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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칼에 찔린 후 발가벗겨지고 능욕당하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 박병역기자(truelook@hanmail.net) 2014.07.17 14:24:59
일제는 살아있는 명성황후를 불태워 죽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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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는 칼에 찔린 후 발가벗겨지고 능욕당하고 산 채로 불태워졌다.
아래 글은 “처참하고 치욕적으로 시해당한 명성황후” 시리즈의 제 6부입니다.
(1부) 역사적 사실과 다른 영화의 명성황후 시해장면
(2부) 명성황후를 일제처럼 ‘민비’라 부르는 우리
(3부) 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생략한 백과사전
(4부)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정부가 주도했다
(5부) 명성황후 죽임은 ‘시해’인가 ‘살해’인가?
(6부) 일제는 살아있는 명성황후를 불태워 죽였다.
대다수 대한민국 국민들은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이 휘두른 칼에 맞아 죽었고 시신은 불태워졌다.”고 알고 있다. 그 이유는 소설이나 영화/드라마/뮤지컬을 통하여 묘사된 명성황후의 최후만을 알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은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영화/드라마/뮤지컬의 장면은 너무도 처참하고 치욕스러웠던 명성황후의 최후를 적나나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대중매체의 제한성 때문이던가, 아니면 아예 제작자들이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모르고 표현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필자의 눈엔 후자로 보인다.
KBS 대하드라마 '명성황후'에서의 최후장면 (실내)
영화 '한반도'에서의 최후장면 (실외)
그동안 명성황후의 최후를 기록한 문서로는 당시 러시아 공사였던 <베베르 보고서>와 일본인 행동대원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수기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 정도였다. 이 두 문서에 명성황후의 최후가 언급되기는 했으나 그렇게 처참하고 치욕적이지는 않았다.
<베베르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현장에 있었던 러시아인 건축기사 사바티니의 증언이 주 내용이나, 사바티니는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직전 현장에서 빠져 나와 명성황후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지 못해 나중에 현장에 있었던 한 무명상궁의 증언을 인용해 기록하고 있다. 여하튼 이 <베베르 보고서>는 일제의 만행을 전 서방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된다.
당시 러시아공사인 베베르(Weber)는 보고서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쟁도 아닌 평화 시 군대를 동원해 궁궐을 습격하고, 한 나라의 국모를 서슴없이 시해한 사상 유래 없는 만행이다.” 그렇다. 명성황후를 시해함은 세계인류사에서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극악무도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들의 잘못을 아직까지 시인하지 않고 있는 일본은 야만인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야만인인 것이다.
<민후조락사건>이란 문서는 당시 일본인 행동대원인 고바야카와가 명성황후 시해의 배경과 계획수립과정부터 무죄판결과정까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수기(手記) 형식의 문서이다. 그 내용을 검토해 보면 고바야카와는 결정적인 장면인 명성황후의 최후를 직접 목격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고바야카와는 왕비를 직접 죽이는 현장에는 없었던 인물이다.
우선 명성황후의 최후에 관한 다른 증언들을 언급해 보기로 한다.
* 왕세자 이척의 증언 : "일본인 흉한들은 왕비를 내동댕이치고 구둣발로 가슴을 세 번이나 내리 짓밟고 칼로 찔렀다"
* 영국 영사관 힐리어가 북경의 오코너에게 보낸 보고서 :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나갔지만 붙잡혀 넘어뜨려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짓밟은 뒤에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힐리어의 보고서는 왕세자의 증언과 거의 일치한다)
영국인 힐리어의 보고서에는 왕비가 실외(室外)에서 변을 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민후조락사건>에는 왕비가 죽어 있는 것을 실내(室內)에서 보았다고 기록했다. 이는 명성황후의 얼굴을 본 적이 없는 고바야카와가 실내에 죽어있던 다른 궁녀를 왕비로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위의 몇 가지 증언에서 보다시피 명성황후의 죽음은 단순히 일본인의 칼에 찔려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모두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명성황후 사후 70여년이 지나자 이상한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1895년 이후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었던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구체적인 언급을 한 학자는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베겐타로(山倍健太郞)였다. 그는 1966년 2월 <일한병합소사(日韓倂合小史)>라는 책에서 "사체능욕(死體凌辱)"이라는 표현을 처음으로 썼는데, 이것이 '명성황후 능욕설'의 원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야마베 겐타로도 뭔가 진실은 감추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즉 시해범들이 명성황후를 시간(屍姦)했다는 말이었다. "1895년 10월 7일 밤부터 다음날 이른 아침에 걸쳐서, 대원군이 훈련대에게 호위되어 있는 동안 일본 수비대와 대륙 낭인의 무리가 칼을 빼들고 경복궁으로 밀고 들어가서 민비를 참살하고, 그 사체를 능욕한 뒤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버린 것이다."
명성황후 시신을 소각하고 있는 장면의 상상도. 과연 시신을 소각했을까!
그리고 22년이 지난 1988년 일본의 여류소설가 쓰노다 후사코여사의 소설인 <민비암살>에서 다시 능욕설이 제기되었다. 아래와 같이 간단히 언급만 하고 구체적인 행위는 생략하는 문구를 썼다. 차마 구체적인 행위를 일본인 여성으로서 언급하기가 무척 심적으로 괴로웠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민비의 유해 곁에 있던 한 일본인이 “같은 일본인인 나로서는 차마 묘사하기 괴로운 행위를 하였다.”는 보고가 있다...(중략)... 보고서에서 '정말로 이것을 글로 쓰기는 괴로우나…'라고 서두에 쓴 후에 그 행위를 구체적으로 쓰고 있다." 라고 쓰면서 뭔가(에이조 보고서)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 후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작가 김진명씨는 베일에 감쳐져 있었던 명성황후의 최후를 상세히 기록한 <에이조(英藏) 보고서>의 전문을 입수하게 되며, 이 보고서는 그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에도 언급된다. 이 <에이조 보고서>의 발견으로 그동안 베일에 감춰져 있었던 명성황후의 최후가 일반인에게 적나나하게 알려지게 된 것이다.
당시 오마이뉴스를 통해 보도되었으나 다른 대형신문사나 방송에서는 별로 중요치 않은 듯 다루지 않았다. 따라서 명성황후의 최후는 대대적으로 국민들에게 알려지지 못했다. 우리나라 주요언론사의 역사인식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것 같아 보여 씁쓸한 느낌을 금할 길이 없다.
<에이조 보고서>란 1895년 당시 일본국 법제국 소속으로 조선정부의 내부 고문이었던 이시즈카 에이조(石塚英藏)참사관이 본국 법제국 스에마쓰(末松)장관 앞으로 보낸 외교문서(보고서)로 ‘왕비(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을 보고’한 서간문이다. 에이조는 당시 미우라공사와는 다른 외교적 라인에 서 있었던 인물이라 이 사건을 아주 객관적으로 잘 기록하고 있다. (‘에이조 보고서’ 전문은 제 7부에 게재합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명성황후 시해의 일본인 행동대원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오(小早川秀雄)의 수기 <민후조락사건(閔后殂落事件)>과 당시 시해 현장에 있었던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藏)참사관의 <에이조보고서>를 결합하면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완벽한 줄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본다.
명성황후의 최후 장면을 기록한 '에이조 보고서' (일본외교문서)
너무도 치욕적인 명성황후의 최후
보고서 중 가장 눈길을 끄는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기록한 문구는 아래와 같다.
그 방법은 경솔하기 이를 데 없으므로 거의 애들 장난[兒戱]에 속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데 다행히 그 가장 꺼림칙한 사항은 외국인은 물론 조선인에게도 서로 알려지지 않은 모양입니다. (其方法は輕率千万殆んど兒戱に類するなきやと思わるるも無之にあらず幸に其最も忌わしき事項は外國人は勿論朝鮮人にも不相知候樣子に候)
첫째가 가장 꺼림칙한 사항인 시해장면을 외국인이나 조선인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위와 같이 기록한 문구이다. 그래서 이 문서가 나오기 전까지 일본인 이외에는 아무도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정확한 진술을 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글 중에 다행이라는 표현을 쓴 것으로 보아 뭔가 봐서는 안되는 짓(가장 꺼림직한 사항)을 했는데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이 ‘가장 꺼림직한 사항’과연 뭘까!
특히 낭인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를 끌어내고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습니다(處刃傷).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裸體) 후 국부검사 --可笑又可怒 / 웃을 일, 또한 노할 일-- 를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燒失)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그 외에 궁내부 대신을 몹시 참혹한 방법으로 살해(殺害)했습니다. (殊に?次馬連は深く內部に入입み王妃を引き出し二三個處刃傷を及し且つ裸?とし局部檢査(可笑又可怒)を爲し最後に油を注ぎ燒失せる茅 誠に之を筆にするに忍びざるなり 其他宮內大臣は頗る慘酷なる方法を以て殺害したりと云う)
1895년 '리옹프와이어'신문에 실린 삽화. 한 일본인이
명성황후의 음부를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고 있다.
둘째가 바로 명성황후의 최후 장면인데, 아래 내용을 잘 음미해 보면 명성황후는 죽지 않은 상태(단지 칼로 상처만 입은 상태)에서 발가벗겨지고 능욕(국부검사)을 당했다. 강간(强姦) 또는 윤간(輪姦)까지 당했는지는 이 기록으로 확신할 수 없으나 그 개연성은 충분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시간(屍姦)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왕비의 몸에 기름을 부어 불에 태워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 근거는 원문의 소실(燒失)이라는 단어로 ‘태워서 ( )을 잃게 하다.’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燒失(命)으로 괄호안의 목숨 명(命)이 생략된 것이 틀림없다. 칼로 상처를 입고 국부검사를 하는 중에 사람이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근거로는 이미 앞에서 국부검사 시 ‘웃을 일 또한 노할 일’이라고 언급해놓고, 다시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 어렵습니다.’라고 다시 언급한 점이다. 이미 죽어있는 시신을 단순하게 태우는 일이라면 이런 표현을 다시 언급하지 않는 것은 상식이다.
이는 분명 뜨거운 석유 불에 태워지면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다 죽어가는 벌거벗은 여자(왕비)의 모습을 쳐다보다보니 인간으로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렵다는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불타기 전에 죽었다면 분명 시신을 불태웠다고 썼을 것이고, ‘차마 글로 옮기기 어렵다’는 표현을 시신을 불태우면서 기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몸에 신나를 뿌리고 분신자살하려는 사람.
명성황후의 벗겨진 몸에 석유를 뿌려
태워죽이는 장면과 아주 흡사하다.
또 다른 근거는 ‘궁내부대신을 살해했다’고 분명 언급한 기록이다. 궁내부대신을 죽였다고 분명 기록했는데 왕비를 죽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명성황후는 석유 불에 태워지면서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야마베 겐타로도 차마 같은 일본인으로서 살아있는 왕비를 불태웠다고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 얼마나 뜨거우셨을까!!! 삼가 명성황후마마의 명복을 빕니다.
이렇게 왕비를 지키지 못한 조선정부의 무능도 문제지만, 이러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에게 아무런 이의제기도 못하게 만든 박정희대통령(일본육사 츨신으로 영혼은 일본인이었다)과 아직까지도 일제의 주구가 되어 식민지배의 향수를 느끼고 있는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기득권층에 대거 포진되어 있다는 것이 국가의 큰 불행인 것이다.
필자가 비록 치욕의 역사이지만 명성황후의 최후에 대해 언급하는 이유는 “나라가 힘이 없으면 외적들에 의해 국모라도 이렇게 처참하고 치욕적으로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그런 나라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다.
친일 집단인 뉴라이트는 “명성황후 잘 죽었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은 아래와 같다. 이래 가지고서야 나라가 제대로 되겠는가 말이다. 돌아가신 우국열사와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 지하에서 통곡하고 계신다.
<뉴라이트의 발언>
* 김구와 안중근은 테러리스트
* 유관순은 여자깡패
* 위안부는 자발적인 창녀
* 독립군은 마적단
* 일본의 식민지배가 한국의 근대화에 이바지했다.
http://www.hinews.asia/sub_read.html?uid=193§ion=sc6§ion2=
첫댓글 칼잡이 왜구족이 바로 민황후 시해범들이다. 머리를 빡빡 깎고 끝부분만 묶은 칼잡이 왜구족은 무사집단으로 모용선비족의 기마용병집단인 흉노족이 고구려정벌에 동원되었다가 북부전선에서 대패한 4세기에 동해안을 타고 열도로 건너간 초원세력의 후손들이다. 고로 대한민국을 부패와 탐욕으로 망치고 있는 노랑개족과 동일혈족으로 보면 된다. 피의 속성은 절대로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랑개족 왜구족의 습성은 침략.학살.왕따.강간.음해.사기다. 선하고 양심적이고 평화적인 한민족의 피와는 전혀 이질적인 백인족의 피가 섞은 혼혈 잡종족이다. 우리가남이가로 뭉치는 쪽수 열등감과 더불어 노랑개족의 역사적 열등감이 거기에 있다.
그것도 그것이지만 중요한 사실은 이렇게 당시 당하고 그것도 당시 온국민들이 즉 우리들 선조들이 개처럼 36년을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또 이렇게 당할 짓을 우리들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멍청한 짓을 하지말고 깨어나자고 7년을 알려도 어느개가 짓냐한다는 것이죠. 역사관 민족관하면 더럽게 똑똑한 척하는 개 같은 새끼들이 깨어나자는 제안을 물고 늘어지며 멍멍하고 개소리를 하고 자빠졌다는 것이죠. 이 짓들이 죽어봐야 그때 죽는맛이 아 이렇구나 하고 알텐데 알자마자 죽고 만다는 것이죠. 답답한 것은 이것들만 골라서 죽으면 정말로 좋을텐데 이 멍청한것들 말을 들고 같이 놀다가 나라가
그래서 깨어나지 못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이죠.
지금 일본은 독도를 지들 땅이라고 개소리를 하고 나라 안에서 전쟁준비를 하며 집단 자유권 발동이란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는 나라 안에서 이런 일본이 한국을 치고 들어올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멍청한 개같은 새끼들이 말입니다. 북한이 툭딱하면 미사일을 날리고 세월 불바다를 운운하고 있는 사실 앞에서 뒤질줄 모르고 이짓을 하고
잡바 졌다는 것이죠. 깨어나 이 위기를 극복하고 잘 살아보자가 7년을 알려도 어느개가 짓냐? 하는 반응입니다.
이러다 눈으로 확인할때 이 개소리하는 자들이 죽어가는 당신들을 살릴 것인가? 지놈도 죽는데 ...
이 치욕을 당하고도 개 소리를 늘어 놓는 인간들 이게 인간인가? 개도 이정도는 아닙니다. 개 만도 못한 이새끼들 말을 들고 끽 깩 끽깩하는 이것들 개소리를 들고 같이 놀아나는 자들 제발 정신들 차리시오. 때를 놓치면 세상에 약이 없습니다. 방법도 없습니다. 정말로 그렇까? 그렇게도 깨달지 못한다면 세월호 사건을 두 눈을 뜨고 보셨죠. 딱 저꼴 당합니다.
살앗거던 지금부터라도 당신 몸을 당신이 지킬 생각으로 깨어나 당신을 당신이 지키십시오. 내 직장 내 재산 내가 지키도록 노력합시다. 알고자 할때 여기서 알게됩니다. 부디 깨어나 사람다워 지십시오. 이 무식한 짓은 개 보다 못한 짓입니다.
친일 매국노세력들 언제까 인종 청소 해야 합니다 지구상에서 더불어 살아 갈수 없는 족속이 일본인 입니다 사실이 이러 한데 일본 원전 사고에서 일본인들이 대거 우리나라 이주 해지요 그들도 모조리 인종 청소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보금자리준 친일 매국노 집단도 인종 청소 해야 합니다 그런 인간 좋다고 하는 무리들도 인종 청소 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곳에 글 올리는 윤모씨도
우린 역사를 배우면서 왜 이런일이 일어났을까에 대한 의문을 무시하고 무조건 감성적인 역사만 배우고 가르쳤다..이렇게 반성없는 역사는 앞으로 되풀이된다..간단이 말하자..일본이 명성황후한테 그렇게 극악한 행동을 할수밖에 없는 이유는 뭘까...간단하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해야 대륙으로 올라갈수있다..조선은 당시 엉망이다..개판이다..일본은 청일전쟁에서 국운을걸고 이겼다..당근 전쟁에서 이겼으면 배상금을 받아서 충당된 전비보충한다..당시 일본이 청나라에 요구한 보상안이 요동반도 할양..만주철도부설권 대만 할양 ,, 이런 조건이 받아드린다면 조선은 바로 일본 식민지 된것이다 만주철도 부설하면 한반도통과해야
되고,,,압록강너머 요동반도가 일본한테 넘어가면 일본군은 요동반도 간다는 핑게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올라간다..러시아는 고민이다 일본이 만주를 차지하면 러시아 극동지배가 무너진다..명성황후는 이이제이 전법으로 러샤를 불러드려서 러시아 프랑스 독일과 연합해서 일본을 압박하고 일본이 차지할 전리품을 챙겨라고 고언을 한다..쉽게말해서 외교력이다..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유명한 3국간섭..청나라는 어차피 뺏길것 미운넘한테 주느니 도와주는넘한테 넘긴다...일본은 쉽게말해서 죽기살기 전쟁에서 이겨놓고 전리품은 고스란히 남한테 뱃기는 형국이니...명성황후에대한 증오심을 이루 말할수없다...일본천황어전내각에서
@천랑성 회의하는데 천황앞에서 내각대신들이 명성황후을 가르키며...ㅅㅂ ㅅㅂ 하면서 증오심을 나타내었다고 한다..명성황후도 나름대로 방어했을려고 했다..당시 궁궐을 지키는 수비대는 신식군대로 거의 친일파군대라서 해산시키고 미국장교를 초빙해서 새로이 궁궐수비대를 만들고 했는데...을미사변은 명성황가 당시 청일전쟁이후 득세한 친일파를 3국간섭으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친일파들을 숙청한 상태에서 친일파들과 일본낭인들과 합작품이라고 보고싶다 순수하게 일본낭인들 사건은 아니다...친일파 협조가 있었고 그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다..이름대면 알수있다...
상세한 정밀부분으로 들어가면 님의 주장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먼저 우리 모두가 알아야할 사실은 고종 이전 철종때 부터 이미 조선은 오랜 당파 싸음이 누적되어 나라 곳곳에 믿음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불신과 부정이 들끌었습니다. 시대가 다를뿐 지금과 흡사했습니다. 물질을 쓰고 살아가는 인간들이 나라 꼴이 이꼴이라 나라안에서 국가 재정이 말이 아니고 당시 나라 곳곳에서 밀란이 들끓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했습니다. 이런데도 불구하고 국가 운영 상태를 똑 바로 세울 길이 없었습니다. 뚝이 무너져 터저나오는 저주지 물 벼락과 같았습니다. 이것이 고종때로 이어지며 이 험한 꼴을 만들어 당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되엇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개 돼지 새끼처럼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광복후 지금까지 이때 두동강난 우리를 역사를 정상 복원했나요? 시간이 짦아 못하나요? 아니면 쪽바리 총칼이 무서워 못하나요? 다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런 정치가 여야공이 다 같은 책임이 있는데 나라 주인들이 되어 이 책임은 누구도 물으려고 압박하지 않고 곳곳에 모여서 무슨놈에 사상들 타령들이죠. 꼴에 왈 역사 학자들이란 것들이 그 간판은 왜 달고 있는지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하는 태도가 죽어봐야 그때 죽는맛을 알겠다고 할 사람들이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부디 한국 국민들이면 깨어나 어느편도 들지 말고 압박합시다.
국내의 정치세력이 국가의 정통성과 역사를 바로 세우기는 힘들다고 판단 됩니다. 첫째, 국가의 주권이 한국민에게 없습니다. 즉, 전시작전통제권이 없기 때문에 국민들도 나약해 졌고 사회국가 모든 면에서 책임지는 리더가 없습니다. 둘째, 현재 대한민국에서 채택해서 쓰고 있는 직접선거민주주의는 우민들의 선택한 자들의 통치에 의한 국가의 정책과 감시 통제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먹튀 매국노들이 정부와 정치인 국가권력기관 사회 각층에 숨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한국인들에게 최악의 정치시스템입니다. 셋째, 오랜동안 이선생님이 주장하신 상생과 소통등 국민들이 최소한의 예의와 도덕적 타락을 막아야 할 국민교육 즉 제대로->
된 시민교육과 민족전통성을 갖는 우리의 조상들과 사상과 문화가 배척되고 있는 현실이 있기 때문에 힘듭니다. 만약 셋중에 어느 하나가 완전하지 못한다면 한민족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처럼 지금 살고 있는 땅에서 쫓겨나서 노예가 되거나 모든 주권이 박탈되거나 살려고 탈출한다 해도 떠돌이 신세가 될것입니다. 민족과 국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신차려야 합니다. 한민족의 앞날이 어둡기 때문에 참으로 걱정입니다. 한국사람들을 보면 정신이 썩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믿고 배운 것도 가짜가 대부분이고 마치 죽을 날만 기다리는 중병 걸린 시한부 인생 환자를 보는 것같습니다. 정말 답답하네요. 답이 없으니 말입니다...
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이럴수록 현 상태에서 깨어난 국민들 부터 민심을 철회하는 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님이 걱정하신 바와 같이 머지 않아 우리는 다 죽고 살아남은 자들은 영구적인 노예로 절락합니다. 이것을 만들어 당할 수는 없잖습니까? 저가 출발할때 7년전에 큰 산을 하나 뚫어 터널을 내는것과 같이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뚫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우리 아들딸들이 살아갈 시간을 부모가 열어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에 남은 생명을 걸고 출발했으며 부족하지만 흔들리지 않습니다. 늦지어도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아시는 분 부터 도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