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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제13장(第十三章) 도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으니,사람이 도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 한다면 도라 할 수 없다
子曰 道不遠人하니 人之爲道而遠人이면 不可以爲道니라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도(道)가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으니, 사람이 도(道)를 하면서 사람을 멀리 한다면 도(道)라 할 수 없다.
道者는 率性而已니 固衆人之所能知能行者也라 故로 常不遠於人하나니 若爲道者厭其卑近하여 以爲不足爲라하고 而反務爲高遠難行之事면 則非所以爲道矣라
도(道)는 성(性)을 따를 뿐이니, 진실로 중인(衆人)[일반인]들도 능히 알고 능히 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멀리 있지 않으니, 만일 도(道)를 행하는 자가 그 비근(卑近)함을 싫어하여 이는 족히 할 것이 못된다 하고, 도리어 고원(高遠)하여 행하기 어려운 일을 힘쓴다면 도(道)를 하는 것이 아니다.
詩云 伐柯伐柯여 其則不遠이라하니 執柯以伐柯하되 睨而視之하고 猶以爲遠하나니 故로 君子는 以人治人하다가 改而止니라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를 벰이여. 그 법이 멀리 있지 않다.’ 하였으니, 도끼자루를 잡고 도끼자루를 베면서도 비스듬히 보고 오히려 멀리 여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다스리다가 잘못을 고치면 그치는 것이다.
詩는 豳風伐柯之篇이라 柯는 斧柄이요 則은 法也라 睨는 邪視也 라 言 人執柯伐木以爲柯者는 彼柯長短之法이 在此柯耳라 然이나 猶有彼此之別이라 故로 伐者視之를 猶以爲遠也어니와 若以人治人은 則所以爲人之道 各在當人之身하여 初無彼此之別이라 故로 君子之治人也에 卽以其人之道로 還治其人之身이라가 其人能改어든 卽止不治하나니 蓋責之以其所能知能行이요 非欲其遠人以爲道也라 張子所謂以衆人望人則易從이 是也니라
시(詩)는 〈빈풍(豳風) 벌가편(伐柯篇)〉이다. 가(柯)는 도끼자루요, 칙(則)은 법이다. 예(睨)는 비스듬히 보는 것이다. 사람이 도끼자루를 잡고서 나무를 베어 도끼자루를 만드는 자는 저 도끼자루의 길게 만들고 짧게 만드는 법칙이 이 도끼자루에 달려 있다. 그러나 오히려 피차(彼此)의 구별이 있기 때문에 나무를 베는 자가 보기를 오히려 멀게 여긴다. <그러나> 사람의 도리로써 사람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사람이 된 소이(所以)의 도(道)가 각기 자신의 몸에 있어 애당초 피차(彼此)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군자(君子)가 사람을 다스림에 그 사람의 도리로써 다시 그 사람의 몸을 다스려서 그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즉시 그치고 다스리지 않으니, 그가 능히 알 수 있고 능히 행할 수 있는 바로써 책하고, 사람을 멀리하여 도(道)를 행하고자 함이 아니다. 장자(張子)[장재(張載)] 의 이른바 “중인(衆人)으로써 사람에게 기대하면 사람들이 따르기 쉽다.” 한 것이 바로 이 것이다.
忠恕違道不遠하니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이니라
충서(忠恕)는 도(道)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자기 몸에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않는 것을 나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다.
盡己之心爲忠이요 推己及人爲恕라 違는 去也니 如春秋傳齊師違穀七里之違라 言 自此至彼에 相去不遠이요 非背而去之之謂也라 道는 卽其不遠人者是也라 施諸己而不願을 亦勿施於人은 忠恕之事也라 以己之心으로 度(탁) 人之心에 未嘗不同하니 則道之不遠於人者를 可見이라 故로 己之所不欲을 則勿以施於人이니 亦不遠人以爲道之事라 張子所謂以愛己之心愛人則盡仁이 是也니라
자기의 마음을 다함을 충(忠)이라 하고, 자기 마음을 미루어 남에게 미침을 서(恕)라 한다. 위(違)는 거리이니, 《춘추전(春秋傳)》에 이른바 ‘제(齊)나라 군대가 곡(穀)땅에서 7리(里)쯤 떨어져 있다.’는 위(違)와 같으니, 여기로부터 저기에 이름에 상거(相去)[거리]가 멀지 않음을 말한 것이요, 위배하여 떠남을 말한 것이 아니다. 도(道)는 바로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이 이것이다. 자기 몸에 베풀어 보아 원하지 않는 것을 나 또한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은 충서(忠恕)의 일이다. 자기의 마음으로써 남의 마음을 헤아려 봄에 일찍이 똑같지 않음이 없으니, 그렇다면,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이니, 이 또한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도(道)를 하는 일이다. 장자(張子)의 이른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남을 사랑하면 인(仁)을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君子之道四에 丘未能一焉이로니 所求乎子로 以事父를 未能也하며 所求乎臣으로 以事君을 未能也하며 所求乎弟로 以事兄을 未能也하며 所求乎朋友로 先施之를 未能也로니 庸德之行하며 庸言之謹하여 有所不足이어든 不敢不勉하며 有餘어든 不敢盡하여 言顧行하며 行顧言이니 君子胡不慥慥爾리오
군자(君子)의 도(道)가 네 가지인데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니, 자식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부모(父母)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신하(臣下)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군주(君主)를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아우에게 바라는 것으로써 형을 섬김을 능히 하지 못하며, 붕우(朋友)에게 바라는 것을 내가 먼저 베풂을 능히 하지 못한다. 떳떳한 덕(德)을 행하며, 떳떳한 말을 삼가여, <행(行)에> 부족한 바가 있으면 감히 힘쓰지 않치 못하며, <언(言)이> 유여(有餘)하면 감히 다하지 못하여, 말은 행실을 돌아보며 행실은 말을 돌아 보아야 하니, 군자(君子)가 어찌 조조(慥慥)[독실함] 하지 않겠는가.”
求는 猶責也라 道不遠人하니 凡己之所以責人者는 皆道之所當然也라 故로 反之以自責而自修焉이라 庸은 平常也라 行者는 踐其實이요 謹者는 擇其可라 德不足而勉이면 則行益力이요 言有餘而訒이면 則謹益至니 謹之至則言顧行矣요 行之力則行顧言矣라 慥慥는 篤實貌니 言 君子之言行如此하니 豈不慥慥乎리오하니 贊美之也라 凡此皆不遠人以爲道之事니 張子所謂以責人之心責己則盡道가 是也니라
구(求)는 책(責)[바람]과 같다.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으니, 무릇 자기가 남에게 바라는 것은 모두 도(道)의 당연(當然)함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돌이켜 자책(自責)하여 스스로 닦는 것이다. 용(庸)은 평상(平常)함이다. 행(行)은 그 실행을 밟는 것이요, 근(謹)은 그 가(可)함을 택하는 것이다. 덕행(德行)은 부족(不足)한데 힘쓴다면 행(行)이 더욱 힘써질 것이요, 말은 유여(有餘)한데 참는다면 삼감이 더욱 지극할 것이니, 삼가기를 지극히 하면 말이 행(行)을 돌아보게 될 것이요, 행(行)을 힘쓰면 행(行)이 말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조조(慥慥)는 독실(篤實)한 모양이다. ‘군자(君子)의 언행(言行)이 이와 같으니, 어찌 조조(慥慥)하지 않겠는가.’라고 말씀했으니, 찬미(贊美)한 것이다. 이는 모두 사람을 멀리 하지 않고 도(道)를 하는 일이니, 장자(張子)가 이른바 ‘남에게 바라는 마음으로써 자기을 책하면 도(道)를 다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右는 第十三章이라 道不遠人者는 夫婦所能이요 丘未能一者는 聖人所不能이니 皆費也而其所以然者는 則至隱存焉하니 下章放此하니라
우(右)는 제13장(第十三章)이다. 도(道)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부부(夫婦)의 능한 바요, 나는 한 가지도 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성인(聖人)도 능하지 못한 것이니, 이는 모두 비(費)이며, 그 소이연(所以然)은 지극히 은미(隱微)함이 있는 것이다. 하장(下章)도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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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13장 1)
子曰:「道不遠人。人之爲道而遠人,不可以爲道。」
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
執柯以伐柯,睨而視之。猶以爲遠。
故君子以人治人,改而止。
자왈도불원인 인지위도이원인 불가이위도
시운 벌가벌가 기칙불원
집가이벌가 예이시지 유이위원
고군자이인치인 개이지
<직역>
스승 말했다(子曰)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遠人) 않는다(不) 사람(人)이(之) 도를 행(爲道)하고도(而) 사람을 멀리 하(遠人)면 도(道)라고 여기(以爲)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시경에 말했다(詩云) 도끼자루(柯)를 베네(伐) 도끼자루를 베네(伐柯) 그(其) 기준(則)은 멀리 있지 않네(不遠)
도끼자루를 잡(執柯)고서(以) 도끼자루를 자를(伐柯)때 자세히 보(睨)고(而) 그것을 본다(視之) 오히려(猶) 멀리 있다(遠)고 여긴다(以爲)
그러므로(故) 군자(君子)는 사람으로서(以人) 사람을 다스린다(治人) 고치면(改而) 그친다(止)
<번역>
공자 말했다. 도는 사람에게서 멀지 않다.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도 사람을 멀리한다면 그것을 도라고 말할 수 없다.
시경에서 말하기를 ‘도끼 자루 베네 도끼 자루 베네. 그 기준은 멀리 있지 않네’라고 했다.
도끼 자루를 잡고 도끼 자루에 쓸 나무를 벨 때는 잡고 있는 자루를 자세히 보고 비슷한 것을 자르면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본보기가 멀리 있다고 생각한다.
군자도 사람을 다스리는데 그 기준은 사람에게 있을 뿐이며 사람이 잘못을 고치면 그친다.
<해설>
시경 구절이 들어가는 바람에 쉬운 내용이 도로 어려워졌다. 도는 어떤 추상적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고 사람에게 있는 것이니 멀리서 찾지 말아라는 당부이다.
중용의 첫머리에 ‘도는 본성을 따르는 것(率性之謂道)’이라고 전제했다. 도는 하늘의 이치라기 보다 사람의 본성을 잘 알고 그 본성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원뜻에 가깝다. 세상의 모든 일들은 인간이 기준이며 그 인간의 여러 일 중에서도 본성과 본능을 거스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으로 파악하면 된다. 특히 군자는 그 인간의 본성을 잘 알아야 백성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논어 마지막 장에 공자는 “因民之所利而利之”(백성이 이익인 곳을 찾아 그것을 이롭게 하라 – 논어 20장 요왈)라고 한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에 따라 그들을 이롭게 해주면 천하가 불만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명인 본성을 따르는 것(솔성)이며 이 길이 바로 군자의 도(道)인 것이다. 그래서 군자의 모든 기준은 사람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다. 시경은 그 도의 기준이 어떤 엄청난 하늘의 이치가 아니라 늘 만나는 옆 사람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다. 도끼자루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러갔을 때 자기가 들고 있는 도끼 자루를 보고 비슷한 나무를 베면 되는 것이지 어디 멀리 물어볼 필요없는 것이다.
인용된 시는 시경 국풍의 빈풍에 나오는 벌가(伐柯)라는 민요다. 전체를 해석해보면
伐柯如何, 匪斧不克(도끼자루 베려면 어떻게 하나 도끼가 아니면 해낼 수 없네)
取妻如何, 匪媒不得(아내를 취하려면 어떻게 하나 중매쟁이 아니면 얻지 못하네)
伐柯伐柯, 其則不遠(도끼자루 베자. 도끼자루 베자. 그 기준은 멀리 있지 않네)
我覯之子, 籩豆有踐(내가 그 여인을 맞이하면 제기에 음식을 차리고 식을 올리지)
이렇다. 이 시는 이게 무슨 뜻인지 해석이 분분한 시이지만 장가가고 싶으면 멀리서 여자 찾지 말고 중매쟁이에게 부탁하는 것이 낫다는 약간은 어처구니가 없는 시다.
시경의 시가 논어나 중용에 인용될 때 무슨 엄청난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자체가 사실은 무리다. 비슷한 이야기가 시경에 있으면 맥락이 맞지 않음에도 인용하는 경우 매우 많으니 그 뜻을 알지 못해 괴로워 할 필요 없다.
<한자해석>
以爲(이위) : ~라 여기다, 간주하다, 생각하다
伐(칠 벌) : 치다, 베다, 자르다, 자랑하다
柯(자루 가) : 자루, 줄기, 가지, 도끼자루
睨(흘겨볼 예) : 흘겨보다, 자세히 보다, 엿보다
<영역>The Master said "The path is not far from man. When men try to pursue a course, which is far from the common indications of consciousness, this course cannot be considered The Path.
"In the Book of Poetry, it is said, 'In hewing an ax handle, in hewing an ax handle, the pattern is not far off. We grasp one ax handle to hew the other; and yet, if we look askance from the one to the other, we may consider them as apart. Therefore, the superior man governs men, according to their nature, with what is proper to them, and as soon as they change what is wrong, he stops.
忠恕違道不遠。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
충서위도불원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
<직역>
충성스러운 용서(忠恕)는 도와 어긋남(違道)이 멀지 않다(不遠) 자신(己)에게(諸) 행하(施)고는(而) 원하지 않은 것(不願)은 역시(亦) 사람에게(於人) 행하지(施) 말아라(勿)
<번역>
충심의 용서는 군자의 도 자체와 그리 다르지 않다. 자신이 하기 싫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해설>
인간의 본성을 따르는 것이 道이므로 도는 어떤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고 하고자 하는 것을 잘 따르는 것이 道일 뿐이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로서 道를 닦는 사람은 산중에 가서 닦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진심어린 용서로 도를 닦아야 하는 것이다. 군자는 자신이 하기 싫은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고 자신이 용서받고 싶은 것처럼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여야 한다. 미움이 있는데 어떻게 마음을 줄 수 있겠는가? 진실한 용서가 있어야 비로소 인(仁)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의 일관된 도는 충서라고 증자가 말하는 것이다.(夫子之道,忠恕而已矣 - 공자님의 도는 충성된 용서일 뿐이오 –논어 4장 이인편) 여기서 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이 합쳐진 글자다. 공감의 뜻이 우선이다. 상대와 공감하니 그의 잘잘못 모두가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래서 용서라는 뜻이 생기고 굳어지게 된 것이다. 논어나 중용에서의 엄밀한 恕의 번역은 ‘공감에서 오는 관대함’ 정도일 것이다.
세상의 대부분 논어나 중용 해설서들은 충서(忠恕)를 ‘충성’과 ‘용서’라고 말한다. 이것은 약간의 문제를 야기하는데 공자가 충서를 말하는 주위 맥락을 아무리 살펴봐도 충성과 용서로 사용하는 맥락은 없다. 그냥 심오한 공감이나 용서를 말할 뿐이다. 충서를 충성과 용서라 해석하는 사람들은 공자의 진심에 관심 없는 자들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목사나 성불에 관심 없는 중같은 해석이다. 다행히도 도올 김용옥 선생은 충서는 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恕를 말하는 것이라 정확히 지적(중용인간의 맛, p196)하고 있다. 恕에 ‘용서’의 의미를 너무 뺀 채로 사랑, 인류애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설명하고 있어 약간 아쉽지만 충서를 충성과 용서라 우기는 엉터리들에 비하면 정말 탁견이 아닐 수 없다. 충서(忠恕)가 충성과 용서가 아니라는 주장은 정약용이 먼저 제시한 적이 있다. '夫子之道 一恕字而已(공자의 도는 용서라는 한 글자일 뿐이다 - 정약용 논어고금주)'라고 말했다. 충서(忠恕)를 ‘충성과 용서’라 말하는 이유는 주자가 충과 서를 각각 해석하는 바람에 이를 무비판적으로 답습해서 생긴 문제에 불과하다.
<한자해석>
恕(용서할 서) : 용서하다, 어질다, 동정하다, 거의
施(베풀 시) : 베풀다, 행하다, 나타내다, 쓰다
諸(모든 제/어조사 저) : 제/모든, 여러, 간수하다 저/~는, 이, 이에, 그야말로, ~에, 之於,之乎의 합자(~의 그것)
<영역>
When one cultivates to the utmost the principles of his nature, and exercises them on the principle of reciprocity, he is not far from the path. What you do not like when done to yourself, do not do to 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