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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도> 목은 휘 색-인재공 휘 종학- 6남 1녀중 딸
한산이씨 목은 휘 색의 3남중 차남이신 인재공 휘 종학의 딸이신 분이 조선왕실의 친척이라면 한산이문인 모든분들이 잘못된 내용이 아닌가하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 목은 휘 색의 손주 및 증손주는 파를 넘어 조선왕실과 친척 및 인척이다
이유를 따져보면 그당시 한산이씨가 상문의 제일가는 대유방가중 으뜸의 위치와 민심을 잡으려는 조선왕실의 시대수습책으로 이루어진 정략정책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 이면에는 고려 말기 가정 휘 곡과 목은 휘색이 만든 가문의 번영속에 마지막 충절을 다한 삼은의 으뜸이신 목은 휘 색의 영향도 있을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배제하고 인재공 휘 종학선조님은 부친의 충절을 물려받아 일찍 졸한것은 한산이문 및 여러지식인이면 다알고 있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시다
그 분의 따님이신 분이 조선왕실과 친척이 되시고 겪은 이야기의 자세한 기록은 사료가 부족하여 현세 및 후손의 몫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다만 시집간 가문과 자식의 기록을 비추어 나름대로 추측해 보면 충절의 피를 물러 받은 대여장부의 군부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먼저 시집간 부군의 익천군 휘 점의 부친 즉 시아버지는 의안대군 휘 화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평내리 일대는 의안대군 및 후손의
사당 및 종중묘가 분포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 부군인 휘 점의 묘지도 있다
전주이씨 가계도로 가보자
태조 이성계의 부친 이자춘은 세부인을 두었다
첫째부인은 이씨로 (한산이씨 아님) 자 이원계의 후손 이란과 관련된 내용은 사윤공 휘 맹유와 관련하여 이미 서술하였다
둘째부인의 자는 태조 이성계로 그의 딸과 관련한 청주이씨가문과 한산이씨 판중추공 휘 맹진의 딸과
관련 기사도 이미 서술하였다
셋째부인의 자가 의안대군 화이며 인재공 휘 종학과는 사돈지간이 된다
의안대군(義安大君 1348~1408.10.6) 이화(李和) 모친 : 정빈 김씨(定嬪 金氏)
정부인 : 부부인(府夫人 ?~1410.7.12)
- 본관 : 순흥 안씨(順興 安氏), 부친 : 안기(安奇) 사이에 1남이 있고
계부인 : 부부인(府夫人)
- 본관 : 교하 노씨(交河 盧氏), 부친 : 경원군 노은(慶源君 盧訔) 사이에 6남 1녀가 있다
교하노씨와의 관계에서 태어나신 막내이신 분이 바로 이글의 주인공의 부군이다
실록의 기사는 위 부분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태조, 2년(1393 계유 / 명 홍무(洪武) 26년) 9월 18일(경신) 3번째기사
환왕의 서자인 이원계와 이화의 가계 환왕(桓王)에게 서자(庶子) 두 사람이 있었으니, 이원계(李元桂)는 비(婢) 내은장(內隱藏)이 낳았고, 이화(李和)는 비(婢) 고음가(古音加)가 낳았다.
원계(元桂)의 아들이 네 사람이니, 이양우(李良祐)·이천우(李天祐)·이조(李朝)·이백온(李伯溫)이고,
화(和)의 아들이 일곱 사람이니, 이지숭(李之崇)·이숙(李淑)·이징(李澄)·이담(李湛)·이교(李皎)·이회(李淮)·이점(李漸)이다.
양우(良祐)의 아들은 이흥발(李興發)·이흥제(李興濟)·이흥로(李興露)·이흥미(李興美)요, 이천우(李天祐)의 아들은 이굉헌(李宏軒)이다.
지숭(之崇)의 아들은 이수장(李壽長)이요, 숙(淑)의 아들은 이오망(李吾望)·이지발(李之發)이요, 징(澄)의 아들은 이의경(李義敬)·이미동(李微童)이요, 담(湛)의 아들은 이효손(李孝孫)이요, 회(淮)의 아들은 이복동(李福同)이요, 점(漸)의 아들은 이실견(李實堅)이다.
【태백산사고본】 2책 4권 10장 B면 【영인본】 1책 50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가족(家族)
위 기사에서 휘 점의 아들 이실견이 이의산과 동일인 인지는 사료가 부족해 밝히지 못했다
이후의 기록은 점의 아들을 모두 이의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바로 한산이씨 인재공 휘 종학의 따님이 낳으신 분이 이의산이다
전주이씨 한산군 휘 의산으로 기록된점도 흥미로웠다
시아버지 이화에 대하여 의안대군 후손 종종기록을 참조하여 살펴보면
1348년(충목왕4) 의안대군은 환조(桓祖)의 3자로 함경도 화녕부 흑석리에서 정안옹주 김씨를 어머니로 하여 탄생하셨다
휘는 화요 시호는 양소다.
1360년(공민왕9) 환조(桓祖)가 승하하자 태조는 정안옹주 김씨를 서울의 제택으로 모셔와 매우 공손히 섬겼다.
공민왕은 의안대군을 사랑하고 우대해서 항상 금중(禁中)에 모시게 하고 자주 연회 자리를 만들어 함께하며 귀한 음식물을 내려 대군의 어머니에게 드리도록 하고, 교방(敎坊)의 음악을 내려주어 우대하고 총애함을 보여주었다.
태조도 공민왕의 이 같은 보살펴 주심을 영광스럽게 여겨 전두(纏頭 : 가무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금)를 많이 주고 대군과 형 원계(元桂)와 더불어 항상 함께 거처하면서 서로 간의 우애를 돈독히 하였다.
1371년(공민왕20) 대군 연치24세 때 대장군으로서 왜적과 홍건적을 물리쳐 큰 공을 세웠고 우왕 때는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왜적을 소탕하였다.
1388년(우왕14) 위화도 회군 때 조전원수로서 선봉에서서 우군도통사인 태조를 도와 활약하였다.
1392년 태종과 함께 개국에 저항하는 세력들을 제거하였다.
1392년(태조1) 순충좌명개국1등공신 녹권(국보232호)을 받고 의안백(義安伯)으로 봉작되었다.
1393년(태조二) 2월9일에 임금이 새로운 도읍지(서울)의 山水와 형세를 관찰하시고 公에게 성곽을 축조할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1393년(태조2) 회군1등공신 녹권을 받았다.
1395년(태조4) 정도전은 을 발간하였는데, 그 중에는 `이요정기(二樂亭記)'가 있다.
내용은 태조고황제가 한양에 도읍을 정한 이듬해 좌우 정승과 동맹한 이들이 지방의 주군으로 부임하는 이들을 전송한 장소가 바로 이요정이다.
석별의 아쉬운 정을 나누는 장면, 한강 물줄기가 한 눈으로 내려다보이는 곳, 그리고 백성들이 사는 모습 등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요정은 바로 의안백의 별장이요 또한 그의 호이기도 하다.
1398년(태조7) `1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정사(定社)1등 공신녹권을 사급 받았다.
1400년(정종2) 영삼사사 겸 판의금부사(領三司事兼判議禁府事)에 임명되었다.
1401년(태종1) `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좌명2등 공신녹권을 사급 받았다. 그 해에 의안대군으로 진봉되었다.
1402년(태종2) 왕실이 안정되어 체제개편을 단행하니 민심이 수습되어 태종대왕은 2월 한가한 날을 택하여 대군들과 활쏘기 시합을 하였다. 이긴 사람에게 상을 주게 되었는데 백발백중 과녁을 뚫은 의안대군에게 수우각(水牛角)을 내려주었다.
1402년(태종2) 10월 13일 임금은 태평관에 가서 중국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전(溫全)이 자신의 자리가 왕태(汪泰)의 아래에 베풀어졌으므로 이를 시기하여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사람을 시켜 두 번이나 청하자 그제서야 잔치에 나왔다.
온전은 직책이 왕태보다 높았으나 왕태가 조명을 받들고 왔으므로 온전의 윗자리에 있게 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가 불만이었다.
이런 심중을 훤히 들여다 본 대군이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술을 한 잔 권하니 왕태가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하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 술잔을 받았다.
임금이 예기치 못했던 태도변화에 의아해 하면서 묻기를 “천사(天使)는 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하면서 술잔을 받소?” 하자,
왕태가 “제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이 분은 국왕의 숙부인 동시에 개국의 1등공신이며 문무에 달통하여 의정부와 병권을 모두 좌지우지하는 조정의 가장 으뜸가는 분이라 하였습니다.
그 신분도 높으려니와 은은히 배어 나오는 온후하고도 강직한 성품과 영명한 통솔력을 이전부터 흠모해 오던 터인지라 이렇게 직접 술잔을 따라 주니 저는 빈주(賓主)의 예로서 일어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1404년(태종4) 1월 대군의 어머니 정안옹주 김씨가 별세했다.
태종대왕은 3일간 조회를 정지하고 친상하였으며 특별히 육선(肉膳)을 하사하였다. 또한 태종대왕은 치제문을 내리고 후히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1407년(태종7) 7월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이화 졸기
1408년(태종8) 10월6일 의안 대군(義安大君) 이화(李和)가 돌아가셨다. 조회(朝會)를 3일 동안 정지하고, 쌀·콩 각각 백 석(石)과 종이 2백 권(卷)을 부의(賻儀)하였다. 시호(諡號)를 양소공(襄昭公)이라 주었다.
화(和)는 순박하고 씩씩하고 용감하여 젊어서부터 태조(太祖)를 잠저(潛邸)에 모시어 좌우(左右)를 떠나지 않았으며, 매양 정토(征討)에 따라다녀 여러 번 전공(戰功)을 나타내서 마침내 개국 공신(開國功臣)이 되고, 또 정사(定社)·좌명(佐命)의 열(列)에 참여하였다. 돌아가시니 나이 61세였다. 일곱 아들이 있으니 이지숭(李之崇)·이숙(李淑)·이징(李澄)·이담(李湛)·이교(李皎)·이회(李淮)·이점(李漸)이다.
1410년(태종10) 7월 의안대군이 종묘 태조고황제 묘정에 배향되었다라고 의안대군 종중후손들은 기록하고 있다
시집가신 부군되시는 익천군 휘 점 후손의 기록으로 가보자
익천군(益川君 ?~1433) 휘 점(李漸)
모친 : 부부인 노씨(府夫人 盧氏)
정부인 : 군부인 이씨(君夫人 李氏) - 부친 :한산이씨 인재공 휘 종학
계부인 : 군부인 변씨(郡夫人 卞氏) - 부친 : 변괘 자녀(3남 3녀)
* 장남 한산군 의산 - 이씨 生
* 차남 원산군 의구 - 변씨 生
* 3남 예산군 인문 - 변씨 生
* 장녀 - 이씨 生, 남편 : 김효문
* 차녀 - 변씨 生, 남편 : 정창
* 3녀 - 변씨 生, 남편 : 원창명
위 기록은 출처는 알 수 없으나 온라인에서 퍼온 글로 고증이 되었는지는 파악을 못했다
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부군은 소실적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정종 1권, 1년(1399 기묘 / 명 건문(建文) 1년) 5월 1일(경오) 2번째기사
도승지 이문화에게 명하여 생원 이약종 등 1백인을 뽑다
도승지(都承旨) 이문화(李文和)에게 명하여 생원(生員) 이약종(李約從) 등 1백인을 뽑았는데,
종친 의안공(義安公) 이화(李和)의 아들 이점(李漸)이 또한 고시(考試)에 합격하니, 이화가 대궐에 나와서 사례하였다.
임금이 경연 시독관(經筵侍讀官) 배중륜(裵仲倫)에게 일렀다. “숙부의 아들 이점이 종친으로서 고시에 합격하였으니, 진실로 범상한 예가 아니다. 네가 집현전(集賢殿)·상서사(尙瑞司)와 삼관(三館)의 여러 선비와 더불어 함께 의안공(義安公)의 집에 가서 치하하라.”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2장 A면 【영인본】 1책 147면 【분류】 *정론(政論) / *왕실(王室) / *역사(歷史) / *행정(行政) / *재정(財政) / *풍속(風俗)
익천군 후손들의 추모비 비명 기록을 더하면
익천군께서는 정종원년 문과에 급제 하신후 개성유사로 입임하시고 일장월취하여 동지돈령부사를 제수 받으시고 이어서 전주부윤으로 계시다가 세종15년에 졸하시니 세종께서 공의 부음을 들으시고 감상애도 하심을 견딜수 없다 하시고 예관을 보내시어 의물을 내리시고 예장하였다,
1453년 단종이 즉위하시니 세대를 우려하여 수양의 왕권도전은 세종과 문종의 원명을 받고 단종을 보필하던 영의정 지제 황보인 우의정 절제 김종서와 찬성사 하령군을 첫번째로 격살하고 대역모반죄라는 누명을 씌워 효시하였다,
수양의 계유년에 명분없는 왕권도전은 역사에 큰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이때 의안대군의 손자 이시고 익천군의 장남 한산군 의산과 공의 장손 해령군 우경께서 피화되시어 단종을 모신 장릉 충신전 중전에 배향 되시었다,
간신과 간웅이 활개치는 혼돈의 시대가 계속되고 순의절사하신 의안대군의 후손들은 모반대역죄 누명을 쓰게되니 이로 인하여 조상의 묘소를 성묘하지 못하게 되었고,의안대군의 묘소를 비롯하여 그 아드님과 손자대의 묘소가 실전 되었다,
후일 순조대에 와서 의안대군의 묘소는 천만다행으로 찾게 되었으나 익천군은 기록에 졸유만 있고 묘지명의 기록누락으로 찾을길이 없었다,조상의 기록을 정비하지 못하고 봉행하지 못한 죄스러움을 금할길 없었다,
이하 중략
단종사화에 순절하신 공의 사자 한산군 의산 사손 해령군 우경 할아버님의 제단을 같이 모시지 못하게 된것이 통한사라 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오늘에 사는 후손들이 익천군 할아버님께서 돌아가신지 571년만에 정성을 모아 설단하고 비명을 세겨 조상님의 효제충신 사상을 이어받아 몸소 길천하여 영세토록 추모하고 끊겼던 향화를 받들어 후손의 귀감이 되고 우리 문중이 더욱 번영 하기를 바란다,
출처 서기 2004년 갑신 5월 일 익천군 종중회장 호윤
부군 휘 점 졸기로 가보자
세종 16년 세종 63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2월 1일(기유) 2번째기사
작고한 전주 부윤 이점에게 교서를 내리고 치제하다
작고한 전주 부윤(全州府尹) 이점(李漸)에게 치제(致祭)를 내리었다. 그 교서에 이르기를, “길고 짧은 것이란 타고난 명이 있는지라, 이수(理數)의 상도는 피하기 어려우나, 은우(恩遇)와 정의(情義)가 겸하여 높았으니, 마땅히 애영(哀榮)의 은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생각하건대, 경은 그 자품이 부드러우면서 단아하였고, 지조와 품행이 단결(端潔) 방정하였도다. 왕가와 연척을 맺으매, 공손하고 근신하는 그 마음이 더욱 미더웠고, 이름이 사판(仕版)에 오르면서 충실 근면한 업적이 허다하였도다. 〈이리하여〉 부왕께서는 결친(結親)한 은의를 높이셨고, 과인(寡人)에 미쳐서는 위임하고 의중(倚重)함을 돈독히 하였던 것이다.
남방을 절제하던 그날을 당해서는 멀리 위풍을 떨쳤으며, 서도에 유후로 있을 때는 능히 어진 정사를 베풀었으니, 진실로 국가의 간성이란 중망에 상부하였고, 곧 재부(宰府)의 어진 재상이었도다.
실상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하여 왔는지라, 더욱 돈독한 보필을 기대하였더니, 어찌 잠시 질병에 걸린 것이 갑자기 영원한 황천으로 막혔단 말인가.
홀연히 부음(訃音)을 들으니 실로 감상 애도함을 견딜 길이 없도다. 이에 예관에게 명하여 약소한 의물을 드리노라.
아아, 슬프도다. 옹용(雍容) 화목하던 정의가 시종 간격이 없었으니, 조휼(弔恤)하는 예에 어찌 유명(幽明)의 다름이 있으리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63권 14장 B면 【영인본】 3책 541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위 기사에서 보듯 시집간 따님의 남편은 뛰어난 분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졸한후 아들인 이의산의 기록을 보면 얼마나 마음고생을 하였는지 알 수 있으며 이후 수양대군의 동생인 안평대군과의 기록 단종사화 및 계유정난등을 통해서 충절의 의미 및 부모로써의 자식생각을 떠올려 보는 시간이 되었다
세종 62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11월 25일(갑진) 4번째기사 별시위 이진문의 아내 어리가와 간부 이의산 등을 의금부에 하옥하다
별시위(別侍衛) 이진문(李振文)의 아내 어리가(於里加)와 간부(奸夫) 이의산(李義山) 등을 의금부에 하옥(下獄)하니, 어리가는 즉 병조 참판 이춘생(李春生)의 딸이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62권 18장 B면 【영인본】 3책 527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윤리-강상(綱常)
세종 62권, 15년(1433 계축 / 명 선덕(宣德) 8년) 12월 8일(정사) 3번째기사
어리가를 사형에 이의산을 지방으로 내쫓기를 사간원에서 상소하다
사간원에서 상소(上疏)하기를, “전일에 어리가(於里加)·이의산(李義山)·허파회(許波回)의 강상(綱常)을 탁란(濁亂)한 죄를 사형에 처하여 뒷사람을 경계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심을 입지 못하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신 등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남녀의 사이에는 큰 욕심이 있는 것이니, 만약 엄중하게 금하고 방지하지 아니하면, 요사하고 음란한 무리들을 어찌 징계하겠습니까.
우리 태종께서는 이러한 사리(事理)를 밝게 살피시어, 범(犯)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대벽(大辟)에 처하였으니, 그 염려하심이 지극하였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백성의 음란한 행위를 방지하여도 오히려 감동(甘同)·금동(今同)·연생(延生)·동자(童子)와 같은 무리가 잇따라 나왔습니다.
만약 어리가(於里加)의 죄를 또 관대한 법으로 처리한다면, 뒷날 잇따라 생기는 방자한 행위를 하는 자가 끝이 없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위로 태종의 이루어 놓은 법을 따르시고, 아래로 신 등의 소청(疏請)에 좇으시어, 그들을 사형에 처하여 신 등의 소망을 쾌하게 하여 주소서.
또 이의산(李義山)과 허파회(許波回)는 다 같이 간부(奸夫)로서 동일한 죄인데, 허파회(許波回)는 신장(訊杖)을 치고, 또 장형을 결행한 뒤에 먼 변방에 충군(充軍)하였으되,
이의산(李義山)은 매[杖] 한 대도 맞지 않고 단지 직첩(職牒)만 회수되었으며, 그 아비의 병으로 우선 그대로 두어두라고 명하시었으나, 신 등은 생각하옵기를, 후일에 이의산(李義山)과 같은 강포(强暴)한 자가 풍속을 더럽히는 일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올 것입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대로 욕심에 끌리어 부모를 욕되게 하는 자를, 맹자(孟子)는 불효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이의산(李義山)의 아버지를 닮지 않은 행위가 일어나매, 나라 사람들은 다 ‘이의산(李義山)은 이점(李漸)의 아들이다. ’고 합니다.
그 아비를 욕되게 함이 이보다 더 심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의산(李義山)은 방자한 마음으로 정욕(情慾)에 방종하여, 그 아비의 병에는 일찍이 근심을 두지 아니하니, 비록 집에 있게 한들 아비에게 무슨 보탬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급히 지방으로 내쫓도록 명령하시어 강상을 문란하게 하는 무리들을 경계하게 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62권 24장 A면 【영인본】 3책 530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윤리(倫理) / *사법-행형(行刑)
단종 3권,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9월 19일(무신) 1번째기사
안평 대군이 마포강 정자에서 생일 잔치를 베풀다
이용(李瑢)이 생일이므로 마포강(麻浦江) 정자(亭子)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고양 현감(高陽縣監) 박하(朴夏) 등이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참석하고,
환관(宦官) 김연(金衍)·이귀(李貴)·한송(韓崧)·최습(崔濕)·김득상(金得祥)·최득상(崔得祥)·최언(崔彦)·조희(曹熙)와 조사(朝士) 이현로(李賢老)·이명민(李命敏)·이석정(李石貞)·이의산(李義山)·조번(趙藩)·김정(金晶) 등 30여 인이 모두 모여서 술을 마시며 활쏘기를 하였다.
세조가 사람을 시켜 문안하니, 이용이 놀라 수박[西爪]을 보내어 치사(致謝)하고 인하여 이를 엿보았다. 박하가 이용에게 아첨해 섬기기를 종[奴僕]처럼 하였는데, 일찍이 이용의 먹은 밥상을 거두어 와서 말꾼[馬卒]과 함께 먹으면서도 매우 만족한 빛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0장 A면
【영인본】 6책 538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위 기사와 관련된 계유정난을 살펴보면
단종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 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으로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만에 죽자 단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후비(后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그러나 당시 여건으로는 수렴청정을 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 산욕열(産褥熱)로 죽었지만(1441년 세종 23), 문종은 다시 세자빈을 맞지 않았다.
후궁으로 귀인 홍씨(洪氏)·양씨(楊氏)만을 두었던 것이다. 사실 세종의 후궁 혜빈 양씨(惠嬪楊氏)가 있기는 했으나 정치적 발언권이 없었다. 후궁들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다만 내사(內事)를 돕는 일에만 관여할 뿐이었다.
때문에 모든 정치적 권력은 문종의 유명을 받은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 황보 인·김종서 등이 잡고 있었다. 세종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 출생한 적자(嫡子)는 문종 외에도 수양·안평(安平)·임영(臨瀛)·광평(廣平)·금성(錦城)·평원(平原)·영용(永庸)의 일곱 대군이 있었다.
그 무렵 왕권은 약하고 신권은 강한 형세였다. 때문에 능력있는 여러 대군은 왕권에 큰 위협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즉,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으고 있었다.
반면에,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에 수양대군은 처음부터 김종서 등이 안평대군과 정치적으로 연결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다.
단종 초 고명대신의 변화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단종이 즉위할 때의 진용은 영의정에 황보인, 좌의정에 남지(南旨), 우의정에 김종서이었다. 이후 남지는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신병으로 사임하고 그 후임으로 이 해 12월 김종서를 좌의정, 정분(鄭苯)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황보 인은 성격이 유약하고 남지는 오래 전부터 앓아온 신병으로 정권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때문에 실권은 자연 김종서가 장악하게 되었다. 정분이 우의정이 된 다음에도 계속해서 모든 권력은 김종서에게 기울고 있었다.
《단종실록》은 이들 대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즉, 안평대군 등 종친뿐 아니라 혜빈 양씨, 환관 등과 모의해 궁중에까지 세력을 부식하는 한편, 황표정사(黃標政事)라 불릴 정도로 자제를 포함, 많은 당여(黨與)를 요직에 배열해 붕당을 조성했으며 끝내는 종실을 뒤엎고 대군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단종실록》이 세조 때 어용사관에 의해 편찬된 것임을 감안하면, 믿기 어려운 점이 많다.
또, 수양대군은 단종을 몰아내고 세조로 즉위한 다음, 《경국대전》 편찬 과정에서 제2의 창업지주(創業之主) 혹은 조종지주(祖宗之主)임을 내세웠다. 그는 계유정난이 없었다면, 황보 인·김종서 등이 반드시 안평대군과 모의해 종사를 결단내었을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수성지군(守成之君)이 아니라 창업주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국대전》의 체재는 물론, 많은 신법을 제정한 것을 보아도 그의 야망이 어디에 있었던가를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이하중략 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계유정난 및 단종복위운동 즉 사육신 사건 후 기록으로 가보자
세조 5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9월 7일(갑술) 4번째기사
의금부에 난신에 연좌된 부녀를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 전지하기를, “난신(亂臣)에 연좌(緣坐)된 부녀(婦女) 내에 이소동(李小童)의 아내 천비(千非), 이공회(李公澮)의 아내 동이(同伊), 심상좌(沈上佐)의 아내 미비을개(彌飛乙介)·딸 계금(繼今)은 계양군(桂陽君) 이증(李璔)에게 주고, 이담(李湛)의 아내 소사(召史), 박기년(朴耆年)의 아내 무작지(無作只), 이오(李午)의 딸 평동(平同),
이유기(李裕基)의 누이 효전(孝全)은 익현군(翼峴君) 이관(李璭)에게 주고,
박팽년(朴彭年)의 아내 옥금(玉今), 김승규(金承珪)의 아내 내은비(內隱非)·딸 내은금(內隱今)·첩의 딸 한금(閑今)은 영의정(領議政) 정인지(鄭麟趾)에게 주고, 조청로(趙淸老)의 어미 덕경(德敬)·아내 노비(老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막덕(莫德), 이현로(李賢老)의 첩의 딸 이생(李生)은 좌의정(左議政) 한확(韓確)에게 주고, 이현로(李賢老)의 아내 소사(召史), 민보창(閔甫昌)의 아내 두다비(豆多非), 김유덕(金有德)의 아내 금음이(今音伊)·딸 옥시(玉時)는 우의정(右議政) 이사철(李思哲)에게 주고,
성삼문(成三問)의 아내 차산(次山)·딸 효옥(孝玉), 이승로(李承老)의 누이 자근아지(者斤阿只)는 운성 부원군(雲城府院君) 박종우(朴從愚)에게 주고, 황보흠(皇甫欽)의 아내 석을금(石乙今), 박쟁(朴崝)의 아내 오덕(吳德)·딸 효비(孝非)는 좌찬성(左贊成) 윤사로(尹師路)에게 주고,
이유기(李裕基)의 아내 설비(雪非)·딸 가구지(加仇之)·말비(末非)·막금(莫今), 성삼고(成三顧)의 아내 사금(四今) 및 한살 된 딸은 우찬성(右贊成) 정창손(鄭昌孫)에게 주고,
이승윤(李承胤)의 아내 가은비(加隱非), 지화(池和)의 아내 막금(莫今)은 파평군(坡平君) 윤암(尹巖)에게 주고,
이휘(李徽)의 아내 열비(列非), 허조(許慥)의 아내 안비(安非)·딸 의덕(義德)은 전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계전(李季甸)에게 주고,
이자원(李滋源)의 아내 유나매(維那妹), 이개(李塏)의 아내 가지(加知)는 우참찬(右參贊) 강맹경(姜孟卿)에게 주고, 이윤원(李潤源)의 첩 분비(粉非), 이경유(李耕㽥)의 아내 효생(孝生)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징석(李澄石)에게 주고, 박인년(朴引年)의 아내 내은비(內隱非),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보배(寶背)는 화천군(花川君) 권공(權恭)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아내 소사(召史), 고덕칭(高德稱)의 아내 보금(甫今)·딸 신금(信今)은 우참찬(右參贊) 황수신(黃守身)에게 주고, 이해(李諧)의 아내 종금(終今)·딸 불덕(佛德)·불비(佛非), 김유덕(金有德)의 누이 막장(莫莊)은 예조 판서(禮曹判書) 박중손(朴仲孫)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누이 선비(善非), 조완규(趙完圭)의 아내 소사(召史)·딸 요문(要文)은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숙주(申叔舟)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아내 소사(召史), 권자신(權自愼)의 아내 어둔(於屯)·딸 구덕(仇德)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권준(權蹲)에게 주고,
우직(友直)의 아내 오대(五臺), 김현석(金玄錫)의 아내 영금(英今)은 이조 판서(吏曹判書) 권남(權擥)에게 주고, 윤영손(尹令孫)의 아내 탑이(塔伊)·딸 효도(孝道), 이반경(李反敬)의 첩 막생(莫生)은 중추원 사(中樞院使) 박강(朴薑)에게 주고, 김문기(金文起)의 딸 종산(終山), 최득지(崔得池)의 첩 지장비(地莊非)는 대사헌(大司憲) 최항(崔恒)에게 주고,
성삼성(成三省)의 아내 명수(命守), 정효강(鄭孝康)의 아내 효도(孝道)·딸 산비(山非)는 병조 참판(兵曹參判) 홍달손(洪達孫)에게 주고, 성맹첨(成孟瞻)의 아내 현비(現非), 최사우(崔斯友)의 첩 옥금(玉今)은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전균(田畇)에게 주고,
심신(沈愼)의 아내 석정(石貞)·딸 금정(金正)·은정(銀正), 성승(成勝)의 아내 미치(未致)는 계림군(雞林君) 이흥상(李興商)에게 주고, 이의영(李義英)의 아내 효생(孝生), 조극관(趙克寬)의 아내 현이(現伊)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양정(楊汀)에게 주고, 박순(朴詢)의 아내 옥덕(玉德), 박헌(朴憲)의 아내 경비(敬非)는 이조 참판(吏曹參判) 구치관(具致寬)에게 주고,
송창(宋昌)의 아내 소앙지(召央知), 황보석(皇甫錫)의 아내 소사(召史)는 전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사윤(尹士昀)에게 주고, 이말생(李末生)의 아내 관저(關雎)·딸 경비(敬非), 김문기(金文起)의 아내 봉비(奉非)는 도절제사(都節制使) 유수(柳洙)에게 주고,
박대년(朴大年)의 아내 정수(貞守), 송석동(宋石同)의 아내 소사(召史)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봉석주(奉石柱)에게 주고, 김승규(金承珪)의 딸 숙희(叔熙), 권저(權著)의 어미 보음미(甫音未)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강곤(康袞)에게 주고, 박계우(朴季愚)의 아내 소비(小非), 김승벽(金承壁)의 아내 효의(孝義)는 예조 참판(禮曹參判) 홍윤성(洪允成)에게 주고, 유성원(柳誠源)의 아내 미치(未致)·딸 백대(百代), 이명민(李命敏)의 아내 맹비(孟非)는 좌승지(左承旨) 한명회(韓明澮)에게 주고, 황선보(黃善寶)의 아내 복중(福中)·딸 덕비(德非)는 우승지(右承旨) 조석문(曹錫文)에게 주고,
이호(李昊)의 아내 개질지(介叱知)·딸 목금(木今)은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유하(柳河)에게 주고, 윤처공(尹處恭)의 딸 숙비(叔非), 정원석(鄭元碩)의 아내 만금(萬今)은 이조 참의(吏曹參議) 원효연(元孝然)에게 주고, 최치지(崔致池)의 아내 미치(未致), 최윤석(崔閏石)의 아내 봉비(奉非)는 단천 군수(端川郡守) 최유(崔濡)에게 주고, 황선보(黃善寶)의 누이 소사(召史),
이유기(李裕基)의 딸 소근소사(小斤召史)는 형조 참의(刑曹參議) 황효원(黃孝源)에게 주고,
조번(趙蕃)의 아내 소사(召史)·딸 의정(義貞), 황의헌(黃義軒)의 아내 복비(卜非)는 병조 참의(兵曹參議) 한종손(韓終孫)에게 주고, 원구(元矩)의 누이 심이(心伊), 조완규(趙完圭)의 딸 가이(加伊)는 좌부승지(左副承旨) 윤자운(尹子雲)에게 주고, 윤위(尹渭)의 아내 소사(召史), 정관(鄭冠)의 아내 신경(信敬)은 우부승지(右副承旨) 한계미(韓繼美)에게 주고,
이의산(李義山)의 딸 소사(召史)·막금(莫今)은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조효문(曺孝門)에게 주고,
이정상(李禎祥)의 아내 삼비(三非)·딸 현비(現非)·정비(貞非), 최득지(崔得池)의 아내 마배(磨杯)는 겸 판통례문사(兼判通禮門事) 이극배(李克培)에게 주고, 윤경(尹涇)의 아내 소사(召史), 성삼빙(成三聘)의 아내 의정(義貞)은 판종부시사(判宗簿寺事) 권개(權愷)에게 주고,
봉여해(奉汝諧)의 어미 소비(小非)·아내 정순(丁順)은 상호군(上護軍) 유서(柳溆)에게 주고, 민보흥(閔甫興)의 아내 석비(石非), 이윤원(李潤源)의 아내 대비(大非)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김질(金礩)에게 주고, 대정(大丁)의 아내 자근(者斤), 하위지(河緯地)의 아내 귀금(貴今)·딸 목금(木今)은 지병조사(知兵曹事) 권언(權躽)에게 주고,
이보인(李保仁)의 아내 물재(勿才)·딸 옥석(玉石)은 성균 사성(成均司成) 정수충(鄭守忠)에게 주고, 조완규(趙完圭)의 누이 정정(精正), 최사우(崔斯友)의 어미 소사(召史)는 상호군(上護軍) 유사(柳泗)에게 주고, 식배(植培)의 딸 귀비(貴非)·귀장(貴莊)·귀금(貴今)·소근비(小斤非), 유응부(兪應孚)의 아내 약비(若非)는 예빈시 윤(禮賓寺尹) 권반(權攀)에게 주고,
민신(閔伸)의 아내 우비(禹非)·딸 산비(山非)는 대호군(大護軍) 안경손(安慶孫)에게 주고, 이지영(李智英)의 어미 석을금(石乙今)·아내 종비(終非)·딸 은비(銀非)는 대호군(大護軍) 홍순로(洪純老)에게 주고, 송녕(宋寧)의 아내 소사(召史), 권저(權著)의 첩 복가이(卜加伊)는 대호군(大護軍) 조득림(趙得琳)에게 주고, 김감(金堪)의 첩 귀덕(貴德)·딸 소비(小非), 이양(李穰)의 아내 월비(月非)는 대호군(大護軍) 이극감(李克堪)에게 주고, 중은(仲銀)의 누이 귀덕(貴德)·딸 귀비(貴非), 장귀남(張貴男)의 누이 말비(末非)는 직예문관(直藝文館) 유자황(柳子滉)에게 주고,
정분(鄭笨)의 아내 순비(順非), 이석정(李石貞)의 첩 말생(末生)·딸 감물(甘勿)은 대호군(大護軍) 임자번(林自蕃)에게 주고, 대정(大丁)의 어미 내은이(內隱伊), 김감(金堪)의 아내 소사(召史)·딸 복금(卜今)·말금(末今)·아지(阿只)는 전 호군(護軍) 김처의(金處義)에게 주고, 최면(崔沔)의 어미 소사(召史)·아내 점물아지(占勿阿只)·딸 부허비(夫虛非)는 사복 소윤(司僕少尹) 한서귀(韓瑞龜)에게 주고, 최치지(崔致池)의 아내 덕비(德非)·딸 백이(白伊)는 전농 소윤(典農少尹) 송익손(宋益孫)에게 주고, 이승로(李承老)의 아내 효정(孝貞)·딸 숙화(叔和), 이오(李午)의 아내 소질지(少叱知)는 군기 부정(軍器副正) 설계조(薛繼祖)에게 주고,
이의산(李義山)의 아내 참군(參軍)·딸 아을금(阿乙今)은 사재 부정(司宰副正) 권경(權擎)에게 주고,
정관(鄭冠)의 어미 소사(召史), 장귀남(張貴男)의 누이 학비(鶴非)는 군기 부정(軍器副正) 홍순손(洪順孫)에게 주고, 허조(許慥)의 어미 화산(花山)·누이 소근소사(小斤召史)는 겸 군기부정(兼軍器副正) 곽연성(郭連城)에게 주고,
권저(權著)의 아내 계비(季非)·딸 순비(順非)는 호군(護軍) 최윤(崔閏)에게 주고, 조순생(趙順生)의 아내 가질비(加叱非), 김선지(金善之)의 아내 내은이(內隱伊)·딸 가야지(加也之)는 전 부사직(副司直) 이몽가(李蒙哥)에게 주고,
이석정(李石貞)의 딸 감상(甘尙), 최면(崔沔)의 누이 막비(莫非)는 도승지(都承旨) 박원형(朴元亨)에게 주라.”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책 5권 8장 A면
【영인본】 7책 150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사법-재판(裁判) / *신분-신분변동(身分變動)
위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한산이씨 사윤공 휘 맹유의 후사를 이은 휘 유기와 이 글의 주인공 인재공 휘 종학의 자 6남1녀중 따님 이신 군부인이 시집간 남편인 전주이씨 익천군 휘 점의 기록을 통하여 조선왕실가에서 겪으신 이야기를 통해 부모의 마음과 충절의 의미를 되새겨보며 한가위를 맞이하는 명절 직전 나름대로 유추하여 삼가 기록을 게시하다
한산이씨 인재공 휘 종학의 딸 선조님을 기리며
문양공 후손 이대원 한가위 인사를 올리면서 삼가글을 게시하다
첫댓글 잘 읽었슴. 선조들의 이야기를 미화시킨 기분좋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여러각도에서 다방면으로 옛 삶을 재조명할수 있게 언찮은 비화들도 올려주셔서 공정하게 저울질을 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림. 수고하셨소이다~~
안소공 휘 훈 내용을 보고 글을 잡아보았는데 한편 글 쓰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ㅎ 좋은 날 되세요
실로 읽기조차 그런 내용/신분변동은 기가 막힌 일이군요.기록을 이리 서술하시느라 너무 애쓰셨습니다.
그래도 우리 선조님 따님들은 딸 보다는 따님이나 여식으로 표현함이 어떠실지요?(제 사견입니다.)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문우를 여쭙지는 못하고 글로만 인사드립니다 한번 시간내어 쓴 글이 자꾸 길어져서 장문이 됩니다
연재보다 한번에 일대기를 적을려고 하다보니 ---
여식이라는 표현이 딸 보다는 형식면에서 좋은 것은 사실 지당한 지적입니다 사실 요즈음 30대이하는 한자식 표현에 익숙지 못해종종 한자 공경어투를 사용하면 무슨 뜻인지 다시 물어보는 경우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래서 고민끝에 중간입장에서 고심을 많이 하게됩니다 다음부터는 혼합병기를 사용하는것이 더 나을것도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식사시간되세요
@대원 글을 올리다보면 민감한 부분들이 있고 어른이나 많이 아는분들께 지적이 많을때도 있답니다.저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사견을 드리는게 좋겠다싶어서요.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