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거리 -
"어느 형제가 지금은 그 이름을 감추고 있는데, 모두 나의 예전 중학교 시절 친구들로서 여러해 떨어져 있어 소식
이 점차 멀어졌었다. 얼마 전 우연히 그 중의 하나가 큰 병에 들었다는 말을 듣고 마침 고향에 돌아가는 주에 길을
돌아서 찾아가 한 사람만 만났더니, 병이 든 사람은 그 동생이었다고 했다. 일부러 먼길을 와 찾아보았으나 벌써
병이 나아 어느곳 시보(試補)로 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크게 웃고 일기 두권을 보여주며 당시의 병세를 알
수 있다면서 옛 친구이니 주어도 상관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돌아와 한번 훑어보고 앓았던 병이 대략 "피해망상
증"류의 것이었음을 알았다. 문장에 전혀 두서가 없고 황당한 말이 많으며, 월일이 적히지 않았으나 먹 색깔과 글
자 체가 일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일시에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간혹 연결이 닿는 것도 조금은 있어, 지
금 한 편을 적어 의학자의 연구자료로 제공한다. 기록 가운데 잘못된 말이 있어도 하나도 고치지 않았고, 인명은
모두 시골 사람들이어서 설사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전체 줄거리에는 무관하겠기에 다 바꾸어 놓았다.
서명은 본인이 병이 나은 뒤에 붙인 것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1918년 4월 2일 적음."
-작품 분석하기 -
광인일기에서 ‘나’라는 인물은 친구의 동생의 일기를 읽어주고, 친구의 아우에 대해 간단한 코멘트를 제시하는 3
인칭 인물이다. 사실 소설속의 ‘나’는 소설의 앞머리에만 나타나고, 일기 속 주인공의 성격을 객관화하는 역할을
맡고있을 뿐이다. 이는 작가가 주인공의 행적과 사건에 대한 묘사를 주인공의 일기에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독자
로 하여금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을 능동적으로 분석하게 하기 위함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광인일기에서 주인
공은 피해망상증이라는 연막장치에 힘입어 전통시대 중국이 오랫동안 바꾸지 않고 품어온 봉건주의적 악덕과 폐
습을 넌지시 고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주인공이 ‘사람 고기를 먹는 행위’를 언급하면서 모두들 제정신이 아
니라고 외치고, 어쩌면 자신도 예전엔 사람을 먹었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식인행위’는 전통시대 중국이
가지고 있던 총체적인 봉건주의적 폐습을 대표하는 단어가 아닐까.
작품에서 인간의 종류를 “옛날부터 그랬으니까 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와,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면서도 먹고 싶어 하는 자”로 나누는데, 너무 오랫동안 인간을 먹는 식인의 습성에 젖어있거나, 또는 나쁜 줄 알면
서 그 욕망을 주체할 수 없는 자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노신은 광인일기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너희들
마음을 돌려라. 진심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머지않아 인간을 먹는 인간은 이 세상에 살 수 없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계속 4천년 이상의 습관대로 식인의 습성으로 살아갈 것인지, 개심하여서 장차 사회에 어울릴 수 있는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지 중국 민족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엔 이런 글을 쓰는 것 조차 엄청 나게
곤란하고 어려운 일이 었을텐데 루신은 역시 중국 문학의 아버지라고 할만 하다.
만약 전형적인 근대소설에서 주인공이 광인이었다면,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 왜곡된 사건들이 이성인의 눈을 통
해 재해석됨으로써 정상상태로 복귀하는 과정이 있어야 할텐데 이 소설에는 그런 것이 없다. 즉 미친 사람만이
본질을 꿰뚫고 있는 사람이고, 미친 사람이 하는 헛소리가 오히려 뼈가 있는 옳은 말이 되는 것이다.
일기의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사람을 잡아먹는 행위를 고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전통적인 중
국인에게 의식개혁을 또다시 역설한다. 그렇지만 주인공은 자신을 포함한 구시대의 봉건주의에 찌든 어른들을 계
몽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아직 인육을 먹지 않은 아이들’을 중국의 악덕과 폐습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
무이한 존재로 묘사하면서 “아이를 구하라!” 라고 외치며 소설을 끝맺고 있다. 루신은 아이들에게 마지막 남은 희
망을 건다고 볼 수 있다.
-작품 평가 -
1918년 5월 ≪신청년(新靑年)≫에 발표된 <광인일기>를 일반적으로 노신(魯迅)의 첫 번째 소설이자 중국 현대문
학사상 맨 첫 작품으로 여기고 있다. 이 작품을 발표할 무렵 노신은 북경에서 교육부의 한 관리로 있으면서 답답
한 나날을 고서의 교정과 금석탁본의 수집 또는 불전(佛典)의 연구 등에 몰두하는 것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노신
자신의 서술에 의하면 그때 그는 S회관에서 여러해 동안 고비(古碑)를 베끼고 있었다고 하였다. 이는 신정부의
교육부 사회교육사(社會敎育司) 제1과장이 되어 북경 생활을 시작하게 된 이후 그가 거주했던 소흥회관(紹興會館)
의 등화관(藤花館) 보수서옥(補樹書屋)에서 처음에는 북양정부(北洋政府) 정보원의 주의를 피하기 위하여 고비를
베끼기 시작한 것이, 나중에는 재미가 붙어 하나의 정밀하고 믿을 수 있는 고비문정본(古碑文定本)을 정리해 내
볼 요량으로 고비를 베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신청년≫ 동인의 한사람이며 노신과 동성(同省) 출신
인 전현동(錢玄同)이 찾아와 ≪신청년≫에 글을 쓰도록 권해서 써낸 것이 바로 3편의 백화신시(白話新詩)와 함께
발표한 <광인일기>였다.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여러해 동안의 사색과 관찰이 누적되어 이 소설이 탄생된 것이
다.
수많은 상징과 우언 및 전고를 사용하여 쓴 초현실적인 수법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노신은 입으로만 인의(仁
義)를 말하는 중국의 유교적 전통사회를 식인(食人)의 사회로 규정, 중국 전통의 도덕교화(道德敎化)·가언의행(嘉
言懿行)은 일종의 가도학(假道學)에 지나지 않으며 이것이야말로 중국사회를 암흑으로 뒤덮은, 버려야 할 유산이
라고 보았다. 그래서 노신 특유의 백화체로 구도덕에 대한 통렬한 부정, 인간성의 해방, 그리고 새세대에게 걸어보
는 희망을 기저로 하여 이 작품을 썼다. 그러나 서양 전통의 사실소설(寫實小說)의 관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일기
이지 소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작품에는 일정한 플롯도 없다. 그리고 사용된 문장도 백화체로만 일관한 것이
아니다. 즉 노신은 이 일기를 발표할 때 문언문으로 소개하는 말을 써 본문 앞에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