우리의 생활양식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불과 반세기도 못되어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사회를 거쳐 정보화사회로 이행하였다.
외국에서는 300년이 걸릴 변화를 우리는 반세기만에 겪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살아온 시간 중 어린 시절의 생활과 지금의 생활은 마치 딴나라의
생활처럼 달라지게되었다.
우리 또래들 중(50대 후반) 유년 시절이나 소년 시절에 오늘날과 같은 생활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우리 또래들 중 누가 내차를 운전하여 출퇴근을 하고, 나들이를 다니고,
손에 전화기를 들고 다니며,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컴퓨터 앞에 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있을까?
너무 빨리 생활양식이 변하다 보니 이를 따라가는 것이 힘들다.
나는 아직도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낼 줄 모른다.
저장된 메시지를 찾아 읽는 것을 배운 것도 몇달 되지 않는다.
벌써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우리의 어린 시절은 우리들에게는 추억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지만
자식 세대에게는 먼 옛날 이야기거나 다른 세상의 이야기로 들리게 되었다.
기억나는 어린 시절의 단상들을 끄집어 내어 친구들과 같이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동심의 시절로 돌아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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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싸움 구경
우리 또래(50대 후반)의 어린 시절에는 볼거리가 없었다.
특히 강원도 양구의 촌놈, 그것도 양구읍에 나오려면 두시간에 한대 꼴인 버스를 타고
1시간은 나와야 하는 촌놈에게는 볼거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부근의 산과 들과 냇가가 놀이터고, 늘 보는 같은 마을의 또래들과 학교의 동급생
몇명이 놀이 상대의 전부였던 시절, 만나는 사람은 30여호밖에 되지 않는 마을의 사람들이 전부였던 시절이었다.
마을의 집 대부분이 초가였던 때였고 집과 집 사이의 울타리는 나무 울타리였는 데 집과 집 사이의 경계만 표시된 것이고 울타리 너머로 이웃집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이웃집 아기의 울음소리까지 들리는 개방된 가옥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부부싸움 하는 소리도 들려서 어느집에서 싸움이 났는지를 금방 알 수 있고
한 집에서 싸움이 나면 마을 사람들 전체가 나와서 구경을 하게 되었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조차 없었던 볼거리가 없었던 시절이라
싸움은 무료함을 깨는 획기적인 이벤트였다.
여름철, 동리 어느집에서 싸움(부부싸움)이 나면 나는 싸움 구경을 하러 갔다.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싸우는 모습은 재미있었다.
아줌마는 소리를 지르고 욕을 퍼붓고, 술이 취한 아저씨는 아줌마를 때리려고 하고
나가버리라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고... 아이들은 자지러지게 울고...
아저씨는 세간살이를 마구 집어 던지며, 아주머니를 때려 죽인다고 소리를 지르고,
이에 맞서 아줌마도 악담을 퍼부으며 죽이라고 대들고...
그러나, 실제로 폭력으로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하려하면 동리 할머니들이 나서서
아저씨를 제지한다.
"김씨 왜 이래! 참아. 참아!"
아저씨는 할머니들에게 붙잡힌 채 소리를 지르고, 아줌마는 악을 쓰고...
이쯤에서 수습이 어려울 것 같으면 동리 아주머니들이 아줌마를 데리고 다른 집으로
피신을 시킨다.
아저씨는 다시는 들어올 생각을 말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런데 어린 나에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싸우는 모습대로라면 아저씨와 아줌마는 헤어져야 하는 데 다음날 보면 언제
싸웠느냐는듯이 같이 다정하게 일을 하고, 애들도 골목에 나와서 재잘거리면서
놀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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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 싸움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애들 싸움이었다.
툭하면 애들이 싸웠다.
짓꿎은 동네 형들이 싸움을 시키기도 했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된 녀석인 A에게 가서 B가 너를 이긴다고 하면서 A를 부축이고
B에게는 "A가 너같은 녀석은 한주먹에 날릴 수 있대, 지금 싸우자고 하던데"라고 하면
두 녀석은 진위여부를 가리지도 않고 씩씩대며 다가와서 치고 받고 싸우는데
그 모습이 볼거리였다.
그렇게 싸운 두 녀석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사이좋게 놀고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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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떼를 몰고 다니는 소년
지금은 유치원 아이들도 성교육을 시키지만 당시 우리 또래들에게는 성교육이
있을 리가 없었다.
초등학교 고학년때쯤 가야 조금 알기는 하였지만.
그때의 성교육의 강사는 동네 형들이나 또래들이었다.
아무런 성교육 매체도 없던 시절에 동물의 짝짓기는 애들의 성에 대한 호기심을
돋구는 이벤트였다.
촌놈인 우리들은 어른들의 어깨 너머로 여러 동물들의 짝짓기 모습을 훔쳐 보았다.
토끼, 소, 돼지 등등.
위의 동물들의 경우 사람이 자리를 마련해 준 행사였다면 개의 경우는 사람의
간섭이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지는 종족 번식행위였다.
그리고, 닭의 경우는 예고 없는 즉석 이벤트였다.
우리집에도 항상 똥개를 기르고 있었다.
새끼를 내서 팔으려고 주로 암컷을 길렀는 데 암컷이 발정을 하면 마을의 수캐들은
모두 모여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대문을 열면 밖에서 낑낑대던 수캐들이 문안으로 몰려 들었다.
주인인 나에게 잘보이려고 와서 꼬리를 치는 녀석도 있었다.
이렇게 며칠동안 수캐들은 우리 집을 매일 찾아 오고 바람난 암캐는 수캐들과 어울리고,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녀석과 짝을 이루는 데, 고른 신랑이 우리 마음에 안드는
경우가 많았다.
몰려온 수캐들 중 크고 늠름한 녀석을 신랑으로 고르기를 바라지만 암캐가 고른 것은
우리 눈에는 형편없는 녀석이어서 실망을 시키곤 하였다.
개들도 짝을 찾는 기준은 제눈에 안경이었다.
집에서 후곡리 약수터까지 2km가 조금 넘었는 데 가끔씩 약수를 먹으러 갔었다.
약수터 마을에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동기인 도영이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집에 놀러 갈겸 약수터에를 갔는 데 물론 걸어서 갔다 오는 것이었다.
우리집 암캐가 발정을 하였을 때다.
내가 약수터에를 갈때면 개가 따라 나섰다.
그러면 뒤에는 수캐들이 따르고...
한번에는 여덟마리의 수캐들이 우리 개를 따라 왔다.
그러니 나는 아홉마리의 개를 몰고 약수터에를 가는 격이 되었다.
2km가 넘는 곳까지 개들은 줄곧 따라왔다.
나는 개떼를 몰고 다니는 소년이 된 것이다.
몇년전 어느 라디오에서 어느 아나운서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을 때 공감이 갔었다.
3. 아줌마들의 싸움
초등학교 4학년 시절 1년간 살았던 양구 남면 적리라는 동리는 연대본부 후문 쪽에
위치하였는 데 군인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작은 마을인데도 당구장도 있고, 막걸리를 파는 술집도 있고(그때는 막걸리 집에도
아가씨들이 있었음) 다방까지 있었다.
장사꾼에 농사꾼, 군인가족들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한 마을에서 엉켜서 살아가는
그런 곳이었다.
팔도 사람들이 모여서 살다보니 이북사투리, 전라도 사투리, 경상도 사투리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내 친구인 기행이는 전라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는 아이였다.
동생들을 보아주며 같이 살던 이종사촌 누님의 친구는 이북에서 내려와 당구장을
운영하던 언니 내외와 같이 살고 있었는 데 그분들은 지독한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분들이었다.
여름날 밤에는 술주정과 더불어 심심치 않게 싸움이 일어났다.
인애라는 다섯살 쯤 된 여자 아이가 있었는 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였다.
그 아저씨가 술주정을 하면 동리가 시끄러웠고 마을의 구경꺼리가 되었다.
그 아저씨는 양기가 입으로만 올라왔는지 완력을 행사하지는 않고 마누라에게 온갖
욕설을 다 퍼부었다. 아줌마는 같이 소리를 지르고.....
아저씨는 그러면서 술을 더 가져 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그러면 이웃집 아줌마는
쌀뜨물을 가져다 주었는 데 아저씨는 쌀뜨물을 막걸리인 줄 알고 벌컥벌컥 들이키곤 하였다.
아저씨의 술주정은 자주 있는 구경거리였고
가끔씩 있는 아줌마들의 싸움이 재미있었다. 이 싸움은 주로 낮에 벌어졌다.
기억나는 싸움으로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아줌마와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아줌마의
싸움이었는데 한 아줌마의 아이가 물총으로 물을 다른 집의 방문에 발사를 하고
도망을 갔다는 것인데 이를 항의하는 아줌마와 자식을 변호하는 엄마 사이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둘은 머리를 꺼들고 엎치락 뒤치락 레슬링을 하는 열전이었는 데 옷이 찢어져서 가슴이
드러나는 등 치열한 싸움이었다.
동리 아줌마들이 나와 말리고 사이가 떨어진 두 아줌마는 입으로 싸웠는 데
한 아줌마가 "그래 너 아이가 있다고 행세니? 내가 아이가 없다고 깔보는거니?"
하면서 섪게 울었다.
이것으로 싸움은 막을 내렸다.
집에 물총을 쏘았다고 나무란 여자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였던 것 같다.
그리고 평소 잠재되어 있던 아이가 없는 열등감이 분출되어 섪게 울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4. 검정개 구로
볼거리가 없는 부대 앞 시골 마을, 아이들의 눈을 끄는 신기한 볼거리가 하나 나타났다.
구로라는 검둥이 개였다. 이 개는 진주양복점이라는 군인들의 군복을 수선해 주는 가게의
아저씨가 기르는 개였는 데 여느 똥개와는 달랐다.
진주 양복점의 아저씨는 마누라도 없고 아이도 없이 혼자 사는 분으로 30대 중반쯤 되는
나이로 구렛나루 수염이 시커멓게 얼굴을 덮고 있는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분이었다.
그가 사랑을 투사하는 존재는 검정개 구로였다.
구로는 훈련을 받은 개였다. 앉으라면 앉고 서라면 서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 재주도
넘었다. 목에 장바구니를 걸어 주고 돈과 메모를 해서 넣어 주면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오기도 하였다.
아이들은 이를 신기하게 구경하였다.
어떤 때는 개가 밥을 먹는 것을 본 적도 있는 데 아저씨가 구로에게 흰밥에 계란을
깨서 비벼 주는 것을 우리는 부러운 눈으로 쳐다 보았다.
여름이 거의 다간 어느날 아저씨는 곧 이사를 간다고 구로를 팔았다.
구로가 팔려 가는 날 아저씨는 구로를 안고 엉엉 울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을 하는 데도 아저씨는 아랑곳하지 않고 구로의 목을 껴안은채
구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엉엉 울었다.
그리고 구로는 어디론가 팔려 갔는 데 며칠 후 그곳을 도망쳐서 다시 아저씨에게 왔다고
한다.
아저씨는 어디론가 이사를 갔고 그뒤로 구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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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미친여자 소동
모내기 농번기가 끝난 6월 중순으로 기억된다.
어느날 아이들이 운동장(양구 광덕 초등학교) 구석에 모여서 돌을 던지고 있었다.
운동장 축대 아래를 내려다 보니 어느 여자가 욕을 하고 있었고 그 여자를 향하여
아이들이 돌을 던지고 있었는 데 그 여자는 미친 여자라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그 미친 여자가 우리 동리에 나타났다.
신작로에 잡동산이를 모아다가 쌓아 놓고 살림을 차리기도 하였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 여자의 나이는 40세라고 하였다.
그런데 40먹은 아줌마라고 할 수 없는 괴력의 소유자였다.
하루는 그 여자가 미류나무위에 올라간 것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운동신경이 둔해서 나무를 잘 오르지 못했는 데 그 여자는 아이들도 오르기 힘 든
미류나무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저녁 시간에 부대에 들어갔다가 군인들에게 쫒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군인들이 후라쉬를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며 쫒아 오고 있었는 데 도망치는 미친 여자가
얼마나 잘 뛰는지 군인들도 그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동리에서 저지레도 저질르고 다녔다.
개울 건너에 큰 댁이 있었는 데 큰아버지와 큰어머니께서 일하러 가신 사이에 미친
여자가 큰댁에 들어가서 큰어머니의 옷을 꺼내 입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담뱃대까지
물고서 마루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큰어머니께서 집으로 들어오시다가 얼마나 놀래셨겠는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연대본부 정문과 후문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크고 작은 저지레를 치자
아랫 동리에 있는 충남상회라는 큰 가게에서 배달을 하는 청년이 그 여자를 다른 동리로
데리고 가기로 하였다.
이 청년이 미친 여자를 꼬여서 자전거 뒤에 태우고 동면 팔랑리까지 올라갔다.
한 이십리 되는 길인데 그 동리에다가 미친 여자를 내려놓고 쏜살같이 자전거를 달라셔
내려 오는 길인데 임당리쯤 오자 뒤에서 으이쌰 으이쌰 하는 구령소리가 나서 뒤를
돌아보니 그 여자가 짐바리를 붓잡고 구령을 부르면서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여자는 다시 동리로 돌아왔고 한동안 저지레를 치면서 다녔는 데 여름이 다갈
무렵부터 그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가족들이 알고 와서 데려갔다고 한다.
몇달 뒤 그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지금 계산하여 보면 우리 동리에
와서 소동을 벌리던 때가 임신 4개월 정도일 때인데 임신중인 마흔살의 아줌마가 어떻게
그런 힘을 발휘하였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를 않는다.
재밌네요. 유년시절, 강원도 화천 논미리에서 살 때였습니다. 아마 국민학교 입하기 전이었을 겁니다.
화천읍내에서 5일장이 섰는데 장 구경이 볼만했습니다. 장날 장보러 가는 어머니 따라 가려고 하면
어머니는 한사코 따라오지 말라고 그러셨지요. 한번은 따라오지 말라는 것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갔다가
어머니가 던진 돌에 이마를 맞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서럽던지, 그래서 지금도 생각나면 어머니한테
그 얘길 합니다.
중학교 때 집에서 암퇘지를 길렀는데, 아버지가 암퇘지 교미시키러 숫놈 종돈한테 몰고 가는데 꼭 나를 대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얼마나 쪽 팔리던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어려서 늘 애들한테 얻어 터지고 다녔는데,(상대방이 나를 노려보면 겁이 나서 울었음) 국민학교 5학년 처음으로
싸움다운 싸움을 했습니다. 상대방 친구 콧잔등을 때렸는데 코피가 나와서 얼마나 겁이 나던지... 그때부터 싸움에 자신이
붙었습니다.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하면 어떻게 하던지 복수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를 지키는 일인줄 알았습니다.
경선생님 이야기의 배경이 강원도 양구이니, 거의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운 시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