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컥, 가슴 저 끝에서 / 허정진
갑자기 머리가 쭈뼛해지고, 목이 잠기고, 말문이 턱 막힌다. 된서리라도 맞은 듯 몸은 경직되고 가슴은 울렁거린다. 눈뿌리가 시큰하면서 숨어있던 눈물이 불쑥 터져 나올지도 모른다. 딸꾹질하듯 횡격막을 떨며 수리성 쉰 소리가 꺾여지기도 하고, 급기야 콧구멍을 벌렁거리며 느닷없는 불기운이 들락거리기도 한다. 오관의 감각기능이 날것 그대로 일시에 달아올라 몸 밖으로 터져 나오는 순간이다.
미농지처럼 얇고 순정한 꽃잎이 명치 끝에 걸린 아린 통증을 뱉어낸 것이 ‘울컥’이다. 목울대에 속울음이 걸린 것처럼 마음의 한계점, 감정의 임계치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일시 멈춤이다. 아주 오래전에 몰래 삼킨 들숨, 깊게 삭혀있던 마음의 뼛심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숨비소리다. 덧칠한 검정 크레파스를 한 움큼씩 긁어낸 그라타주같이 밑바닥에서 맨발로 걸어 나온 별빛이다.
울컥은 머리 밖에서 수치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용광로 같은 심장에서 온갖 감정이 녹아내려 분출한다. 머리와 가슴이 합체된 두흉부(頭胸部)의 절지동물이기라도 한 것처럼 찰나에, 일촉즉발에, 말릴 틈도 없이 반응하는 불수의근이다. 신체 각부의 기능을 통솔하고 자극하는 뇌와 척수의 중추 신경계도 울컥 앞에서는 무효가 된다.
울컥, 벌컥, 덜컥 같은 단어들에는 묘한 긴장감이 돌고 스톱모션 같은 정지감이 느껴진다. 악장과 악장이 넘어가는 경계, 보이지 않는 지휘자의 동작에 무언의 암시를 띄며 숨죽여 집중하게 되는 틈새이다. 밑도 끝도 없이 쓰이는 부사지만 부연 상황이 더 이상 붙을 여지가 없이 짧고 강렬하게 나타나는 몸이 내뱉는 말이다. 동심원으로 다가오는 삶의 파동이며 가슴 언저리 감정의 결정체다.
마주 잡은 손에, 더운밥 한 그릇에 울컥한다. 남들은 모두 외면하고 있는데 불쑥 나서서 내 편이 되어줄 때, 불감청(不敢請)의 목마른 심정을 고소원(固所願) 하듯 선뜻 다가와 넓은 어깨를 빌려주었을 때 가슴이 불같이 뜨거워진다. 타끈하게 살아도 모자라기만 한 세상에 자기의 편리와 이득은 버리고 누군가를 위해 선한 의기와 희생을 보면 순간 숨죽이고 있던 촉촉한 감동이 밀려온다.
그뿐인가. 슬픔에 복받치거나, 더 이상 아픔을 억누를 수 없을 때도 울컥한다. 이별을 통보받았던, 혼자여서가 아니라 하나가 되지 못해 외로웠던 어느 겨울의 뒷골목이 얼마나 허전하고 쓸쓸했던가. 삶이 고단하고 팍팍해서, 마음 한 곳 의지할 데 없어서, 막노동하면서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낯선 모습을 보고 한 덩어리의 침묵이 가슴을 옥죄어 온다. 화장로에 들어가기 전에 염을 하는 마지막 아버지 모습을 보고 부정(父情)과 인연, 별리, 부재, 상실, 허망 같은 온갖 단어가 비문증처럼 눈앞을 떠다니며 목젖을 자극한다.
마음에 상처를 입고도 울컥한다. 가슴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설움인지 분노인지, 자존과 자긍을 건드리는 쓰라린 통증이 밀려올 때 또 마음이 뒤틀린다. 부지불식간에 차별이나 경계가 느껴지면 억울하다는 생각에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분노한다. 절대적인 선언처럼 한 자 한 자 끊어서 확고부동하게 거절하는 그 냉정함에 서럽고 서운해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뒤돌아서기도 한다. 상실감과 무력감, 대접받지 못하고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은 그 섭섭함에 나이가 들수록 울컥하는 빈도가 늘어난다.
연암 박지원은 요동 벌판을 보고 인간의 칠정(七情)으로 억눌린 마음을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데는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요동 벌판으로 갈 수도 없고 군중 속 주위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 울컥하고 마음의 소리를 토르소 석고상처럼 발가벗겨 몸으로 드러내고 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꽃으로 핀다는 시인의 말처럼 벼랑 앞에 선 감정의 끝단에 나타나는, 한 바가지 속울음을 예고하는 천둥번개 같은 휘몰이가 그것이다.
울끈불끈하는 그 마음이 문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붙들어 매지도 움켜쥐지도 못하는 마음은 주위에 설렁대며 지나가는 바람에도 시시때때로 반응한다. 기쁨에 겨워 희열에 들떠있다가도 순간의 감정으로 슬픔에 빠져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게, 바위처럼 단단하게 사는 것이 들차고 실속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정을 가진 인간이 로봇처럼 모두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희로애락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직관적이고, 우수(憂愁)적이고, 인본적이고, 관념적인 본능대로 무자기(毋自欺)로 사는 것도 내다 버릴 수 없는 또 자기만의 정체성이다.
아웅다웅하고 미워하고 갈등하면서도 한통속으로 굴러가는 것이 세상이다. 인간관계가 한 사람의 노력과 욕심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닌 이상 더없이 좋다가도 한순간에 돌아서서 실망과 미움으로 피폐해지기도 한다. 삶을 평상심으로, 흔들림 없이 조화와 균형을 갖추고 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닌 탓이다. 인간은 원래 나약하고 불안정한 존재이므로 순간마다 일희일비하면서 천둥벌거숭이로 사는 게 당연한지도 모른다.
아직도 울컥한다.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울컥 앞에서는 무방비 상태가 된다. 천성이 여리고 소심해서 남 의식을 많이 하는 탓도 있겠지만 이성적인 논리나 의지력보다는 감성적이고 충동적인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성향 때문이다. 사는 것이 그러려니 하며 애써 눈길을 돌리고, 세상일에 무관심한 척 외면하려 해도 심장이 먼저 달려가 반응을 보이는 일에 어쩔 수가 없다. 몸은 둔해져 가지만 감정은 더 예민해지는 것이 나이인 것 같다.
돌이켜보면 살아오면서 나로 인해 상대방이 울컥했던 일이 없었는지 한편 염려가 된다. 온정과 배려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나 마음 한구석에 씻지 못할 상처가 되었다면 그보다 큰 과오도 없는 일이다. 사람이 감정 없이 살 수는 없다. 슬프거나 아프다는 명분보다는 선하고 아름다운 사연으로 감동을 주고받는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런 일에 노인네가 울컥거린다고 창피할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