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명의 일탄
원제 : The Fastest Gun Alive
1956년 미국영화
감독 : 러셀 라운즈
각본 : 프랭크 D 길로이, 러셀 라운즈
음악 : 앙드레 프레빈
출연 : 글렌 포드, 진 크레인, 브로데릭 크로포드
러스 탬블린, 리프 에릭슨, 앨린 조슬린
리스 윌리암스, 버지니아 그렉
우리가 '재미난 서부극'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영화들에서 흔히 나오는 장면이 주인공과 악당의 1 : 1 속사대결입니다. 서로 권총을 차고 마주보고 서서 동시에 총을 뽑고 둘 중 한 사람은 죽는 것, 더 손이 빠른 사람이 이기는 대결입니다. 이런게 서부극의 묘미였고, 이 대결이 끝나면 영화도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고스트타운의 결투' 건힐의 결투' '베라크루즈' '셰인' 등의 영화가 그랬고, 심지어 마카로니 웨스턴에서는 1 : 1 대결이 아닌 혼자서 여럿을 해치우는 지나친 과장도 나왔습니다.
1956년 글렌 포드가 주연한 '숙명의 일탄'은 바로 이 1 : 1 속사대결에 대한 풍자와 비판이 주제가 된 작품입니다. 단순하게 영화의 재미와 멋을 위해서 영화에서 활용되었을 뿐, 실제 서부시대에는 사실 거의 없었을 듯한 1 : 1 권총 속사대결에 대해서 거의 '집중해부'한 영화라고 볼 수 있지요.
영화가 시작되면 비니 해롤드(브로데릭 크로포드) 라는 악당이 어느 마을에 찾아와 다짜고짜 한 사람을 불러냅니다. 일면식도 없고 아무런 원한도 없는 사람에게 단지 누가 빠른지 증명해 보자고 1 : 1 속사권총대결을 강요한 것입니다. 그런식으로 상대를 쓰러뜨린 비니에 대한 소문이 퍼집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직접 봤다고 무용담을 퍼뜨리는 떠버리꾼들도 등장하고.
반면 크로스 크릭 이라는 어느 마을, 작은 마을이라서 보안관도 없고 마을 사람들 모두 온순하고 선량한 동네입니다. 거기서 잡화점을 하는 조지(글렌 포드)는 임신한 아내 도라(진 크레인)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4년전 이 마을로 와서 정착했고, 아예 총을 갖고 다니지도 않는 평화주의자 입니다. 그런데 물론 그는 '과거가 있는 남자'지요. 조지가 상당히 총솜씨가 좋다는 건 이미 관객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치 3년전에 등장한 서부극 걸작 '셰인'이 연상되지요.
서부극에서 자주 등장하는 1 : 1 권총속사대결
글렌 포드
러스 탬블린이 보여준 일명 '삽춤'
평화로운 크로스 크릭 마을에도 비니에 대한 소문이 퍼집니다. 그를 직접 봤다는 수다쟁이의 말이 마을 곳곳에 퍼지는데 조지는 유독 이런 사람들의 수다에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평소와 달리 짜증을 내기도 하고....결국 술을 마시던 조지는 비니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합니다. 그는 수년간 사용하지 않던 권총을 꺼내와서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귀신같은 총솜씨를 보여줍니다. 공중에 은화 두 개를 날려서 정확히 맞추고 멀리서 맥주컵을 날려버리고... 이렇게 조지의 숨겨진 실력을 보고 사람들은 그를 다시 보게 되지만 다음날 정신을 차린 조지는 그런 행동을 후회합니다. 특히 조지의 과거를 아는 아내 도라는 심히 걱정을 하지요. 결국 교회의 예배자리에서 조지는 목사에게 총을 반납하고 마을을 떠나겠다고 하는데 마을 사람들이 만류합니다. 총잡이가 있다는 소문이 돌면 곳곳에서 악당들이 찾아와 실력대결을 요청할 것이고 그럼 평화로운 마을이 시끄러워질 것이고... 결국 마을 사람들은 절대 조지에 대한 얘기를 외부에 발설하지 않을 것을 선서하기에 이릅니다.
조지가 이렇게 총을 다시 집어넣으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은행을 털고 보안관에게 쫓기던 악당 비니일행이 하필 크로스 크릭 마을로 도망을 오게 되었고, 비니는 마을 소년에게 더 빠른 총잡이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서 조지를 불러냅니다. 다시 총을 잡지 않으려고 한 조지, 하지만 비니 같은 악당을 상대할 수 있는 인물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조지 한 명뿐. 마을사람들과 조지의 고민은 커지고 비니가 제시한 시간은 다가오는데....
과거를 떨치지 못한 남편 조지를
걱정하는 아내 도라
"자네들이 총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렇게 떠들어?"
내 총을 받납하겠습니다
다시는 총을 쏘지 않겠어요
제법 재미있고 완성도도 괜찮은 서부극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더 재미있지요. 비니가 조지의 마을로 들어오면서 벌어지는 긴장과 갈등은 후반부 다운 묘미를 가중시킵니다. 얼핏 보면 좀 답답한 느낌도 나지요. 악당이 왔으니 응당 가장 총솜씨가 좋은 조지가 나서서 물리쳐야 하는게 당연한 것 아닌가 싶은.... 그렇지만 이 영화가 다른 서부극들과 다른점은 바로 이런 '총잡이와 살인'에 대해서 좀 더 깊이있는, 불편한 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서부시대에서 영화로 보면 제법 남자다운 대결로 보이는 1 : 1 속사대결이 얼마나 이루어졌을까요? 특히 악당과 정의로운 총잡이의 대결이? 이건 사실 서부극을 미화시키기 위한 재미난 설정에 불과할 겁니다. 유명한 전설이 된 와이어트 어프 만 해도 그런 대결을 실제로 거의 갖지 않았고 실수로 뒤에서 사람을 쏴서 무고하게 죽이기도 했다죠. 1 : 1 속사대결에서 최고의 솜씨라는 닥 할러데이의 신화도 많이 과장되고 만들어진 것일테고. 빌리 더 키드 등도 마찬가지죠. 사람 목숨이 귀한데 아무리 무법천지 시대였다고 해도 1 : 1 속사대결이 난무했을리는 없습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조지가 마을사람들의 간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선뜻 비니를 처치하러 나서지 못하며 '두렵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조지는 누구보다도 용맹하고 빠른 보안관이었던 아버지가 그렇게 총을 선호하다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아픈 기억이 있고, 총잡이로 살아간다는게 얼마나 무모하고 위험한 일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총연습을 시킬때 무척 싫었다는 조지의 고백, 특히 사람을 표적을 총을 쏜다는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가 조지의 고백에서 등장합니다. 악당 비니 역시 조지를 불러내기는 했지만 실제 그와의 대결에 꽤 부담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 언뜻 보여집니다. 조지가 맞춘 은화 두개는 아무리 무자비한 악당이라도 예사로운 솜씨가 아닌 상대를 대적해야 한다는 큰 부담을 주는 것이지요. 동료 둘이 지레 도망친것도 그렇고. 즉 권총대결이 멋지고 낭만적인게 아니라 정말 할짓이 못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영화에 비해서 성숙된 아름다움을
보여준 진 크레인
"나보다 더 빠른 녀석이 이 마을에 있다고?"
총을 영원히 반납하기로 했는데
악당의 등장으로 고민에 빠진 조지와 마을사람들
"이번 상대는 제법 후달리네"
속사대결 서부극을 몇 차례 만든 존 스터지스 감독도 '황야의 7인'을 통해서 총잡이로 명성을 떨친 멋쟁이 리(로버트 본)가 밤마나 악몽에 시달리며 겁을 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남들이 보기엔 멋있어 보이는 총잡이의 삶이 얼마나 할게 못되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특히 6인의 총잡이가 그런 총잡이를 선망하는 치코(홀스트 부크홀츠) 앞에서 총잡이의 애환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1950년대 서부극이 한창 인기있던 시절에 만들어진 '숙명의 일탄'은 총잡이에 대한 로망에 일종의 찬물을 끼얹는 느낌을 주는 내용입니다. 굉장히 현실적인 지적을 하면서도 또한 역설적으로 1 : 1 속사대결에 대한 묘미를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서부극, 군인연기에 잘 어울리는 인기 배우 글렌 포드가 주연을 맡았고, '애수의 호수' '위험한 횡단'에서 인상적이었던 진 크레인이 그의 아내 역으로 차분한 미모를 보여줍니다. 아카데미상 수상배우인 악역전문 브로데릭 크로포드가 함께 공연하고 '7인의 신부'에서 놀라운 무용묘기를 보여준 러스 탬블린이 마을축제 장면에서 역시 묘기에 가까운 재미난 춤솜씨를 보여줍니다. 상업적 재미와 인간적인 묘미가 함께 담긴 서부극입니다.
평점 : ★★★ (4개 만점)
ps1 : 원제의 의미가 '가장 빠른 총이 살아남는다' 라는 속사대결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ps2 : 1 : 1 속사대결을 아예 대놓고 주된 스토리로 다룬 영화가 샤론 스톤이 여성 총잡이로 등장한 '퀵 앤 데드' 였지요.
ps3 : 제법 완성도 있는 영화인데 아직 정식 DVD나 블루레이 릴이 등장하지 않은 영화입니다. 아무래도 감독 러셀 라우즈의 인지도가 약하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ps4 : 끝에 살짝 탄복스런 반전이 있습니다. 아하! 싶은.
[출처] 숙명의 일탄(The Fastest Gun Alive, 56년) 1 : 1 속사대결의 허무함|작성자 이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