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세 서열관계의 의문점
1 이승명, 이성호, 이기명이 주로 상소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누구인지?
2 P84쪽에 ‘한성부 장적’을 살펴 보았다는데 “한성부 장적”이 있는지?
그리고 종실의 출생년도가 부전이고 종근은 생졸이 모두 부전인 상태에 한성부 장적에 기록이 있었는지도 의문이 들어 신뢰할 수 있는 자료로 보기 힘듬
3. 84쪽 족보를 위조하여 형벌을 받은 이근찬은 무신보에 참여도 하지 않았는데 누구인지?
4. 그 당시 이근찬은 힘이 없고 이승명 등이 세도를 등에 업고 상소하여 조정에 판결을 유리하게 혹시 받지는 않았는지도 의문이 됨
5 한자의 의미를 가지고 형,동생 순서를 주장하는데 신뢰할 수 있는 증빙 자료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이 듬( 씨앗이 있어야 싹이 트면서 뿌리가 생기니 씨앗이 먼저라는 주장도 나올 수 있어서)
6. 105쪽에 종근의 사위 대봉문집에 종근이 형이라고 써 놓은 것이 증거라는데 종근의 사위가 쓴것을 증거라고 하기가 좀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임.
7 온랑공 검강유겸의 글자 뜻으로 이름 지은 것이 서열순서라는 주장이 이해하기 힘들고 이것이 증거라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태임
8 133쪽에서 1차 격쟁이 1832년 시작했는데 종실·종근은 1400년 경 출생하여 400년이상의 지난 1830년대에서 400년 전의 서열관계를 조정에서는 어떤 증빙을 가지고 어떻게 판결하였는지 의문이 들고,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라든가 한성부장적이나 여러 가지를 판단하여 하였다면 그 당시 조정에 연이 있는 쪽에 유리하게 판결하였는지도 입증이 되지 않은 상태임
1. 무신보의 내용
학성이씨 무신보(戊申譜)는 임진왜란 이후 1668년 12월 청량면 율리 소재 청송사에서 5문 7현(익,정의,명,시만,기,찬우,달영)께서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 단권47장으로 학성이씨의 최초 족보이다
편찬을 주관한 이익(李)·이시만(李時萬)·이정의(李廷義)·이명(李蓂)이 쓴 서문과 간단한 범례와 시조 이예(李藝, 1373∼1445)의 사적 및 이예가 받은 향리면역공패(鄕吏免役功牌)를 권수에 싣고 보도(譜圖)는 5층횡간으로 배열한 다음 ‘학성이씨족보’라고 큰 글자로 판각하고 그 밑에 본관 울산부의 연혁을 주기하였다.
을미보서(乙未譜序)
부정공파(副正公派)의 파보(派譜)를 비로소 한 질 6책으로 편찬하였는데, 그 규정과 범례는 무신보(戊申譜)의 법을 그대로 준수하여 가히 한 집안의 믿을만한 역사라 하리라. 이제 46년이 지난 을미년(서기1956년)에 이르러, 덕 있는 이의 후손은 선조의 뜻을 실추하지 않는지라, 다시금 이 파보(派譜)를 이어 경술보(庚戌譜)의 규범을 그대로 따랐는데, 권수가 제법 많고 큰 일에 힘이 미약하여 한 해를 넘기고서 일을 마쳤다.
경술보서(庚戌譜序)
학성이씨(鶴城李氏)는 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인 학성군(鶴城君) 휘 철(哲)이 최초의 조상인데 그 뒤의 세대는 전하지 않고, 충숙공(忠肅公) 휘 예(藝)가 충성과 공훈으로 저명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세종 때 충숙공의 아들인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종실(宗實)이 세 번 대마도를 토벌하다가 바다에 묻혔는데, 국왕이 초혼하여 제사지내게 하였다.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아들 셋은 후대가 전해지지 않는다.
무신보서(戊申譜序)
공의 2남 중 장남은 종실(宗實)이다. 실직(實職)의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서 대마도를 토벌한 것이 무릇 세 번인데, 돌아오다가 바다 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건너지 못하였다. 국가에서 특별히 애도하여 포상하였다. 둘째는 종근(宗謹)인데,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현령(縣令)의 직책을 맡았다
2. 족보 발간 내용
시조: 예자 할아버지 1373출생(말응정은 울산 중구 명난로 115 태화동 말응정[명정마을])
구보:1668-1769, 신보:1770-1872가 있고, 1873(고종10년)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1668:무신보(구보)-1770경인세보-1912(학파선생파보)-1967(학파실기:화수회발간) - 1971(신해대동보) -1972(임자대동보)
1904(서면파보(봉사공))-1908(청량세보)-1910(부정공파보:농소)-1938(월진파보(참봉공))-1939(판관공파세보:곡강)-1939(봉사공세보)-1949(청량파보)-1958(학성세보:매헌공))- 2000경에 각파별 족보를 편찬하였다.
무신보(1668-1769에서는 종실을 장남으로 족보가 발간되었고, 경인세보(1769-1873)는 반대로 종근을 장남으로 되어있다.
그 후 1971신해대동보와 1972 임자대동보에서 서로 상반된 주장으로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3. 윤서에 대한 저자 개인의 견해
우리 선조 2世 할아버지중에 종실 할아버지가 장남이고, 3世의 7형제중 위로 세분은 不傳이며, 넷째 다섯째 할아버지의 倫序(윤서)가 분명치 않은 상태이다.
우리 직강 할아버지가 넷째가 되면, 우리 서면파가 鶴城이씨 전체 宗家(종가) 가 된다.
그리고, 2世 종근(청량파조)할아버지가 장남이면 당연히 청량파가 종가가 되는데, 왜 월진파와 항상 대립을 하는가 하면, 현재 월진파에서는 2世 종근 할아버지를 장남으로, 3세는 자기들 派祖(파조)이신 직검 할아버지를 넷째라고 주장을 하는바, 이렇게 되면 월진파로서는, 우리 서면파보다는 큰집이 되고, 청량파 종가와는 제일 절친한 사이로 지내고 있으니 나름대로 자존심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서면파와 곡강파, 농소파가 석계서원을, 월진파와 청량파가 용연서원을 고수하느라, 한 개만 있어야 할 始祖 할아버지의 신도비가 두 개가 되고, 그 내용 또한 다르게 서로 주장하고 있어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으며, 대립관계로 서로 내용증명을 보내어 법적으로 하겠다거나 조금도 양보가 없는 상태이다.
1955년에 구보(무신보)에 의거 5파가 모여 윤서를 서로 합의한바 있으나 이 또한 아무런 의미 없이 지금까지 서로 각자의 행보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시조 할아버지와 2세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약 300년이 지난 후에 최초 무신보라는 족보가 만들어 졌는 상황에서 정확한 근거로 볼 수도 없지만 후에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파보와 세보가 만들어 지면서 서로의 주장에 한치의 양보도 없는 실정이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아니면 성도 없는 상태에서 벼슬을 위해서는 좋은 성과 장남이 최우선 시대에는 큰집이 중요했지만 예자 할아버지가 태어 나신지 640년이 지난 현재는 첨단과학시대에 큰집이면 어떻고 작은 집이면 뭐가 불편한지 궁금하다.
제 생각에는 다 무시하고 큰집 작은 집을 정하지 말고 그냥 덮어두고 서로가 왕래하면서 지내는 것이 학성이씨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