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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묵상글 (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 주님께 가기만 하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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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12.11 04:30
- 주님께 가기만 하면
요즘 저는 유명 강사들에게 사람들이 몰려가고,
그들의 상담과 치유 프로그램에 열광하는 것을 볼 때 마음 불편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에게 오라고 하시는데 그들에게 가니 말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그러니 더욱 마음이 불편하고 안타깝습니다.
그러면 저는 안 그럴까요?
예, 저는 이런 마음이기에 그들에게 가지는 않습니다.
저는 안식을 얻는 법은 확실히 주님께 배웠고 배운 대로 살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배웠건만
주님께 힘을 얻어 안식을 누리려고 하지 않고
피곤을 덜어 안식을 누리려고 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배터리를 충전하지 않고 그저 사용을 중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지요.
배터리는 충전해야지 지속 사용할 수 있지
사용을 중지하는 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용한 배터리를 충전기에 꽂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가 안식도 얻고 힘도 동시에 충전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우리는 기를 쓰고 뭣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기를 쓰고 뭣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빠지겠지요?
그러니 이렇게 기를 쓰고 뭐를 한 뒤에는 기를 보충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께 힘을 얻으라 하실 뿐 아니라 배우라고도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고 편하게 지는 법 말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가 편하고 그 멍에로 짐을 지면
짐이 가볍다고 하시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멍에는 불편하고 짐이 무겁다고 합니다.
주님의 멍에는 온유와 겸손이고, 져야 할 짐은 십자가이기 때문인데
우리 생각과 달리 주님께서는 주님의 멍에 곧 겸손과 온유가 왜 편하다 하실까요?
사실 그것은 실천하기가 쉽지 않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짐을 잘 지지 교만한 사람은 짐을 잘 지지 못할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거운 짐을 마땅히 자기가 져야 할 짐이라고 생각하기에
온유하게 지지만 교만한 사람은 ‘이것이 왜 내게’라며 화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겸손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실 겸손하기가 무거운 짐 지는 것보다 더 어렵고
그래서 겸손해지기보다 어쩔 수 없이 무거운 짐을 지게 되는데
다행스럽게도 나이를 먹으며 무거운 짐이 우리를 겸손하게도 합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 대림절에 안식과 힘을 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께,
어떻게 무거운 짐을 져야 하는지 가르쳐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께 달려갑시다.
주님께 가기만 하면 힘 얻는 것과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지는 법을 배우는 것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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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UN에서는 매년 세계 행복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행복이 측정 가능하다는 듯, 지수화 그리고 서열화했습니다. 그런데 행복은 그렇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사실 매년 5위 아래 떨어지지 않은 나라가 북유럽에 있는 핀란드입니다. 우리나라는 2024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서 52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렇다면 핀란드와 우리나라의 행복 차이가 엄청날까요?
사실 핀란드 국민은 과묵하고 신중해서 잘 웃지 않는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술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이며, 유럽에서 자살률 1위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인구 대비 당뇨병 환자 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것도 놀랍습니다. 과연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행복은 지극히 관념적이고 주관적입니다. 순위가 그래서 자기의 행복 기준이 타인의 행복 기준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누구는 삶과 일이 조화를 이룰 때 행복하다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없어도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불행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를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소유의 많고 적음이 아닌, 세속적인 욕심의 많고 적음에서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세상의 기준에 있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 선언이 세상의 기준과 정반대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고통과 시련 안에서는 행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고통과 시련 너머에도 분명히 당신과 함께하면서 행복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고통과 시련이 찾아오면 행복이 없다고 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때 주님께로 가야 했습니다. 주님을 잊었고, 주님께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행복을 느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고통과 시련은 너무나 불편하고 무거워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면 편한 멍에와 가벼운 짐이 될 수 있습니다.
나의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남에게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아닌, 자기 안에 주님께서 함께하신 것 그 자체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고통과 시련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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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세상에 하찮고 쓸모없는 것은 없다. 산밭의 돌멩이 하나도 제자리에 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신비의 관계 속에서 무언가 은밀한 일들을 하고 있으니(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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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렇게 참으로 복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안식”을 주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듣기만 하여도 벅찬 감격입니다. 여기서, “안식”이란 단순한 쉼이 아니라 ‘구원’과 동의어입니다(히브 3,11.18; 4,1.3.5.10-11; 묵시 14,13 참조). “안식을 주겠다.”는 이 벅찬 초대는 ‘안식’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곧 ‘안식’(구원)은 그것을 가지신 분으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것을 가지고 계신 분만이 주실 수 있으니, 주시는 분에 의해 얻어지는 것임과 동시에, 바로 당신이 구원자라는 선언이요, “안식”(구원)은 당신이 선사하는 선물이요, 사랑이요, 자비요, 호의임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누구에게 주시는가?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주시기 위해 먼저 초대하십니다. “나에게 오너라.” 라는 문구는 현인들이 자신의 학교에 와서 지혜를 배우라고 부를 때 사용하는 전형구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때 부르는 대상은 주로 ‘배우지 못한 자들’(집회 51,23)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 모두”를 부르십니다. 이들은 우선 23장의 “무겁고 힘겨운 짐”(23,4)에서 알 수 있듯이, 613개의 율법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부르시는 이유는 단순히 지혜를 전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안식”(구원)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을 “주겠다”라고만 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길도 가르쳐 주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
그것은 바로 당신의 “당신의 멍에를 메고”고 당신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멍에를 멘다.”는 말은 당시의 유대인 사회에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말해줍니다. 당시의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노역자가 함께 메게 되어 있듯이,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 저희와 하나가 되어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이기에 ‘그 멍에는 편하고, 그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30). 사실, ‘멍에’는 ‘순종’을 나타내는 비유입니다(사도 15,10; 갈라 5,1). 그러니 예수님께 순종하며 가르침을 받으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순종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순종으로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인가?” 바로 ‘예수님, 당신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 앞에 항상 지니셨던 그 마음인,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라 하십니다. 그러면 '안식'을 지니고 계신 그분으로부터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 ‘짐’은 우리를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고 북돋아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돕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지고 가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단지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주시는 스승만인 것이 아니라, 함께 걸으시고 동행하시면서, 몸소 우리를 지고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십니다. 단지 그 '길'을 제시하는 스승이 아니라, “길”을 함께 가실 뿐만 아니라 “길 자체”이신 참 스승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제자 됨”이란, 단순히 예수님을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걸으며,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마음, 곧 “양순하고 겸손하신 마음”(마태 11,29)을 선물로 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사도 바오로의 고백처럼,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그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필립 2,5). 바로 그 마음 안에서, '배움의 순례길'을 걸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그 ‘참된 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마태 11,29)
주님!
당신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위에 있지만 짓누르지 않는
묶지만 옭아 메지 않는
오히려 편하게 하는 사랑의 멍에를 메게 하소서.
함께 지며 나누는
함께 가며 끌어주는
그 손을 놓치지 않게 하소서.
동행해 주고 길이 되어 주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 마음을 따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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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몸은 고달프고 힘이 들지만, 본연의 일을 하고 있으면 기쁩니다. 더군다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없이 복되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하는 일이 억지로 마지못해하는 일이 되면 무거운 짐이요, 멍에가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 꼭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기쁘게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 앞서 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8).고 말씀하셨는데 당시에는 사람들이 무거운 짐과 멍에를 메고 괴로워했습니다. 무엇보다 억눌리고 고된 가난의 생활이 짐이 되고 힘이 들었으며, 율법의 수많은 규정을 지켜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생명을 위해 주어졌던 율법(에제20,13)을 율법 학자들은 수백 가지의 특수한 규정을 만들어 견딜 수 없는 짐이 되게 하였습니다. 유다교에는 613개의 계명이 있었는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법을 만든 그들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율법을 위해 사람이 존재하게 되었으며 계명은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오히려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워라” 하시며 산상 설교를 통해 참된 행복과 율법(마태5장-7장)을 철저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법에 사람을 맞추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위한 법을 확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기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으로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계명은 무거운 짐이 아닙니다.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5,3). 사랑의 법을 제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이 세상에 오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며 스스로 모든 이의 종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주어진 짐이요, 멍에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스스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기꺼이 받아들이셨기에 편한 멍에요, 가벼운 짐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와 짐은 결코 넉넉한 삶의 편안함에서 오는 무사태평함이나 악과 공존하기 위해 놓여 진 안일한 평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의 여정도 고달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삶을 봉헌하고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하면 내적인 평화와 기쁨,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사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13,8).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13,10). 주님의 계명을 준수하고 계명의 의미를 살려고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예수님의 멍에는 위로의 원천이 되고 인간적인 욕심을 포기하는 힘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완전하여 생기를 돋게 하고 주님의 법은 참되어 어수룩한 이를 슬기롭게 하네. 주님의 규정은 올발라서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은 맑아서 눈에 빛을 주네”(시편19,8-9).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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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죽음 교육에서 고은 시인의 ‘순간의 꽃’이라는 시를 읽었습니다. 짧은 시인데 깊은 여운을 주는 시였습니다. 오늘은 그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노를 젓는 일이 필요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노를 젓는 방향이 중요합니다. 물질, 성공, 권력, 업적이라는 방향을 향해서 노를 저으면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참된 행복을 향해 나갈 수 없습니다. 노를 놓쳐서 잠시 멈추면 비로소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사목이라는 노를 저어서 33년을 달려왔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청년부와 주일학교를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행사하고, 밥 먹고, 술 마시면서 청년들을 만났습니다. 돌아보면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사목회를 중심으로 교우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많은 행사가 있었고, 만남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말씀이 부족했고, 영적으로 메말랐습니다. 교구청에 있을 때는 교구청을 중심으로 교구 신자들을 대상으로 노를 저었습니다. 교육이 있었고, 행사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교우들이 바라는 것을 제대로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역시 말씀과 영성이 부족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 있을 때는 코로나 팬데믹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신문사 운영이라는 노를 저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에 늘 노심초사였습니다. 달라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이라는 노를 젓고 있습니다. 어쩌면 현직에서 젓는 마지막 노가 될 수 있습니다. 점시 노를 멈추고 말씀과 영성을 향해 방향을 바꾸어야겠습니다.
‘물벌레와 잠자리’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벌레는 물속에서 살며 물 표면을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물속 생활에 익숙한 물벌레들은 자신들의 세상을 떠나 물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물 위로 올라간 친구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느 날, 물벌레 중 하나가 물 표면을 향해 올라가기로 결심합니다. 물을 떠나 물 밖으로 나온 물벌레는 기다리고 있던 변화를 맞이하며 잠자리로 변태하게 됩니다. 잠자리가 된 물벌레는 하늘을 날며 새로운 세상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속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물속에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겪은 변화를 알리고 싶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이 이야기는 변화와 성장, 그리고 우리가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신비로움과 연결됩니다. 물벌레에서 잠자리로의 변태는 인간 삶의 단계적 변화를 상징하기도 하며, 종교적 관점에서는 죽음과 부활, 또는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은유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물벌레가 잠자리로 변하는 과정은 삶과 죽음의 순환을 상징하며,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찰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짐과 멍에를 이야기하십니다. 어떤 짐과 멍에일까요? 강도 맞은 이웃을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측은지심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아버지께 돌아가는 둘째 아들의 수오지심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가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했던 바오로 사도의 사양지심입니다. 성령의 열매를 분별하는 시비지심입니다. 친구가 오리를 같이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도 함께 가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전에 먼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바라는 열정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려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해야 할 일들을 좋아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를 지는 일도, 복음을 전하는 일도, 힘들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을 좋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짐과 멍에는 여러분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대림 시기를 지내는 것은,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업적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의 허물과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살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에게 상처를 준 이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듬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024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지고 가려던 짐과 멍에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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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의 멍에가 무엇이었을까요? 간단하게 말해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멍에였습니다. 그리고 그 멍에가 쉽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잠시 돌아보십시오. 예수님의 삶이 쉬웠는지 말입니다. 어릴 때는 피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후에는 집도 절도 없이 지냈습니다. 빌어먹기 일쑤였고, 비난과 돌팔매를 피해 돌아서야 했습니다. 그렇게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쉬운 삶이었습니까? 그런데도 예수님은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나에게 배워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배우라는 말씀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멍에를 메고 가는 방법입니다. 예수님이 멍에를 어떻게 메셨습니까? 그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방법의 이름은 ‘믿음’입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아파도, 쓰러져도 다시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야 할 언덕까지 올라가셨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힘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내 멍에를 메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주님의 멍에를 각자 다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주님처럼 이해받지 못한다면, 삶의 무게에 쓰러졌다면, 배신과 치욕으로 몸서리쳤다면 우리는 그 순간순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멍에 없는 사람, 고통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허락하신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믿음 때문에 부활과 하늘의 영광을 주셨듯이,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 때문에 은총과 희망과 평화를 주시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 매일이 힘에 부칠지 모릅니다. 매일 매일이 가시밭길 같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 길을 내 힘으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 배웁시다. 믿음이라는 씨앗이 희망이 되고, 희망이라는 나무에서 사랑이 나고, 사랑이라는 열매가 행복을 선물한다는 것을 배우며 살아갑시다.
⭐주황등
운전하면서 갑자기 든 생각입니다. ‘주황등은 왜 필요할까?’
녹색 신호등이 빨간 등으로 바뀌는 그 사이 ‘주황등’
너무 짧은 시간이어서 ‘꼭 필요한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주황등’이 있기에 많은 사고를 막을 수 있다고 합니다. 주황은 우리에게 ‘주의하세요.’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 사이사이에 ‘주황등’ 같은 사람, ‘주황등’ 같은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아주 짧기에 기억 속에 존재 하지 않을 수 있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했던 그 시간과 그 사람들. 우리 마음을 환기하게 하고 돌아볼 수 있게 한 그 시간.
‘주황등’ 그것은 우리 삶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하늘의 선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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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살아계신 사랑의 참 하느님
<경천애인敬天愛人>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늘 살아계신 사랑의 참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사람이 누구인지, 또 내가 누구인지 아무리 물어도 하느님이 없으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인생 허무와 무지에 대한 답도 하느님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자 생명이요, 진리이자 길이요, 지혜이자 빛입니다. 세상 것 다 알아도 하느님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요, 하느님을 모르면 허무와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다 할 수 없습니다. 참나의 탐구와 하느님 탐구는 함께 갑니다. 그러니 평생공부가, 평생사랑이 하느님을 대상으로 합니다. 지금도 늘 거기 그 자리 정주의 불암산을 볼 때 마다 여전히 되뇌는 고백입니다.
“산앞에
서면
당신앞에
서듯
행복하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대해 나눴고, 얼마나 많이 하느님과의 삶의 여정과 만남에 대해 말했고, 얼마나 많이 하느님 사랑을 고백했고, 얼마나 많이 하느님 자랑을 해왔는지 모릅니다. 인생광야여정중 “성인이냐 괴물이냐 폐인이냐” 셋중 하나라고, 또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요 잘못 미치면 폐인”이라 참 많이도 강조했습니다. 하여튼 하느님은, 예수님은 저의 전부였습니다. 다음 시편 역시 그대로 저의 고백이었고 참 많이도 제 고백으로 참 많이도 나눴습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이밖에도 제가 사랑하는 시편은 끝이없습니다. 세상에 성서의 시편보다 더 아름답고 깊은 시들을 본적이 없습니다. 시편을 너무 사랑하고 좋아하다보니 세상 시들에 대한 맛을 잃었습니다. 수도공동생활 42년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바쳤던 성무일도시 토요일 끝기도시 독서는 제 영혼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너 이스라엘아 듣거라. 우리 주 하느님은 오직 한 분 뿐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힘을 다하여,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기고, 너의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 있을 때에도 길을 갈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일어날 때에도 항상 말해 주어라.”(신명6,4-7)
작년 8월15일 성모승천대축일이자 광복절부터는 기상하자마자 바친 만세칠창은 살아있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성령님 만세!
대한민국 만세!
가톨릭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요셉수도원 만세!”
절박한 위기의 시대를 맞이한 작금의 국내상황에 네번째, “대한민국, 한반도 만세!”는 더욱 각별하고 간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받는 전국토가 순교성지로 가득한 순교자의 나라 대한민국이 아닙니까? 아마도 이 기도덕분에 현재의 위기도 전화위복, 잘 수습되리라 믿고 대한민국의 위상도 드높아지리라 믿습니다. 이어지는 자작 행복기도 역시 2018년 10월 이후 참 많이 나눈 기도문이요 그 일부만 나눕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꽃자리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바로 오늘 이사야가 또 예수님이 당대 무겁고 어둔 고난과 시련의 상황에서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이들에게 주신 말씀은 오늘의 고난과 시련중인 우리들에게도 무한한 위로와 힘이 됩니다.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 주는 끝없는 위로와 격려, 치유가 되는 말씀입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40,28-31)
우리의 하느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 하느님 말고 이런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하느님 더하기(+) 나는 전부임을, 충만한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반대로 이런 나에서 하느님을 빼버리면(-) 제로의 허무와 무지의 인생자체일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어 은총의 대림시기 예수님의 위로와 격려가 고맙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종파를 초월하여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모든 인류에게 활짝 열려 있는 구원의 문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 정주처, 피난처, 쉼터, 배움터, 샘터는 예수님뿐입니다.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가면서 우리의 불편한 멍에, 무거운 짐은 점차 주님의 편한 멍에로, 가벼운 짐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주님의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시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시편103,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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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믿음의 멍에를
누구는 불신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희망의 멍에를
누구는 절망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사랑의 멍에를
누구는 미움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섬김의 멍에를
누구는 군림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온유의 멍에를
누구는 강퍅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겸손의 멍에를
누구는 오만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베풂의 멍에를
누구는 탐욕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품음의 멍에를
누구는 밀침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이음의 멍에를
누구는 가름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함께의 멍에를
누구는 홀로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축복의 멍에를
누구는 저주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누구는 살림의 멍에를
누구는 죽임의 멍에를
누구나 멍에를 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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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0. 대림 제 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교부들의 말씀 묵상✝️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멍에를 가볍게 만드는 것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 버리십시오. 예언자는 말합니다. “저들의 오랏줄을 끊어버리고, 저들의 사슬을 벗어 던져 버리자”(시편 2,3). 모든 악덕의 불쏘시개인 부정이라는 멍에를 벗어 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멍에가 편하고 가볍다면 이 거룩한 종교가 어떤 사람들에게 힘들고 가혹하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이 종교를 힘들다고 여기는 사람이 더러 있는 것은 세상 욕망에 물든 마음은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깁시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멍에를 멜 수 없습니다.
-라틴인 에피파니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13
하느님 바깥에 있는 것은 무일 뿐이다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6).
이와 같이 버림이나 부정의 길은 창조계를 깎아내리지도 억누르지도 않는다. 부정의 길은 금욕주의 - 고행 - 도 아니다. 그것은 더 충분히 알기 위해서 버리는 것이고 충만해지기 위해서 비우는 것이다. 비움과 채움도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사물들의 궁극적인 일치를 드러낸다. 그것은 이분법적 의식이 아니라 변증법적 의식을 요구한다. 관계는 차이들을 들추어내지 않는다. 따라서 관계는 사물의 본질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본질 속에 존재하되, 본질 자체에게 차이를 들이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관계 자체가 자연스러운 관계와 차별의 성질을 없애기 때문입니다 ... (293)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9절: 인노첸시오 3세부터 보니파시오 8세까지의 교황직
교황권과 슈타우펜 제국 사이의 결전:
불행히도 이 정점은 동시에 전환점을 의미하였다. 인노첸시오는 공의회가 끝난 후 곧 사망하였다(1216. 7.16).
그의 후계자들은 인노첸시오를 통해 획득한 교황권을 지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매우 어려운 정치적인 담보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지배는 비록 교회가 민족들의 생활이 그리스도교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원리에 의하여 지도되도록 아직은 크게 배려해야 하였을지라도, 역시 결코 교회의 사명은 될 수 없는 것이다. 종교는 정치와 혼화(混化)되면 해를 입는다. 대사제적인 직무는 영적인 것만이 아니라 세속적인 목표를 위해서 배치될 경우에는 명망을 상실한다. 인노첸시오 3세의 후계자들에게 있어서 높은 보편교회의 이념들은 점점 후퇴하여 마침내는 중세 후기와 르네상스 시기와 종교개혁 시대에는 영토상의 정책적인 문제들과 교황령의 유지와 그 확대가 자주 보편교회적인 문제들보다 더 중요시되었다.
즉시 이어진 왕권과 성권 즉 프리드리히 2세 황제와 교황들 사이의 마지막 대결전에서는, 두 보편적인 세력 중에서 어느 것이 우위를 차지하느냐가 큰 문젯거리였다. 그런데 젊은 황제가 슈타우펜 왕가의 시칠리아 정책을 다시 갱신하고 약속한 십자군을 계획하는 대신, 언제나 교황령을 위협한 결과가 된 남부 이탈리아 계획을 완전히 고집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그를 1228년에 파문하였다. 프리드리히는 파문된 채 십자군에 착수하였는데(1228/1229), 그것은 그가 술탄 알 카밀과의 조약으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지의 양도를 달성한 점에서는 하나의 성공이었다. 그는 1230년에 파문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곧 시칠리아를 제국에 병합하려는 황제의 정책을 둘러싸고, 따라서 황제에 의한 교황령의 포위 때문에 생기는 의견 차이가 다시 나타났다. 프리드리히는 다시 파문되었다(1239). 그는 나폴리에서 로마로 향해 전진하였다(1241). 그의 목표는 로마를 정복하고 그곳을 지신의 보편적 제국의 수도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보편적인 교황직을 결정적으로 청산해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 되고, 또한 교황직을 제국의 하나의 보통 교구로 격하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교황권에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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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예수님의 멍에는 왜 가벼운 것일까?
강만연 [fisherpeter] 2024-12-10 ㅣNo.17836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멍에에 관한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냥 나에게 와서 뭔가를 배워라고도 하실 수 있는데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의 인품, 여기서는 인품이라고 표현을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신성도 지니고 계신데 신성을 표현하는 적당한 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인성도 가지고 계신 분이라서 부득불 그렇게 표현하겠습니다.
먼저 온유하시고 겸손도 하시다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말 그대로 해석을 하면 이렇기 때문에 내 멍에를 메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식도 누릴 수 있다고 하셨고 또한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또한 예수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생각해서 복음의 내용만 봐서는 왜 그런지 이해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우리는 그렇다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왜 그런지는 우리의 상상과 묵상으로 나래를 펼쳐봐야 할 것입니다.
멍에는 목에 거는 막대입니다. 말과 소 따위의 동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걸 이해를 하려면 옛날 소림사 영화나 중국 영화를 보면 양쪽 어깨에 긴 막대를 걸쳐서 물동이를 메는 소림사 같은 걸 연상하면 이해가 한결 쉬울 것입니다. 만약 이 막대를 사용하지 않고 물동이를 들고 가려면 아주 힘든데 물론 같은 무게인데 막대를 이용해서 어깨를 지지해서 들고 가면 힘도 들 들고 또 이동도 용이하지 않겠습니까? 어깨의 힘이 양 다리의 힘이 지지를 해 주고 그 지지해 주는 힘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인체의 역학을 이용한 것입니다.
복음에서는 짐이라고 했지만 여기서 짐은 실제는 멍에에 부착된 것도 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그것과 연결된 쟁기 같은 것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쟁기를 끌기 위해서는 쟁기가 밭에 묻혀서 땅과 저항해서 받는 마찰력이 멍에에 전달되고 그 마찰력보다 끄는 힘이 더 커야 밭 같을 것을 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을 다 연상해서 한번 묵상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할 때 표현하는 단어 중 하나가 멍에입니다. 이때 의미는 구속이라든지 속박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께 매이게 되는 것과 같은 의미로 보면 좀 더 잘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여자랑 산행을 하는데 그 여자가 메고 있는 배낭 때문에 산행이 힘들다고 했을 때 남자가 그럴 경우 맨다고 한번 가정을 해보죠. 남자라고 해서 쉬운 것은 아니겠지만 그런 경우에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 대신 메주는 것과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 그것도 남자라고 한다면 가령 어쩔 수 없이 도와주어야 하는 도덕적인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렇게 한다면 이 양자를 비교하면 그 무게가 동일하다는 전제를 했을 때 그 상황이 어떨 것 같습니까? 그것도 동일한 조건이라고 했을 때 말입니다.
설령 무겁고 힘들다고 해도 사랑하는 여자의 배낭을 메었을 때는 모르는 남자의 배낭을 메었을 때보다는 더 가볍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똑같은 무게인데도 왜 그럴까요? 그건 여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걸 감수할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사랑의 힘이 그 무게를 인식할 수 없게 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느낀다고 해도 심적으로는 덜 느끼게 됩니다. 이제 이 개념을 복음에 한번 대입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라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근데 그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같이 함께 우리도 메고 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저희를 사랑해서 지는 그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실제로는 우리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응당 우리가 지고 가야 할 그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저희를 사랑해서 지고 가시는 십자가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우리의 십자가인 셈인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멍에가 되는 것이라고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벼운 멍에라면 굳이 저희를 사랑한다면 굳이 그 멍에를 메라고 하지 않고 그냥 예수님 홀로 가시면 될 일인데도 불구하고 왜 메라고 하셨는지를 생각해보면 바로 이런 게 아닐까요? 우리에게 그 멍에가 구속의 멍에가 아니고 또 속박의 멍에가 아니고 그 멍에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과 온유, 희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만 가능할 것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의 배낭을 멜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기 때문에 멜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이해를 한다면 오늘 복음이 좀 더 공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꺼이 그 멍에를 같이 메고 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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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최소한 신앙인의 양심은 지켰으면....
강만연 [fisherpeter] 2024-12-10 ㅣNo.178363
제가 지금은 영세를 받은 본당에서 교적을 옮긴 지 약 한 달 정도 됩니다. 기존 본당에서도 있었던 사실입니다만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을 할 수 없지만 에둘러 표현하겠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에서 아주 싫어하는 게 있습니다. 기존 본당에서도 있었는데 지난 주일에 옮긴 본당에서도 그와 같은 현상을 봤습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고급의 신앙심까지는 요구하지 않습니다. 최소한 인간의 탈을 가졌으면 인간의 양심만큼은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마저도 저버린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차라리 죄를 짓는 게 그런 행동보다도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은 죄를 짓는 게 좋다는 게 아니라 죄는 그래도 회개를 할 수도 있고 용서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양심을 속이는 일은 그것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하면서 어떻게 성당에 천연덕스럽게 나올 수 있는지 그런 사람의 멘탈은 정말 역설적이지만 대단하다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최소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면 정말 정말 최소한의 인간적인 양심만큼은 팔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와 같은 신자는 그게 물론 죄가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죄라고 하긴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사실 깊이 들어가면 옛날 교리서에 보면 이와 같은 것도 사실 옛날 교리서가 아니더라도 최근 나오는 양심성찰에 관한 책에 보면 그것도 성사를 봐야 하는 죄라고 나오긴 합니다. 이걸 아마 죄라도 생각하는 사람은 아주 희박할 것입니다. 만약 죄라고 한다면 아마 놀랄 것입니다. 제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는 것은 너무나도 부끄러운 모습이고 치욕스럽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신자가 지켜야 하는 의무를 설령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도 인간 사회에서 누구나 사람으로서 종교의 유무를 떠나서 지켜야 하는 사회 윤리 규범과 도덕을 지키지 못하면서 신자로서 지키는 규율을 잘 지킨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실제 신자로서 잘 지켜야 하는 것을 지키는 사람치고 그런 것도 못 하는 사람은 아마 보기 힘들 것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밝히고 싶지만 그러면 천주교 신앙인의 격이 떨어질 것 같아 차마 밝히지는 못하겠습니다. 신자 노릇 하기 이전에 최소한 인간의 양심에 따라 그 양심을 잘 지키면서 신자의 도리를 지켜야 그게 제대로 된 신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양심을 파는 부끄러운 신앙인은 최소한 되지 말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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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 이 세모에 그분 멍에를 /
박윤식 [big-llight] 2024-12-10 ㅣNo.178366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에게 큰 오류는 스스로 규정한 하느님 모습과 자기만이 지닌 어떤 신앙심이 아닐까? 내가 하느님 틀로 가는 게 아니고 그분께서 내 틀에 들어오시길 바란다는 것이다. 그러니 걸핏하면 하느님 원망으로만 이어진다. 자신이 설정해 놓은 틀에서 상대방이 벗어나면 용납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과중하게 지었던 율법의 멍에를 벗겨 주러 오셨단다. 그렇지만 못된 우리는 또 다른 멍에를 만들어 스스로 짊어지려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 씌우려한다.
이렇게 힘들게 하는 무거운 짐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가족 생계에 대한 부담으로 지워진 짐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거운 삶의 ‘짐을 멘 이들’ 모두는 내 멍에를 메고서 모두 당신께 오라신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고생하며 무거운 짐 진 너희는 모두 내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단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가끔은 자신만이 모든 짐을 짊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이 다른 누구의 등에 타고 있는 사실을 잊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짐의 일부를 짊어지셨다. 다시 말해 나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만 가진다면, 우리가 진 짐은 가볍기 그지없고 지고 갈 힘과 용기가 생길 게다. 이렇게 예수님은 당신 멍에를 메면 안식을 얻고 편해진단다. 그분의 짐은 가볍단다. 어떤 멍에이기에 가벼울까? 아니 어떻게 메었기에 그럴까! 단지 사랑일 게다. 사랑만이 그러하리라. 끝없이 주는 사랑이니까.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그 사랑이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능과 능력은 말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단순하게 제시하신다. 하느님 자비의 최고 표현은 당신께서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라셨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함께 나누기를 바라셨다는 데에 있다. 참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 친밀감으로 들어 높이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리라.
예수님께서는 삶의 큰 짐을 지고 가는 이들을 언제 어디서나 초대하신다. 나아가 그들이 짐을 내려놓고 쉬도록 부르신다.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너무나 많은 짐을 진다. 예수님께서는 온유한 마음, 겸손한 마음만이 인간의 멍에를 가볍게 한단다. 사실 짐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강도는 달라질 게다. 재산을 재벌과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 놓고, 백세의 무병장수를 찾는다면, 대다수는 어쩌면 불행하리라. 그러나 동일 눈높이에 두고 보면 우리는 행복할 게다.
이렇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셨지만,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평범한 일에도 그저 감사할 게다. 거룩한 신성을 끝내 감추시고 비천한 인간으로 태어나신 그분 사랑을 생각하면, 우리는 마냥 행복한 추억만을 가지리라.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서 그토록 처참하게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고통과 십자가를 이겨 낼 게다.
곳곳에 소통이 단절된 불통이 드러난다. 작은 이들과 아픔을 함께하는 그 한계가 자꾸 멀어진다. 빈익빈부익부가 자꾸 벌어진다. 그분의 편한 멍에가 그리워진다. 세모의 찬바람이 세차게 분다. 우리만이라도 그 편한 멍에를 메고 그분의 사랑을 안고, 작은 이웃을 찾아 나서자. 그분 멍에를 대신 야무지게 메고 작은 이 찾아 함께하는 삶에서, 대림시기의 훈훈한 안식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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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김재덕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와서 안식을 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그러나 많은 신앙인은 예수님께 가서 안식을 얻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에서 안식을 얻고 싶어 할까요?
기도보다 세상이 주는 흥밋거리로 마음을 채우는 것을 안식으로 삼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생각과 마음 안에 담기보다, 누군가를 향한 비난과 험담에서 안식을 얻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기보다 게으름, 게임, 술, 인터넷 등
하느님께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안식처로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8-29).
우리의 안식처는 하느님이십니다.
영혼이 지치고 마음이 메마를수록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바로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성체 앞입니다.
여러분의 안식처는 어디입니까? 예수님께 가십시오. 그분 곁에 머무르십시오.
우리가 이 선택을 할 때 우리 영혼은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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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보관을 위해 추가 첨가한 자료입니다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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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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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마태 11, 28)
애쓰며
살아가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아십니다.
기꺼이
가장 좋으신
당신 사랑을
내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무거운 것이
가장
가벼운 것이
됩니다.
어느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자신을
초대하십니다.
무거운 짐처럼
느껴지는 것들이
주님의
위로와 감사로
바뀝니다.
껴안고
가야할
대상 또한
그 누구도
아닌
우리자신임을
뜨겁게
깨닫습니다.
하느님 편에서
바라보는
참된 평화를
체험합니다.
괴롭게
애썼던
그 마음까지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전부를
내어주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자신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비로소
휴식을
알게 되고
얻게 되는
주님의
은총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벗어나는
무거운
짐입니다.
가장 좋은
사랑을
만나는 날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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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위로 올라갑니다!
때로 매일 매일 우리에게 배달되는 성경 말씀이 얼마나 큰 위로요 기쁨이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하는 독서 말씀과 복음 말씀은 온통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위로로 가득합니다.
특히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여기 쑤시고 저기 아픈, 저같이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지니게 해줍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간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이사야 40,30-31)
맞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주님은 영원히 청춘이십니다.
언제나 새롭고 활기로 가득하십니다.
주님은 노쇠하거나 은퇴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안에 길이 머무는 우리 역시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늙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라면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청춘을 살수 있습니다.
비록 세월의 흐름 앞에 너나할 것 없이 약해지고 작아지마, 삶은 점점 위축되고 결국 소멸되겠지만, 주님 안에 사는 사람, 주님만 바라보는 사람은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릅니다.
제가 요즘 온몸으로 실감하는 바입니다.
주님께서 제게 큰 자비와 은총을 주셔서, 상상을 초월할 강철 체력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봐도 놀랄 정도입니다.
꼭두새벽부터 시작해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엄청 바쁩니다.
일이 눈에 보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피정 집 운영, 미사, 기도, 고백성사, 신앙상담, 특강, 원고 작성, 청소, 수리, 시장, 주방...그 와중에 물때가 좋으면 해루질에 낚시...
꽉 찬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들면 온몸이 파김치처럼 되지만, 놀랍게도 하룻밤 자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에너지가 백퍼센트 충전되어 원상복귀됩니다.
나름 열심히 살려고 하니 주님께서 힘을 주시고 기력을 북돋아 주시는가 봅니다.
제 체험상 나이들수록 더 움직여야 합니다.
좀 아프다고 누워만 있으면 통증은 점점 더
심해집니다.
근심 걱정도 주님께 맡기고, 건강 문제도 주님께 맡기고, 병고도 주님께 맡기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주님께 맡기고, 그렇게 모든 것 맡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몸과 마음이 얼마나 가벼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자요 결정적인 위로자이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런 고통 저런 상처를 이고 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말씀은 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 28)
세파에 지칠 때마다, 그래서 걷기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나아가야 할 곳이 있습니다.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바다처럼 관대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시는 예수님, 한없이 따뜻하고 편안한 하느님의 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표현대로 그분은 에너지 충전소입니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십니다.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십니다.
젊은이들도 피곤하여 지치고, 청년들도 비틀거리기 마련이지만, 주님께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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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28절) 주님께서는 율법의 멍에를 멜 힘조차 없는 지친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악마에게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지고 무수한 죄에 억눌린 우상 숭배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우리는 그분에게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29절)한 것을 배우라고 하신다.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멍에는 편하고 짐은 가벼워진다. 왜 주님께서는 그 길을 좁은 길이라고 하셨을까? 게으른 사람들에게는 좁은 길이다. 그러나 잘 배운 이들에게는 그 계명이 가볍다. 설사 잠깐 육체적 고통이 따른다 해도, 희망 안에 양육되고 있는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견디어 내는 신심이 깊은 사람이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 어렵게 보이는 것을 요구하시는가? 이것이 어렵게 보이는 것은 멍에를 메고 그분의 말씀을 믿는다면 얼마나 편하고 가벼운 짐인지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짐은 관습과 규정이 아니라, 영혼의 결심이기 때문이다.
생명을 원하고 좋은 날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부정과 악의의 멍에를 벗어버려야 한다. 모든 악덕의 멍에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편하고 가벼운 멍에를 멜 수 없다. 그리스도의 멍에를 힘들다고 여기는 것은 세상에 물든 마음으로 하늘의 것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은 아직 그리스도께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울 수가 없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절) 세상 주인들의 짐은 힘을 점점 더 빠지게 하지만, 그리스도의 짐은 그 짐을 진 이들을 오히려 도와준다. 우리가 은총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우리를 지고 가며, 우리가 은총을 돕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도우라고 은총이 우리에게 주어졌다.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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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자기 마음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즈의 마법사에는 양철 나무꾼이 나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양철 나무꾼이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워낙 이성적으로 사는 사람이어서 사랑을 느낄 심장을 원했던 것입니다.
저는 저의 심장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집착으로 모든 고통을 주는 게 마음임을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양철 나무꾼이 새로운 심장을 가지게 되는 과정을 살펴봅시다.
양철 나무꾼은 본래 닉 초퍼라는 이름의 솜씨 좋은 나무꾼이었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먼치킨 소녀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먼치킨들을 지배하던 동쪽의 악한 마녀는 이들의 사랑을 막기 위해 닉의 도끼에 저주를 걸었습니다.
“동쪽 마녀가 내 도끼에 저주를 걸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내 몸의 한 부분을 잘라냈습니다.”
도끼는 그의 팔다리를 하나씩 베어내었고, 친절한 양철장이가 이를 대신하여 양철로 그의 몸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결국 그의 몸은 전부 양철로 대체되었지만, 도끼는 그의 가슴마저 베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양철장이가 그의 가슴을 양철로 대체했지만,
이에 따라 닉은 심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 나는 깨달았습니다…. 심장이 없이는 더 이상 내가 사랑했던 소녀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심장을 잃은 그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하며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그에게 심장의 부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는 여전히 나무꾼으로서 일을 계속했지만, 마음속 공허함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심장이 없으니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삶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느 날 비를 맞고 녹슬어버린 그는 숲속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방치되었지만, 도로시와 허수아비가 그를 발견하여 구해주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나는 마법사를 찾아가 심장을 달라고 부탁하겠소.
그래야 다시 사랑할 수 있을 테니.”라며 여정에 동참하게 됩니다.
에메랄드 시로 가는 여정에서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다고 믿으면서도 동료들을 위해 여러 번
희생하며 자신의 따뜻한 본성을 드러냈습니다. 강을 건너다 허수아비를 구하기 위해 도끼를 휘두르고, 함정에 빠진 사자를 구출하는 등 친구들을 돕기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사랑과 배려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음을 보여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완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소. 하지만 내 가슴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오.”
마침내 마법사를 만났을 때, 그는 심장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마법사는 그에게 심장을 주겠다는 약속과 함께, 서쪽 마녀를 물리치라는 임무를 내렸습니다.
임무를 마친 후, 양철 나무꾼은 마법사에게 돌아와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마법사는 양철 나무꾼에게 이미 그에게 심장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의 자신 없는 행동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을 위해 보여준 희생과 사랑은 진정한 심장의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양철 나무꾼이 더 이상 공허함을 느끼지 않도록 마법사는 그에게
비단으로 감싼 톱밥 심장을 주었습니다.
마법사는 말했습니다.
“이 심장은 당신이 이미 사랑하고 배려할 줄 안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해 줄 것입니다.”
비단은 부드러움과 연약함을, 톱밥은 단순함과 강인함을 상징합니다.
곧 온유함과 겸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성체’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저의 서품 성구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저는 얼음 같은 마음이 사라지고 따듯한 예수님의 마음을 원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할 수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하.사.시.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심장은 사랑이 거창한 행위나 완벽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작은 선택과 타인을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심장을 받은 양철 나무꾼은 깨달음을 얻으며 말했습니다.
“이 심장을 영원히 간직하겠소.
이 심장은 양철이라도 사랑을 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니까요.”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울어줄 때 나는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내일 걱정부터 했습니다.
그러니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따듯한 가슴을 원했습니다.
이전의 심장이 미웠습니다.
성체를 통해 내 안에 이미 따듯한 심장이 있다고 믿고 온유하고 겸손하여지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느 순간부터 내 안에 예수님의 심장이 있다고 조금씩 믿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블랙스완’은 자신이 유명해지지 못한 발레리나 어머니가 딸에게 자기 꿈을 강요하여
딸의 인생을 나락 가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프리마돈나를 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 자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엄마의 기대였습니다.
엄마를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지만, 결국 그 일은 자기를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엄마가 우리가 모두 가지고 태어나는 마음입니다. 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미워해야 합니다.
어떻게? ‘착한 뜻’을 가지면 됩니다.
지혜를 가지면 됩니다.
사랑하면 행복하다는 지혜로 사랑하려는 착한 뜻만 가지면 지금 심장을 미워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바랄 수 있게 됩니다.
레베카는 아브라함의 종에게 우물에서 물을 길어주고 그의 낙타들까지 물을 먹였습니다.
이 착한 행동이 결국 이사악과 결혼하여 그의 심장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구약에서 십계명을 먼저 주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배우고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당신은 당신 심장을 내어주십니다.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영하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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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은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를 주시는 분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28-30).”
1) 이 말씀에서 ‘안식’이라는 말은, 단순히 ‘편안하게 쉬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구원, 영원한 생명, 평화, 영원한 기쁨과 행복 등을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라는 말씀은, “내가 너희를 구원하겠다.” 라는 뜻입니다.
‘고생’과 ‘무거운 짐’은 ‘죄와 죽음’을 포함해서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억압과 고통입니다.
‘너희’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에게 오너라.” 라는 말씀과 “나에게 배워라.” 라는 말씀은, 당신을 믿고 당신의 가르침대로 살면서 당신을 따르라는 권고입니다.
‘내 멍에, 내 짐’은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입니다.
이 표현은 ‘반어법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멍에나 짐이 아니라, 온갖 멍에와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열쇠입니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는 말씀은, “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너희의 멍에들과 짐들을 없애고 너희에게 해방과 안식을 준다.” 라는 뜻입니다.
2) ‘안식’(구원)을 얻기를 갈망하지만, 그것을 어디서 어떻게 얻어야 하는지를 몰라서 방황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예로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 여자가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한 것은 맞는 말이다. 너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너는 바른대로 말하였다.’(요한 4,13-18)”
“그 여자가 예수님께,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5-26)”
여기서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지금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니”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여자의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신 말씀일 수 있습니다.
‘참된 구원(안식)’을 얻기를 갈망하면서 이 종교, 저 종교를 찾아다니면서 방황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씀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참된 구원’을 주시는 분을 만나지 못하면,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어떤 곳에서도 구원을 얻지 못하고, 안식과 평화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7-38)”
3)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여기서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고, “주님은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저희는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 길이 아무리 힘들어도, 주님만을 따르겠다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1코린 8,5-6).”
이 고백은, 인간 세상에는 종교가 많지만, 우리가 믿는 하느님만이 참 하느님이시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만이 참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은 신이 아니고,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4) 세상에는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해 주는 것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마음의 평화’가 ‘구원’(안식)은 아닙니다.
그것이 선한 일이고, 좋은 일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실제로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구원’은 ‘마음의(영혼의) 평화’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죄와 죽음’의 억압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방식으로 얻는 ‘마음의 평화’는 진통제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진통제가 아니라 치료제이고, 그 치료제는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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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마태 11,28-30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거센 풍파에 시달리느라 지친 우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늘 피로에 찌든 채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우리에게 그 말씀은 ‘아무 것도 안하고 푹 쉬게 해주겠다’는 의미로 들려 반갑게 느껴지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안식은 우리가 기대하는 ‘휴식’과는 다릅니다. 안식은 하느님께서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실 때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에게 허락하시고 명하신 ‘축복’에 가깝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늘어져 있으라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단 하루라도 ‘세상의 일’을 잠깐 접어두고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 머무르며 그분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을 묵상해보라는 초대이자 권고인 겁니다.
그런데 세상은 우리가 그런 안식을 누릴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체제 안에서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뽑아내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하기에, 세상은 우리가 일을 중단하고 쉬는 걸 탐탁치 않게 여기는 겁니다. 그렇게 쉴 때 다 쉬어가며 어떻게 성공하느냐고, 더 많은 돈을 벌어 행복해지려면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불철주야 달려야 한다고, 쉬는 건 많은 돈을 벌고 난 뒤에 성공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는다고 우리를 다그칩니다. 그 영향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은 ‘피곤해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정작 안식을 누리는 걸 불안해 합니다. 죽으면 어차피 쭉 쉴거니 할 수 있을 때 죽어라 일해서 빨리 성공하겠다고 이를 악물지요. 그러다보니 몸과 마음에 병이 생깁니다. 쉼을 포기한 대가로 통장에 숫자는 쌓여가는데 마음은 점점 공허해질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두 나에게 오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 깊이 머무르며 그분과 친교를 맺는 기도의 시간이야말로 몸과 마음, 영혼까지 다 방전되어버린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안식’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나 사이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분께서 주시는 힘과 위로를 받아 마음이 충만해지지요. 그럴수록 그분 사랑 안에 더 깊이, 더 오래 머무르고 싶다는 갈망 또한 커집니다. 그런데 이 거룩한 안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일을 잠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들을 상당부분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건 ‘어리석은 시간 낭비’라고 우리 귀에 대고 속삭이는 어둠의 세력들을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물론 주님과 함께 한다고 해서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지고 가야 할 ‘짐’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세상살이에서 짊어지는 짐에 신앙생활에 따르는 의무까지 더해져 때로는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하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눈 앞에 놓인 바다를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바다를 갈라 살 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힘들고 괴로운 십자가를 대신 져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십자가를 끝까지 잘 지고 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시고 나에게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언제나 나와 함께 걸으시며 힘을 주시니, 우리는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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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모두 나에게 오너라 ”
이렇게 겨울의 추운 밤이면 어린시절의 은행나무 골목이 생각납니다.
성당에 모여서 저녁 만과를 바칩니다.
식구들이 함께 성당에 갈 때에는 문제가 없지만 혼자서 집으로 돌아 올 때에는
은근히 동네 어귀의 처녀가 죽어서 귀신 소리를 낸다는 향교 앞 숲을 지나는 것이
걱정이 됩니다.
겨울에 몰아치는 바람소리는 영락없이 귀신이 곡하는 소리입니다.
수녀님이 주님의 기도를 소리내서 외우고 지나가라고 해도 소용없는 것이
그 자리에 오면 소리마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있는 힘을 다해서 달리곤 합니다. 훗날 철이 들어서 주성모님께서
힘이 되어 주신 것을 깨닫게 되었지요.
한번은 겨울 지리산에 가서 마지막 코스에서 그만 해가 지고
순간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날따라 눈이 내리고 온도가 급강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방은 컴컴하고
가야할 길은 눈에 덮이고... 후레쉬 불에 의지하며 가다 결국은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자신도 모르게 주성모님께 의지하는 기도가 나왔습니다.
산장에 늦은 밤에 도착했더니 그곳 책임자가 사고 나는 줄 알았다고
큰 걱정을 하면서 위로의 말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지리산은 미리 신청을 하고 가기 때문에 그 곳 대피소에서는 인적사항과
도착시간을 미리 알고 있지요.
우리가 살다보면 예기치 못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을
맞을 때가 있습니다.
당황하고 고통스러운 순간이라도 주님께 기도를 하면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힘이 되어 주시지요.
주님께서 삶의 무게로 허덕이는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해 주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가끔씩 교우 중에 하던 일이 어긋나면서 나앉게 생겼을 때, 달리 방법도 없고
할 말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께 기도하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도와주시지요. 그것이 믿음의 신비라 할 수 있습니다.
성실한 목자가 길을 잃고 헤매는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나서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고 계시기 때문에 구해주십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놀라우신 주님의 손길을 전합니다.
“너는 알지 않느냐? 너는 듣지 않았느냐? 주님은 영원하신 하느님, 땅 끝까지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줄도 지칠 줄도 모르시고,
그분의 슬기는 헤아릴 길이 없다. 그분께서는 피곤한 이에게 힘을 주시고,
기운이 없는 이에게 기력을 북돋아 주신다.”(이사 40,28-29)
주님의 말씀에 귀기우리며 이 대림시기에 우리자신의 신앙을
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0,29-30)
대림절의 하루를 지내며 주님께 초대받은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지 묵상합시다.
“너희는 맛보고 눈여겨보아라, 주님께서 얼마나 좋으신지!
행복하여라, 그분께 피신하는 사람.”(시편 34,9)
오랫동안 익숙한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이 남아 있습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보고 맛들여라 복되다
그 님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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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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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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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211. 대림 제 2주간 수요일.
영적인 멸망으로 이끌려 가지 않는 삶
<2024.12.11> 아침을 여는 묵상 (암 6:1~14절)
❝영적인 멸망으로 이끌려 가지 않는 삶❞
❚ 영혼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 영적으로 건강해지고 범사에 행복해집니다.
✔ 멸망으로 이끌려 가게 하는 원인은 무엇입니까?
➲ 영적인 교만함은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1~2절).
선지자는 시온에서 교만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1절). ‘시온에서 교만한 자’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쾌락에 빠져 있는 남유다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는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갈레와 하맛 그리고 가드’(2절) 이들 나라들은 당대 이름난 도시들입니다.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시들은 마침내 멸망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영적으로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할 지도자들의 영적 안일함과 교만함에 대해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닌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직분을 가졌고, 교회 안에서도 많은 봉사를 한다고 해서 진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우리의 모습들이 오히려 영적 안일함과 교만함에 빠지도록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간과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으로 나를 부르셔서 영적 리더십으로 세워주신 만큼 영적인 안일함과 교만함에서 벗어나 생명의 길로 이끌어가는 주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게으름은 우리를 죄악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3~7절).
하나님의 심판을 목전에 두고도 이를 깨닫지 못한 지도자들은 극도의 사치와 쾌락을 탐닉하므로 직무를 유기한 채 자신들의 향락만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상아로 만들어진 침대, 최고의 어린양과 송아지를 잡아 먹고..’(4절), ‘비파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절거리며’(5절)..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6절) 발랐습니다. 지도자들은 민족의 운명이나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고, 그들의 화려한 잔치는 끝나게 될 것입니다(7절).
많은 것을 누리며, 잘 먹고, 잘 입고 잘사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의 추구는 영원한 만족이 없습니다. 평생을 그 목표만을 위해 살아가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겉으로는 믿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주일성수는 하고 있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구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윗이 악기를 제조하고 음악을 연주(5절b)한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는데, 당시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향락을 목적으로 악기를 제조하여 연주한 것처럼 모양만 목사이고,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말씀에 거울에 내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당장 나에게 하나님의 징계가 없다 해서(3절) 영적 게으름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영적 긴장감을 늦추지 말고, 부지런히 주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삶을 통해 죄악의 길로 나아가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 영적인 무지함은 우리를 심판의 길로 이끌어 갑니다(8~14절).
영적인 교만함과 게으름은 결국 영적인 무지함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야곱의 영광을 싫어하며.. 원수에게 넘기리라..’(8절)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못할 것이라..’(9~10절)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시면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개인의 죄악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의 죄악 그리고 한국 교회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우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의 지배 아래 단단하게 묶여 있어서 ‘정의를 쓸개로..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12절) 즉 하나님의 책망의 말씀이 너무 쓰게 느껴져서 말씀 자체를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허무한 것을 붙들고 기뻐(13절)하고 만족해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우리는 직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영적인 무지함이 결국 우리를 심판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다시 한 번 간절히 사모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적 교만과 게으름과 무지함으로 타락하여, 멸망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갈 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깨우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거룩한 부르심의 뜻을 따르는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암 6:1~14절)...
행복의 시작 예수 그리스도!!!
빛이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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