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할뱀의 형수이고 퇴계의 큰어머님인 찬성공 植의 첫째 부인은 의성김씨로 친정아버님은 김한철이며, 김한철은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이신 청계 김진의 증조부인 김한계의 바로 아래동생이며, 김한계의 모친은 안동권씨로 조선5대 왕인 문종의 비 현덕왕후(조선6대왕 단종의 어머니)와 자매지간으로 비운의 왕 단종과는이종사촌 간이다.
송재할뱀의 아버님이시고 퇴계의 조부이신 노송정 이계양은... 큰딸은 김한계의 며느리로 출가시켰고...큰아들인 찬성공 植의 장인은 김한계의 바로 아래동생 김한철이다.
노송정(온혜파)은 우리 송당파의 아버님댁이며 ....
송재의 형수이신 의성김씨가 시집올 때 전.답.노비 대신 책을 여러 수레에 가지고 왔다고 하며(당시 재산은 아들딸 구별없이 똑같이 상속) 아마 이 책이 우리 휼륭한 선조를 배출하는데 큰 역할 했을거라 생각합니다.
이래서 자손에게 재산보다 책을 물려주라는 속담이 생겼나 봅니다.
송재 할뱀의 형수이시고 퇴계의 친어머님이신 춘천박씨는 송재 할뱀의 부인인 월성(경주)이씨의 이질녀(언니의딸)로 월성이씨 보다 나이가 한 살이 적다.
송재할뱀은 처이질녀를 형수로 모셨고, 부인 월성이씨는 이질녀를 맏동서로 모셨다.
찬성공 植과 송재 遇의어머님이신 영양김씨의 집안은 예안현에서 큰 부자였다.
영양김씨는 농암 이현보(영천이씨)의 부친과는 외사촌간이다.
송재할배의 부친이고 퇴계의 조부인 李繼陽(1423-1488)의 장인은 영양김씨 金有庸 이며, 金智老의 아들이다.
김지로가 부호였는데, 재산이 의돈(춘추전국시대 魯나라 사람으로 왕후와 비길만한 富를 이룬 사람)에 비길만하다고 기록되어 요즘의 재벌급 아닌가 생각한다.
안동판관을 지낸 변계손이 자기 아들을 김지로의 사위로 삼고, 중앙에서 괸직을 지내고 은퇴한 뒤 예안현에 낙향하여 사돈에게 의탁할 정도의 富를 일구었으니 요즘말로 정경유착이다....ㅋㅎ
미루어 짐작컨데 영양김씨 할매가 시집올 때 많은 재산을 가지고 온듯하다.
그러하니 송재할배 형제분들 아랫대인 퇴계의 형제들 모두 유복하게 지낸듯하고 ..공부에 전념했으리라...
영양김씨 후손 일부가 지금 봉화 봉성면 외삼1리와 창평리에 살고있다.
우리 일가들이 알고 지냈으면 한다.
李繼陽은 1453년 30세에 진성이씨 최초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진성이씨가 武에서 文으로옮겨가기 시작...
다음 해 온혜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고 과거에는 응시하지않았다 ....
老松亭 繼陽할뱀은 1453년 30세에진성이씨 집안에서 최초로 진사시에 합격했다.
정상적인 경로라면 한양에 있는 성균관에 들어가 대과시험을 준비해야 되는데, 진사시 합격 후 다음해에 온혜에 집을 짓고 더이상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진사시에 합격한 해에 계유정난(수양대군이단종을몰아내고 왕위에 오름)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아들인 송재문집에는《정축년1457년(단종이 영월에서 피살된 해)이후 용두산 서쪽 기슭에 단을 쌓고 겨울에 천둥과 벼락이 치는날이면 북향하여 영월 쪽으로 절을했다. 후에 비석을세우고 그일을 기록했다(그봉우리를 국망봉 이라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인지?
정치적으로 비슷한 인물을 선택하여 겹사돈을 맺었다.(단종의 이종사촌인 김한계에게 자신의 큰딸을 그집의 큰며느리로 보내고, 그의 바로 아래동생인 김한철의 딸을 큰며느리로 삼는다) 노송정 할뱀은 우리 집안이 武에서 文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경제적으로 기반을 튼튼하게 했는데 아마? 이재에 아주 밝았던 듯 싶다.
자녀들을 어릴때부터 인근 절에 보내 공부하도록 하여 자녀교육에 전념했음을 알 수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재력 없이는 안되는 일이다.
그런데? 문집을 읽거나? 족보를 읽어보면 충돌이 발생한다.
노송정 繼陽의 아버님이신 정(禎)할뱀은 음사로 세종대왕 때 영변판관으로 약산성을 쌓는데 공을 세웠다(지금의 북한핵시설기지)또한 여진족 부락을 정벌한 공으로 한산(韓山충남서천)과 선산(善山경북구미 )의 府使를 지냈다.
또한, 세조 때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에 오르기도 했다.
족보에는 북방오랑캐를 토벌한 공과 증손 퇴계의 貴로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좌익원종공신에 책봉된 것은
눈을 닦고 비벼봐도 없다.
왜? 그럴까?
수양대군은 1459년 왕위에 오르는데 공을 세운 신하 44명에게 좌익공신을 훈봉하고...
민심안정과 요즘말로 정권유지를 위해 4년후1459년에 좌익원종공신 2000여 명을 책봉했다....
지방 고을에 영향력이 있으면 거의 포함되어 책봉....
이래서 족보에는 없다....
요즘말로 상벌남발이다.....
禎할뱀은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우양ㅡ주촌파
둘째.흥양ㅡ마라파
셋째.계양ㅡ 온혜종.노송정
세째 계양할배가 우리 송당파의 아버지집이고, 크게는 온혜종파( 노송정파.송당파. 온계파 상계파 .하계파 등등)를 이룬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진성이씨는 조선시대 정치적으로 南人으로 분류되는데
둘째집 마라파는 많은 선비가 배출 되었으나 노론 가문으로 분류되는데 ,
석병 이회보 이후 우율승무(우계 성혼, 율곡 이이를 문묘에 배항하는 문제)논쟁에 찬성하므로 西人으로 평가되었고, 자식이
없어 代가 끊어져도 그쪽집으로 양자를 보내지 않아 無後(후사가 없다)되거나 하여 진성이씨 문중에서 많이 쇠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