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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logy of glory, theologia gloriae | theology of the cross, theologia crucis |
자명하게 받아들여지는 삶의 원칙과 신이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당연히 행동하기로 기대되는 방식에 근거한 신학. | 고난과 죽음의 연약함 안에서 드러난 신의 자기계시에 근거한 신학 |
인간이 신에게서 기대하는 것을 보증해 줌 | 인간이 신에 대해 상상하는 모든 관념을 부정함 |
신의 보이지 않는 영역을 마치 실제 일어난 일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것으로 여김 | 고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신의 영역을 명확하게 이해함 |
성취, 영광, 지혜, 따라서 악을 선호 | 고난, 십자가, 어리석음, 선을 선호 |
신에게서 지혜와 능력을 찾음 | 하나님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만 앎 하나님의 길과 만물의 당연한 이치는 일치하지 않음 신의 자기계시는 십자가, 세상의 어리석음과 약함의 형태로 드러남 (고전 1:18-31) |
하나님의 자비: 의인만을 위해 유보됨 | 죄인에게 주어짐 |
하나님의 능력은 : 권능 가운데 드러남 | 약함 속에 드러남 |
하나님의 지혜는 : 명언처럼 자명함 | 비유와 역설 속에 감춰짐 |
하나님의 생명은 : | 죽음 속에서 드러남 |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함 (결국 잃음) |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잃음 (결국 구함) |
인간의 기대와 욕망에 응답함 | 인간의 지혜로는 신의 부재한다고 판단하는 상황 속에서 즉, 불확실, 위험, 고난 속에서 신을 찾게 됨 |
Douglas John Hall: Lighten Our Darkness (1976), Thinking the Faith, Professing the Faith, Confessing the Faith (1989,1993,1996) | |
북미의 기독교 제국 신학 (North American Christendom) | 십자가의 토종 신학 (indigenous theology of the cross) |
문화적, 공공적 낙관주의; 국가적 진보; 과학기술의 발전; 개인적 성취, 교회의 성장; 공적 영역에서 성공과 고효율 지향; 고통으로부터 해방; 정치적 영향력 확대 | 기독교왕국 부인; 신앙≠ 확실; 소망≠ 낙관주의; 사랑≠ 고통회피; 십자가 장식≠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야 |
마가복음은 도와주고, 치유하고, 환대만 하는 관용이 넘치는 낭만적인 측면만 가진 메시아상을 거부한다. 마가복음은 또한 인간의 가능성을 향상시키는데 집중하는 기독론도 배제한다.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려있는 그의 죽은 몸을 인식하는 것이고, 제자의 길은 우리 자신의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주석적 관점
▶ 마가복음에서 결정적 순간은 베드로가 “ 당신은 메시야입니다” (8:29)라고 고백하여 최초로 예수의 진정한 status 깨달은 때이다. 이 본문은 예수의 메시야되심과 제자됨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 “ 인자가 반드시 고난을 받는다” (8:31-33)고 할 때 ‘ 인자’ (Son of Man)는 다니엘서 7:13-14에 처음 사용했는데, 사람을 지배하고 왕 되시는 하늘에서 오신 사람을 가리킨다. 마가에서는 여러 차례 예수가 자신을 가리켜 이 용어를 사용했다. 앞에서도 지상의 권위와 관련하여 예수는 인자라 칭했다.(2:10, 28) 인자와 고난을 연결시키는 것은 새로운 용법인데 이는 자신의 메시야직의 본질을 가리킨다. 인자가 반드시 고난당하고 죽고 그리고 다시 사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반드시(must, dei)는 단순히 고난, 죽음, 부활의 불가피함을 말하기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임을 말한다.(9:12; 13:7-11)
▶ 예수의 이 말에 베드로가 즉각적이고 극적으로 반응했는데 그는 예수를 바짝 잡아당기고 ‘ 꾸짖었다’ (rebuke). 마가에서 이 용어는 예수가 사탄과 불결한 영(1:25;3:12;9:25), 몰아치는 바람과 바다를(4:39)를 꾸짖을 때, 그리고 제자들과 군중들이 지나친 청원자들을(10:13,48)꾸짖는데 사용되었다. 제자가 스승을 이렇게 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마가는 무엇이 베드로가 이렇게 반응했는지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았는데, 문맥으로 보아 베드로는 메시야가 고난받고 죽는 인자라는 것에 반대하며 메시야에게 왕, 권력, 승리라는 전통적 기대를 하고 있다(시2편 참조).
▶ 이러한 베드로에 대해 예수의 반응도 극적이다. 예수께서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시고, 베드로를 꾸짖어 말씀하셨다. 제자들을 본 것은 그들도 베드로와 제자직과 메시야직에 대한 생각이 비슷함을 암시하며, 여기에서 예수는 베드로가 고난받는 메시야를 거부하는 것을 예수의 시험한 사탄에 연결시킨다(1:14-15). 고난받는 메시야를 거부하는 것은 인간적 생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다. “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 제자들도 고난 받아야 한다.(34-39). 만약에 메시야가 고난 받아야 한다면 그를 따르는 자들도 고난 받아야 한다. 예수는 제자들을 쳐다보면서 베드로와 논쟁했듯이, 예수는 그를 따르려는 군중들에게도 이 말을 전하고자 한다. 누구든지 “ 나를 따라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은 아마도 박해받는 공동체였던 마가공동체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다. 그들에게 이 메시지는 명확했는데 구원의 길을 박해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충실하게 견뎌내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 자기를 부인하는 것” 은 실제적 박해가 없는 공동체에게도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이 말은 자신의 관심에서부터 다른 사람을 봉사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와 힘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9:35;10:43) 본문은 재림과 연관된 제2의 선언으로 마치는데 누구든지 예수와 예수의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재림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라는 경고이다.
▶ 본문의 패턴 즉 예수의 고난의 예고와 제자들의 오해와 거부, 제자직에 대한 가르침 마가에서 두 번 더 나타난다.(9:30-37; 10:32-45) 반복되는 메시지는 여전히 제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르지 못함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 이야기에서는 이해의 모델을 보여주는데, 마지막 동전을 포기한 과부(12:41-44), 십자가를 대신 지 구레네 시몬(15:21), 향유를 뿌린 여인(14:3-9), 눈을 뜨고 예수의 길을 따라 나선 소경 바디매오(10:46-52) 등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저항과 부정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에게 희망은 없을까? ▶ 마가의 세 번이나 반복되는 메시지(8:22-10:52)는 소경을 눈을 뜨는 기적이야기와 연결되어져 있다. 벳새다의 눈 먼 사람을 고친 이야기는(8:22-26)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에 예수가 손을 대었을 때에는 희미하게 보다가, 두 번째 손을 대었을 때 명확하게 보게 되었다. 이것은 확실히 비록 베드로와 같이 처음에는 예수의 고난이 하나님의 계획과 진정한 제자직을 위한 길에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불완전하게 본 사람도 두 번재는 완전히 보게 된다는 약속을 주고 있다 하겠다.
목회적 관점
거의 모든 예배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물로 가지고 있다. 다른 상징들보다 신뢰할 만한 상징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신약의 모든 책들은 예수의 구속 사역의 실체를 규명하는 핵심으로 십자가를 지목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사람을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으려는 죄와 죽음의 장벽 너머로 다리를 놓은 것이다. 십자가가 없으면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는 부활 안에서, 그리고 부활을 통해서 가시화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앙의 중심적인 상징이다. 폴 틸리히는 십자가라는 상징이 자기 자신 너머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는바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의 실체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마가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에 대한 전조라는 극적인 이야기로 예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독자는 베드로가 예수가 메시야라고 그의 신앙을 선포했고, 예수는 그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 일을 상기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가 침묵하라고 명령한 이유를 밝혀준다. 예수는 그들에게 그가 직면할 일들, 배신, 부인, 고통, 죽음 그리고 마침내, 그리고 가장 신비스러운, 부활에 대해 더 가르쳐야 했다.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단순히 그가 치유하는 것을 보고, 그가 가르치는 것을 듣는 것 이상이다. 예수는 그의 십자가에 관하여 명백하게 말하는데, 친밀한 제자들과 큰 무리 양쪽 모두에게 말한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자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만 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명을 잃어야 한다. 왜 모든 예배당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중심에 두면서, 우리 자신의 십자가는 어디에서도 상징화하지 않을까? 신약성서의 공동 증언은 십자가를 예수가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정에 대한 가시적인 상징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고 우리를 위한 그 여정과 복음을 찬양할 권리가 있다. 마가복음이 기록되기 오래 전에 이 증언은 이미 서신들 안에서 그렇게 제안했다. 마가는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것을 복음의 중심에 둔다. 마가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예수의 첫 번째 부르심으로 예수의 제자가 되거나 교회에서 안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려면 예수가 그 자신의 길에서 했던 바로 그 일을 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과 함께 자기 자신의 신앙의 여정을 책임지고 가야 한다. 제자도는 희생하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것을 포함하고, 우리가 받은 것을 줌으로 놀라운 구원의 발견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예배의 마지막 말은 회중을 향한 우리의 축도인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라는 권고일 때가 많다. 하지만 각자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가 앞서 걸어가신 희생의 여정을 우리 스스로 가기 위해 전적인 책임을 지라는 예수의 부르심이라는 영원한 상징이 없어서, 교회가 제자 대신 회원으로 채워지고 있다. 사순절은 십자가를 향한 예수의 여정의 온전함을 기억하면서, 우리를 제자로 부르시는 예수의 요청에 응답하기 적합한 때이다. 이 계절에, 우리의 예배당에 십자가나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만 묵상하지 말고,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모든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사랑과 섬김의 길을 가라고 요청하는 예수의 그림도 함께 묵상하자.
설교적 관점
-사순절 기간에 가장 중요한 질문은 “ 예수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간동안 또 “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도 함께 해야하는데 마가는 이 두 질문이 상호연관되어 있음을 전제하면서 답을 찾아가고 있다. 우리는 메시아 예수의 제자됨을 이해하기 이전에 먼저 예수에 있어서 메시아가 의미하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1세기 유대인들간에 다르긴 했지만 메시아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고 갈릴리는 이 혁명적 실천의 온상이었다. 예수의 갈릴리 제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고 어느 누구도 고통받고 죽어가는 메시아를 기대하지 않았다. 8:31-31a에서 예수가 큰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서기관들에게 거부당하고 그리고 죽음을 맞게되고 또 3일후에 살아날 것을 이야기 했지만 이 가장 중요한 사실에 제자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고난, 거부, 죽음을 말했을 때 제자들은 듣기를 멈춘 것이다. 들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메시아이해에 있어서 부활은 필요가 없는데 그것은 메시아는 결코 고난을 당하거나 죽지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예수가 말하는 고난받는 메시아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은 불신앙으로 이어진다. 예수의 메시아적 일정을 받아들이지 못한 베드로는 이미 바로 전에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했지만(29절) 그래서는 안된다고 펄쩍 뛴다. 베드로는 예수에게로 가서 자신의 팔을 그에게 두르고 메시아됨에 대해 말한다.“ 고난, 거부, 죽음은 메시아의 일정이 아니다. 명성, 권세, 지배가 메시아가 가는 길이고 권세와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는 다윗의 위에 앉는 것이다. 우리는 왕관을 따라 여기까지 왔지 십자가가 아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선입견으로 눈이 가리워져 있었다. 그 선입견은 베드로가 메시아가 가야만 하는 길을 보지 못하게 하였다. 우리들 또한 얼마나 이런 죄를 범하고 있는가? 우리들의 편견, 추측, 선입견등으로 눈이 가리워져서 우리가 원하는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우기고 심지어는 예수께서 말한다 해도 우리를 설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꾸짖는다. 베드로가 속이는 자 사탄을 위해 말한다고 비난한다. 예수의 사역 초기부터 사탄은 그 사역의 방향을 십자가로부터 세상의 권력을 잡는 메시아로 바꾸려하였다. 광야에서의 유혹 (막 1:12-13, 마 4:1-11, 눅 4:1-13)은 다른 메시아가 되게하여 십자가를 피하게하는 유혹이었다. 베드로의 항변은 우리 인간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예수께서 말한다. 승리로 가는 길은 권력과 세력을 얻는 길이고 이들은 모든 것을 정당하게 만들고 영광스러운 왕국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승리로 가는 길은 그렇지가 않다. -34절에 예수는 제자들뿐 아니라 군중들에게 말한다. 이것은 예나 지금이나 제자다 되려는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는 각자가 자아를 부인해야만 한다(We must "deny" self). 이 자아(self)는 에덴동산 이래로 문제의 근원이 되어왔고 이 자아가 우리를 다스리는 한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을 것이다. 1세기 팔레스틴에서 십자가는 한가지를 뜻했는데 그것은 죽음 곧 감히 황제의 나라를 위협했던 어느 누구에게나 가해지는 잔인하고 사악한 죽음이었다. 예수의 청중들은 십자가를 진다는 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C.E 6년에 그들은 로마가 2천명의 갈릴리 반란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을 이미 목격하였다. 자아가 지배하는 한 우리는 왕국으로 향하는 고통없는 지름길을 영원히 찾고있을 것이다. 십자가를 대신할 다른 길을. 하지만 우리 자아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질 때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있다. 다른 길을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그 길을 곧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신 분에 대한 부인이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도이다. 결국 진정한 메시아에 대한 이해와 참된 제자됨은 상호연관되어 있다. 결국 예수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생명을 내어준 고난받는 자로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 또한 우리를 이해하고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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