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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요셉형제로부터 성문 밖 문화탐방 해설 의뢰를 받는다. 잠시 생각이 지난 후 나는 속도감 있게 준비를 해 나갔다.
주제는 다음과 같이 정하고 - 한양 도성(漢陽 都城)을 걸으며 보면 한국 천주교 역사가 보인다
성문 안 권력의 실체를 살피고 그 대척점에 있던 남인들 중심으로 성문 밖 지식인들의 동향을 연대별로 살폈다. 무슨 일이든 선지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분명하게 존재 한다.
절대 권력자인 왕권, 그 아래 기생하며 자신의 이익만 취하던 고관대작, 그리고 백성의 고혈을 쥐어 짜는 지방관들의 득세로 조선중기 말 이후,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난 남인 지식인들, 그들은 고뇌하기 시작하였다. 신분적으로 그들은 사대부라 하였고 인격적으로는 사군자라 존중 받던 지식인이다. 반계 유형원은 이런 말을 남긴다. 먹을 것은 단하나인데 먹으러 덤벼드는 이는 여럿이니 분당이 생기고 파벌이 생긴다는 것이다. 양반들도 스스로 농사를 지어 먹을 것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논리는 성호에게 이어져 실학으로 태동하여 이어지고 서학으로 접근한다. 서학은 끝내 강학을 거져 자생적 힘으로 종교로 고착되어 간다. 이 과정에서 국가를 지키려는 권력과 믿으려는 사람과 충돌이 일어난다. 중간 중간 정치적 술수가 끼어들기도 하지만 박해는 여러차례 일어난다.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형조를 중심으로 의금부, 동,서 포도청에선 천주쟁이를 잡아 들여 심문하고 고문하고 배교를 권고하고 실행하면 권면하지만 거부하면문밖, 사람 왕래가 많고, 물이 흐르고, 사직단에서 벗어난 곳에 형장을 세우고 참수형으로 다스렸다. 그 형장이 바로 서소문 밖 사거리, 당고개, 새남터다. 경기권역은 남한산성 동문 밖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천주쟁이를 잡아다 죽인 이유는 더 이상 백성들 속으로 퍼져 나가지 못하도록 막기 위함이었는데 결과는 오히려 정반대였다. 순교자의 피는 사방으로 퍼져 나가 깊은 산중에 교우촌이 만들어지고 그 세를 점점 넓혀 나갔다. 심지어 왕가에 까지 전해져 그 안에서 믿는 이들도 생긴다. 권력의 힘으로 대리하여 박해의 중심에 선 이들은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있던 형조가 그 중심이고, 포도청과 의금부 또 한 그 부근에 있었다. 이에 반해 믿는 이들은 명례방 부근, 북촌일대, 남대문 부근, 낙산아래에 숨어 세를 불리고 있었고 성문 밖으로는 동대문 밖 지붕 아래와 마재, 양근, 광주 일원과 서소문 밖 순화, 아현 부근에 숨어 지냈다.
또한 박해의 시기가 지나고 한불조약으로 어느 정도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자 순교터가 내려다 보이는 곳 서소문밖에 약현 성당이 세워지고, 명례방에는 명동성당이 세워지고 용산 함벽정에는 성심신학교가 개교를 하여 신학생을 배출하여 약현성당에서 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 낙산 아래에 용산 신학교가 이전하여 성 안에 반듯하게 개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주제를 위와 같이 정하게 된 것이다.
약속된 성원이 된 것을 알고 탐방을 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학교 전반적인 발전에 대하여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순교 의지를 담아 기도를 청한 후 혜화문 안에서 시작하였다. 내사산과 외사산을 설명한 후 도읍배경과 한양도성 사대문, 사소문을 설명한 후 낙산아래 신학교에 대한 설명을 끝으로 도성을 따라 걸었다. 경신학교 부근 성북동 남향 언덕 채석장이 있던 곳을 바라 보고 김광섭 시인이 살던 집을 알려 준 후 건축 배경까지 설명하였다. 성북동은 도성밖 숙정문 밖 아래 마을로서 삼청동과 더불어 三淸 을 지닌 곳이었다. 山淸, 水淸, 人淸 숲이 푸르고 물이 맑고, 사람 또한 맑은 이들이 살았다. 풍치가 좋은 곳이다 보니 문인들과 예술인들이 많이 살던 곳이었는데 어느해 부터 기업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돌을 채석하고 언덕을 깍아 집을 지으면서 자연을 훼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런 훼손되어 가는 자연을 보면서 우리들에게 귀감이 되는 시를 남긴다. 그 시가 바로 성북동 비둘기다. 누구보다도 창조적인 질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우리들이기에 그 시를 선택하고 나누어 준 것이다.
시인이 살던 집을 보며 성북동 비둘기를 낭송하였다. 낭송은 유영재 마틸다 자매님이 담당해 주셨다. 이어서 북정마을을 살피기 위하여 성곽을 끼고 와룡공원을 향해 올랐다. 오전내내 비가 와 숲에는 피톤치드가 가득하였다.
가는 길. 잠시 중간턱에 쉬었다 가기로 하였다. 이 지점에서도 몇해 전에는 낙산 일대가 조망되었는데 나무가 자라 숲이 풍성해져 지금은 보기가 어렵다. 마틸다 자매님이 과일을 또 챙겨 주신다. 마침 입이 말랐었는데 한 입 물자 과일향과 함께 수분이 촉촉하게 입 안을 상쾌하게 변모 시켜 주었다. 적기에 살펴준 배려에 감사 인사를 드렸다.
쉬어 가시는 자매님들의 사진을 기억해 놓고 다시 일어섰다.
북정마을은 반달같은 지형 언덕받이에 세워진 마을이다. 성곽 밖 동북향 내지는 북향과 동남향이다. 숙정문 밖 있는 마을로서 커다란 우물이 있어 북정(北井) 마을이라 불렀다는 설이 있고 메주를 쑤어 궁궐에 진상했다는 설이 있는데 메주를 쑤는 달이 오면 콩을 삶고 만드느냐 사람들이 북적거려 북정마을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내가 알기로는 6.25동란을 겪으면서 피난민들이 머물 곳은 산비탈이었다. 삼선동 비탈에 수많은 집이 생기면서 성북동 안쪽으로 들어차기 시작 한 것이다. 성곽아래 옹기종기 모여 살며 형성된 곳이 바로 성곽 아래 마을이었다.
60년대 서울의 외곽 전형적인 모습을 지금도 갖고 있는 마을이 북정 마을이다. 지금은 재개발 추진이 후 많은 주민들이 떠났지만 한 때는 외룡공원 부근까지 민가들로 가득찼었다.
북정마을은 인정이 넘치는 마을이었다. 나는 샛길을 이용하여 북정마을로 안내 하였다. 이 세상에 변화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생기면 점차 원래의 빛을 잃어버려 가는 것은 숙명이다.옛적에는 문밖이었지만 지금의 도시의 팽창 영향으로 도심의 한 부분이 된 성북동 북정마을, 성곽 아래 은거하듯 인정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유일한 달동네다. 이곳에 오래토록 사셨던 노인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떠올랐다. 식구들은 떠나자 하는 것을 내가 고집을 부려 머물게 만들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묻자 사람 냄새가 좋고 흙냄새가 좋아서 떠날 수 없었어, 나는 당시 그 노인의 마음을 충분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이 시람 냄새를 잃고 흙냄새를 잃으면 인간으로서 존재성이 떨어진다. 오랜 만에 우리의 옛 주거 환경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사진을 찍고 과거를 회상하는 시간을 갖으라고 한참 나는 서서 기다려 주었다.
북정마을 카페와 골목 길 사이에 있는 이발소다. 정겨운 모습이 살아 떠오른다.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 시 동판이 서있는 곳이다. 잠시 머물며 중요한 부분을 발췌한 후 이야기를 나눔하였다.
인간이 자연과 일체성을 버리면 난감해 진다. 자신부터 무너지기 시작하게 된다. 아무리 과학, 문명을 논하여도 결국 우리들이 가는 곳은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다. 흙이 되고 초목이 되고, 꽃이 되고 자연으로 흩어지는 것이다. 육신의 본향인 자연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을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북동 비둘기 중 좋아하는 부분을 발췌 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
성북동 비둘기 시를 나눔한 후 골목 중간에 있는 심우장으로 내려 왔다. 심우장은 원래 승려 벽산 김적음이 초당을 지으려 준비한 땅이다. 면적은 약 52평에 불과하였지만 벽산이 내놓자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독지가들이 나서서 땅을 더 사서 집을 짓는다.112.99평으로 늘어난 대지 위에 17,8 건평으로 단층 팔작 기와 지붕이다. 한옥의 구조는 정면 4칸으로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 양쪽으로 온돌방을 두었다. 우측 서재로 사용하던 방에는 尋牛莊이란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옥호를 선종(禪宗)의 깨달음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뜻하는 심우를 따 심우장이라 한다. 이곳에서 만해 한용운은 1933년부터 1944년 까지 살다 열반에 든다. 열반 당시 지독한 영양실조 상태였다. 대문은 동향이고 한옥의 방향은 북향으로 하였다. 총독부와 마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에서 그렇게 한 것이다.
만해는 충남 홍성출신이지만 한명회 친동생의 둘 째 아들이다. 본관은 청주이고 본명은 정옥이다. 용운은 법명이다. 그리고 만해는 아호다, 만해는 1919년 승려 백용성과 함께 불교를 대표하여 33인 발기인으로 참여 한다. 독립선언문 공약 삼장 집필자다. 만해는 설악산 오세암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출가하였지만 속세로 다시 나온다. 그리고 중국, 만주등을 돌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 한다. 그러다 다시 28세에 백담사로 들어가 정식을 계를 받아 승려의 길을 걷는다. 1910년 불교개혁을 주장 조선불교 유신론을 저술하고 1926년에는 님에 침묵을 펴낸다. 신간회 가담하였고 1931년 조선불교청년 동맹을 결성을 주도하기도 한다. 만해는 1919년 3.1 운동 때 3년의 옥고를 치룬다. 석방 후 성북동 골짜기 세방을 살이를 하면서 어렵게 지내고 있었다. 이 때 승려 벽산이 도움을 자청하고 나선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찾아 간다는 심우장은 만해의 마음 공부하는 집이었던 것이다.
한용운이 쓰던 방에는 한용운의 글씨, 연구논문집, 옥중공판기록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심우장의 이름처럼 인간의 소박한 본성을 지녔던 만해, 승려였으면서 독립운동가 였고 문인이었다. 얼마 전 이곳에서 73주기 입적을 추모하는 제가 열렸었다. 이 심우장 마당에 서면 만해의 사상과 민족의 혼, 그리고 주옥같은 시어들이 나비가 되어 떠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한 만해, 그는 위대한 민족 혼 자체였다. 합장으로 허리를 굽혀 이별을 고한 후 골목길을 내려 섰다.
심우장으로 올라 가는 길에 서있는 만해 좌상으로 다가 가 단체 사진을 찍었다. 십우도가 뜻하는대로 만해는 소도 버리고 자신도 버리고 텅빈 공허 속에 머물다 다시 저잣거리로 다시 나와 우리 모두에게 일성으로 가르치고 계신다. 무엇이 그렇게 바쁘다고 정신 줄을 놓고 사느냐. 정신들 차려 너의 본성을 찾아 내거라
존경 받는 일,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특히 시류와 상관 없이 이어지는 존경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것은 진리안에 항상 있을 수 있는 삶을 살았기에 가능한 일이다. 등을 돌려 아래로 내려 왔다. 이곳에 오면 항상 점심을 챙기는 설렁탕 집으로 가기 위함이었다. 아~~ 오늘 월요일이지, 주말에 시달린 집은 쉬는 날이다. 길을 건너 만두집으로 가려 하였으나 유명세를 타는 집은 주말을 보낸 후 쉬어야 한다. 그런데 안쉬는 집이 있다. 보리밥 집이 그 집이다. 방을 내놓으라 하고 방을 차지하고 점심 나눔을 가졌다. 식사 후 구미술관 뒷에 있는 한옥으로 갔다. 소설가 이태준을 만나기 위함이었다. 그가 앉아 소설을 집필하였다는 방이 참 아담하고 정갈하다. 이곳도 입소문이 돈 집이라 월요일 휴업이다. 들어갈 수 없지만 솟을 대문 앞에서 아쉬움을 달랬다.
상허 이태준은 1933년부터 1946년까지 이곳에 머물며 황진이, 돌다리, 달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만해와도 교분이 있었다. 만해도 심우장에서 소설 몇편을 써서 조선일보에 연재한다. 같은 소설과 입장에서 교우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집은 수연산방이란 옥호로 전통 찻집을 운영하고 있다. 운영자는 상허의 외종손녀가 한다. 이 집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장독대가 나온다 왼쪽은 수연산장 찻집이 있고 야외 태이블과 오두막이 운치를 더한다. 오른쪽에는 사랑방, 안방, 마루로 이뤄진 안채가 있다. 찾는이 마음에 드는 공간에 앉아 다과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한옥에서 즐기는 전통 차, 한모금, 마음을 여백으로 모으기 금상첨화다. 그런데 휴관이라 다음 기회에~~~~ ^^ 다시 걸어 300m 내려 가면 길 건너에 또 하나의 별장이 있다. 이종석 별장인데, 조선의 거상 이종석은 마포에서 젓갈로 갑부가 된 인물이다. 1900년경 별장을 지은 집이다. 이곳도 일요일과 월요일은 휴관한다. 조선말기 거상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다음기회로 미뤄졌다. 밖에서 설명만 한 후 선잠단지를 지나 작은형회 성북동 수도회로 갔다. 묵상과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다.
수도원 안 마당으로 들어 가자 학사님과 지원자가 반송 아래에서 담소중이었다. 다가 가 신분을 밝히고 2층 경당으로 가겠다하자 5년차 학사님이 앞장 서서 준비해 주셨다. 평창동까지 기능을 성북동으로 합쳐 지원에서 종신, 학사, 수사님과 성직자들이 함께 머무는 수도원이 되었다. 대신 평창동은 피정센타로 탈바꿈하고.... 김찬선 신부님도 이곳에 머무신다. 우선 2층 경당으로 가 모두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1층 회합실로 내려 가 준비해 주신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눔하였다. 그리고 학사님과 수사님을 모시고 단체 사진도 찍었다. 반갑게 맞아 주신 수사님과 학사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다시 남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자리에 일어섰다.
다시 정원에 계신 성모님 앞에 모여 ~~~^^ 200m 위에 있는 성북동 성당을 참례하기 위해 걸어 올랐다.
9월 24일 용문 청소년 수련원에서 한 마음 잔치가 열리는 모양이다. 성당 벽에 걸어 놓은 현수막이 사실을 알려준다. 30여년 전 있었던 기억이 떠 올랐다. 부제서품을 받으시고 오신 부제님, 이상하게도 힘들어 하셨다. 윗분하고 소통이 잘 안되는 경우였다. 말라가시는 모습이 얼마나 안타까웠던지, 그리고 떠나신 후 서울교구 소유 수련원으로 가셨는데 찾아간 적이 있었다. 흙투성이 작업복, 누가 인부이고 성직자가 누구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그런데 대화중에 행복하다는 사실을 역려하게 느끼고 돌아 온 적이 있었다. 현수막을 보면서 그 생각이 떠올랐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소통이다. 불통이면 서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기도가 없는 믿음은 불통이지 않겠는가!
작은 성당이지만 아름다운 성당이다. 신자수는 약 2500명 선(등록된 숫자) 주보 성인은. 성모 성탄이시다. 1975년 축성된 성전으로 2015년 기준으로 2,500명 이다. 붉은 벽돌로 아담하고 아름답게 축성된 성전이다. 원래 혜화동 성당에서 분가된 곳이다. 오늘 쉬는 날이라 관리장을 찾아 뵙고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갖겠다고 말씀드렸다. 허락을 받은 후
성모님 동산 앞에 모여 참가자 전원을 손을 잡게 한 후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입당한 후 묵상과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성북동 성당 유리화의 주제는 예수님과 성모님, 순교자와 관련되어 있다. 제대를 중심으로 각각 양쪽에 4개씩 전시되어 있고. 유리화 작가는 양단철 하상 바오로다. 동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러시아 문화연구소에서 이콘을 공부하고 이어서 프랑스 사르트르에서 유리화를 연수 하였다. 작가는 유리화에 우리나라 전통적인 문양을 집어 넣어 한국의 미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예수 성탄 유리화는 중앙에 아기 예수와 성모님을 붉은 햇살로 감싸고 있고 아래에는 요셉이 아기예수의 탄생의 의미를 묵상하고 있으며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물을 들고 경배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확실한 나의 도반들이시다. 이제는 표정만 스쳐도 기분을 알 정도가 되었다. 데레사, 마틸다 자매님은 모처럼 오셔서 응원을 보태 주셨다. 감사할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다시 마당으로 나와 마침기도를 드리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다. 미흡하지만, 아쉽지만 마침 기도를 끝으로 각자의 길로 다 떠나야 한다. 혹시 진행하면서 외람된 행동이나 오만한 구석이 있었다면 동행하신 모든 형제들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함께 한 시간내 행복하였다는 사실을 전하며 탐방 이야기를 이만 줄이겠습니다. 환절기 건강 유념하시고 은총 안에서 항상 행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오언제나 샬롬!
오늘 있었던 모든 일에 대하여 아멘~~
함께 하며 소통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숨 쉬며 살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상대가 있다는 사실은 참 행복한 일이다.
너를 봄으로써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행복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
감사한 마음에서 적습니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멋진 가을날 오후. severino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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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베리노형제님! 그 날 수고에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뒤풀이에도 함께했으면 좋았을텐데 못해 미안합니다. 다음을 기약해야지요. 관련한 해박한 지식이 부러웠습니다. 사랑합니다
형제님 무척 반가웠습니다. 화양구곡에서 뵙고~~~^^ 환절기 건강하시고 늘 은총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훗날 기회가 오면 뒷풀이하시지요. 그날 여러모로 감사하였습니다. 꾸벅~~~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사를 배위 뜻깊은 시간이었어요 사진을 다운받을 수 있게 앨범에 올려주세요
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