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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9월 22일(화)
* 시작 기도
(삼하 18:9) 압살롬이 다윗의 부하들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주님...
아버지 다윗 왕을 왕위에서 축출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된 압살롬이 아버지의 군대와 싸우기 위하여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갔습니다.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머리를 무엇보다 아끼고 자랑하였는데 이는 그의 머리가 흠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하던 머리로 인하여 죽음 직전에 놓였습니다.
아름답던 그의 머리가 그만 상수리나무 가지에 걸려 그를 대롱대롱 매달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요압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는 누구나 자신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그에게 가장 약점이 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또한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나의 장점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는 가장 취약한 점이요 나의 의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하여 오늘도 나의 나 됨을 드러내되 나의 의가 아니라 나의 약함을 드러내는 자로 서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대상 13:1-8
제목 :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1 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지휘관과 더불어 의논하고
2 다윗이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좋게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초원이 딸린 성읍에 사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을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 뭇 백성의 눈이 이 일을 좋게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
5 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릅 사이에 계시므로 그러한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았더라.
7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 나의 묵상
다윗은 천부장과 백부장, 실제로는 모든 지휘관과 법궤 이동을 상의하였다(1절).
그런 후에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 회중을 향해 말하였다.
만일 너희가 옳게 여기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동의해주신다면 명령을 내려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에 남아 있는 우리 동족을 그들의 일가와 함께 불러오고, 목초지가 있는 성읍에 사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우리에게 모이게 하자. 그리고 우리가 사울 시대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던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 자신을 위해서 되찾아오자(2-3절).
그 일은 온 백성이 볼 때 옳게 여겨졌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 회중은 그렇게 하자고 동의하였다(4절).
그래서 다윗은 기럇여아림에서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고 애굽의 강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았다(5절).
그런 후에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궤를 가져오려고 유다 지파 땅 바알라에 있는 기럇여아림에 갔다.
그 궤는 “그룹들 위에 앉아계시는 여호와”라고 불려왔다(6절).
그들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으로부터 운반했는데 웃사와 아효가 그 수레를 몰았다(7절).
다윗과 온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서 온 힘을 다하여 노래를 부르며 거문고와 가야금을 뜯고 소고와 비파를 치고 나팔을 불면서 춤을 추었다(8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고 그들을 언약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들이 말씀에 순종하여 언약을 지키면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소유(특별한 보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다(출 19:4-6).
하나님께서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피로 언약을 체결하신다(출 24:8).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시내산으로 불러 이스라엘 백성과 만날 성막의 모형을 보여주시고 성막을 짓게 하셨다(출 25:9-40).
성막의 가장 안쪽에 지성소가 있다.
지성소는 1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제물을 통해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백성들을 용납하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시혜(施惠)의 자리였다.
그 자리는 결코 상호교제의 장은 아니다.
그리고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으며, 하나님께서는 언약궤에서 백성을 대신한 대제사장을 만난다.
이 언약궤, 곧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과 관계’를 위한 매개체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궤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며,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궤로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의 궤는 '관계'를 위한 매개체가 그 본질이나, 관계를 근거로 한 능력이 나타나는 매개체이기도 하였다.
특히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입성하는 과정을 전후해 하나님의 궤는 기적을 가져오는 ‘거룩한 능력’이 되었다.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의 궤를 앞세우자, 넘치던 요단강 물이 그쳤다.
이로써 이스라엘 백성은 40년 만에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이다.
이때로부터 하나님의 궤는 관계를 위한 매개체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도구로 인식되었다.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궤 앞에서 회개하거나 적들로부터 승리하는 등 하나님의 궤를 하나님 능력의 발현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후에도 하나님의 궤는 ‘실로’에 안치되며(수 18:1), 임재의 상징뿐 아니라 능력의 도구로 받아들여졌다.
실로에 안치된 '하나님의 궤'는 엘리 제사장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함으로 인해 실로의 성막에서 떠나가셨다.
(시 78:60-61) 사람 가운데 세우신 장막 곧 실로의 성막을 떠나시고 그가 그의 능력을 포로에게 넘겨주시며 그의 영광을 칼에 넘기셨으니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이 부재한 ‘물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궤를 능력의 도구로 인식한다.
사무엘상 4장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패하여 4,000명이 죽었다.
이때 이스라엘 장로들은 실로에 있는 하나님의 궤를 속히 가져오라고 한다(삼상 4:3).
하나님이 이미 궤를 떠난 것도 모르고 이들은 하나님의 궤를 기적을 일으키는 마술적 도구로 사용하려 한 것이다.
적들은 이 소식을 듣고 두려워하였지만 더욱 무장하여 결국 이스라엘은 참담히 패배하고 말았다.
이때 죽은 이스라엘 병사의 숫자는 무려 30,000명에 달하였다(삼상 4:10).
그리고 그들이 믿었던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겼다.
그런데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이 탈취한 언약궤로 인하여 큰 곤란을 겪는다.
다곤 신상들이 깨어지고 재앙이 그치지 않자, 언약궤(법궤)를 속죄 제물과 함께 이스라엘로 돌려보낸다(삼상 6:1-9).
법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거기서 “그것을 들여다본”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삼상 6:10-20).
그 성읍 주민에게 법궤를 옮겨버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 사자들이 급히 기럇여아림에 파견되었으며, 그 법궤는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에 안치되었다.
이후로 법궤는 다윗의 시대까지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다윗은 왕이 된 후 법궤를 자기가 있는 곳, 다윗성으로 가져오기로 하였다.
그것은 전에 사울 때에는 궤 앞에서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다윗은 궤 앞에서 하나님께 묻고자 하는 선한 뜻에서 법궤 이동을 결정한 것이다.
이 일에 온 이스라엘이 찬성하였고 법궤의 이동은 성대한 행렬과 함께 시작되었다.
다윗과 이스라엘이 법궤를 가져와 하나님께 묻고자 한 것은 옳은 결정이었다.
그들의 취지는 하나님 앞에서 선하고 기특하였다.
무엇보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마음먹었다.
(5절) 이에 다윗이...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절) 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
그런데 다윗이 온 무리를 이끌고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웃사와 아히오가 새 수레를 만들어 거기에 언약궤를 실었다.
그리고 다윗 일행이 도착하기 직전에 언약궤를 실은 새 수레를 끌고 집에서 나온 것이다.
다윗이 미처 제지할 겨를도 없었다.
이에 웃사와 아히오는 새 수레를 끌고 출발하였고 다윗 일행 역시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악기를 켜고 행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예시로 성막을 보여주시고 그 성막을 짓도록 명하셨다(출 25장 이후).
그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은 지성소이다.
특별히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위에 있는 뚜껑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속죄소 곧 시은소이다.
용서와 은혜가 베풀어지는 시은소 아래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히 9:4) 금 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돌판들이 있고
시은소 아래 곧 언약궤 안에는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언약의 두 돌판이 있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볼 때 굉장히 가치가 있는 보배들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이것들을 시은소 아래 넣으라고 하신 이유가 있다.
바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필요한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이다.
그런데 이들은 매일 아침 밖에 나가서 이 만나를 거둘 것을 명하셨다.
하지만 백성들 중에는 꼼수에 능한 자가 있었던지 한 번에 이틀치 만나를 거둬온 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음날 이미 거둬온 만나를 먹으려 할 때 그것은 다 상하고 썩어서 냄새가 났다.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를 알게 된 모세는 그들에게 진노하였다.
너희들이 언제까지 하나님을 시험하려 하느냐 하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주신 목적이 그들이 내 말을 잘 듣는지 듣지 않는지를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출 16: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이 행하신 이 시험에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여실히 드러내는 상징적인 물건이 된 것이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역시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영적 지도자로서의 지위와 권위를 허락하셨다.
그런데 이를 시기하며 원망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누가 진짜 하나님이 택하신 제사장인가, 하는 문제로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시끄러웠다.
하나님께서는 각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지팡이 하나씩을 가져오게 하였다.
레위 지파의 대표로 아론이 지팡이를 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민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에게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라.
이튿날 모세가 성막에 들어가 보니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린 것이다.
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단순히 기적을 보여주는 물건이 아니다.
사실 바짝 말라버린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 열매가 열린다는 것은 기적 그 자체이다.
하지만 이런 기적 때문에 그것을 언약궤 안에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과 반역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넣어둔 것이다.
언약의 두 돌판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두 돌판을 만들어서 모세로 하여금 가지고 백성들에게 전해주라고 하셨다.
이에 그 돌판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올 때 밑에서 시끌벅적한 노래소리와 함께 춤을 추고 뛰놀고 있는 것이다.
모세가 들고 있던 돌판은 율법으로서 거룩 그 자체이다.
이에 거룩이 죄와 만남으로 심판이 일어났다.
모세가 돌판을 산 아래로 던졌다.
그랬더니 돌판이 깨지고 말았다.
이처럼 거룩이 죄와 만나면 심판이 일어나는데 그 심판은 거룩이 깨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거룩하신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서 죽으실 때 당신이 죄가 되셔서 죽으셨다.
이는 죄 중에 죄인 우리를 의로운 자로 삼으시기 위함이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거룩과 죄가 맞닥뜨리면 죄가 깨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이 깨진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방편이다.
이에 모세는 다시 산 위로 올라가서 두 번째 돌판을 받는다.
이 돌판은 모세가 다듬고 하나님께서 그 위에 글을 쓰신다.
이것은 하늘과 땅의 연합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땅에 내려와서 친히 땅에 속한 백성들을 끌고 가시는 것을 묘사한다.
그리하여 그 죄인들을 속죄소 아래, 곧 언약궤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 돌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은 율법을 못 지킨다는 것이다.
사실 그 자체가 죄이다.
거룩의 대명사인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죄와 맞닥뜨렸을 때에 죄인인 우리들을 죽이지 않으시고 당신이 죄가 되셔서 스스로 깨뜨려지신 것이다.
하여 속죄소 아래에 들어간 것들은 모두 대단한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 곧 죄인 중에 괴수인 우리들을 상징한다.
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궤 곧 언약궤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생각했던 자였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그들을 이기고자 실로에서 가져왔던 언약궤는 이기게 하는 능력의 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 중에 내가 서 있었다.
나는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을 나의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는 무뢰한이다.
내가 아무 것도 모르는 무식쟁이라면 몰라도 나는 가르치는 목사요 선교사이다.
그럼에도 이런 무뢰한의 죄를 저지르곤 하였다.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오늘도 나는 이런 나를 보면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내 입을 가린다.
주님을 찬양한다고 하면서도 툭하면 나의 유익을 위하여 주님을 이용하던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런 나를 아주 죽이는 진멸이 아니라 징계를 통하여 다시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셨다.
나 같은 죄인이 들어가야 할 곳은 오직 은혜와 용서가 베풀어지는 곳 속죄소요 시은소 아래이다.
그곳은 그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품속이다.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오직 위치의 문제이다.
오늘도 나는 주님의 품속에 거하면서 주의 말씀으로 생명의 교제를 나눈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믿는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사울 때에는 궤 앞에서 묻지 않았음을 다윗은 알았습니다.
하여 자신이 왕이 된 후에는 그 궤 앞 곧 하나님 앞에서 묻기를 원하여 언약궤를 시온 성으로 옳기려고 했습니다.
궤를 옮길 때는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고 옮겨야 했습니다.
물론 다윗은 그 사실을 알고 그렇게 하려고 했으나 한 발 앞서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만들어 언약궤를 싣고 움직였습니다.
이를 말렸어야 했지만 그럴 새도 없이 쌩 하고 나가버린 것입니다.
무엇이든 때가 있습니다.
아차, 할 때라도 멈추게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다윗에게는 천추의 한이 되었습니다.
이 종 역시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시작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 새 딴 길로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늦었지만 그 때라도 깨닫고 그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는 인간은 나의 유익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조차 내 맘과 내 뜻대로 하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런 나를 주님께서 심판하사 주님의 것으로 온전히 사용될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하소서.
나는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