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튼의 전설 딕시 딘(Dixie Dean)
Ted Jones
Thu, Jan 11, 07 06:30
<사진 : 득점의 천재였던 딕시 딘>
한 시즌에 60골, 그리고 통산 500골을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급은 8파운드에 불과했습니다. 이제 얼마 후 그의 탄생 100주년이 다가옵니다. 이 에버튼의 전설이자 잉글랜드 대표팀의 센터 포워드를 잊지 마십시오.
어린시절, 우리는 우리가 언제 엉클 톰(Uncle Tom)을 방문할지 항상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찬장 서랍에 보관되어 있던 파랑 & 흰색의 스트라이프 넥타이를 꺼내서 나와 형에게 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엉클 톰이란 리버풀의 지지자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에버튼을 지지했습니다. 사실 우리집은 에버튼을 주제로 한 박물관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넥타이들 이외에도 직접 감청색과 흰색으로 짜여진 보온병 커버를 직접 짜기도 하셨습니다.
우리집의 찬장은 사실 매우 컸기 때문에, 어린나이에 혼자서 그걸 열었다 닫았다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찬장에는 블루 앤 화이트 리본으로 된 꽃줄 장식이 있었고, 색바랜 화이트 앤 블루 장미꽃 장식이 그 옆에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가장 귀중했던 경험은, 우리 삼촌인 버트(Bert)와 함께 1933년 웸블리 구장으로 구경을 가 에버튼의 FA컵 우승장면을 지켜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 당시 에버튼팀의 스타는 윌리엄 랄프 딘(William Ralph Dean)이라는 센터 포워드 였습니다.(그들은 그 당시에 지금처럼 스트라이커라고 불리지 않았습니다)
만약 에버튼팀이 우리에게 종교라고 한다면, 윌리엄 랄프 '딕시 딘'('Dixie' Dean)은 우리에게 영적 지도자나 마찬가지인 존재였습니다. 비록 당시는 경기장에 가기에 내 나이가 너무 어렸지만,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스코어를 마음속 깊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에버튼 3, 맨체스터 시티0. 득점자는 스테인(Stein), 딘(Dean), 그리고 던(Dunn)이었습니다.
딕시는 득점의 귀재였습니다. 그의 포지셔닝과 공중공격 능력, 그리고 배짱에 비해서 드리블 기술은 그리 좋지 못한 편이었습니다. (그가 터뜨린 골의 절반은 헤딩슛이었습니다)
1927~1928시즌 딕시의 활약은 매우 훌륭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1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어느 누구보다 많은 골을 기록했고, 에버튼의 리그 우승은 매우 유력해 보였습니다.
시즌 3경기가 남은 상태에서, 많은 팬들은 딘이 미들스부르의 조지 캠슬(George Camsell)이 가지고 있던 한시즌 59골이라는 대기록에 근접할 것이라고 믿었고, 또 그 기록을 깨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3경기가 남은 상태에서 딕시가 넣은 골은 '단' 51골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음 두 경기에서 6골을 터뜨렸습니다. 아스톤빌라에게 2골, 그리고 번리(Burnley)에게 4골을 몰아친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가 기록을 경신하려면 시즌 마지막 경기인 아스날전에서 해트트릭을 달성해야만 했습니다.
1928년 5월 5일, 서포터들은 구디슨 파크(Goodison Park)를 가득 메웠습니다. 이미 에버튼은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상태였지만, 팬들은 역사를 쓰는 딕시의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딕시는 전반 5분만에 첫골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전반전이 중간쯤 지나갈 때, 에버튼은 페널티킥을 얻었습니다. 그 페널티킥을 누가 찰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아는 것이었습니다.
경기 종료 8분이 남은 상황에서 경기의 스코어는 2-2였습니다. 60000명의 사람들은 마치 딕시가 새로운 기록을 달성하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초조하게 시계를 쳐다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왼쪽 윙어인 알렉 트룹(Alec Troup)이 딕시를 향해 크로스를 날렸습니다. 그리고 딕시는 수비수들 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뛰어오른 그가 바닥에 착지했을 때, 공은 이미 네트 안에 있었습니다. 축구의 역사가 새롭게 쓰여진 순간이었습니다. 구디슨 파크에 모인 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 때문에, 마치 아스날은 동점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 조차 하지 못하는듯 보였습니다.
그는 그 해 39경기에서 60골을 넣었고, 게다가 친선대회와 컵 대회를 포함한 국제대회에서도 40골을 넣었습니다. 놀랍게도 한 시즌에 넣은 골이 도합 100골 입니다. 요즘은 유러피언대회를 포함해서 더 많은 경기들이 있지만 아마도 이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딕시 딘은 은퇴후 체스터(Chester)에서 펍(pub)을 열기 전까지, 선수생활을 하면서 37번의 해트트릭을 포함해서 거의 500골을 넣었습니다. 그의 펍인 더블린 패킷(Dublin Packet)은 올드 팬들을 위한 '성지(Mecca)'가 되었습니다. 내 삼촌인 버트 또한 여러차례 '성지순례'를 한 많은 사람중의 한명이었습니다.
은퇴 후 오랜시간이 지나, 딘은 1980년에 세상을 떴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수많은 군중들은 리버풀의 거리에서 그에게 묵념을 했습니다. 리버풀의 감독이었던 빌 샹클리(Bill Shankly)는 죽은 딕시가 오늘날 살아있는 에버튼 보다도 더 많은 관중들을 끌어모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유로2000을 기념해서 발간한 우표 시리즈 중에, 19번째 우표는 'Dixie Dean, 1907-1980' 이라는 설명문과 함께, 딕시의 전형적인 헤딩슛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가 축구계의 전설로 인정받기 까지는 사실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8세의 나이로 3000파운드를 받고 트레메어 로버스(Tranmere Rovers)에서 에버튼으로 이적한 그는, 선수경력 중에 받은 가장 많은 주급이 고작 8파운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월 22일에, 세계 축구계는 딕시의 탄생 100주년을 축하 할 것입니다. 나와 내 아들, 그리고 손자 모두, 에버튼 팬들은 푸른 셔츠를 입을 것입니다.
첫댓글 일년동안 백골.......
13년간 에버튼에서만 355경기에 308골을 터뜨리셨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