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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잡록(亂中雜錄) "조선(朝鮮)은 중국(中國)"! (1)
○ 본인(本人)은 『조선(朝鮮)은 중국(中國)이며, 중국(中國)은 조선(朝鮮) 조정(朝廷)이 있는 곳을 말한다고, 단정적(斷定的)으로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수백(數百)년 또는 수천(數千)년 전의 기록(記錄)으로 주장하는 것이며, 유물(遺物)이나 유적(遺跡)이 더해진다면, 확실(確實)하게 증거(證據)된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은 분명(分明) 대륙(大陸)에 있었으며, 지리적 위치는 “중국(中國)”이며, 그곳은 중원(中原)의 땅이었다. 이곳은 과거 “한도(漢都) 장안(長安)”으로 명명되던 곳이다. 또 여러 조선(朝鮮)의 각 나라의 도읍지(都邑地) 역시 하(河)를 중심(中心)으로 동서(東西)방향인 “횡축(橫軸)”선 상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물론 왕조(王朝)의 부침(浮沈)으로 천도(遷都)는 항상 있었을 것이나, 중심지역이 그렇다는 것이다.
○ 역사를 해설함에 있어, 심정적(心情的)이나, 정황(情況)상으로, 음(音)의 전음(轉音)이니 하는 그런 막 연(漠然)한 추측이나, 추정(推定)등의 추리(推理)로 역사(歷史)를 해설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것은 현대사(現代史)의 해설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 요즘 현대사(現代史)에서, 전 대통령 이 승만, 박 정희 또는 전 군인이었던 “백 선 엽” 등 많은 이들의 인물(人物) 평을 보면, 현(現) 시점에서 과거를 평가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 아주 흔하다. 『잘한 일은 분명 잘 한 것이고, 잘못한 일은 분명 잘못한 것이다.』
○ 지금 현세(現世)의 대한민국(大韓民國) 입장에서 바라보는 인물평, 조선(朝鮮)이나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인물평은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것을 혼동(混同)해서는 정당한 인물평이 나올 수 없으며, 자신의 입장에서 과거의 인물(人物)을 평가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일 수 있는 것이다.
● 아래의 것은 “난중잡록(亂中雜錄)”속에 있는 내용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표현되는 과거 “조선(朝鮮)과 왜(倭)”와의 7년간에 걸친 전쟁사를 다룬 것이다. 이곳엔 우리들이 의문을 품고 있었던 몇 가지 사항을 아주 세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당시 “왜(倭)”는 “상국(上國 : 조선)”에 대한 “반란(反亂), 항명(抗命)” 그 이상의 명분(名分)이 없었다는 점이다.
<긴 해설이 될 것 같습니다. 몇 편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원문텍스트와 번역”은 “한국고전종합 D B 고전변역서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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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朝人許儀後.擄在日本.見秀吉入寇之狀.上疏天朝云.陳機密事人許儀後.爲協忠報國事等.辛未年.過廣東.連船被擄.幸以小道.見愛於日本薩摩之君.苟存性命.每恨不逞之徒.引倭我大國商漁船擄掠.愁苦萬狀.乙酉年.後等.協俱哀告于薩摩之君.殺死陳和,吾錢小輩十餘酋.沒其妻孥餘賊.走入東浦寨,暹羅,呂朱等處. : 천조【 본인 주 : 天朝 - 중조(中朝)를 말하는 것으로 “신주(神州)”의 주인 곧 황제, 천자가 있는 조정을 말한다.】사람 “허 의 후(許 儀 後)”는 포로가 되어 일본에 있었는데, 수 길이 침공(侵攻)할 모양을 보고 천조(天朝)에 다음과 같이 상소하여 이르기를 ; 기밀을 말하는 사람 “허 의 후”는, 충의로 나라에 보답하기 위한 것입니다. 신미년【조선 선조 4년(1571)】에 광동(廣 東)을 지나다가, 배와 함께 포로가 되었으나, 다행히 작은 기술이 있어, 일본 “살 마(薩 摩)”의 군(君 : 임금)한테, 사랑을 받아,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고 있습니다.(苟存性命). 못된 무리들이, 왜(倭)들을 인도하여 우리 대국(大國)의 상선과 어선을 노략질하고, 온갖 괴로움을 다 당하는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왔습니다. 을 유 년【선조 18년 (1585)】에 우리들이, 함께 협력하여 “살 마”의 군(君)에게 슬픔을 고하자, 진 화(陳 和)ㆍ오 전소(吾 錢 小) 등 10여 두목(酋)을 죽이고, 그들의 처와 자식을 몰수(沒收)하니, 나머지 도적들은, 달아나서 <동 포 채>【 東 浦 寨 : 본인 주 : 앞의 동(東)자는 간(柬)의 오자가 아닐까 한다. 간 포 채(柬 埔 寨)는 바로 진 랍 국(眞 臘 國)으로서 안남(安南)과 섬라(暹 羅) 사이에 끼어 있는데, 처음에는 ‘감 발지(甘 孛 智)’라 하다가 만력(萬曆) 연간에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섬라>【暹 羅 : 태국】, <여주>【본인 주 : 呂 朱 :呂 宋 : 필리핀? 명사열전에는 불랑기와 같다고 하였다. : 呂宋居南海中,去漳州甚近.已,竟乘其無備,襲殺其王,逐其人民,而據其國,名仍呂宋,實佛郎機也.】 등지로 들어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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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남(安南)과 섬라(暹羅)사이에 있는 간 포 채(柬埔寨)국!!!!!!!!!!! 섬라(暹羅)는 현 태국(泰國)이라 하고, 안남(安南)은 운 남 성(雲南省)지방이라고 하는데, 지형(地形)지리(地理) 및 방향(方向)으로 봐도 “간 포 채(柬埔寨)”나라는 있을 곳이 없다.
억지로라도 끼워 넣는다면 “라오스” 땅이 있을까!
● 당시의 왜(倭)가 열도(列島)를 근거지(根據地)로 했다고 봤을 때 위의 기록은 허구(虛構)의 사실이 될 뿐이다. 대륙의 남쪽 광동(廣東)해안 근처에서 왜구(倭寇)의 포로(捕虜)가 되어 현 열도(列島)지방으로 끌려가 생활하던 당시의 대륙인 “허 의 후” 의 사정으로 “살 마(薩摩)군주”가 왜구(倭寇)들을 토벌하자 이들은 “간포 채(柬埔寨). 섬라(暹羅). 여송(呂宋)”등지로 도주하였다고 적고 있다. 열도(列島)에서 “간포 채(柬埔寨). 섬라(暹羅). 여송(呂宋)”등지로 도주(逃走)하는 것, 이게 가능한 일일까?
● 더 중요한 사실은 위에서 말하는 나라들 곧 “간포 채(柬埔寨). 섬라(暹羅)”등은 현재의 동남아(東南亞)가 아닌 그 서쪽의 인도(印度)의 남쪽에 있었다는 조선사(朝鮮史)의 기록이다. 그렇다면 당시의 “왜(倭)와 일본(日本)”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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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 상 만력 20년, 선조 25년(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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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왜인 귤 광련(橘 光 連)이 의(義)를 위해 죽다. 귤 광련은 일명 강 광(康 光)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대마도(對馬島)의 작은 두목[小 酋]이다. 경인년(선조 23, 1590) 이전에도 누차 왜의 사신이 되어 우리나라에 내빙(來聘)하였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후한 상과 높은 작위로 특별히 회유하였다. 경인년에 이르러, 그가 현소(玄 蘇) 등과 함께 정탐하러 왔을 때, 귤 광련이 은밀히 우리 조정에 고하여, “일본의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하기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러 해 동안 모략을 쌓은 끝에 상국【上國 - 명나라를 말함 : ➡ 본인 주 : 이것은 잘못된 번역이다. - 조선(朝鮮)을 말한다.】을 침범할 계획을 결정하였으니, 지금 온 두목들을 죽여서 큰 화를 막도록 하십시오.” 하였는데도, 우리나라에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이번에는 수길(秀 吉)이 귤 광련이 우리나라를 자세히 안다고 해서 그로 하여금 의지(義 智) 등과 함께 선봉을 갈라 맡아 가지고 날짜를 정해 바다를 건너가게 하였지만, 귤 광련이 그 명령을 거부하고 말하기를, “이번 출병(出兵)은 무슨 명목에서인가. 조선으로 말하면 일본의 좋은 이웃이다. 2백 년 동안 조금도 틈이 없이 우호 관계를 유지하며 최대한의 성심을 다해 왔는데, 어찌하여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켜 상국의 땅을 범하려고 한단 말인가. 하물며 나는 상국의 후한 은혜를 받았으니 죽을 것을 산 것도 뼈에 살을 붙여 준 것도 모두 그 은덕이 아닌 게 없다. 내 비록 보잘것없는 존재이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만은 지니고 있다. 머리 위에 하늘의 해를 이고 있으면서 어떻게 차마 은덕을 잊고 감히 조선을 짓밟고 지나가겠는가. 한 번 죽기는 마찬가지다. 군사를 몰고 바다를 건너가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 하다. <光連拒之曰.此兵何名也.夫朝鮮日本.善隣也.二百年間.少無釁隙.通成交好.極盡誠心.奈何渝盟而興兵.欲犯上國之境乎.況我受上國厚恩.生死肉骨.莫非其德.我雖微眇.亦人心耳.頭戴天日.其何忍背恩忘德.敢過朝鮮之地乎.一死所矣.決不爲驅兵而渡海也.>
의지가 이 말을 수 길에게 전하여 알리자, 수 길이 대노하여 곧 귤 광련을 잡아다 목 베어 대중에게 보이게 하고 또 구족(九族)을 멸하게 했다. 귤 광련의 한 아들은 요행히 상인으로 먼 섬에 나가서 머물러 있었는데, 이 변고를 들어 알게 되자 곧 행장을 버리고 성명을 바꾸고는 도망가 숨어서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다.그 후 만력 34년 병 오 년(선조 39, 1606) 일본 국왕 원 가 강(源 家 康)이 평성(平 姓)을 다 없애고, 서신을 써서 사신을 보내고는 다시 통신하기를 청해 왔다. 예조(禮 曹)에서는 무과첨지(武科僉知) 전 계신(全 繼 信)과 역관(譯官) 박 희 근(朴 希 根)을 회 답사(回 答 使)로 하여 일본에 보냈다. 이들이 대마도에 당도하여 귤 광련의 아들을 만나 보기를 원했더니, 성이 귤과 다른 한 왜인이 와서 그 이유를 캐는 것이었다. 전계신 등이 그가 귤 광련의 아들임을 알아채고 백방으로 그를 위로하면서 극진한 은의를 베풀었다. 귤 광련의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전에 있었던 일을 다 말했다. 회답사가 돌아와서 경상 감사에게 자세히 보고하였고, 감사 유 영순(柳 永 詢)이, 이 일을 조정에 갖추어 상주(上奏)하니, 조정에서 의론한 끝에 귤 광련의 사당을 부산(釜山)에 건립했다. 그 후 신해 년(광해군 3, 1611)에 유상(柳 相)이 나한테 이 일을 자세히 전해 주기에, 내가 기특하게 여겨 그 일을 기록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천부의 양성이란 구해서 오는 것이 아니련만 / 秉 彝 良 性 非 求 至
난에 임해서는 어찌하여 신의 적단 말고 / 臨 亂 胡 爲 少 信 義
의관 갖춘 사람마저 나라 저버리고 부끄러움 모릅디다만 / 衣 冠 負 國 尙 不 恥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겠는가 / 夷 狄 之 人 乃 如 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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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적 땅의 사람으로 이럴 수 있겠는가 / 夷 狄 之 人 乃 如 此>......... 이 말은 왜인(倭人)으로써, 상국(上國)인 조선(朝鮮) 땅을 침범(侵犯)하려는 “평수길(平秀吉)”에 대한 반항(反抗)으로 받아들여져 참수(斬首)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恨歎)한 내용이다.
● 왕조실록 <성종 12년 신축(1481, 성화 17) 10월 17일(무오)> 기록에 있는 ; <동이(東夷)는 부상(본인 추가)과 일본(日本)으로써 바다로 둘러싸인 나라이며,>라는 기록과 연결되는 문구로써 본시 이(夷) 는 조선(朝鮮)이 아니며, 통 털어 “동이(東夷)”이나 사해(四海)의 이족(夷族)을 다스리고, 통치함에 그 중심(中心)의 조정(朝廷)이므로, 화【華 : 화(花) : 꽃의 중심으로 꽃술을 뜻한다.】라 하는 것이다.
● 고전번역원의 번역자는 원문(原文)에도 없는 “명나라”를 상국(上國)이라 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다. 번역(飜譯)은 원문(原文)에 충실해야 한다. 원문(原文)의 내용과 전혀 다른 내용이 된다면 바로 왜곡(歪曲)이요, 조작(造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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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三十日.車駕西幸.前數日.都中一空.大小臣僚.近侍衛卒.一時散去.上痛泣曰. (중략) : 30일. 거가(車駕)가 서행(西 幸)하다. 이보다 수일 앞서, 서울 안이 싹 비어 버렸고 대소의 신료(臣 寮)ㆍ근시近侍)ㆍ위졸(衛 卒)들이 일시에 흩어져 가 버리니, 임금은 가슴 아프게 울면서, (중략).》
(2)《 初 三 日 賊 入 長 安 城 中. : 초 3일 왜적이 장안 성(長安 城) 안으로 들어오다. 하루 전날, 왜적이 성문 밖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성 안의 반도(叛徒)들이 나와서 맞이하면서, “나라는 비었고 임금이 없으며, 성은 버려져 지키지 않는다.” 하자, 왜적이 그 제서야 성 안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
(3)《漆浦萬戶文貫道.聞大駕西巡.西向再拜.痛哭良久.兩南義之.出慶尙巡營錄. : 칠포만호(漆 浦 萬戶) 문관도(文 貫 道)는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순행(巡幸)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서쪽을 향해 재배하고 퍽 오랫동안 통곡하였는데, 호남과 영남에서는 그를 의리 있다고 여기다. 경상순영 록에 나온다. 》
(4) 《전라 감사 이광(李 洸)이 전 부사 고경명(高 敬命)에게 보낸 서한에, <大 駕 西 狩. 京 城 不 守. 國 事 至 此. 慟 哭 慟 哭. : 대가가 서쪽으로 순행하고 서울은 지켜내지 못했습니다. 나라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할 일입니다.> 라 하였다.
○ “왜(倭)”가 침략(侵略)하여 동(東)쪽과 서(西)쪽으로 충돌하여서【衝突東西】10일 이라는 짧은 시간에 관령(關嶺)을 넘어, 곧바로 경사를 두드렸다.【直 搗 京 師】고 한다. 이때 “조선(朝鮮)”의 군주(君主)였던 “선조대왕(宣祖大王)”께서는 “서(西)”쪽으로 순행【巡幸 :임금이 나라 안을 두루 보살피며 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하였다고 좋은 말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상(實狀)은 “적(敵)”을 피해 도망(逃亡)간 것이다.”
○ (2)를 보면 ; <初 三 日 賊 入 長 安 城 中. : 초 3일 적이 장안 성(長安 城) 안으로 들어 왔다.>고 적고 있다.
○ “난중잡록(亂中雜錄)” 을 보면, 반도(半島)의 지리(地理)와 지형(地形)과 방향을 완전 무시한 채로 알 수 없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분의 기록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은 【 전라도(全羅道) 남원(南原)에서 유학자(儒學者)이며 무용(武勇)을 겸비한 의병장(義 兵 將)으로 이름이 높은 산서(山 西) 조 경남(趙 慶 男) 선생이 저술한 것이다. 그의 자서 문(自序 文)에 이르기를, “7년의 긴 세월을 전쟁으로 지나오면서 나랏일에 큰 힘이 되지 못하였으나 마음만은 이 나라와 왕실을 떠나지 못하여, 승전한 기록은 기쁜 마음으로 춤추면서 쓴 것이고 패전한 기록은 통분한 마음으로 쓴 것이다. 다른 날 이 책이 지사(志士)가 무릎을 치면서 감격하여 읽을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하였다. 】고 했기 때문이며, 이 분은 『자신이 직접 체험(體驗)한 것과,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는 것이므로 당시(當時)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분이다.
➊ 반도조선(半島朝鮮)의 지형(地形) 특성 상 “남북(南北)은 길고, 동서(東西)는 짧다.” 또한 열도(列島)에 왜(倭)가 있었으며, 이곳에서 배를 띄워 “반도조선(半島朝鮮)”을 침략했다고 했기 때문에 어떤 길을 택했다 하더라도 “남(南)쪽에서 북(北)쪽으로 진격(進擊)해야만 그들의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지형(地形)지리(地理)를 무시한 채 “동(東)쪽과 서(西)쪽 지방에서 충돌(衝突)하였다.”는 말은 그 현장은 “반도(半島)”일 수 없다는 점이며,
➋ 만약 당시 “선조(宣祖)”가 서쪽으로 행차를 했다면, 배를 타고 대륙(大陸)으로 도망(逃亡)가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이나, 선조(宣祖)는 대륙(大陸) 땅으로 피신(避身)한 적이 없다. “선조(宣祖)”는 임진(臨津)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 송도(松都)를 거쳐, 평양(平壤)과 의주(義州)로 갔다고 했기 때문이다.
➌ 임란(壬亂) 당시의 한양(漢陽)에 있었던 『황성(皇城)의 이름이 장안 성(長安城)이었다.』는 것을 이 기록에서 증명(證明)이 된다. “장안 성(長安城)”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한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것이나, 조선(朝鮮) 백성(百姓)중의 한 사람이었던 자연인이 기록한 것에서 “장안 성(長安城)”을 찾는다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곧 『장안(長安)은 곧 평양(平壤)이며, 서경(西京)이며, 낙랑(樂浪)의 땅이며, 한양(漢陽)이며, 한성부(漢城府)였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朝鮮) 황제(皇帝) 선조대왕(宣祖大王)이 “서(西)”쪽으로 서천(西遷)했다는 말은 곧 장안(長安)을 떠나 서쪽으로 갔다는 말이며, 반도(半島)의 형세와는 전혀 다는 지방임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임진(壬辰)년 왜(倭)의 반란(反亂)으로 시작된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대한 설명은 새로운 방향에서 재구성(再構成)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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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令羅道都巡察使.爲通諭道內父老軍民等事.嗚呼.最爾倭賊.毒鍾蜂蠆.性毓蛇虺.陰懷猾夏之心.敢肆跳梁之患.陷城池數十餘處.屠士卒幾千萬人.恇怯守臣.聞聲而鼠竄.愚駭群姓.望風而波奔.嶺南山河.盡入豺虎之窟穴.湖西草木.半染犬羊之腥膻. : 전라도 도순찰사를 시켜 도내의 부로(父老)와 군민(軍民)들에게 유시하다. 아! 조그마한 왜적들이 독하기론 벌과 전갈이 모인 듯하고, 천성은 뱀을 타고났도다. 그들은 음흉하게도 중국을 어지럽힐 마음을 품고는, 마구 날뛰는 침략 행위를 감행하여 성을 수십여 군데나 함락시키고 장병을 몇 천만 명이나 도륙하였건만, 겁쟁이인 수비 담당의 신하들은 그 소문을 듣자 쥐같이 도망쳐 버렸고 우매하고 놀란 백성들은 그 모습을 바라보자 굽이치며 달아났다. 영남의 산천은 깡그리 승냥이와 범 같은 왜적의 굴혈이 되었고, 호서의 초목은 반이나 개나 양같이 천한 왜적의 비린내로 물들었다. 》
➡ 위 글을 보면 “조선(朝鮮)”이 “하(夏)”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하(夏)는 화하(華夏)이며, 화(華)이며, 중화(中華)를 말하는 것이다.
➡ 이는 “증보문헌비고” 동요 편의 <壬 辰 倭 亂, 聞 賊 勢 甚 急, 以 四 月 三 十 日, 去 彬 大 雨.......임진왜란, 적의 세력이 성하다는 말을 급히 듣고, 4월 30일 빈(彬)을 떠나는데 큰 비가 내렸다>는 말과 같은 것으로 『 빈(彬)은 빈(邠)과 같은 곳이다. 』
○ 지봉유설에 기록된 일본(日本)의 지형지리(地形地理) 보면 ; <원문 : 日本舊名倭奴.漢武時始通中國.至唐改號日本.東西五千餘里.南北數百里. : 일본(日本)은 옛 이름이 “왜노(倭奴)”이다. 한(漢) 무제(武帝) 때 처음으로 중국과 통하였다. 당(唐)에 이르러 이름을 고쳐 “일본(日本)”이라 하였다. 동서(東西) 오천(五千)여리이며, 남북은 수백(數百)리이다.>라 하였으며, 다산시문집에는, 일본(日本)의 지형(地形)은 남북(南北)이 짧고 동서(東西)가 길어서 마치 거문고를 비껴 놓은 것 같은데, 그 동북(東北) 각만이 좀 뾰족할 뿐이다.
○ 수없이 설명한 내용이다. 왜(倭)는 결코 열도(列島)에 존재(存在)할 수 없다. 근세(近世)에 일단(一團)의 무리들이 원주민(原住民)들을 정복(征服)하고, 『이곳이 옛 왜(倭)의 근거지였다.』고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 반도(半島) 땅에 “조선(朝鮮)의 황제(皇帝)는 없었으며, 열도(列島) 역시 왜(倭)는 없었다.” 근세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 조선(朝鮮)의 광대(廣大)한 영토가 분할(分割)되면서, 자신들의 몫을 차지했을 뿐이다. 미국(美國)은 필리핀을, 영국(英國)은 인도와 아라비아반도를, 불란서(佛蘭西)는 베트남등과, 왜(倭)는 열도(列島)를 말이다.
○ 동물(動物)세계의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法則)은 인간(人間)에게도 예외(例外)없이 적용(適用)된다. 인간(人間)도 동물(動物)이니까 말이다. 조선(朝鮮)을 해체(解體)한 자들에 의한 분노(憤怒)를 표출하면서 욕해본들 혈압(血壓)만 올라갈 뿐이다. “조선(朝鮮)” 왕조(王朝)를 구성하고 있었던 자들의 무기력(無氣力)과 권력다툼, 부정부패(不正腐敗), 천심(天心)의 이탈, 조정(朝廷)에 대한 민심(民心)이탈(離脫), 서양세력들에 의한 평등주의(예수교의 전도)의 전파 등 여러 가지 요인(要因)이 있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다툼으로 인한 치사한 싸움은 항상 교훈을 주는 계기가 된다. 곧 망한다는 이야기다. 대표적인 것이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권력싸움으로 외세를 끌어들여 “막장”까지 간 것 아닌가!
○ 이런 사정을 감안해 보면, 외세(外勢)를 욕한다는 것이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이다.” 해방(解放) 이후의 역사 역시 똑같은 상황이다. 누굴 욕할 수 있겠는가? 이승만, 박정희, 친일 군인들! 그들은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사회에서 승리(勝利)자의 편에 줄서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자들을 청산(淸算)하지 못한 자들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의 할아버지요, 아버지요, 선배요, 동료이다. 누굴 욕할 수 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자는 나와 보라.
○ K. B. S에서 <장군 백 선 엽>에 대한 편파적 방송이 있었다.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곳에서 이러한 것을 여과 없이, 청산 없이, 반성 없이 전파를 타게 했다는 것은 수신료 인상 반대와 수신료 거부 등의 명분으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도(正道)를 지키려 했다면, 과거의 잘잘못을 인정하고, 신생 대한민국의 군인으로써 혁혁한 전공을 세워 국가를 위해 온 몸을 바쳤다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했다. 미화(美化)된 영웅(英雄)은 허상(虛像)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이제 남의 탓할 시기는 지났다. 스스로 이러한 자들을 걸러내면 되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이게 문제(問題)인 것이다. 전과자(前科者)를 사면(赦免), 복권(復權)시키고, 이들은 다시 정치(政治)계에 복권(復權)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례(一例)이다. 자신의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문제가 있었던 분이라면 스스로 공인(公人)이 되는 일은 삼가야 되는 일이나,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는 이러한 자들이 득세(得勢)하는 곳이다. 이러한 자들이 득세(得勢)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백성(百姓)들 여러분이다. 누굴 탓할 것인가? 남의 탓만 할 것인가?
남의 잘못을 들춰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자신의 허물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 스스로 반성(反省)해야 되는 일이다. 남을 탓하기 전에, 인접(隣接)한 국가(國家)를 욕하고 분노(憤怒)를 표출(表出)하기 전에 말이다. 만약에 말이다. 반도(半島)에 힘이 있었다면, 현재의 열도(列島)는 어찌 됐을까? 아마도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의 혼혈(混血)들일 것이다. 필리핀과 베트남을 보라. 그곳에 우리들과 같은 피를 가진 후세들이 얼마나 많은지, 누가 이들을 버리고 온 것인가?
○ 이제 남의 탓할 시기는 지났다. 과거와 같은 치욕스런 일은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만들려 한다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 지금과 같은 <국론분열, 권력싸움, 부정부패, 엘리트층들의 부패, 관리직 우대, 매관매직, 입영기피, 금전만능주의, 도덕의 타락> 등 속된 표현으로 사회는 난장판인데, 과거와 같은 치욕스런 일을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 세계(世界) 어느 곳에든,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을 위해 헌신(獻身)한 사람들은 그것에 합당(合當)한 대우(待遇)를 받아야 하며, 국가(國家)와 민족(民族), 사회(社會)에게 해악(害惡)을 끼친 자는 그만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다. 이러한 구분(區分)마저 헷갈리게 하는 사회(社會)나 국가(國家)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지금 어떤가????????
● 아래를 보자.
(1) “도주(島主)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니, 판관은 속히 성을 나와 명령을 듣도록 하라.” 하고 써 있으니, 박의장 등은 성을 비우고 도망가 버렸다.
(2) 《경상도 순영 록》에 나온다. 흉악한 왜적에게는 의기를 떨치지 못한 채 도리어 무고한 군사들에게 독수(毒手)를 옮겨 쓰고도 전혀 후회하지 않고 보고를 작성하여 공(功)을 요구했으니, 그런 못된 꼴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3) 이날 우후(虞 候)와 이협(李 俠)이 군기(軍器)를 못물[池 水] 속에 가라앉히고 창고를 태우고서 도망갔으며, 창원 부사(昌 原 府使) 장 의국(張 義 國) 역시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
(4) 왜적이 좌병영을 함락시키니, 이각(李 珏)과 원 응 두(元 應 斗)는 이미 먼저 도망가 버렸고, 열세 읍의 군사들은 다 무너지다. 이각은 무예(武藝)가 뛰어났는데, 본직(本職 즉 좌 병사)을 제수하자 그는 포를 쏠 때 탄환(彈丸) 대신 탄환만한 10여 두(斗)의 해 마석(海 磨 石)을 가지고 시험했는데 소리와 힘이 모두 격렬하니, 사람들이 그를 중진으로 여기게 되다. 그러나 한정 없이 탐욕을 부렸고 천성은 또 겁이 많아 왜적이 지경을 침범해 왔다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허둥지둥 어쩔 줄을 몰랐으며, 동래(東萊)가 함락되자 몸을 빼어 달아났고, 병영이 포위되었을 때도 성을 비우고 먼저 도망가다.《경상 순영 록》에 나온다. ○ 당시 장수들은 겁이 많은데다 또 탐욕스러웠다. 자기 몸을 청렴하게 갖고 군사를 사랑하며 적을 막아 나라에 보답하는 자는 거의 없었으니, 이들은 실로 한(漢) 나라의 공명(孔 明)이거나 송(宋) 나라 붕 거(鵬 擧)의 죄인들이다. 이각의 겁은 적을 보기도 전에 드러났고 이각의 탐욕은 국가가 어수선할 때에 나타났으니, 비단 옛 훌륭한 장수에 대한 죄인일 뿐 아니라 실로 당시 장병들의 죄인이기도 한 것이다. <出 慶 尙 巡 營 錄> : ○ <當時之將.旣㥘且貪.鮮有廉己愛士.折衝報國者.實皆漢孔明宋鵬擧之罪人.而李珏之㥘.出於見賊之前.李珏之貪.出於搶攘之時.非但古良將之罪人.實是當時將士之罪人也.>
(5) 그때 영남(嶺南) 사람으로 왜적에 항복하여 패(牌)를 받은 자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時 嶺 人. 降 附 受 牌 者 不 知 其 數 云.>
(6) 적병이 충주(忠州)로부터 곧장 경기로 향하다. 임금은 신립(申 砬)이 패전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 이어 적병이 이미 경기에 다가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중략). 《將近旬日.士民皆潰.無人聽從.急令戒嚴城門.不許人物出入.城中貴賤士女.晝夜縋城盡走.或恐眷屬相離.以索相結而遁.都中無賴之徒.結黨追逐.美女財寶.見輒掠奪.不分縉紳.傷殘盈路.父子夫婦.相矣投竄.上聞人心至此.決意避敵. : 열흘 가까이 되자 백성들이 모두 무너지고 아무도 말을 듣지 않는지라, 급히 명령을 내려 성문을 엄격히 지키고 사람이건 물건이건 출입을 허락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나 성 안의 사람들은 귀천 남녀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성에 줄을 걸고 내려가 다 달아났으며, 어떤 사람은 자기의 권속이 뿔뿔이 헤어질까 두려워한 나머지 줄로 서로를 엮어 도망치기도 하였다. 서울 안의 불량한 무리들은 작당하여 고운 여인과 재물을 찾아다니다가 보기만 하면 곧 약탈하고 하였는데, 상대가 고관이라 해도 분별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피해자들이 길에 가득했고 부자(父子)와 부부가 서로 잃어버린 채 도망쳐갔다. 임금은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적을 피하기로 결심하였다.》 <惜乎.二百年休養之餘.何人心至於此耶.不但含羞於天地.抑亦有愧於凶徒 : 아깝다! 2백 년 동안 휴양한 끝에 어찌하여 인심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는가. 하늘과 땅에 부끄러움을 느낄 뿐 아니라 또한 흉악한 왜적의 무리에게까지도 부끄럽다.>
(7) 한편 신립은 여러 도의 정병(精兵)과 무관 2천 명, 종족(宗族) 1백여 명, 내시위(內侍衛)의 군졸 등 도합 6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령으로부터 다시 충주로 후퇴하였는데, 종사 김여물(金 汝 岉)이 이일(李 鎰)의 말에 따라 산길을 굳게 지키자고 요청하였으나, 신립은 듣지 않고, “바다를 건너온 왜적은 빨리 걷지 못한다.” 하고는, 마침내 달천을 등지고 탄금대(彈 琴 臺)에 진을 쳤던 것이다. <申砬盡率諸道精兵及武官二千,宗族百餘員,內侍衛卒幷六萬餘兵.自鳥嶺還退忠州.從事金汝岉.因李鎰之言.請堅守山路.砬不聽曰.過海之賊.不能趍步.遂背㺚川.結陣于彈琴臺.>. <我 國 精 兵. 盡 殲 於 忠 尙 之 兩 役 云. : 그래서 우리나라의 정병은 충주와 상주 두 전투에서 다 섬멸되었다고 한다.>
(8)《二十九日.全羅監司李洸.令列邑.調發勤王兵凡十餘萬.慶尙監司金睟.亦收燼餘欲.與兩湖兵偕行.自居昌到咸陽.時嶺南六十餘邑.盡已淪陷.唯右道六七邑.僅免兵火.而軍卒則已散矣. : 29일. 전라감사 이광(李 洸)이 여러 고을로 하여금 근왕병(勤王兵)을 징발하게 한 것이 10여만 명이 되었고, 경상 감사 김수(金 睟) 역시 타고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양호(兩湖)의 군사와 함께 가고자 거창(居 昌)에서 함양(咸 陽)으로 가다. 그때 영남 60여 고을은 깡그리 함락되었고, 오직 우도의 6, 7읍만이 겨우 병화를 모면했으나 군졸들은 이미 흩어져 없었다. 》
(9) 《初二日.賊兵大進.漢濱,廣津,麻田,沙平,銅雀等處.一時乘桴亂涉.守江之兵皆散.陪吏伏元帥轎倚下告曰.賊兵渡江.軍卒盡散奈何.再三告稟.一無應辭.仰視之.元帥已無去處.但虛床而已.賊旣渡江.大喜曰.麗國可謂無人.險嶺無兵.長江不守.若有一夫當之.則吾難至矣.進兵至東南大門外.城中寥寂.絶無人形.賊疑之.留外不入.此乃先鋒賊.大賊.充斥四五日程矣. : 2일. 적병이 대거 진격하여 한강변[漢 濱]ㆍ광나루[廣 津]ㆍ마전(麻 田)ㆍ사평(沙 平)ㆍ동작(銅 雀) 등 처에서 일시에 떼[桴]를 타고 마구 건너왔는데, 강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졌다. 배리(陪吏)가 원수(元帥)의 교의(轎 椅) 밑에 엎드려서 고하기를, “적병이 강을 건너왔는데 군졸들이 다 흩어졌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하고 재삼 고하여도 전연 대꾸가 없기에 쳐다보았더니, 원수는 이미 간 데 없고 다만 빈 상(床)만 있을 뿐이었다. 왜적이 강을 건너와서는 대단히 기뻐하면서, “고려 국엔 사람이 없다 해도 좋다. 험한 고개[嶺]에도 군사가 없고, 긴 강도 수비하지 않는다. 만약에 한 사나이라도 막았던들 우리는 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였는데, 군사를 전진시켜 동ㆍ남대문 밖에 이르자 성 안이 고요하고 전연 사람의 형적이 없는지라, 왜적이 의심하여 밖에 머무른 채 들어오지 못하다. 이것은 선봉으로 온 왜적이었고 대부대의 왜적이 가득 몰려오기까지는 4, 5일의 거리가 된다. 》
● 이 모양이니 제후(諸侯)가 감히 상국(上國 : 천자 국 : 황제 국)에 반란(反亂)을 일으키는 것이다. 누굴 탓하겠는가???????????? 왜(倭)를 탓해!!!!!!!!!!!!!!! 무능력한 자신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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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사회에서는 “그의 한 줄기 충절을 만고에 누군들 맞설 수 있으랴. 문경(聞慶) 전후로 오직 수양 성(睢 陽 城)에서 순절한 장순(張 巡)이 있을 뿐이다. : 出慶尙巡營錄.一介忠節萬古誰雙.聞慶前後.只有睢陽.>” 우리에게는, 우리시대에는 이런 인사(人士)가 필요한 것이다.
2011년 06월 27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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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려움을 극복하고 불의에 항거하는 정신을 가지기 위해 노력을 하겠습니다. 일부 조상님들의 비굴함을 거울삼아 저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왜란의 참화는 우리 탓만이라고 몰고가는 것도 그리 좋지 않다고 봅니다. 그것은 패배주의만을 양산 할 뿐입니다. 전쟁의 재화가 닥친 원인은 우리의 무능력함도 있지만 일본의 침략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문무님의 글 매우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의문이 드는 점이 있습니다. 왜인들의 이름에서 덕천가강을 원가강이라고 표기한 것 같습니다. 풍신수길을 평수길이라고 표기한 것 같구요. 이름 형식이 하화와 같이 세 글자로 이루워졌네요. 현재 일본인들의 이름은 한자 네 글자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원래는 3글자 형식이었나 보군요.
어쩌다가 4글자로 바껴졌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전쟁에는 서양 세력들의 도움도 한 몫했습니다. 신라 시대때 신라를 많이 괴롭혔지만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혼이 나고 나중에는 청해진의 장보고 장군에 의해 격퇴당합니다. 그럼에도 하화(=조선의 영토)를 얻지 못한 그들은 서양의 우수한 무기를 공급받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화(=조선의 영토)를 얻지 못한 그들은 서양의 우수한 무기를 공급받고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를 이기지 못하고 우리의 땅을 얻지도 못했습니다. 이 점이 그들은 부끄러웠던지 임진왜란은 조선도 일본도 승리한 전쟁이 아니라고 가리친다고 합니다. 우스은 점은 한국의 강단사학계에서도 그렇게 가리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입니다.
총들고 달려들어 화살 쏘는 사람들을 이기지 못하다니 얼마나 수치스럽습니까!!! 저의 댓글은 문무님께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오니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걱정하는 것은 역사를 보는 과정에서 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패배주의가 발생할 가능성입니다. 제 글이 국수주의, 편협한 민족주의에 기반한 것 같다고 생각하신다면 즉시 삭제하겠습니다.
일본의 심기를 살펴서 임진왜란이 양자 모두 승리한 것이 아닌 것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로 계시니 정말 이 나라는 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나라를 이어온 선조님들의 기상이 이 땅에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극복하고 진실을 찾아 사해동포주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두 분 말씀 잘 압니다. 제가 하고자 하는 말은 "과거의 치욕스럼을 거울삼아 현재나 미래엔 결코 과거와 같은 일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선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또 남의 탓만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스스로 반성하고, 반성하여 다시는 이 땅(비록 반도일지라도)에 과거와 같은 어리석음을 재현시켜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동안 남의 탓을 너무 해왔다는 점입니다. 현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국가를 칭)을 뒤돌아보는 것이 중요함에도 그렇지 않는 것에 답답함을 토로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님의 말씀, 당연한 조선의 후예입니다. 고맙습니다.
평수길이란 이름은 난중잡록의 원문에 있는 그대로입니다. 또 다른 사서에는 풍신수길이란 이름도 보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이유는 있을 것입니다. 참고하십시요.
유리님의 글 잘 보았습니다. 우리의 무능함도 있지만 일본의 침략때문이었다. 또 패배주의다. 사해 동포 주의도 쓰셨습니다.
제가 반론을 제기 하겠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귀족입니다. 그 귀족 집단은 지배하는 백성의 안위와 평안을 위해서는 교육 받은 능력과 목숨을 바쳐 지켜줘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임란때 재대로 활약한 귀족은 이순신, 곽재우,권율등 소수의 귀족과 역사에 나오지 ㅁㅅ하는 의병들 입니다. 나머지는?
그 다음 병자, 정묘호란때의 정신 차리지 못한 귀족집단에 의한 잘못된 인도로 말 못할정도의 백서들의 참상 이것은 바로 외부의 도전이라기 보다는 내부의 대응력 부재부터 우리가 반성을 하여야 합니다.
패배주의라니요? 우리의 잘못을 반성하고 단련을 통해 다시는 똑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건강한 비판이 없이 어떻게 발전이 있겠습니까?
사해동포주의에 대해 반론을 하겠습니다. 작금 대한민국에 불체자 문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단제께서도 홍익 인간을 천명하셨습니다.똑같은 위차가 아니라 우리의 앞선 문명을 야만적이고 척박한 주변을 교화하여
서로 좋은 세상을 만들자 하신거지 같은 위치가 아닙니다.
원 가강과 평 수길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원은 미나모또, 평은 다이라씨 입니다. 제가 알기에 미나모또는 신라계, 다이라씨는 백제계입니다. 왜인들이 인정하는 나름대로의 뼈대 있는 귀족 집단입니다. 15세기 왜의 영주들의 족보는 소수를 빼놓고는 개족보입니다. 임진왜란전 왜는 100년간 싸움판의 전국시대를 보내고 각 영주를 제압한 오다, 도꾸가와, 도요또미를 거쳐 왜의 천하통일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 3인의 족보도 실상 개족보 입니다 3인 중 오다는 일찌감치 제거되고 나머지 2인이 남아 천하쟁투를 하면서 왜의 귀족들과 백성의 지지와 권위를 부여받기위해 원씨와 평씨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듯이 뻥 족보를 만든
것입니다. 근래 대한민국도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들 행태도 그렇지요.
천복님 말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자기 비판이 패배주의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반성과 단련을 패배주의인양 말 한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사해동포주의 부분에서 갑자기 불체자가 왜 나오는 것입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리고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분 말씀, 모두 맞는 말입니다. 패배주의로 흘러도 안되는 것이며, 또한 자만심에 빠져서도 안되는 것이지요. 자신(국가)의 행동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인접국 또는 상대방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 개개인에게도 적용되는 인간의 삶의 기본적인 틀이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행동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곤란한 처지에 빠지게 됩니다. 역사를 보면, 개인 또는 사회, 국가의 미래를 점 칠수 있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두 분의 <조선사랑>에 대해 경의를 표합니다.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