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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전도여행 시작과 아볼로의 사역
행 18:23-28
23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
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5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6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
27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함으로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더니 그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공중 앞에서 힘있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
행 18:23-28 / 안디옥에서 얼마 동안 지낸 다음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에 있는 모든 신도들을 격려하고 주님 안에서 굳은 믿음을 지켜 가도록 도와주었다. 24) [에베소에서 전도한 아볼로] 그 무렵 훌륭한 성경교사며 설교자로서도 뛰어난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에베소를 찾았다. 25-26)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배워서 열성을 다해 회당에서 설교하였다. 그러나 그가 아는 것은 고작 애굽에 있을 때 어떤 사람에게서 들은 침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와 요한이 예수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가 하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담대한 그의 설교를 들어 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찾아가서 요한이 온 후에 예수께 일어난 일들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27) 얼마 후 아볼로가 아가야로 가고 싶어하자 신도들은 그를 격려해 주었다. 그리고 그곳 믿음의 형제들에게 아볼로를 소개하고 환영해 달라는 편지를 써보냈다.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며 교회에 큰 힘을 북돋아 주었다. 28) 그는 공개 토론에서도 유대인들을 훌륭하게 논박하고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께서 참으로 메시야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에 머물면서 다음 전도여행을 준비합니다. 또한 요한의 세례만 아는 성경에 능통하고 언변이 좋은 아볼로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배움으로 참 제자가 되어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된 것을 봅니다.
모든 제자를 굳건하게 하니라(23) 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사도 바울은 52년 여름부터 53년 봄까지 안디옥에 머뭅니다. 그리고 다시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바울의 이번 여행은 선교팀이 아닌 혼자서 전도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번 전도여행의 목적은 2차 전도여행 때 복음을 전한 지역에 가서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된 성도들을 만나이단의 거짓 교훈에 흔들리지 않고 더욱 믿음을 굳게 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4-26) 바울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을 만났습니다. 이곳은 당시 세계제일의 도서관이 있는 지역으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곳에 복음을 처음 전한 사람은 마가 요한이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일찍이 학문을 익혔고 또한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복음의 핵심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을 통한 그리스도만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가 하나님의 도와 예수님에 관하여 더 깊이 풀어주고 성령강림의 사건을 정확하게 알려주었습니다. 이는 아볼로를 통하여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와 뜻이 세워질 것을 확신한 가운데 행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언하여 유대인의 말을 이김이러라(27-28)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통하여 하나님의 도를 더욱 깊이 깨달은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기를 원했습니다.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 영접하라 하였습니다. 아가야에 도착한 아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더 깊이 깨달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함으로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 성경지식과 열정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없습니다.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남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지식으로 만이 아니고 개념적인 이해만이 아니라 성령을 체험하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의 능통한 성경 지식과 복음의 체험을 담은 증언은 힘이 있어 유대인들의 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아볼로는 복음 전도자로서 사도행전의 한 부분의 역사를 채운 자가 되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도를 하나님의 은혜로서 더욱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아볼로와 같이 믿는 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는 앞서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붙잡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사람은 언제나 진실할 때 평안해집니다. 거짓된 마음을 품고 있으면 늘 불안하고 평강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많이 가지고 있어도 늘 불만과 불편함이 따릅니다. 진실만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줍니다. 왜냐하면 진실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삶에 있어서 거짓을 버리는 용기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진실을 말하라. 자기가 느낀 바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결코 주저하지 말라.” 이는 프랑스의 조각가 로뎅의 말입니다.
< 설 교 >
아볼로
김영규 목사
제3차 전도 여행의 시작
제2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바울은 잠시 체류한 후에 곧바로 제3차 전도여행을 시작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행18:23) 유대 땅 가이사랴에 상륙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그간의 전도 결과를 보고하고 예루살렘 교회 교인들을 문안했습니다. 그리고 파송 교회인 안디옥 교회로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곧바로 제3차 전도여행에 나섰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을 연도별로 보면 대략 이렇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은 주후 45년 이후 51년 사이, 제2차 전도여행은 주후 52년에서 55년까지, 제3차 전도여행은 주후 55년에서 59년까지로 봅니다. 제1차 전도여행과 제2차 전도여행 사이에는 상당한 휴식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예루살렘 종교회의에도 참석했고, 노독을 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2차와 제3차 여행 사이에는 휴식 기간이 거의 없습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신속하게 3차 여행을 시작했을까요?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합니다. 첫째로, 아시아 전도에 대한 열망입니다. 제2차 전도여행 당시 바울은 아시아에 집중하려 했었는데, 성령께서 마게도냐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유럽으로 떠났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잠깐 에베소에 들렸었는데, 그 때에 에베소 사람들이 머물도록 간청했었습니다. 바울은 이때에 하나님의 뜻이면 돌아오리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었습니다. 아마 이 때에 아시아 전도에 대한 비전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로, 바울이 이미 세운 교회들을 돌아보려는 열망입니다. 바울은 이미 1차 전도여행 때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버가, 등지에 많은 교회들을 세웠습니다. 제2차 여행 때에도 이 교회들을 방문했습니다. 이제 10여년이 경과된 시점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들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고 싶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교회들을 방문하고 믿음을 강화시켰습니다.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방문한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했습니다.
아볼로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할 무렵에 또 한 사람의 중요 인물이 도착했습니다. 그가 바로 아볼로입니다. 오늘은 이 아볼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본문을 봅시다. 아볼로가 누구인가?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4-25)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입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는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지금의 이집트 북쪽,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드리아는 BC332년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란 이름도 알렉산더 대왕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알렉산더는 이 도시를 건설하면서 헬라인과 함께 유대인을 정착시켰습니다.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알렉산더 대왕은 유대인들에게 헬라인과 동등한 거주의 권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다섯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 중 두 구역을 유대인에게 할당했습니다. 이 도시는 크게 부흥하여 자유인과 노예를 합한 인구 60만 명의 대도시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 유대인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필로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알렉산드리아와 주변에 살던 유대인의 숫자가 1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로마제국 시대에도 알렉산드리아는 아프리카의 수도였고, 제국의 3대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주후 641년 아랍의 칼리프 오마르가 점령했을 당시, 알렉산드리아는 4000개의 왕궁과 4000개의 목욕탕, 400개의 극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더 대왕이 건설한 만큼 헬레니즘 문화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기 때문에 유대주의적인 문화도 상당히 섞여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이 만난 곳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에 동일하게 중요한 유산이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70인경이란 구약성경입니다. 본래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었는데,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이 성경을 최초로 헬라어로 번역했던 것입니다. 본래 문자를 그대로 베낀 것을 사본이라 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한 것을 역본이라고 하는데, 70인경은 성경 최초의 번역본입니다. 로마 제국과 헬라 문명권에서 살던 많은 유대인들은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은 유대교 역사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아무튼지 이런 배경에서 성장한 사람이 바로 아볼로란 인물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볼로의 특징이 두 가지입니다.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24) 첫째로, 학문이 많았습니다. 학문이 많다는 말은 “lovgio"” 유창하다는 뜻인데, 학식이 많다는 의미로도 사용이 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적인 철학, 수사학 등의 여러 학문이 발전되었습니다. 아볼로는 헬라 철학이나 웅변에도 능통했습니다. 둘째로, 성경에 능했습니다. 능하다는 말은 “dunatov"”(powerful, mighty)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이 많았기 때문에 유대인 회당과 학교도 많았습니다. 아볼로는 이렇게 풍부한 성경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으로 어떤 것이든지 변론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볼로가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25)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아볼로가 어떻게 예수를 알게 되었을까? 많은 추측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돌아간 사람들이 전했을 것이란 설입니다. 둘째는,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받았던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회당으로 전파한 것을 아볼로가 들었으리라는 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누구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곧 메시아가 오실 것이라고 하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했습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서 세례 요한이 예수를 메시아로 소개한 것이 구전으로 알려졌고, 아볼로도 이런 얘기를 듣고 예수를 메시아로 알았다는 설입니다.
그러나 아볼로가 알고 있는 복음은 불완전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5) 그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명하신 세례는 알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한의 세례는 무엇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먼저 요한의 세례부터 생각해 봅시다. 요한의 세례가 뭘까요?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마3:5-6)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이 요한의 세례는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일종의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물로 씻는 의식이 죄를 없이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막1:4)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NASB) “people should be baptized to show that they had turned from their sins and turned to God to be forgiven.*”(NLT) 요한의 세례는 죄 용서를 받도록 회개시키는 세례였습니다. 말하자면 일생일대의 conversion의 표시로써 받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실질적인 속죄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육체를 씻는 세례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성령으로 마음의 죄를 씻는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한 세례라면 예수님의 세례는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자에게 주는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가 영혼을 씻기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세례는 영혼의 죄를 능히 씻기는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믿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형식상 물세례는 받았지만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셋째로, 만일 그가 유대교적인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다면, 그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속죄하신 대속의 원리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유대인들의 현세적 메시아관을 가졌을 것입니다.
아볼로의 발전
아볼로가 새로운 복음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아볼로는 복음에 대해서 불완전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적인 메시아관, 혹은 성령의 역사를 알지 못하는 불완전한 회개, 불완전한 믿음, 불완전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볼로에 대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데려다가 가르쳤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훌륭한 두 가지 모범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아볼로의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그는 기꺼이 복음의 진리를 배웠습니다. 배우는 열심! 배우는 겸손! 영적으로 성장하는 모습! 그것이 아볼로의 장점입니다. 아볼로는 교리적으로 불완전한 진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교리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은 사단과의 싸움에서 약점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에 “주의 도” 혹은 “하나님의 도”라고 했습니다. “도”란 “호도스”인데 길, way란 뜻입니다. 바른 교리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시고, 어른들에게는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 교육을 보면 아이들은 가르치고 어른들은 축복합니다. 거꾸로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하세요. 어른이 되면 더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성숙되어야 합니다.
아볼로는 새로운 진리를 알게 됨으로써, 더 크게 쓰임받게 됩니다. 아가야 교회가 아볼로를 지도자로 초빙했습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7-28) 아볼로가 아가야로 가려고 한 것은 고린도 교회의 청빙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 여러 분파가 있었는데 아볼로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로, 형제들의 격려입니다. 우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개인적인 가르침입니다. 형제나 지도자가 부족할 때에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할 것이 아닙니다.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볼로가 교리를 모른다고 챙피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르면서 뭘 가르치느냐고 탓하지 않았습니다. 모르는 부분,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지도자를 대하는 방법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는 지도자의 부족이 많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비판하기에 앞서, 부족을 대신 채워주고, 부족이 채워지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교회의 초청을 받았을 때에 믿음의 형제들은 그를 잘 영접하라는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부족한 형제를 보완해 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도자를 나무에서 떨어지도록 흔드는 교회가 아니라, 잘 감당하도록 부족을 돕는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아볼로의 공헌
아볼로의 성장은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바울의 추종자, 베드로의 추종자, 아볼로의 추종자가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 아볼로의 추종자들은 오늘날로 한다면 말씀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파는 소위 말하는 은혜파들입니다. 은혜파에게 약점은 성경 말씀, 혹은 교리적 지식의 약점입니다. 아볼로는 그의 풍부한 성경 지식으로 은혜파의 약점을 보충해 주었습니다. 특히 고린도 교회에는 그 의미가 큽니다. 고린도 교회는 갖가지 은사로 서로 충돌했기 때문입니다.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여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27-28) “boulomevnou de; aujtou' dielqei'n eij" th;n !Acai?an, protreyavmenoi oiJ ajdelfoi; e[grayan toi'" maqhtai'" ajpodevxasqai aujtovn, o~" paragenovmeno" sunebavleto polu; toi'" pepisteukovsin dia; th'" cavrito":” “eujtovnw" ga;r toi'" !Ioudaivoi" diakathlevgceto dhmosiva/ ejpideiknu;" dia; tw'n grafw'n ei\nai to;n Cristo;n !Ihsou'n”오늘 우리의 믿음도 그렇습니다. 은혜로 믿게 되었다면, 즉 감성과 의지가 나를 믿음으로 인도했다면, 성경의 확증 즉 논리적, 법적 근거로 뒷받침해야 합니다. 아볼로는 은혜로 받은 구원에 대해서 성경 진리로 확증하여 주었습니다. 또한 성경으로 대항하는 유대인들에게 역시 성경으로 그들을 제압했습니다. 한 사람의 미숙한 일군 아볼로를 잘 지도하여 유능한 일군으로 만드는 것이 교회의 책임입니다. 바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단순히 전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일군을 찾아 교회에 공헌하게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서금석 목사
들어가면서
● 바울의 3차 전도여행 중에 에베소가 가장 중심이 되는 도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에베소에 가기 전 에베소에서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가르치던 아볼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마치면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를 에베소에 머물게 했었지요?
● 에베소란 어떤 도시였습니까?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당시 로마제국내에 4대 도시가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에베소였습니다. 그중에서 에베소는 아시아 지역을 다스리던 수도였습니다. 해안에서 5km정도 육지로 들어간 카이스터 강가에 위치한 도시로 로마에서 동방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소아시아 최대의 무역 중심이었습니다. 다음시간에 에베소의 특징에 대해 다시 설명하겠지만 에베소를 중심하여 계시록의 소아시아 일곱교회와 골로새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3년 머무르면서 전도를 했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19장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 아볼로에 대해서 말씀드리려면 먼저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24절 서두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라고 시작하지요? 알렉산드리아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아프리카 북단 나일강 하류에 위치한 도시였는데 알렉산더 대왕이 BC332년에 제대로 된 계획도시를 만들어 보자(분당, 일산처럼)해서 만든 도시가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상업과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가 50-60만권 정도가 되었다고 하니 학문적인 열정과 수준을 짐작할만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애굽사람, 로마사람, 헬라사람, 유대사람 이렇게 네 민족이 살았는데 그 중에 유대인수가 100만명이 되었다고 하니 유대사람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종교생활과 학문활동을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볼로는 바로이런 분위기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또하나 알렉산드리아를 생각하면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구약의 성경은 히브로 말로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최초로 히브리말에서 희랍어로 번역한 곳이 바로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70명이 번역했다고 해서 '70인역 성경'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면 아볼로는 어떤 사람입니까?
1.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사람이었습니다(24)
"24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자라"
⑴ 먼저 학문이 많다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학문이 많다는 의미는 많이 배웠다는 뜻입니다. 말씀드린대로 알렉산드리아는 학문적인 분위기로 대단했습니다. 애굽과 헬라의 학문도 많이 배웠을것이고 유대인이었으니 히브리철학에도 능통했을 것입니다. 아볼로는 애굽에서 최고의 학문을 배운 지성인이었습니다. 학문적인 권위는 하루아침에 생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배울 기회가 생겼을 때 열심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배우지 않고서 배운사람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배운 사람은 배우지 못한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이렇게 저렇게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기회가 있을때마다 공부해야 합니다.
'교육열'을 말하면 우리나라 부모처럼 열성적인 민족도 보기가 힘들 것입니다. 좀 지난 연구입니다만, '산업화 사회의 어린이들'이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움에서 한국, 미국, 일본, 대만의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각종 조사결과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와 공부하는 시간이 우리 한국어린이가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나머지 세 나라들이 모두 1시간인데 비하여 거의 세곱이나 되는 2시간 54분을 공부시간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놀 때 상대하고 노는 아이수가 적은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여타 나라 아이들은 교우하는 친구가3-4명인데 한국어린이는 2명에 불과합니다. 학교 공부말고 여가로 습득하는 과목으로 미국은 스포츠가, 대만은 외국어가 으뜸인데, 한국어린이는 산수가 으뜸이었습니다. 수험(受驗)을 의식한 공부를 일찍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학문교육과 함께 인성교육이 되어져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합니다. 성공한 자녀일수록 부모님과의 관계가 생각만큼 뜨겁지가 못합니다.
어쨋든 배워야합니다. 학교도 가정도 이제 기술과 전문지식만 가르치려 하지 말고 인격도 가르쳐야 합니다. 학문이 많다고 반드시 인격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배운 것이 모자르면 좋은 지도자가 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또 하나 학문이 많다는 헬라어 '로기오스(λογιοσ)'는 '유식한'이라는 의미와 함께 '말잘 하는'이란 뜻도 있습니다. 아볼로는 풍부한 학식과 함께 천부적인 언변(言辯)도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말 만 잘한다'면 이것도 문제이겟지만 자기가 배운바를 잘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말 잘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 아닙니까? 28절 후반절을 보면 '공중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 유대인들에게 힘있게 논박했다는 말씀인데, 아볼로가 얼마나 언변이 뛰어난가 하는 점을 보게 해 줍니다.
아볼로는 학문적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말도 잘했어요. 바로 이런 아볼로의 능력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데 귀하게 쓰임받지 않습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열정도 있었습니다.
(2) 아볼로는 성경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떤 사람이 성경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신학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까? 헬라어와 히브리어에 능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내용이나 흐름을 훤하게 아는 것이 성경에 능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성경의 중요한 내용을 줄줄이 암기하는 사람이 능한 사람입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 맞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그런것만 가지고 성경에 능하다고 말하기는 부족하지요. 성경에 능하다는 말은 성경의 진정한 의미를 잘 깨닫고 깨달아 진대로 믿고 믿는대로 생활에 적용하여 실천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하여 배운 것이 많고, 아는 것도 많아도 성경이 그 사람의 삶과 생활에 아무런 관련도 없고 영향도 미칠 수 없다면 소용없는 일 아닙니까? 세상을 보면 학문이 능하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성경을 멀리하거나 가볍게 여기는 사람을 보는데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닙니다. 아볼로는 세상 학문에도 능할뿐 아니라 성경말씀에도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 아볼로가 어떻게 성경에 능한 사람이 되엇을까요? 25절 첫부분을 보면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
● 주의 도(the way of the Lord)란 한마디로 기독교를 말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을 믿는가와 함께 믿는 바를 실제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生)의 길입니다.
'배웠다'는 희랍어 '카테케메노스(κατηχημενοσ)'라는 단어의 의미는 '배웠다'는 뜻인데 제대로, 깊이 있게 배웠다는 말입니다. 스승이나 부모로부터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웠다는 뜻입니다. 신앙에 대해서도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여기 저기서, 이 얘기, 저 얘기 들어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하여 제대로 배웠다는 뜻입니다. 아볼로는 바로 어려서부터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제대로,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말씀입니다. 뿌리있는 신앙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 성경을 어떻게 공부하십니까?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주어 모으듯이 성경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나무를 우선 흔듭니다. 사과가 떨어지면 주워담고 그리고는 큰가지를 흔듭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는 사과는 작은 가지마다 사과를따냅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면 처음에는 창세기부텅 요한계시록 까지 계속읽는 것입니다. 통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연구의 가장 초기단계입니다.
● 성경통독 몇 번 하셨어요?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최소한 1년에 한번정도는 읽어야 지요. 성경과 늘 함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심방 가 보면 성경찾는데 시간이 걸리는 사람들-워낙 성경을 보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집사 이상 되신 분들 1년에 성경 꼭 한번이상 통독하세요. 이것이 성도의 기본입니다.
그 다음에는 책별로 장별로 공부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은 마라에서의 이야기, 출애굽기 20장은 십계명... 요한복음 2장은 가나혼인잔치의 기적과 성전정화사건 등 또 주제별, 단어별로 공부하기도 합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기적처럼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성경에 대하여 묻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잘 가르쳐서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인지 아니면 성경을 너무 읽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뜻인지..
아볼로는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자'라 했습니다. 열심히 배우고 연구했다는 뜻이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이 연구하고 아는대로 행하며 산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열심히 배웁시다. 특별히 성경에 대해서 많이 배우시고 말씀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생명수가 여러분 삶속에 흐르는 삶'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열려진 마음으로 말씀과 깊이 만나고 말씀을 사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체험으로 내게 와야 합니다. 그렇게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아볼로는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으나(25)
여기서 아볼로의 문제와 한계가 발견됩니다.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한 아볼로는 일찍부터 '주의 도'를 체계적으로 잘 배웠습니다. 몇가지 생각해 봅니다.
'열심으로'라는 헬라어를 직역하면 '영으로 뜨거워져서'라는 뜻이 있습니다.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열정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남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열정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아볼로는 뜨거운 사람, 열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에게 예수에 대해서 가르쳐본적 있나요? 누구에게 복음을 제시해 본 적 있나요? 예수 믿은 지가 몇 년 되셨습니까? 몇사람에게 예수에 대해 가르치고 예수 믿으라 권해 보셨나요? 이런 얘기 들으면 등에서 식은땀이 나십니까? 남에게 가르친다는 것 - 더구나 예수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은 생각처럼 쉬운일이 아니지요.
● 아볼로가 예수에 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긴 했는데 그런데 요한의 세례밖에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25절 성경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아볼로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배웠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알수는 없습니다. '예수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며 가르쳤는데 요한의 세례밖에 몰랏다' - 무슨 뜻입니까?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참 미묘한 성경귀절이라서 이 구절에 대한 해석도 분분합니다만 이런 정도로 정리합니다. 요한이 베푼 세례는 물세례였습니다. 물세례와 대칭되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성령세례. 아볼로는 열정적이었고 가슴이 뜨거운 사람이긴 했지만 성령세례는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장으로 가면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물었더니 대답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볼 때 아볼로가 '요한의 세례 - (물세례)-밖에 몰랐다'는 말씀은 성령세례 못 받았다는 해석이 맞는 것으로 봅니다.
●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아볼로가 성경에 능해서 구약의 메시야에 대해서도 알앗고 예수에 대하여도 알았다 했는데 문제는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시오 메시야이심에 대한 증거와 확신이 아볼로에게는 없었던 것으로 봅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 시인할 자가 없다 하지 않앗습니까?
다른 하나는 아볼로가 학문이 많고 성경에 능해 열심히 가르치기는 했습니다.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아서 남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지는 못했지요. 종교적 열정과 합리적 학문성 때문에 남에게는 가르칠 수 있었지만 자신은 경험치 못햇던 것으로 봅니다. 죄에 대해서 가르치면서도 자신에게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없습니다. 이론과 지식은 있지만 마음에 체험과 감격은 없는 반쪽짜리 믿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예수가 힘이요 능력이 되겠습니까? 아볼로는 학문도 높앗습니다. 성경도 잘 알았고 가르치기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없습니다.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볼로를 비난하는 것은 아니고 여기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대해서도 예수에 대해서도 알기는 많이 아는데 감동이 없습니까? 기쁨이 없습니까? 반쪽짜리 신앙입니다. 체험하셔야 합니다. 성령체험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야 기쁨이 옵니다. 그래야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체험신앙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머리만의 신앙이 아니라 머리와 가슴이 함께 뜨거운 감격으로 채워지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신앙이 내게 능력이 됩니다.
3. 아볼로는 대단히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26)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회당에 갔다가 아볼로가 예수에 대해 담대히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아볼로가 가르치기는 잘하는데 내용에 좀 부족한 것이 있엇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조용히 자기 집에 데려다가 자기들의 알고 체험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인품을 엿볼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볼로는 학문에 있어서나 성경에 있어서나 실력있는 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까 문제가 있엇습니다. 보통사람같으면 여럿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질문도 하면서 아볼로에게 있는 허점을 부각시키려 했을 것입니다. '대학자도 별 수 없구나' 성도 여러분. 실력있는 사람이 실수하면 마음이 어떻습니까? '별 수 없구나'한소리 하지요. 그 속에는 '나도 많이 안다는 자만심도 있을 수 있고' '대단한 사람도 실수도 하는데 나 같은 사람이 별 수 있겠어?'하는 자기 합리화의 마음도 잇을 수 있는데 하여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아볼로를 조용히 자기 집에 초청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배우고 체험했던 '주(主)의 도(道)' - 복음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아볼로가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대학자 아볼로가 서민들의 직업인 천막만드는 브리스길라와 아불라 부부에게 배운다는 것 - 쉬운 입니까? 그것도 학문과 성경에 능한 사람인데 말입니다. 상상이 안 되는 모습입니다. 이점이 바로 아볼로의 위대한 점 아니겠습니까? 남에게 배운다는 것 자체가 겸손입니다. 겸손한 태도가 없으면 결코 남에게 배울수가 없습니다. 아볼로는 가르치기도 잘 했지만 겸손하게 배울 줄도 알았습니다. 왜 아볼로를 위대하다 합니까? 가르치는 사람이 남에게 겸손하게 배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아요.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기본적인 심성이 참 중요한 것을 느낍니다. 잘못되고 어리석은 사람은 배울수록, 많이 알수록 더 어리석어 집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배울수록 더 지혜로와 집니다. 아볼로는 공부는 많이 해서 많이 알긴 했지만 체험이 없었어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배운 것은 많지 않았어도 체험이 있었어요. 아볼로는 바로 브리스길라 부부로부터 체험에서 나오는 생생한 증거를 통하여 참으로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제가 목사인 것을 알고는 가끔 성경에 대한 엉뚱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없는 사람, 성령받지 못한 사람이 성경 많이 알면 목사에게는 참 골치아픈 일입니다. 질문해도 자신이 신앙에 대해서 예수에 대해서 무엇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골탕먹이려는 의도를 가지고 꼭 이상한 질문만 합니다. "임신한 마리아가 마굿간에서 애 낳을 정도의 몸으로 어떻게 하루 종일 걸었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900살 넘게 살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 저도 "모릅니다" 하면 "목사가 그것도 모릅니까?" 그런 것을 안들 신앙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믿음없는 사람들은 꼭 이상한 것만 눈에 뜨이게 마련입니다. 믿음있는 사람은 성경볼 때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볼로에게 겸손함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세상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 나보다 못하게 보이는 사람을 만난다해도 한가지 이상은 꼭 배울 것이 있어요.
그래서 그 이후에 어찌되었지요. "27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 형제들이 저를 장려하며 제자들에게 편지하여 영접하라 하였더니 저가 가매 은혜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 28이는 성경으로써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며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어김일러라"
아볼로가 자신의 학문과 성경의 능함 위에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로부터 체험적 신앙을 배우자 은혜가 넘쳐나기 시작합니다. 가는곳마다 은혜를 끼치기 시작합니다. 변론에도 뛰어났기에 말씀과 은혜가 합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임을 증거합니다. 유대인들이 말로는 결코 아볼로를 당하지 못합니다.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아볼로의 학문적 지식과 성경에 능통함과 뛰어난 언변위에 체험적 신앙이 더해지자 엄청난 힘이 붙기 시작합니다.
정리하면서
아볼로는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학문도 많고, 성경에도 능하고 언변도 뛰어났습니다. 거기다가 인품도 좋아서 세상사람들이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는 서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도 겸손히 배울줄도 알앗습니다. 몇가지 교훈을 생각합니다.
1. 세상학문, 성경 - 기회있을때마다 열심히 배우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성경많이 읽고 많이 배우세요. 성경 제대로 깨닫고나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겸손하게 열심히 배워야 합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배워야 합니다.
2. 체험적 신앙이어야 합니다.
관념적 신앙도 따지기는 잘 하는데 생각해보면 맞는 얘기이기는 하는데 남에게 감동을 주지 못해요. 남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성령받아야 합니다. 성령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에 은혜가 힘이 붙습니다. 신앙생활이 피곤한 일이 아니라 내게 위로와 힘과 소망이 됩니다.
3. 궁극적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열심히 가르쳤습니까? "예수는 그리스도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하게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능하다는 것은 단순히 많이 안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삶속에서 적용하고 실천하여 한 단계 성숙해지는 은혜가 성도 여러분. 모두에게 있으시기 바랍니다.
쓰임 받은 아볼로
신성종 목사
오늘은 월평동산교회 설립 2주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쓰임받은 아볼로란 제목으로 우리 교회도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인간의 행복은 쓰임 받을 때입니다. 반대로 불행은 버림받을 때입니다. 쓰임 받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러나 세상에는 남을 이용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쓰임을 받느냐 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어디에 쓰임을 받아야 할지를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아볼로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
본문 26절에 보면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더 자세히 푼다는 말은 바로 성경의 짝을 찾아내서 바른 해석을 하였다는 뜻입니다. 바른 성경 해석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누가복음 24장 27절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성경을 해석하신 사건이 나옵니다.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 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 예언된 그 오실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부활하신다는 예언이 바로 주님 자신에 관한 것임을 해석해주었습니다. 이 때에 두 제자의 눈이 영적으로 밝아지고 마음이 뜨거워지고, 예수님께서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또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지만 도무지 그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빌립 집사가 묻습니다. 30절에 “읽는 것을 깨닫느뇨?” 그러자 간다게의 내시가 말합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이때에 빌립 집사가 이사야 53장이 바로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임을 자세히 해석하여 주었을 때에 내시가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물세례를 받고 중생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바른 성경 해석은 우리의 신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아볼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것은 성경을 바로 해석하여 깨닫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교에서 성경 해석학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아볼로를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아볼로가 에베소에 있었을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1. 먼저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고린도전서 3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에는 네 파벌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바울파, 둘째는 게바파, 셋째는 그리스도파, 넷째는 아볼로파였습니다. 이것은 자기들 마음대로 정해서 만든 파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볼로파가 있었다는 것은 아볼로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이 일로 인해서 얼마나 상처가 컸는지 모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고린도에 와 달라고 했지만 거절했고, 심지어 바울이 오라고 했는데도 고린도에 오는 것을 거절한 것으로 보아 분파에 대한 아볼로의 확고한 심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볼로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1) 24절 중반절에 보면 “이 사람은 학문이 많고”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학문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아볼로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별히 아볼로는 헬라권 문화 안에서 성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습니다. 물론 교회는 학문이 전부는 아닙니다만 그러나 학문이 없으면 큰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말에 능하고 지도력이 탁월했지만 교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바울보다 떨어지는 것은 학문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큰일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학문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당시에 알렉산드리아에는 많은 이민 온 유대인들, 디아스포라들이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이 세운 도시입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명한 박물관과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는 일, 그것을 LXX(셉투아진트)라고 부릅니다만 이 작업이 바로 여기서 진행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약성경에 인용된 구약의 구절들이 다 셉투아진트, 즉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래서 구약에서 인용되었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의 말씀과 약간 다른 것은 바로 번역의 차이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알렉산드리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숫자가 무려 백만명이 넘었다고 했는데 이들이 바로 초대 교회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또 신약성경도 가장 오래된 사본의 하나인 알렉산드리아 사본은 5세기경의 것입니다. 이처럼 이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기독교의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한 지역입니다. 성경 해석도 이 지역 사람들은 영적인 해석, 즉 알레고리칼 해석을 하기도 했습니다. 루터에 의하면 히브리서의 저자가 아볼로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처럼 아볼로는 사도급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2) 24절 하반절에는 “성경에 능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에 능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구약에 예언 되어진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을 인용하여 증거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변증적 설교였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학문을 한 사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공격에 아무런 이론적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였는데 이것을 아볼로가 해낸 것입니다. 아볼로는 웅변가였기 때문에 고전 3장 6절에 보면 당시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그 심은 씨앗에 물을 주어서 자라게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지금도 교회에는 물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전도사님들과 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교역자들이 바로 물을 주는 사람들입니다.
(3) 25절 상반절에는 “그가 일찍 주의 도를 배워”라고 했습니다.
과연 누가 아볼로에게 주의 도(당시 기독교를 그렇게 불렀습니다)를 가르쳤을까요? 성경학자들은 부모에게서 배웠거나 아니면 이름 모를 어떤 경건한 성도들을 통해서 배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아볼로는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도]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더구나 일찍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영아부의 교육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여러 달 전에 영아부 제1회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나이가 많아서 배우는 것은 금방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어려서 일찍 배우는 것은 일생동안 잊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육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우리말에는 세 살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4) 25절 중반절에는 아볼로에 대해서 “열심으로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라고 했습니다.
열심은 참으로 중요하고 필요합니다. 그러나 열심은 불과 같아서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좋으나 나쁜 일에 열심을 낼 때에는 아주 해가 됩니다. 바울의 경우가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처음에는 유대교에 열심이 있어서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고, 핍박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이슬람교와 유대교와 열심당원들입니다.
이 열심은 전염병과 같아서 사람들에게 빨리 전염됩니다. 따라서 참 열심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열심은 참으로 더럽습니다. 그런데 참 열심이 되려면 지식이 있는 열심이어야 합니다. 아볼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는 열심이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5) 26절 상번절에서는 아볼로에 대해서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열심은 바로 담대함으로 통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열심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하는데도 열심이 없고, 성경을 배우는데도 열심이 없고, 봉사하는데도 열심이 없고, 믿는데도 열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보기도 민망하고, 형식주의에 빠져가고 있어서 걱정이 많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차지도 덥지도 않은 상태여서 주님이 토해낼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 될까봐 두렵습니다.
(6) 끝으로 아볼로는 소명에 충실한 사람이었습니다.
27절 상반절에 보면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자 하니”라고 했는데 그 뜻은 그가 받은 소명에 충성하려고 아가야로 가려고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명감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은 물론이고, 장로님들과 권사님들도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결코 회사의 이사들처럼 뒤에서 잔소리나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심지어 직장에 다니는 분들도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소명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볼로에게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25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고 한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볼로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습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유명한 설교자가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레의 경우를 보아도 그런 경우는 많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어도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내가 세례 요한의 세례처럼 물세례만을 받았는가? 아니면 주님의 세례인 성령의 세례를 받았는가? 자신을 검토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한 직분자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세례에 관한 내용은 다음 주일에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본문의 말씀에 관해서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 아볼로가 하나님께 쓰임 받게 된 이유는?
26절에 보면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고 했습니다. 구약은 신약의 빛 속에서 해석해야 보다 분명해집니다.
구약을 구약 안에서만 해석하면 우리는 바리새파가 되기 쉽습니다. 구약이 뿌리라면 신약은 꽃이요 열매입니다. 구약 속에는 신약의 모든 진리가 다 그림자처럼 숨겨있습니다. 그것은 신약의 빛 속에서 환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는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이때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만났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에게는 물론 아볼로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들입니다.
(1) 먼저 우리는 이 만남에서 아볼로의 겸손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아볼로는 유명한 학자요 웅변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이름도 없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데려감을 당해서 배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볼로가 얼마나 겸손한 사람이었는가를 보여줍니다. 저도 솔직히 집사 정도의 사람에게 불려가서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진리 앞에서는 겸손하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가서 복음을 들었고, 마침내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첫째가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보석을 담는 보석상자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도 겸손할 때에는 하나님께 쓰임 받았지만 그러나 교만하여질 때에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의 겸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겸손하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복음을 들으면서 아볼로는 아가야로 가야 한다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들으면 누구든지 소명을 받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아볼로에게 추천장을 써주었고, 아볼로는 아가야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헬라는 나라를 두 지역으로 나누었는데 마게도냐와 아가야였습니다. 고린도는 아가야 지역의 수도였습니다. 이곳에 와서 선교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27절에 보면 “은혜로 말미암아 믿은 자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것은 28절에 나옵니다. 그의 성경지식을 통해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였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발견합니다. 교훈도 발견하고, 축복도 발견하고 위로도 발견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다른 많은 것을 발견해도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를 만나지 못하면 그 사람은 헛되이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3) 끝으로 27절의 아볼로는 마침내 “공중 앞에서 유력하게 유대인의 말을 이김일러라”는 말씀처럼 놀라운 변증적 효과를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독교는 능력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도 다른 어떤 종교보다 이론적 토대가 있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아볼로 같은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고 복음으로 무장을 할 때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해석을 바로 해야 합니다. 왜 이단이 나옵니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과 우리 사이에는 두 가지의 간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적 문화적 간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의 해석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영적 간격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식으로 해결이 안 됩니다. 오직 성령으로만이 해결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때에 우리의 편견이 없어져야 되고, 우리의 고정관념이 무너져서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해결됩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릴 때 마음문을 열어 성령의 역사를 훼방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역사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에 일어납니다. 이 쓰임 받음은 먼저 성경을 바로 해석해서 은혜가 될 때에 얼어납니다. 그러므로 아볼로에게 일어난 그런 역사가 오늘 이 자리에서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