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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사로 보는 세상] 구급차·응급 환자 분류법 탄생과 나폴레옹의 전쟁(2)
2023.05.30 13:37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 1769~1821)는 통령, 황제의 위치에 오르고 1815년 웰링턴(Arthur Wellesley, Duke of Wellington)이 이끄는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패함으로써 몰락하기까지 참 많은 전투를 했다. 이 기간 동안 군인 약 250만 명, 민간인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전쟁은 부상자를 양산하므로 평소와 다른 환경에서 의료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의학 발전에 공헌을 하기도 한다. 나폴레옹의 시대는 유럽의 역사, 문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 결과 의학발전에도 큰 공헌을 했다.
● 프랑스에서 가장 유명한 군의관 래리
나폴레옹보다 3년 먼저 태어난 래리(Baron Dominique Jean Larrey, 1766–1842)는 프랑스 군의관으로 평생을 보내면서 외과와 응급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나폴레옹 시절에 비샤(Marie François Xavier Bichat, 1771-1802)를 비롯하여 훌륭한 의사가 많이 등장했지만 나폴레옹과 함께 전쟁터를 누빈 것으로는 가장 유명한 의사다.
피레네 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제화공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13세에 부모를 모두 잃고 외과의사이던 삼촌에 의해 외과의사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파리 최고라 할 수 있는 디외 병원(Hôtel-Dieu de Paris)에서 수학한 후 해군 군의관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787년에 미국으로 가는 해군 배를 탔을 때 그는 프랑스 해군 최연소 군의관이었다. 파리로 돌아온 직후 프랑스 대혁명을 맞이했고, 래리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사상을 지지했다.
1792년에 라인강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면서 육군의 수술을 시행할 수 있는 여건, 야전 병원 운영, 구급시스템 등에 관심을 가지고 개선을 하고자 했다. 그는 마차가 빠른 속도로 전장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보고 부상자를 신속히 수송하기 위한 구급차를 운영하기로 했다.
1793년 메츠 전투에서 래리가 고안한 구급차의 가치가 증명되었다. 그 후로 래리의 구급차는 프랑스 전역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은 구급차 디자인 경연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공급이 지연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 맹활약한 미국식 야전병원(Mobile Army Surgical Hospital, MASH)도 래리로부터 시작되었다. 래리는 의과대학에서 해부학과 외과학 교수로 일을 하기도 했지만 1794년에 나폴레옹을 만난 후부터 래리는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나폴레옹 군대를 대표하는 군의관으로 일을 했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 함께 간 래리는 카이로에 군의관 양성을 위한 의과대학을 설립했다. 그는 진료뿐 아니라 병의 증상과 진행에 대한 연구를 하여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사막에서 말 대신 낙타를 이용하여 부상병을 수송함으로써 효율을 올리는 등 의료개선에 힘을 쏟았다.
래리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치료법이 크게 발전되지 않았고, 마취제도 개발되어 있지 않았다. 총이 발견된 후 전쟁에서 총상을 입는 병사들이 증가하면서 출혈이 심하거나 상처 부위에 감염이 되면 쉽게 죽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부상이 심한 경우 사지를 절단한 후 이차감염을 막기 위한 방법이 시도될 뿐이었다.
마취제가 없었으니 사지절단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빨리 자르는 것이 중요했다. 래리는 약 2분만에 다리를 잘랐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영국의 리스턴(Robert Liston)과 더불어 역사상 가장 빨리 사지절단술을 빨리 시행한 의사 중 한 명으로 꼽힌다.
1811년에는 유방절제술을 시행하면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와 효과적인 수술과 가정에서 행해야 할 후속조치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 주었다. 또 이듬 해에 러시아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
전쟁터에서 국적과 계급을 불문하고, 환자를 돌보던 그는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프로이센군에게 붙잡혔으나 프로이센 외과의사의 도움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 의사는 래리가 부상당한 포로도 치료를 한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래리는 의사, 교수, 군의관의 역할을 했으며, 그를 따라다닌 아들(Félix Hippolyte Larrey)도 그의 뒤를 이어 군의관이 되었다. 래리는 자신이 연구한 내용을 저서로 남겨 주고, 1842년에 세상을 떠났다.
● 치료 우선순위를 정하기 위한 환자분류법
래리가 워털루전투에서 포로로 잡혔으나 처형되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군의관으로서의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경험많은 군의관으로 환자치료를 잘 했을 뿐 아니라 전쟁터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구급차를 고안했고, 현대적인 환자분류법을 개발했다.
래리가 환자분류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전쟁터에서 갑자기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경우 군의관이 동시에 모든 환자를 돌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나폴레옹의 군대가 승승장구했지만 이집트 원정에서 패배를 당하면서 군인 중 약 3분의 1이 전투와 질병으로 사망할 정도로 피해가 크자 래리는 많은 부상자의 치료 순서를 결정하기 위한 방법을 고안했다.
환자 분류의 가장 큰 목적은 부상자 전체의 생존율을 향상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수술과 상처 세척 등을 신속히 처리해야 했다. 1865년에 영국의 리스터(Joseph Lister)가 무균처리법을 발견하기 이전에 이미 래리가 이차감염을 예방할 수 있는 무균처리법을 불완전하게나마 시행함으로써 전쟁터에서 치료율을 크게 높여 주었으므로 그를 ‘최초의 현대 군의관’이라 하기도 한다.
1797년부터 나폴레옹식 분류라 하여 전쟁터에서 다시 싸울 수 있는 병들고 부상당한 병사들과 계급이 높은 병사를 우선적으로 치료하고 있었다. 이는 가능한한 많은 생명을 구하기보다 군사력을 더 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래리는 위험한 부상자는 국적과 계급에 관계없이 먼저 치료를 받고, 덜 심각한 부상자는 심각한 부상자들이 먼저 치료받을 때까지 기다리도록 했다. 부상의 심각성과 치료의 긴급성에 따라 부상자를 치료하자고 제정한 그의 분류법에 따라 프랑스의 동맹군은 물론 적군의 병사들도 치료를 받게 되었다.
● 날아다니는(flying) 최초의 구급차
전쟁터에서 부상자의 사지에서 세포와 조직이 죽어가기 시작하면 이차감염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당시에 사지를 절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래리가 구급차를 개발하기 전에 군 병원은 보통 전쟁터에서 4~5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래리는 부상자들이 조금이라도 빨리 군 병원으로 이송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차를 이용하여 이송하기로 하고, 말이 잘 달릴 수 있도록 가볍게 한 후 부상병 2명을 태울 수 있도록 내부를 설계했다. 이 구급차 내에서 응급수술이 시행되었고, 훈련받은 인력이 부상자와 함께 타고 병원으로 이송했다. 이를 두고 이송이 빨리 이루어진다는 뜻에서 ‘날아다니는 구급차’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래리의 구급시스템은 113명의 병력과 12개의 마차로 구성하여 3개 사단을 담당하도록 했다. 1799년에 프랑스군 전체에 구급차가 배치되어 전투지에서 후방의 야전병원까지 부상자를 신속히 이송할 수 있게 되었다.
구급차에는 의료진과 함께 수술과 드레싱 도구, 약물이 구비되어 있었으므로 이동 중에도 환자를 돌볼 수 있게 했다. 환자분류법과 함께 구급차가 활용되면서 프랑스군의 환자 치료와 부상으로부터 전쟁터에 재배치되는 과정이 크게 향상되었다.
병원으로 이송되기 전과 도중에 환자를 치료하는 응급의료서비스(Emergency Medical Services, EMS)가 구급차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래리의 구급차와 EMS는 1860년대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 중에 미군에 도입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시 미군은 참호에서 발생한 사상자 치료를 위해 의사 대신 일반 군인을 참호에 배치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 응급처치 요원들이 전투에도 참가하는 전투의무병으로 발전했다.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부상자 이송을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는 헬리콥터를 이용하여 전쟁터에서 병원올 곧장 옮기기 시작했다. 신속한 후송의 중요성은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강조되고 있다.
● 저체온증의 치료와 응용
추운 환경에서 저체온증이 발생하는 경우 몸에 비정상적인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은 기원전부터 수시로 의학자들에 의해 보고되곤 했다. 감기나 동상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들에게 아주 호발하는 질병이지만 래리는 저체온증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알아냈다.
래리는 러시아에서 영하 15도에 노출된 병사들은 아무 증상도 호소하지 않지만 영하 18도 이하로 병사들은 고통스러운 감각 이상과 경직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또 화재와 같이 뜨거운 환경에 노출되면 온도의 급격한 변화가 세포와 조직이 괴사하는 원인이 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는 감기가 발생하는 경우 시간당 약 0.5-1℃의 속도로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주장했다. 더위와 추위가 연속되는 건 몸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또 래리는 날씨가 좋은 날보다 추위에 노출된 경우 출혈이 적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추위는 감각을 둔하게 하여 절단시 통증을 줄이는 데에도 도움이 되고, 혈액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쇼크를 예방하는 데에도 낮은 온도가 효과적임을 발견했다.
오늘날 심정지, 급성 심근경색, 저산소성 허혈, 뇌졸중 등 다양한 질환에 응용되는 저체온요법이 래리에 의해 응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 래리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의학의 발전상
구급차는 전장에서 부상자를 신속히 이송할 수 있게 해 주었을뿐 아니라 구급차내에서 치료를 시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술의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하기도 했다.
래리는 일찍부터 경험이 많은 데다 성격도 대담하여 새로운 도전도 즐겨하는 성격이었다. 그는 사지절단시 고관절 부위를 절단한 최초의 의사였고, 심낭을 절제하여 심장에 쌓인 체액과 고름을 제거하기도 했다. 또 상처 부위에서 죽어가고 있는 조직과 이 부위에서 생겨난, 오염물질이 포함된 체액을 치료목적으로 절개하기도 했다. 이는 16세기에 이미 알려진 방법이지만 이를 치료 목적으로 적극 활용한 것은 래리의 업적이다.
래리는 구더기가 들끓는 상처의 깨끗함을 발견하고 흥미롭게도 상처부위 청소를 위해 구더기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구더기 요법이라 한다. 래리와 오랜 기간 함께 한 나폴레옹은 그를 위해 10만프랑을 지급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래리의 업적을 알고 있던 프로이센의 군의관 에스마르크(Johannes Freidrich August von Esmarch)는 모든 군인이 응급 처치용 키트를 휴대하고 사용법을 익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1873년에 그의 이름을 딴 고무붕대를 고안하여 절단수술시 사지에서 피가 흘러나가는 것을 줄이는데 이용하도록 했다.
1850년대에 크리미아 전쟁이 일어나자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이 참전하여 위생에 힘쓴 결과 사망률을 줄이고 전투력을 보존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나이팅게일은 그 후에 간호학의 창시자라는 이야기를 들을 만큼 간호사 제도 확립에 큰 공헌을 했다.
또 1840년대에 발견된 마취술이 널리 보급된 데에는 1860년대에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수술시 마취제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또 1859년에 이탈리아와 프랑스 연합군이 오스트리아에 승리를 거둔 솔페리노 전투지를 방문한 스위스의 뒤낭(Henry Dunant)이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전쟁터에 누워있는 부상자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참혹한 현장 모습을 담은 ‘솔페리노의 기억’이라는 글을 남겼고, 부상병을 돌보기 위한 구호 단체 설립을 주도한 것이 적십자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 공로로 뒤낭은 1901년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나폴레옹은 1798년 이집트 원정 때 많은 학자들을 데리고 간 것처럼 전쟁터에 군의관을 많이 데리고 다녔다. 래리를 비롯한 군의관들의 활약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학 발전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 참고문헌
1. Robert Richardson. Larrey: Surgeon to Napoleon's Imperial Guard. Quiller Press. 2022
2. 예병일. 전쟁의 판도를 바꾼 전염병. 살림. 2007
3. 윌리엄 맥닐. 전쟁의 세계사. 신미원 역. 이산. 2005
4. Alan Schom. Napoleon Bonaparte: A Life. Harper, 1997
예병일 연세대원주의대 교수
※필자소개
예병일 연세대학교 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C형 간염바이러스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텍사스 대학교 사우스웨스턴 메디컬센터에서 전기생리학적 연구 방법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의학의 역사를 공부했다.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에서 16년간 생화학교수로 일한 후 2014년부터 의학교육학으로 전공을 바꾸어 경쟁력 있는 학생을 양성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평소 강연과 집필을 통해 의학과 과학이 결코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 우리 곁에 있는 가까운 학문이자 융합적 사고가 필요한 학문임을 소개하는 데 관심을 가지고 있다. 주요 저서로 『감염병과 백신』, 『의학을 이끈 결정적 질문』, 『처음 만나는 소화의 세계』, 『의학사 노트』, 『전염병 치료제를 내가 만든다면』, 『내가 유전자를 고를 수 있다면』, 『의학, 인문으로 치유하다』, 『내 몸을 찾아 떠나는 의학사 여행』, 『이어령의 교과서 넘나들기: 의학편』, 『줄기세포로 나를 다시 만든다고?』, 『지못미 의예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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