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운문록 실중어요(室中語要) 50. 한 곳에 통(通)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힘을 잃고
[운문선사가 한 때 법을 보이셨다.
"한 곳에 통(通)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힘을 잃고, 두 곳에서 통(通)하지 못하면 부딪치는 길마다 막히리라" 한 옛사람의 말씀을 들려주고는 주장자를 잡아 세우면서 말씀하셨다.]
오늘에 거하신 향상일구(向上一句)은 누구라는 말씀하신분을 밝히지 않고 거론하였습니다.
“한 곳에 통(通)하지 못하면 두 곳에서 힘을 잃고”라는 것은 한 곳에 통하지 못하면이라고 한 한곳은 지금 여기를 말씀한 것이고 있는 그대로에 통하지 못하면 양변이 다 힘을 잃는다는 것은
인연법(因緣法)에서 석존께서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이 없다”라는 말씀과 같이 모든 법은 상대성이며 대대법(對對法)인 것이듯이 양변을 함께 들어야만 말과 글과 행위가 되며 이 양변을 다 드는 것이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되듯이 똑같은 말입니다. 마음에서 본다면 마음의 체인 무심(無心)과 마음의 작용인 유심(有心)을 함께 들어야만 말이 되는 것과 같은 도리를 예시한 것입니다. 양변(兩邊)이란 깨달음과 무명(無明)이 양변이요 높고 낮음, 크다 적다, 있다 없다, 이것과 저것, 정과 동, 등 모든 것은 다 상대성의 양쪽으로 나누어진 차별상과 분별망상이 다 유위법(有爲法)이지만 무위법(無爲法) 떠나 유위법이 없고 유위법을 떠난 무위법이 없는 것처럼 이 양변을 벗어나면 즉 본래공이요 무일물(無一物)인 경지에서는 이 모든 법이 다 사라지는 중도정견(中道正見)인 중도실상론(中道實相論)이 불교인 것입니다.
이 중도 실상론이 바른 일승법문(一乘法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승법문이다, 이승법문이다, 삼승법문이라는 법문도 나눌 수 밖에 없는데 삼승법문에 습연된 안목으로는 이승법문을 모르고 이승법문에 훈습된 납승은 일승법문을 모릅니다.
이 모르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인 것처럼 선지식들이 설하는 일승법문은 본래공(本來空)을 깨닫는 것이요 본래 무일물(無一物)을 알아차리면 깨달았다고 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만 사실 중도실상(中道實相)에서 본다면 무명도 없고 깨달음도 없는 우주라는 일진법계(一眞法界)에서 본다면 모든 법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뿐인 것입니다. 돌~~!!!!!!!!!!!!
일승법문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설파하신 법정 대우거사라는 분의 일승법문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일승법문 (一乘法門) 현정선원 대우거사는 이미 열반을 하셨지만 그 제자들은 지금도 일승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1. 불생불멸(不生不滅) 불래불거(不來不去)는 불교의 근본이다
불교는 스스로의 마음(自性)을 밝혀서 참 성품(眞性)을 공부하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모든 법은 마음에서 나왔으며 ‘오직 마음뿐’인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입니다. 그 마음은 여여(如如)해서 항시 고요히 비출(寂照) 뿐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바다의 파도처럼 고뇌의 연속입니다. 마치 저 바다가 종일 파도가 치는 것처럼.... 그러나 바다(물)의 겉모습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같지만 오고 가는 일이 없는 불래불거(不來不去)이며 본체인 바다는 늘고 주는 일이 없음으로 부증불감(不增不減)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하나의 참된 성품바다인 일진성해(一眞性海)’라 부릅니다.
우리의 마음도 인연 따라 수많은 번뇌의 파도를 치지만 그 본체는 전혀 변함이 없이 신령스런 빛인 신광(神光)을 발할 뿐입니다.
바다는 만파로 물결치지만 성품과 모습은 고요함과 움직임이 둘이 아닌 상태로 유지하면서 생겨나고 없어지거나하는 생멸(生滅)은 늘거나 주는 증감(增減)이 없이 ‘항상 머물러 상주(常住)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 역시 수많은 인연이 얽히고 설키면서 생멸을 연출하면서 파도치고 있지만 이 세계의 실상(實相)은 바람이 일어 파도가 치거나 말거나 변하지 않고 진실되어 생멸하지 않으므로 파도라는이 세상의 변천하는 모습은 다만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일체 만 가지 존재가 생겨나는 일도 없고 사라지는 일도 없으며 오고가는 법이 없는 불생불멸 부래불거(不生不滅 不來不去)인 진리 즉, 무생법인(無生法忍)을 깨닫는 순간 인간이 진실의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지를 불가(佛家)에서는 십지보살 품의 제팔부동지(不動地)인 전혀 움직이는 일이 없음. 혹은 동진지(童眞地)라하여 어린이가 처음 진실상(眞實相)을 깨닫는 것 즉, 참된 지혜가 열리는 순간이라 합니다
천재 물리학자 코페르니쿠스는 300년 전 ‘하늘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지동설을 발표했을 때 아무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지금은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2500년 전 ‘모든 존재가 존재인 채로 존재가 아니고, 모든 움직임이 움직임인 채로 움직임이 아니다’는 진리 즉, 모든 실상은 생사가 없고 오고감이 없으며 허깨비요 물거품이며 산골짜기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날도 믿으려 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가요?
2.본래 무명(無明)도 부처도 없음을 알면 이것이 곧 불과(佛果)이다.
‘일체 만유(萬有)인 만 가지의 존재가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겨날 뿐이며 그 자체로는 고유의 성품이 없다’는 것이 연기설의 근본이다. 어떤 물건이 성품이 없다면 그 물건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 같은 것들과 어울려 한 물건이 생긴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불생불멸의 이치로 우리들은 인과(因果)가 아닌 것을 인과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자기의 몸과 마음이 <지금 있는 그대로>가 온전한 불과와 같아서 조작하고 닦고 할 것이 없는 온전한 부처인 것을 알면 바로 그 몸에 부처의 종자를 심어 두는, 즉 초발심시 변정각(初發心時 邊正覺)가 처음 발심할 때 바로 깨달음인 것이다.
3. 무명과 부처가 본래 없음을 알면 깨달은 사람이다.
죽고 사는 문제(生死問題)는 인류 역사이래 줄곧 다루어 왔다.
특히 적자생존(適者生存; 적응하는 자만이 생존하는 것)의 현실에서 생사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할 문제인데 이 문제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세상이 온다면 매우 평화롭고 자유스러운 세상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생멸이 없고 가고 옴이 없는 이치>를 깨달아서 생성과 소멸의 순환의 고리(因緣)가 끊어지고, 인과법의 전후관계도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내서, 시간의 흐름도 없고 공간적 차별도 소멸한 세계가 나타난다면 그 사람은 차별적인 현상계속에서 아무런 갈등과 충돌도 없이 무애자재(無碍自在)한 아무 것에도 걸림이 없음을 안 삶을 살수 있는 일승법계의 깨달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생도 현재 모두 그와 같은 세계(열반의 세계)를 살고 있으면서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놀랄 일이 아닐 수 없다.
즉 범부(凡夫)들은 생멸도 생사도 없는 시작도 끝도 없는 고요하고 청정한 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중생의 업식(業識) 그동안 지어온 업장 때문에 업의 그림자인 업영(業影)를 실다운 존재인줄 착각하고 집착하여 모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꿈에서 깨기만 한다면 무명이 본래 없고 중생도 부처도 모두 없다는 것이 바로 발심한 것으로 무명을 깨친 부처, 보리가 되어 편안한 잠자리인 열반(涅槃)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일승(一乘)의 도리는 결코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로는 알 수가 없다
중생이란 어지러운 번뇌의 세상에 휘말려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고, 번뇌를 벗어나 저 언덕(彼岸)에 도달하는 것을 삼승삼승(三乘) 즉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이라 한다. 그러나 일승보살은 일체만유가 모두 허망하여 실다운 존재가 없어 가없이 광대한 이지(理智)의 바다에 노닐면서 참과 허망이 하나의 참으로 돌아갔으니 어찌 허망을 버리고 참을 구하고 속(俗)을 벌고 진(眞)을 취하는 양변(兩邊)을 지향하겠는가?
그러므로 일승 보살은 물결이 바로 물이듯이 속이 바로 진이므로 <짓되 지음이 없는 참된 도>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진만을 쫓거나 절학무위(絶學無爲)인 배움이 없고 함이 없음을 옳다고 여기면 닦는 자나 닦지 않는 자나 모두 진리를 등지는 것이니 어느 세월에 고향에 돌아갈 수 있겠는가?
사성제(四聖言+帝; 苦集滅道)를 닦는데 있어서도 -
고(苦)를 보는데 있어서도 고가 그대로 도(道)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항시 이것을 싫어하여 멀리할 것을 생각하며,
집(集)을, 즉 번뇌를 끊는데 있어서도 번뇌가 본래 난 일이 없다는 것인 무생(無生)을 알지 못하고 , 항시 그것이 일어 날까봐 두려워하며, 멸(滅), 즉 열반을 증득하는 데 있어서도, 오직 치우치게 함이 없음에만 머물려고 집착하면서 함이 없음인 무위(無爲) 그대로 함이 있음인 유위(有爲)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도(道)를 닦는데 있어서도, 오직 구원만을 논하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곧 그대로 불과를 얻는 유일한 길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일승 보살은 자기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법계 허공계에 가득하여 항상 사물에 감응하되 왕래와 중간이 있으므로 누진통(漏盡通)인 번뇌가 다한 신통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범부들은 세간법(世間法; 세상법)을 행하고 삼승은 출세간법(出世間法)을 행하지만, 일승보살은 세간도 출세간도 아니니, 곧 세간을 떠나면서 모든 차별 법을 자재하게 굴리되 전혀 걸리는 일도 없고 물 드는 일도 없다. 세간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인 사의법(思議法)으로 소득이 있음인 유소득(有所得)이므로 삼승의 법이나, 일승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인 부사의(不思議)이니 무소득이며 고요와 걸림이 없어 대자재(大自在)한 것이다.
오직 오래도록 무심(無心) 무념(無念)의 생각 없는 경지에 있으면서 마침내 고(苦)를 싫어하지 않게 된 자와, 고요함에 머무르지 않는 자와, 지금 이대로 이 세상이 곧 항구불변하는 해탈 열반의 청정한 불국토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만이 이 일승의 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5. 닦는 자도 닦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이 그대로 '부처'여서, '마음' 밖엔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완벽히 체달한 보살이라 해도 저 바깥에는 여전히 유정(有情) 무정(無情)의 온갖 잡다한 것들이 마구 우쭐우쭐 하면서 여전히 '내 마음'을 붙잡고 말끔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수행자들은 이 쫓아도 쫓아도 사라지지 않는 '경계'를 말끔히 털어 버리기 위해서 더욱더 '공(空)한 도리'에 매달리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공해탈'(空解脫)을 추구하는 권교보살(權敎菩薩)이고, 또 서방정토(西方淨土)를 바라는 이른바 정토보살(淨土菩薩)인 것이다.
그러나 일승보살(一乘菩薩)은 결코 <마음 밖에 한 법도 없는 경지>를 증득(證得)하는 일은 없다. 마음 밖에 법이 있건 없건, 또한 그것에 홀리건 홀리지 않건 간에, 그 모두가 오직 참된 '한 마음'에 의해서 운용(運用)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꿰뚫어 본 것이다.
따라서 모든 법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평등하고, 어느 것 하나도 '불법'(佛法) 아닌 게 없는 것이다. 즉, 어지럽기 그지없는 지금 있는 그대로의 이 세상이 바로 '정토'요, 「저의 국토는 안연(晏然) 즉 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수행자가 충국사(忠國師)에게 물었다.
『 경에 이르기를, 「온갖 법이 모두 '불법'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살생'(殺生)도 '불법'입니까?』하니, 국사가 대답했다.
『 온갖 하는 일은 이 모두가 '부처 지혜'의 작용이니라. 마치 사람이 불을 태울 때, 불이 향기로움과 나쁜 냄새를 가리지 않는 것과 같고, 또한 물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가리지 않는 것과 같이 이 모두가 '부처 지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수행자가 '마음' 밖에서 법을 취하여 분별을 내면서, 항상 '훌륭한 일', '선한 일'만을 옳은 것으로 삼고 이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곧 세간법일지언정 결코 '마지막'(究竟)은 아닌 것이다.
'일승법문'(一乘法門)은, 먼저는 홀렸다가 즉 유류(有漏)였다가 뒤에 가서는 홀리지 않게 되는 무류(無漏), 그런 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개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첫째로, 범부는 늘 바깥 경계에 홀려서 헤어나지 못하고,
둘째로, 이승(二乘)은 저 바깥의 모든 경계가 그림자처럼 허망한 것인 줄 깨달아서 철저히 이것을 쓸어내고,
셋째로, 보살(菩薩)은 '빈 것'도 또한 '빈 것'이 아니라고 하나,
부처 지혜의 경지에 이르면, 대경(對境)이 있건 없건, 또 그것에 '홀리건' '홀리지 않건' 이 모두가 오직 '마음의 광명'일 뿐인 줄 분명히 알아서, 마치 태양이 한낮(中天)이 되자 뭇 별이 그 모습을 감추듯 도무지 말이나 생각으로 헤아리고 더듬고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설하였듯이 우리 주위에는 선지식이 있지만 그 사람의 안목이 밝지 못하니 성인인지 범부인지를 밝혀 내지 못할 뿐인 것입니다. 즉 스스로 자기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똥인지 된장인지 그 성품을 밝혀 내지 못한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돌~~~!!!!!
{한 옛사람의 말씀을 들려주고는 주장자를 잡아 세우면서 말씀하셨다.“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대중을 향하여 묻고 계십니다.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모든 부처님이 다 이 주장자 끝에 있는데 무슨 막힘이나 걸림이 있으랴.]라고 하시어 여기서 모든 것은 마음이 그려내는 형상이니 이 형상이라는 산하대지와 모든 부처님이 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임을 안다면 그 모든 법이 마음이요 마음이 법이며 마음이 부처인 것이니, 이것은 직설적으로 모두가 다 마음이 그려낸 공화라고하시면 될 것을 대중들이 스스로 그답을 찾게하기 위하여 선기방편을 베푸는 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같이 주장자 끝에 있든데 라고 힌트를 주시면서 무슨 막힘이나 걸림이 없다는 것은 마음의 작용을 무애자재하여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다는 것을 밝혀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다시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지금 이렇게 밝은데 어둠은 어디로 갔겠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이말씀은 밝음과 어둠이라는 양변을 들어 양변을 벗어난 “지금 이렇게 밝은데”라고 하신 것은 지금 여기인 시공을 벗어나서 그냥 이렇게 밝은데 이 밝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태양의 빛이 화현되어 비추일 때는 어둠이라는 상대법이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둠이 바탕이 깔려 있지 않다면 밝음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 없다. 빛의 화현만 드러나 계속이어지면 밝음자체도 모른다. 오직 어둠이라는 상대법이 함께 있어야만 빛도 드러난다. 카메라로 햇빛을 바로 찍어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듯이 그 밝음도 어둠이라는 바탕이 까려 함께 있으니 밝다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쌍차쌍조(雙遮雙照) 차조동시(遮照同時)라고 하는 것처럼 양변을 함께 함으로 그 형상에 억매이지 않고 밝든 밝지않든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를 밝힌다면 빛의 그림자의 성품을 볼수 있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양변을 벗어난 중도 실상을 밝혀 내는 것이 바른 깨달음임으로 이렇게 자기 마음을 스스로 밝혀 정각(正覺)을 이루어 라고 이렇게 말후구를 날립니다.
[이 밝음 그대로가 어둠인데 일체 중생(衆生)은 색공명암(色空明暗)에 막히어 거기서 생멸(生滅)하는 법(法)이 있다고 보게 된다."]라고 일괄하십니다.
지금 여기서 이 밝음이라는 그대로가 어둠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밝음이라는 빛의 그림자도 어둠이라는 것과 함께 있어니 드러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십지품에서 제 팔지인 부동지(不動地)인 모든 법은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 뿐 여기에 밝다 어둡다 하는 양변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색공명암(色空明暗)이라는 색이다 공이다 밝다 어둡다라는 차별상에 현혹되지 않아 항상 있는 그대로 일 뿐임을 밝혀 주고 계십니다. 알겠습니까?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조사선(祖師禪) 운문록(雲門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일승법문을 시절인연삼아 인연성불 하옵시고 대원성취 하옵소서 !
원오선원 명상쉼터 천안시 두정동 611_1번지 5층(041)551 854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운문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