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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생님 운남성 차밭 답사 여행기 살짝 보기 10 (페북에서)
91. 2012.10.17
愚人初见范伟群制作的千年红已过了江山可变的十年。当年的青年范氏已成为省大师了。当时的修子朴某也穿着了镖局商袍。现今可顾当年的情趣只在愚人写给范氏的一条墨迹。
古佛密言优昙花
人生谁见千年华。
波澜苦海流半百
壶中奇闻观音话。
어리석은 이가 처음 판웨이췬이 만든 천년홍을 본 게 벌써 강산이 바뀐다는 십 년이 흘렀습니다. 그때의 청년 판씨는 그 사이에 쟝쑤성 공예미술대사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박모는 마을 하나 나타나게 하려고 표국 상인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지금 그때의 정취를 돌아볼 수 있는 것이라곤 어리석은 이가 판씨에게 써주었던 천년홍에 대한 몇 자 글귀 뿐입니다.
옛 부처 가만히 우담화를 얘기하셨으나
사람이 뉘라서 천 년의 세월을 본다던가
파란고해 흘러 반백 년
차호 가운데서 기이하게도 관음의 말씀을 듣는구나.
---참고로 저는 불교 신행자는 아닙니다. 다만 존중합니다.
92. 2012.10,19
점심 약속을 마치고 모처럼 짧은 시간이나마 어슬렁어슬렁 대다 지나가는 이들의 표정들을 구경하자니 가슴이 아립니다. 뭐가 텅 빈 듯, 화를 꾹 누르고 있는 듯, 짜증나는 일이 덮여 있는 듯, 누군가의 조종에 끌려 다니는 좀비라도 된 듯, 누가 쫓아오는 이가 있는 듯, 비적이 칼 들고 뒤나 따르는 듯, 방금 심한 사기나 절도라도 당한 듯, 오늘 저녁 끼니가 떨어지기라도 한 듯, 세탁소에서 옷이라도 훔쳐 입은 듯 합니다. 너무 가슴이 아립니다. 대개가 수미산이라도 짊어진 듯 합니다. 한국전쟁 피난길에 찍힌 한 갑자 전의 사람들이 지었던 고난의 표정보다 힘들어 보입니다. 사진이 맑지 못해서 그렇지 고난의 시절임에도 그 이들의 얼굴에선 지나가는 웃음이 꽤 진한데도 말입니다. 이게 대체 어이 된 일인지 말입니다.
그 까닭을 모르지 않으니 더 그렇습니다. 그 앞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 그리 하니 더욱 그렇습니다. 길을 벗어난 자동차나 궤도를 벗어난 열차가 되기를 고집해서 생긴 아픔이라서 한번 더 그렇습니다.
93. 2012.10.19/2
모든 시기에는 그 나름대로 흐름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식의주의 영역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끊임없는 성장만이 생존의 절대적 조건이 되는 자본주의사회, 더구나 제국주의적 수탈을 주요한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없는 오늘날의 자본주의사회는 어쩔 수 없이 이른바 트랜드라 불리는 흐름의 변화를 통해 성장의 동력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기술의 첨단화일 것입니다. 아울러 그것이 결코 전부는 아니지만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환경보호나 녹색문화 및 건강생활 심지어 복고적 회귀 및 사회적 기업화 및 공동체주의 또는 남녀평등의 가치조차도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아낌없이 끊임없는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제공되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제공하는 분들의 첫 생각은 대체로 순수하겠지만 이 사회에서 공론화가 되고 나면, 나름대로 재조정되어 성장의 동력원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와 철인과 문인과 운동가의 손에서 정치인과 경제인과 이익집단의 마당으로 확장되는 순간 이런 재조정은 이미 진행된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공동선은 현실적으로 성장인 탓이 아닌가 합니다. 복지도 분배도 신 성장 동력으로 재조정되기만 한다면 새로운 논의거리가 될 것이니, 환경보호가 녹색성장으로 재조정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등장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성장의 동력화를 위해 트랜드는 늘 새로운 물결과 함께 춤을 춥니다. 식의주의 트랜드도 그래 왔고 또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잡화점의 형태를 띠고 대세를 이루던 양품점은 고품질과 신뢰성 및 국제화와 규격화 및 세트화라는 요구에 의해 백화점으로 그 유통주도권을 넘겨주었으며, 백화점은 세퍼레이트 컴비내이션과 개성화 및 합리화 등의 요구에 의해 잠시 스파브랜드시대를 거쳐 편집샵에게 그 주도권을 물려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 과정은 성장의 과정이자 성장주체의 변화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먹는 것의 영역이나 주택문화의 영역도 다르지 않겠지요. 같은 수입원을 가진 사람이 비슷한 집에 살다가 새로운 주거 트랜드이자 새로운 럭셔리 하우스였던 아파트가 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채택되자 그 적응방식에 따라 빈부가 나뉘면서 새로운 주택시대가 오지 않았습니까? 수요의 문제나 경기침체의 문제가 얽히면서 새로운 성장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곧 새로운 럭셔리 하우스가 하나의 트랜드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다시 적응과 선택을 통한 심각한 분화가 진행되겠지요. 그 럭셔리의 방향성이나 특징 및 내용이야 뻔한 것이겠구요.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오늘 한국문화정품관의 간판작업을 했습니다. 코리안 브랜드 코리안 메이드의 편집샵이 문화라는 영역과 주제를 매개로 곧 문을 열려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바이코리아가 아니라 바이코리안 스타일샵이 문을 여는 것이지요.
아이고 치초가
횡설수설로 말이 기네요. 용서를...대체로 순수하겠지만 이 사회에서 공론화가 되고나면,
나름대로 재조정되어 성장의 동력원으로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학자와 철인과 문인과
운동가의 손에서 정치인과 경제인과 이익집단의 마당으로 확장되는 순간 이런 재조정은 이미 진행된다고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공동선은 현실적으로 성장인 탓이 아닌가 합니다. 복지도
분배도 신성장동력으로 재조정되기만 한다면 새로운 논의거리가 될 것이니, 환경보호가 녹색성장으로 재조정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등장한 것도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성장의 동력화를 위해 트랜드는 늘 새로운 물결과 함께 춤을 춥니다. 식의주의 트랜드도
그래 왔고 또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잡화점의 형태를 띠고 대세를 이루던 양품점은 고품질과 신뢰성
및 국제화와 규격화 및 세트화라는 요구에 의해 백화점으로 그 유통주도권을 넘겨주었으며, 백화점은 세퍼레이트
컴비내이션과 개성화 및 합리화 등의 요구에 의해 잠시 스파브랜드시대를 거쳐 편집샵에게 그 주도권을 물려줄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 과정은 성장의 과정이자 성장주체의 변화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먹는
것의 영역이나 주택문화의 영역도 다르지 않겠지요. 같은 수입원을 가진 사람이 비슷한 집에 살다가 새로운
주거트랜드이자 새로운 럭셔리하우스였던 아파트가 성장의 새로운 동력으로 채택되자 그 적응방식에 따라 빈부가 나뉘면서 새로운 주택시대가 오지 않았습니까? 수요의 문제나 경기침체의 문제가 얽히면서 새로운 성장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곧 새로운 럭셔리하우스가 하나의 트랜드로
등장하면서 새로운 성장동력이 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다시 적응과 선택을 통한 심각한 분화가 진행되겠지요. 그 럭셔리의 방향성이나 특징 및 내용이야 뻔한 것이겠구요.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오늘 한국문화정품관의 간판작업을 했습니다. 코리안 브랜드 코리안 메이드의
편집샵이 문화라는 영역과 주제늘 매개로 곧 문을 열려는 것입니다. 추상적인 바이코리아가 아니라 바이코리안스타일샵이
문을 여는 것이지요.
아이고 치초가 횡설수설로 말이 기네요. 용서를...
욕망이 삶에서 자주 또는 늘 문제로 되는 것은 왜일까요? 욕망의 실현은 서수급수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지만, 욕망은 늘 그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자기 발전을 하기 때문인 듯싶습니다. 이것을 둘러싼 문제가 '演小天地'의 문제인 듯도 싶습니다. 치초라서 어느 하나에도 단정의 표현을 쉽게 못 하는 것도 용서를......누구나 지구가 태양을 돌고 또 자전을 하는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계절이 온다고 하지 지구가 그 계절로 간다고 하지 않으며, 해가 뜬다고 하지 해를 놓고 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그건 한편으로 옳고 당연합니다. 그러면 한기를 느낀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저는 많은 인체 연구자나 의생이나 수행자들이 이걸 제대로 표현한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댓글은 곧 지우고자 합니다. 이제 표국상인의 옷이 더 마련된 게 없어서 지금 입은 옷이 닳으면 치초는 곧 다른 옷으로 갈아 입을 생각입니다. 아울러 앞으로 몇몇 상태 글은 국소 공개로 올릴 생각입니다.
선생님의 '그 누구도 계절이 온다고 하지 지구가 그 계절로 간다고 하지 않으며, 해가 뜬다고 하지 해를 놓고 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는 표현을 읽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의 틀을 확 바꿔주는 엄청난 말씀 같습니다......좀더 연장된 깨달음을 갖고 싶어집니다......세상을 크게 볼 수 있도록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그래서, 감히 정중히 인사 올리면서 '한기를 느낀다는 말이 무엇인지? ' 여쭤 봅니다.
크든 작든 소통입니다. 사람의 몸도 세포 또는 세포적 단위의 독립적인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생태계이며 복잡한 사슬의 평원입니다. 그런데 욕망이 작동하고 그 욕망을 이루려는 힘이 작용하며 그 힘이 차츰 강해지면 그 생태계를 이끄는 선도 작용체에 의해 마치 하나의 생명체인 것처럼 되어버리면서 사람 몸이 생태계의 다원적 생명들은 하나의 생명을 구성하는 부속품처럼 되어버립니다.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한 방향으로 달리게 되면 마치 그 공동체가 그런 흐름을 이끄는 선도자 한 사람의 몸뚱이처럼 되어버리는 현상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지도부는 머리와 같은 부분으로 간주되고, 젊은 구성원들은 팔이나 다리처럼 간주되며, 각 구성원들은 세포로 간주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누구나 착각하듯이 생각은 뇌가 하고 소화는 위가 하고 통제는 간이 한다는 등의 사고방식도 이런 편견에 지나지 않습니다. 각 세포는 모두 나름대로 판단하고 사고하며 느끼고 감각하며 기억합니다. 사실 세포라는 이름조차 적절치 않으며, 그들을 굳이 이름 붙이자면 인체 구성 생명체들인 것입니다. 신경, 핏줄 등은 그 자체로서 생명의 연합이자 각 생명들이 공존을 위해 만들어둔 소통 합작의 길입니다. 일단 간단하게만 말씀 드리자면 '한기를 느끼는 것'도 그런 생명들 가운데 일부가 그 자체의 생로병사 과정에서 받아들인 감각과 사고 등을 소통의 길을 통해 보고해 온 것이자, 그것을 선도부분의 생명체가 받아들여 전체화 또는 공동화한 것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몸을 풀어주면 이런 소통이 활발해져 감각이 잘 공동화 또는 전체화되며, 몸이 한 방향으로 끌려가면 그런 소통이 무시당하거나 주요하게 부각되지 못합니다. 무슨 무슨 정신이라 부르는 것도 그런 현상의 하나입니다. 일이나 시험에 집중하거나 군인정신 등으로 쏠려 끌려가는 현상이 두드러지면 아픔조차 못 느끼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통이 무시된 몸 즉 작은 생명 생태계는 언젠가 더 쉽게 파괴되기도 합니다. 아이고......오늘은 이쯤에서......줄입니다. 하자고 들면 너무 길기도 하고......당황스러운 내용이기도 하고......해서......거두 절미해버리겠습니다. 다만 심장을 이식하면 기억도 이식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도......머리가 주된 연산기억장치이고 심장이 부수적인 장치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참 답답한 소리이고요......인간적이라고 해석적 상식적으로 주어진 범위에서는 사고, 소화, 등의 장치가 인식되겠지만, 사실은 모든 세포가 다 독립생명체인데도 인간은 백여 년 동안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입니다, 그 생태계가 무너질 때까지 말입니다. 그러니 그 하나라고 하는 생명은 공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강불식하는 천체처럼 각 생명에게 그 생명다움을 꽃피우게 하는 것 이외에 하나라는 전제에서 나오는 모든 것이 무상하고 공허한 것입니다......정말로 이만!
지상에 황제가 있던 시절에는 하늘에 옥황상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하늘은 허한 하늘입니다. 지상에 승정원 비슷한 게 있으니 하늘에 판서원이 있었습니다. 그런 하늘은 허한 하늘의 노름판입니다. 그런 하늘을 본 사람에의 몸에는 황제격인 슬과 널, 그러니까 혼과 백이 있습니다. 그 영혼을 찾는 것은 연목에 구어입니다. 그건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욕망에 깊이 걸려든 것입니다. 성불하려니 부처를 못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두고 두고 또 두면 작은 천지 안에서 저절로 한 생명이 일어나 춤출 것이니, 그 춤을 따라 제 결이 나투어지고, 그 결을 따라 내 생태계의 구주로 나타날 것이니, 그 생명의 이름이 바로 '하라'입니다. 욕망의 궤도에서 주인 노릇 하는 선도체를 그것으로 삼아 내쳐 달리면 다만 유능한 파괴자가 그 안에서 자랄 따름입니다. 이상은 하나오니 쇳사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오니 쇳사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두지 않고 두지 않고 있다 여기는 하나를 일으켜 그 주인이라 여길 이를 찾아 붉은 밭이요 검은 밭이요 찾아 가래질을 하는 것은 하라를 일으키는 길이 아니라 결국을 하라를 죽이는 일이니, 늘 기억하라. 덕스러운 목자는 그 그림자를 취할 따름이니 그림자엔 이미 색이 없도다. 검은 밭은 욕망의 이름이요 붉은 밭은 욕망의 늪이로다"
94. 2012.10.30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게 제 얼굴이 있을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그 목표는 인위적인 것이고, 그 인위적인 만큼 덧칠된 얼굴들이 가는 길목마다 놓여 있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목표를 향해 써 내리는 글에도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숨길이 어느 밭을 지나간들 거기에 천연이 있을까 싶습니다. 목표를 그려놓고 바쁘게 운영하는 기업 가운데서 백년기업이 나올까 싶습니다. 그냥 문제꺼리를 치워가는 일을 부지런히 하다 보면 목표는 그 가운데서 스스로 생겨 드러날 것이니, 공선생께서 "드러낼 뿐 지어내지 않는다" 述而不作 하신 것도 시공간의 좌표에서 생명이 스스로를 드러낸다 보셨던 까닭은 아닐까 여겨봅니다. 숨 쉬는 원리와 방법을 익혀 숨을 넣고 빼는 일을 아무리 거듭해도 그 숨에 생명이 있을까 싶습니다. 숨 쉬는 주체가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도록 문제꺼리를 치워가면 그 스스로 기지개를 켜고 사립문을 열어 봄날아지랑이 같은 따뜻함을 피워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문제꺼리를 열심히 치워가다 보니 누군가는 백년기업이 일구어졌다 이야기했습니다. 목표를 안고 사는 많은 얼굴들은 어쩌면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의 이미지는 아닐까도 싶습니다. 한국문화정품관 갤러리에 걸린 똰즈엉취段正蕖 의 그림에서 목표가 만들어낸 온기 바랜 삶의 이미지를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그림의 제목은 '화장한 헝산인 9번'입니다.
어쩌면 우리 농악 하시는 분들이랑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Yie선생님 말씀이 옳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헝산은 중국 서북부에 있는 작은 현급 지역인데, 이곳은 저녘놀(夕阳红)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년 전통의 농악대로 유명합니다. 이들이 쓰는 라오야오꾸(老腰鼓)라는 악기는 허리에 매고 치는 작은 북으로서 그 쓰임새는 우리 농악의 장고와 비슷합니다. 모양새에서는 우리 장고와 달리 허리가 굵고 두 끝이 조금 작습니다. 그 소리는 장고와 소고의 중간쯤 된다 하겠습니다. 라오야오꾸는 입식 악기로서 농악대의 기본 발 밟기 흐름을 이끕니다. 이 악대는 우리들의 일부 지역 농악처럼 화장을 하고 나와 열을 지어 어울리는데, 이 그림도 그런 광경을 모티브로 한 것입니다. 송구스럽게 조금 아는 체를 했으니, 너그러운 혜량을 빕니다.
뜬금없는 소리--이 별의 뭍에 살고 있는 사람 수가 70억 가까이 된다지요. 전체적으로 뭍에 사는 열 마리 포유동물 가운데 사람의 수가 하나를 넘진 않겠지요? 그런데 사람이 차지하는 땅의 넓이는 아마 셋 가운데 하나를 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집터, 길 터, 논과 밭이 그렇다는 것이고, 소유나 점유를 잣대로 삼는다면 열 가운데 여섯 일곱은 사람의 손에 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만 하면 충분한 것을 지나 넘친다 여겨도 될 듯싶은데, 사람은 여전히 욕심을 냅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참 좋아하는 도토리묵을 먹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참으로 먹고 싶으면 도토리만큼 또는 그 보다 많은 다른 재배한 곡식을 가져다 주고 바꿔서(물론 일방적인 거래이긴 하지만) 먹을 순 있지 않을까 합니다. 언젠가부터 도토리를 주어왔다 하면 도토리를 훔쳐왔다거나 뺏어왔다로 들리니 어쩌지요? 神市라, 신시라......아마 사람 사이의 거래도 그러려니와 사람과 다른 생명 사이의 거래도 알맞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창문을 여니 옆 뜰에서 제법 거센 바람에 열매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치초가 정신이 깜박하여 잠시 '글을 내려'落书 봅니다.
북방불교의 홍파와 황파가 피 흘리는 싸움을 하고 그 가운데 싸움에 진 사람들이 흘러 들자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들을 받아 들였습니다. 자기 나라를 침략했다가 남게 된 적국의 군인들도 그렇게 받아 들였습니다. 도교의 도사들이나 유학의 신봉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에 안았습니다. 35만 기마대병의 질풍노도 앞에서 겨우 수십여 노인들이 악기를 들고 맞서서 그들의 전투의지를 썩은 담 허물듯 가라앉혀버렸습니다. 차마고도를 타고 찾아오는 마방 사람들의 피곤함도 식구들 맞이하는 애정으로 녹여냈습니다. 남루한 의복에 보잘것없는 무장을 한 군인들이 만리를 달려왔을 적에도 그들을 형제라 부르며 끌어 안았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바람과 눈과 꽃과 비도 그렇게 맞이했고, 날마다 들리는 해와 달도 그렇게 맞이했습니다. 맞이하고 나면 차별이 없었습니다. 하나로 녹아 들었으나 그들의 개성은 더욱 뚜렷했습니다. 원융이라는 말의 실상을 드러낸 사람들의 밑힘이 바이족白族 출신 화가 홍링洪凌의 붓 놀림에서 몽환적인 잔치를 벌입니다. 어제 한국문화정품관 갤러리에서 즐겁게 그의 그림을 다시 읽었습니다.
작가 이름이 红凌인데 잘못 입력되었습니다.
먼 세월은 바람이 되어
소녀의 옷에 앉아 때가 되었다.
낯선 세월은 구름이 되어
소녀의 옷에 내려 얼룩이 되었다.
소녀들은 여전히 웃고 있다.
때나 얼룩이 옷 안으로
거칠거나 달콤하게 스며들지라도
소녀들은 바람 앞에 선다.
소녀들은 구름 아래서 논다.
소녀들의 얼굴에선 햇살이 만만찮다.
티베트, 쟝바라의 땅!
하늘 아래 첫 동네에도
하늘은 아직도 늘 멀다.
--한국문화정품관 갤러리에서 중국 화가 위샤오뚱의 그림을 보다가 그냥 생각 따라 글을 내려 봅니다. 그의 그림 한 폭 가격이 그림 안 소녀가 1,200년 열심히 일해서 받을 연봉 예상액이라 하니 치초의 마음에 쟝바라의 뒷산 만큼이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는 것은 바람 속으로 때가 되어 날아가고 배운 것은 구름 그림자 밑으로 얼룩이 되어 자취를 감춰갑니다. 이제 조금씩 제 안에서 무수무변의 생명이 어리석은 영혼을 두려워 않고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가을 햇살이 참 곱습니다.
때나 얼룩이 옷 안으로
거칠거나 달콤하게 스며들지라도
소녀들은 바람 앞에 선다.
소녀들은 구름 아래서 논다.
소녀들의 얼굴에선 햇살이 만만찮다.
티벳, 쟝바라의 땅!
하늘 아래 첫 동네에도
하늘은 아직도 늘 멀다.
--한국문화정품관 갤러리에서 중국 화가 위샤오뚱의 그림을 보다가 그냥 생각 따라 글을 내려 봅니다.
그의 그림 한 폭 가격이 그림 안 소녀가 1,200년 열심히 일해서 받을 연봉예상액이라
하니 치초의 마음에 쟝바라의 뒷산 만큼이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집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는 것은 바람속으로
때가 되어 날아가고 배운 것은 구름 그림자 밑으로 얼룩이 되어 자취를 감춰갑니다. 이제 조금씩 제 안에서
무수무변의 생명이 어리석은 영혼을 두려워 않고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가을 햇살이 참 곱습니다.
95. 2012.10.31
无主空山 水流花开
주인이 있으면 생각이 있을 것이고, 생각이 있으면 길을 만들려 할 것이며, 길을 만들려 하면 무리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주인 없는 빈 산이면 산이 저절로 제 임자가 되겠지요. 산이 저절로 제 임자이니 지어냄도 없지 않겠습니까? Ground of You! 제가 노는 무대인 GU도 임자가 없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냥 무주공산의 일꾼 가운데 하나일 따름 이려 합니다.
무주공산이라 물은 거침없이 제 길을 내며 흐를 것이고, 꽃은 저절로 피겠지요. 그 꽃이 피고 지면, 그 물이 흐르고 흐르면, 물길 따라 사람 갈 길도 드러날 것이고, 그 길 따라 가다 보면 어느덧 백 년을 넘기겠지요. 그저 다만 생각이 주인인 양 하여 물길 막으려는 것을 지키고 꽃 시절 험한 비 내림을 지키려 할 따름입니다.
今天又过了一段长线的塞门。真是十月的终章一天啊!事情虽然繁多 事完就相似秋黄叶啦!
96. 2012.11.01
박회장님, 비원 앞 GU명차 현액 앞에서 포즈 취하셨네요. 갈수록 멋져지십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元阳의 두메마을 따뜻한 날씨가 생각납니다. 이제 이레 뒤면 겨울로 들어갑니다. 또 조금 있으면 작은 눈 큰 눈이 내려 여름내 데워졌던 우리 별의 뜨거운 숨과 섞이겠지요. 그러면 겨울의 한 가운데를 지날 것이고, 곧 작은 추위와 큰 추위를 맛보겠지요. 추위는 우리 별의 가라앉은 더운 숨에 되살림의 힘을 불어넣을 것이고, 이 숨이 처음 돋는 날 봄이 오겠지요,
97. 2012.11.02
고독한 중심, 달리는 선!
한국문화정품관에서 오는 여드렛날 늦은 다섯 시에 석창우 화백님의 전시회를 엽니다. 페친들을
이 자리에 뫼시고 싶습니다. 왕림을 앙망합니다. 석 화백께서
도자기를 바탕으로 삼아 당신의 마음 폭을 열고자 하십니다. 그 도자기 가운데는 석화백님의 마음 길을
담은 이싱 자사차호도 있습니다. 또 그 자리에서는 화백님의 현장시연도 이루어질 것이라 합니다. 다시 한번 모시고 싶은 마음을 전하면서......치초 드림
98. 2012.11.05
아직도 저의 마음에는 와 닿지 않지만, 무등골 마을의 새 조감도가 나왔기에 한 번 올려봅니다.
아직은 많은 것이 모자라지만, 한님을 굳건히 믿고 한걸음씩 걸어갑니다.
자동차는 평상시 상주 거주지구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됩니다. 지정된 지역 이외에는 전파가 차단될 거구요.. 지정된 시간 이외에는 뛰는 것도 금지될 것입니다......
크기는 작으나마 병원과 학교도 있을 거구요......찻집도 있을 거구요.. 상당한 차창고도 있을 거구요......아이구 끝이 없을 이야기를 하고 있군요.. 이 치초가......
99. 2012.11.07
애쓴 만큼 좋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중국도자계의 대부인 이싱 도자행업협회의 스쥔탕史俊棠회장이, 낙생도예에서 출품한 새로운 감각의 자사차호와 작품집을 보시고선, 60개 세트가 완성되면 단독전람회를 추진하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합니다. 더구나 다가오는 5월에는 대규모 행사장에서 규모있는 출품전시행사를 해주시겠다고 저에게 미리 시간을 내라고까지 하셨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제가 도움은 되었지만, 오* *라는 젊은 분의 애씀으로 말미암아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그를 자사 디자인 디렉터로서 선뵈기를 할 수 있을 듯해서 마음이 더욱 기쁩니다. 사실 2013년 봄여름 계열의 작품인데, 2013년 가을겨울의 작품은 더욱 자사예술의 시야를 넓혀갈 것이라 믿습니다. 젊은 자사디자인디렉터의 미래를 축복합니다.
아울러 12월 8일에는 중국 도자예술 대사 쉬드아밍徐达明선생과 낙생도예 총공예사 판웨이챵范卫强선생, 지유도예연구소부소장 쟝루이펑蒋瑞峰선생, 자사도예공정사 스시밍史锡明선생 등을 모시고 작품전시회를 연다고 합니다. 확정이 된 것인지 알지 못해서(저는 이미 뒷방인지라) 아직 제대로 올리지는 못하는 게 아쉽긴 합니다.
100. 2012.11.12
벌여놓은 일도 꽤 되는데, 두 주일 정도 자리를 벗어나 운남 등을 다녀오려 합니다. 내일 오후에 출국해서, 따리 근처에서 닷새, 쿤밍 어근에서 사흘, 시솽반나 부근에서 나흘, 이싱에서 이틀 정도 머물다 제자리로 돌아올 예정입니다. 처음 따리 부근에서는 사진작가 김중만선생님 일행 및 전동화작가님 등과 함께일 듯하고, 쿤밍에서는 이런저런 차관계 일로 노닐듯 하며, 시솽반나 어근에서는 지유를 미국에 뿌리내려보려는 크리스 셜리 내외가 함께 다니는데, 차와 차기름과 여행이 어우러질 듯합니다. 이싱에 들러서는 마무리 지을 일도 있고, 새로운 일터도 둘러보며, 다음달 오실 분들도 만나볼 생각입니다. 데이터로밍을 받아가긴 하겠지만, 아마 연결이 되지 않는 곳도 많을 것입니다. 그 사이 페친들의 건강과 밝은 모습을 기원합니다. 아울러 그 사이에 석창우 화백님의 전시회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기를 기원합니다. 반드시 그럴 것으로 믿지만 말입니다.
10회분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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