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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모님 사모님 ☆★ 원문보기 글쓴이: 참조아라
1% 행운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외 지음
함께 해서 가능하다
성공의 맛
1965년 여름이었다. 그해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열일곱 살의 나는 장차 의사가 되기를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건이 뒷받침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내가 일하던 동네 철물점에서는 최저임금, 시간당 1달러 25센트를 주었다. 그런 나에게 대학 진학은 인간의 달 착륙만큼이나 멀고 험한 여정이 아닐 수 없었다.
코네티컷 주 브리지포트에 있는 부모님 집에서 유난히 무덥고 습기 찬 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가족의 오랜 친구 가운데 한 분인 피터 버크 박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의사 일을 때려치우고 가족과 함께 우리 집에서 불과 40마일 떨어진 뉴욕 주 아몬크로 이사를 가기로 했다는 이야기였다. 버크 박사와 그의 가족을 근 1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했던 우리 가족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었다. 우리의 재회는 이내 이루어졌다. 1967년 7월의 어느 일요일, 그 날은 나에게 말 그대로 운명적인 하루가 되었다. 새로 이사한 그의 집에서 바비큐를 먹으며 버크 박사와 나는 동업관계를 맺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그때만 해도 그것이 패스트푸드 산업의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 무렵 나는 대학 진학을 생각하면 할수록 어떻게 해야 돈을 마련할 수 있을지 더욱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버크 박사의 집으로 들어서면서 그에게 조언을 한번 구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대학에 보내줄 형편이 못 되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대학에 가고 싶은지를 이야기하면 버크 박사가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잠수함 샌드위치 가게를 차려야겠군.” 뭐라고? 고작 열일곱 살밖에 안 된 나더러 샌드위치 가게를 차리라고? 하지만 나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어떻게 하면 되죠?”라고 묻고 있었다. 그러자 버크 박사는 잠수함 샌드위치 사업을 설명해 주었고, 나에게 해볼 생각이 있으면 기꺼이 동업자가 되어주겠다고 했다. 그날 우리 가족이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자, 버크 박사는 나에게 1천 달러짜리 수표를 한 장 써주었다. 우리의 사업에 대한 투자인 셈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지만, 만약 잠수함 샌드위치 가게가 성공을 거두면 그것은 단순히 대학 등록금을 버는 차원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성공이란 쉼 없는 모험과 흥분의 롤러코스터를 의미한다. 나에게 그것은 〈서브웨이(SUBWAY)〉라는 이름의 음식점이었다. 성공이란 또한 최선의 노력과 인내를 의미하며, 나는 그것을 통해 경제적 독립과 그에 수반되는 모든 것을 얻었다. 그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전 세계 곳곳의 〈서브웨이〉에서 일하는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음식점 체인 〈서브웨이〉는 그동안 여러 가지 기념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과 캐나다, 호주만 놓고 보면 〈맥도날드〉보다 더 많은 매장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이다. 프레드 드루카와 〈서브웨이〉 본사 및 가맹점들은 수많은 상과 찬사를 받고 있다. 지방이 많은 기존의 패스트푸드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그 상호와 제품이 수많은 언론 매체에 소개되기도 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고맙습니다, 웨인 씨
우리 아버지는 늘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아버지는 오래 전에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자신의 고향인 중국을 떠났다. 홍콩과 일본을 여행하던 시절에는 틈만 나면 친구들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1970년대로 접어들자 미국으로 이민하는 아시아 사람들의 수가 크게 늘어났다. 이것이 아버지에게 커다란 기회로 다가왔다. 아버지가 캘리포니아 뉴포트 비치의 발보아 섬에 있는 음식점을 9만 달러에 사들인 직후,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는 사업의 토대를 다지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이윽고 1972년, 우리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특별한 사건이 우리 집 문을 노크했다.
영화배우 존 웨인의 아내의 홍보를 전담하던 글로리아 지그너라는 젊은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가 자기 남편의 생일 파티를 우리 음식점에서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는 존 웨인이 이 파티에 참석해 줄 수 있겠냐고 그의 아내에게 부탁했다. 존 웨인이 우리 음식점에 온다는 소문이 퍼지자 언론에서는 전혀 엉뚱한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덕분에 우리 아버지의 사업이 큰 덕을 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존 웨인이 우리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예정이라는 소문은 이내 그가 자신의 생일 파티를 우리 음식점에서 연다는 쪽으로 부풀려졌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우리 음식점을 존 웨인과 연결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졸지에 우리 음식점은 유명한 사교장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사업이 번창하자 우리의 삶도 자리를 잡았다. 우리 형제들은 캘리포니아 남부의 바다를, 바닷가에서의 생활 방식을 사랑하게 되었다. 파도타기는 우리의 일상 가운데 하나가 되었고, 파도타기를 즐기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다. 우리가 점점 나이를 먹자, 아버지는 우리 형제들에게 힘든 음식점 일은 이제 그만두고 대학에 진학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우리는 각자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고, 나는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에 들어가 공학을 공부했다. 얼마 후 나는 전공을 재무 쪽으로 바꾸었고, 우리 가족 중에서 처음으로 번듯한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몇 군데 대기업을 옮겨 다니며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우리 부모님이 누리던 자유와 유연한 삶의 방식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조직에 얽매여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이고, 생활 전체가 수많은 규정과 제한에 묶여 있는 삶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나는 비스마르크와 에드, 밍고 등 형제들과 상의한 끝에 음식점을 차리기로 마음먹었다. 말하자면 한가롭고 느긋하지만 아주 젊고 세련된 분위기와 맛도 좋고 몸에도 좋은 새로운 패스트푸드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생선구이 타코가 기본 아이디어였지만,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 특유의 브라질 및 아시아의 맛을 가미할 생각이었다. 개업 1주일을 앞두고 우리는 드디어 메뉴를 확정했다. 〈와후 생선 타코〉가 탄생한 것이다. 1988년에 처음 매장을 연 이후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열심히 일을 했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형제 중 한 명이 일한 적이 있는 〈뉴포트 서프 앤 스포츠〉의 마이크라는 사람이 업계 관계자들을 초대한 행사장에 음식을 납품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그래서 우리는 그 회사 주차장에서 생선 타코를 만들어 제공했다. 손님들은 하나같이 우리 타코의 기막힌 맛에 반해버렸다. 우리가 출장 서비스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와후 생선 타코〉는 단번에 우리 가게의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그 이후 〈와후 생선 타코〉는 ‘〈빌라봉〉 지정 공식 음식점’이 되었다. 그 직후 〈퀵실버〉와 〈오닐〉을 비롯한 몇몇 업체들이 뒤를 이었다. 가게 문을 연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7개 파도타기 업체의 공식 음식점이 된 것이다. 이제는 존 웨인도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와후 생선 타코〉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기 시작했고, 1백 개가 넘는 파도타기 업체들이 우리를 공식 음식점으로 지정했다.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도 신화는 계속 되고 있다. 〈와후 생선 타코〉 매장이 40개가 넘게 생길 만큼 크게 번창하는 것을 지켜보며 에드와 밍고, 그리고 나는 많은 분들에게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일찌감치 미국으로 건너와 우리에게 근면의 정신을 심어준 부모님, 아낌없이 우리를 지원하고 격려해 준 파도타기 업계 관계자들, 그리고 <상하이 파인 가든>에서 아주 특별한 생일 파티가 벌어졌던 1972년의 그날 저녁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고맙습니다, 웨인 씨. 당신 덕분에 비롯된 신화는 지금도 활화산처럼 펄펄 살아 숨 쉬고 있답니다.
우리는 녹슨 삶을 두려워한다.
엄마, 이것 봐요, 손이 없어요!
“아무도 당신의 신발 끈을 대신 매주지 않아. 이제 당신도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거야.” 1993년, 그러니까 내 손에 장애가 생긴 지 2년이 지났을 무렵에 내 남편 론이 나에게 던진 말이다. 그 충격적인 한 마디가 ‘손과의 전쟁’을 치르던 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전환점이 되었다는 얘기이지 정작 그런 충고를 처음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다.
나는 서른여섯 살 때부터 드 퀘르벵이라는 병에 시달렸다. 이것은 손의 힘이 점차 약해지면서 통증이 뒤따르는 질병이다. 내가 이 병에 걸린 것은 어느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회계부장으로 일하던 1991년의 일이다. 그 무렵만 해도 드 퀘르벵이란 병에 대해 잘 몰랐던 때였고, 법적인 보호 조치도 마련되지 못했다. 하다 못해 단순한 건초염 증상으로 더 이상 타이핑을 할 수 없는 직원에 대한 보호 조치가 아예 없던 시절이었다. 나는 통증을 견디다 못해 같은 부서 직원들에게 타이핑 작업을 부탁했는데, 그 때문에 팀플레이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일자리를 잃은 것이 나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상의 일이었다.
남편 론에게서 충격적인 충고를 들었던 1993년, 나에게 이웃 사람이 어느 행사장에서 컴퓨터 음성 인식 장치를 보았다는 말을 했다. ‘드래곤딕테이트’라는 소프트웨어였다. 그 이웃은 내가 신기술을 사용하면 일터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 고맙게도 나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는 컴퓨터를 이용해 ‘말’을 ‘글’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다. 아주 복잡하고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기술이며, 처음에는 제대로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때만 해도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는 DOS상태에서만 작동했고, 무려 5천 달러짜리 컴퓨터가 필요했다. 게다가 단어와 단어 사이를 일일이 떼서 발음해야 제대로 인식되는 시스템이었다. 그토록 결함투성이인 기술을 목격한 순간, 나 같은 사람들이 이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도록 음성 인식 기술을 가르쳐주는 회사를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런 회사는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드래곤’ 소프트웨어를 돌리기에 충분한 메모리를 가진 컴퓨터를 특별 주문했고, 우선 나 자신부터 그 소프트웨어 사용법을 익혔다. 이어서 맞춤형 훈련 프로그램과 사용 설명서까지 만들어 놓고 1993년 10월에 드디어 내 회사를 차렸다. 우선 캘리포니아 산 마테오에 보증금이 없는 사무실을 임대했다. 이렇게 해서 장애를 입은 사람들이 음성으로 컴퓨터를 조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미국 최초의 회사가 탄생했다. 출발이 워낙 미미했던 탓에 1994년에야 처음으로 두 명의 직원을 채용했다. 그때는 이미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일상적으로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절이었고, 1990년대 말부터 손목굴 증후군이 전염병처럼 유행했을 때 나는 이미 음성 인식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굳힌 상태였다. 1993년부터 이 분야의 기술과 우리 회사, 그리고 내게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 회사는 그 동안 수천 명의 사람들을 컴퓨터 관련 업무로 복귀시켰으며, ‘손과의 전쟁’을 치르는 그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 자신도 계속해서 음성 인식 프로그램을 사용하고 있다. 이런 기술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니 슬기로운 충고 한마디로 내 삶을 바꾸어 놓은 론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론, 당신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나도 존재하지 못했을 거야!
캘리포니아에 본사를 둔 〈제퍼-텍〉은 미국에서 제일 큰 컴퓨터 음성 인식 소프트웨어 트레이닝 회사이다. 음성 인식은 이제 장애인뿐만 아니라 타이핑보다는 음성으로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싶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다. 최고 경영자이자 설립자인 레니 그리피스가 헌신적으로 남을 돕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 회사에 취업한 직원들 가운데 상당수가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살아가라, 한 번도 넘어지지 않은 것처럼
지켜야 할 약속
지금까지 걸어온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여러 갈림길을 지나왔다는 생각이 든다. 그때마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 쪽보다는 미지의 새로운 세계로 나를 이끌어갈 방향을 선택해 왔다. 그 덕분에 무수한 장애물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큰 감사와 축복 속에서 새로운 지평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선택한 길이 내 인생을 어떻게 여기까지 이끌어왔는지를 생생하고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내 기억은 온통 가족들과 어울린 것들뿐이다. 부모님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연애를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해서 뉴저지에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일 때문에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 안정이 될 만하면 또 다시 이사를 가야 하는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어머니의 삶도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남다른 미술적 재능을 타고난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자주 집을 비우는 바람에 점점 외로움과 우울함에 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부모님은 우리 가족에게 더욱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선택을 하고 말았다. 이 같은 상황은 어떻게든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일을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내가 어른이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야말로 ‘정상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갈구하는 것은 안정과 인정 그리고 사랑이었다.
내 인생의 등대였던 외할머니는 동시에 나침반이기도 했다. 나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가슴 깊이 간직한 채 집을 떠났다. “설령 네 인생이 나락까지 떨어진다 해도 거기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해라.” 나는 할머니의 그 말씀을 항상 마음속에 새겼다. 어디서,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슬픈 기억으로 얼룩진 내 인생 앞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이윽고 스물여섯의 나이에 나는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다. 아니,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좋은 집안에서 자란 남자와 결혼을 했고, 이내 아기를 갖는 축복까지 받았다. 아기가 뱃속에서 점점 자라는 것을 느낄 때마다 인생의 가장 짜릿한 환희를 맛보는 기분이었다. 드디어 나는 어린시절부터 꿈꿔온 완벽한 삶을 누릴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은 우리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어야 했다. 갓 태어난 아들에게는 데이비드라는 이름을 붙였고, 비록 잠시나마 ‘삶이란 이토록 황홀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에 빠졌다. 데이비드가 태어난 순간에 내가 느낀 기쁨은 일찍이 내가 경험해본 가장 완벽한 축복이었다. 내 인생에서 그때보다 나 자신이 하느님과 가깝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갓 태어난 데이비드를 병원에서 집으로 데리고 온 뒤, 아기의 울음소리는 이내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로 바뀌었다. 조그만 뾰루지 같은 것이 데이비드의 온몸을 뒤덮고 있었다. 고통스러워하는 데이비드를 지켜보며 나는 망연자실했다. 몇 달 동안 수많은 의사와 간호사와 각종 전문가들을 찾아다녔지만, 그 누구도 속 시원한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육체적·정신적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나는 더 이상 어디에도 희망을 걸 데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과 가장 가깝게 있다는 믿음과 이제부터 영원하리라 생각했던 행복이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고통으로 뒤바뀌어버렸다. 데이비드를 간호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결혼 생활도 파탄을 맞고 말았다. 너무나도 절망적인 또 하나의 갈림길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외할머니의 말씀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설령 네 인생이 나락까지 떨어진다 해도 거기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노력해라.’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인 데이비드를 잃는 슬픔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큰 소리로 하느님과 나 자신을 향해 이렇게 약속했다. “데이비드를 데려가시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제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데이비드가 매주 화요일마다 유난히 상태가 안 좋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요일이라면 내가 집안 청소를 하는 날이었다. 도저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도서관으로 달려가 온갖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나는 오랜 세월을 두고 조금씩 우리 집에 독성 물질이 축적되어 왔다는 결론을 내렸다. 겁에 질린 나는 세제를 비롯해 조금이라도 독성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내다버렸다. 데이비드는 그날 하루를 멀쩡하게 잘 보냈다. 그 다음날,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한 주가 무사히 지나갔지만, 그사이 싱크대에는 씻지 않은 그릇들이 수북이 쌓였고, 온 집 안이 빨랫감으로 가득 찼다. 그래도 나에게는 오로지 데이비드가 아프지 않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온 집 안이 아수라장이었다. 이제는 우리 집과 내 인생을 추슬러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언제나 변함없이 가장 듬직한 후원자가 되어준 사람, 외할머니에게 도움을 청했다. 외할머니는 당신이 젊었을 때만 해도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 물건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주 손쉽게 비누를 만드는 법을 알려주셨다. 나는 할머니가 알려주신 방법으로 비누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고, 친구와 주변 사람들에게 그 같은 사실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또 한 번 인생의 갈림길을 만났다. 하느님과 나 자신에게 한 약속을 떠올리면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하는 책임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오로지 믿음과 약속만을 가지고 비누를 만들기 시작했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도 오늘날의 모든 가정은 세제와 관련해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외칠 자신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이 갈림길이 내 인생을 어디로 끌고 갈지는 아무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저물 때마다 나는 내 약속에, 내 목적에, 그리고 내 아들에 대한 결심을 떠올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족을 위해 보다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사명을 떠올린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을 위해 지금보다 나은 선택으로 이어지는 ‘환경 친화적’인 생활방식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을 위해 내 인생을 바치는 것이야말로 나의 책임이자 사명이라고 믿는다.
아밀리아 안토네티는 지금은 아주 건강한 소년으로 자란 데이비드의 어머니이자 〈아밀리아 비누〉의 설립자 겸 〈AMA프로덕션〉의 대표이다. 아들에 대한 사랑, 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지혜, 그리고 최고의 재료들을 한데 섞어서 만드는 아밀리아 비누는 비독성, 저자극성, 생물 분해성 세제이다. 타고난 사업 감각과 모성 본능, 그리고 굴곡 많은 인생에서 배운 교훈으로 무장한 아밀리아는 가격 경쟁력도 다른 브랜드에 뒤지지 않는 제품을 선보이며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미국 세제 업계에서 성공적인 활동을 펼쳐 보이고 있다.
마음의 소리를 들어라
그 모든 달콤함
나는 어려서부터 딸기와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가 나를 위해 딸기밭을 만들어주셨는데, 그때부터 딸기와 뗄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내가 주로 하는 일은 밭에 나가 딸기를 따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따온 딸기를 가지고 맛있는 딸기 파이를 만들곤 하셨다. 식탁에서 어머니가 딸기 파이를 자를 때 내 몫이 너무 작다고 떼를 썼더니, 그 다음부터 엄마는 아예 두 판을 만들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뒤 나는 오빠의 회사에서 모기지 브로커로 일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정말로 눈부신 실적을 세웠고, 돈도 많이 벌었다. 첫해에는 ‘올해의 신인상’을 비롯해 각종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그것이 나에게 큰 힘을 가져다주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런 상을 받기 위해 누구보다 오랜 시간 동안 열심히 일한 것도 사실이었다. 내가 모기지 브로커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고객 관리를 잘했기 때문일 것이다. 요리사였던 시누이의 도움으로 해마다 휴가철이 되면 해마다 선물 바구니를 직접 만들어 고객과 부동산 중개인들에게 돌리곤 했다. 그것은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선물 바구니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손으로 만든 초콜릿 딸기 쿠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원래 창의력이 있는 편이었던 나는 색색 가지 쿠키를 만들고 바구니를 장식하는 일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마케팅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나 자신의 스트레스를 푸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뒤에는 주식과 관련된 일을 하게 되었는데, 솔직히 모기지 일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딸기 쿠키 만드는 일은 여전히 재미있었고,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하여 계속 쿠키를 만들었다. 하루는 내가 만든 쿠키를 거래처 개업식에 가지고 갔는데, 전문 요리사가 만들어온 것보다 더 맛있고 모양도 예쁘다는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러자 사무실에서 일하는 상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증권회사에서 일하는 여자가 언제부터 이런 재주를 갖고 있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아이디어 하나가 번쩍 떠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에 〈샤리스 베리〉를 만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나는 밑바닥부터 사업을 시작하면서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그것이 성공의 발판으로 작용했다.
· 언제나 직원을 소중하게 생각하라. 직원들은 절대 사장이 자신을 대하는 것보다 더 소중하게 고객을 대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절대 직원에게도 시키지 말라.
·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한 가지 선택해서 그걸로 돈을 버는 방법을 궁리해보라.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나는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벌고 생계도 꾸려갈 수 있는 축복을 받았다.
· 고객은 언제나 옳다. 최고의 고객 서비스로 당신의 제품을 뒷받침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기분 좋은 고객은 세 사람한테 얘기한다. 기분 나쁜 고객은 열 사람한테 얘기한다’라는 말을 명심해야 한다. 내 회사에 대해 언제나 긍정적인 이야기만 나오도록 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고,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최대한 만족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 일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우리는 가족을 부양할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다. 절대로 일 때문에 가족이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
여러분에게 들려주고 싶은 충고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여러분도 할 수 있다. 성공적인 기업가가 되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이런 목록을 정리해 봐야 한다. 그것이 자신만의 성공비결로 남을 테니까.
샤리 피츠패트릭이 창업하고 대표를 맡고 있는 〈샤리스 베리〉는 미국 전역의 수많은 가게와 온라인 사이트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샤리스 베리〉는 ‘딸기 장미’를 비롯한 2백여 종 이상의 제품을 자랑한다. 손으로 직접 장식한 딸기로 장미꽃을 만들고, 이파리와 줄기 역시 손으로 만들었다. 딸기 장미 꽃다발은 특허를 받을 만큼 독창적이며, 아주 특별한 선물로 꼽힌다. 피츠패트릭은 아주 간단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자신의 성공을 설명한다. 첫째 하느님, 둘째 가족, 셋째 일. 피츠패트릭은 이 특별한 공식이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게 커다란 행복을 가져다주었다고 강조한다.
행운은 만드는 자의 것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
큰 자본 없이 시작했는데도 오늘날의 〈디핀다트〉 아이스크림이 있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내가 만든 아이스크림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나는 일리노이 주 남단의 오하이오 강가, 그랜드 체인이라는 조그만 부근의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형적인 시골 소년이었던 나에게 농사는 대단한 기업가 정신은 요구했다. 엄청난 인내심, 강인한 윤리의식, 그리고 개인적인 위험까지도 감수해야 했다.
학교 공부 중에는 과학이 재미있어서 화학 선생님의 조언에 따라 의사가 되려는 꿈을 키우기도 했다. 1979년에는 본격적으로 의학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쇼니 전문대학에서 남 일리노이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학교가 개강할 무렵, 한 친구가 같이 사업을 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래서 그 친구와 함께 돼지를 키우기 시작했는데, 하필이면 시기가 최악이었다. 돼지고기 값이 폭락하면서 내 학업 성적도 곤두박질쳤다. 돼지 농장 때문에 한 주에 수업을 여덟 시간이나 빼먹은 적도 있었다.
내 인생은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했다. 돼지 농장이 망하자 의기소침해진 나는 집에 틀어박혀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전화번호부의 ‘의사’ 항목을 들춰보니 수백 명의 이름이 끝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의사가 정말 나에게 맞는 직업일까? 내가 정말로 의사가 되고 싶은 걸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동안 빼먹은 수업을 따라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판이라, 결국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때부터 나는 미생물학 쪽으로 관심을 돌렸고, 그 학문을 농업에 활용하는 방법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이미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있었고, 어떻게든 보다 나은 돈벌이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켄터키에 본사를 둔 생명 공학 기업인 〈올테크 주식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생 때 실험실에서 ‘리신’이라는 단백질을 다뤄본 경험이 있었다. 리신은 박테리아 배양액에서 리신을 추출해 분말로 만든 것이었는데 이 분말을 사료에 섞으면 동물들의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을 공급할 수 있었다.
〈올테크〉에서는 그것과는 다른 이유로 박테리아를 배양하고 있었다. ‘좋은’ 박테리아를 배양해서 냉동 건조한 다음 분말로 만들어 가축에게 먹이면 항생제를 쓰지 않고도 자연적인 방법으로 ‘나쁜’ 박테리아의 침투를 막을 수 있었다. 박테리아의 신선도와 구조적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에 배양액을 급속 냉동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한동안 저온 공학과 씨름한 끝에 박테리아 배양액을 순식간에 알갱이 형태로 냉동시키는 방법을 찾아냈다. 바로 그 알갱이가 내 인생을 바꿔놓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어느 날 오후 집에서 가족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만들던 나는 연구소에서 사용하는 냉동 시스템을 생각해냈다. 이 냉동 시스템을 사용하면 아이스크림의 신선도와 맛을 오래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당장 실험을 해보았다. 처음에는 아이스크림의 맛을 보존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이내 조그만 구슬알갱이 형태의 전혀 새로운 아이스크림이 만들어진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걸 먹어본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괜찮다는 반응을 확인한 나는 당장 사업을 시작할 준비에 돌입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훗날 〈디핀다트〉라는 상표명을 붙인 아이스크림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자신만만하게 렉싱턴에 최초의 매장을 차린 것이 1988년 3월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시행착오를 모조리 겪어야 했다.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이 찾아왔고, 광고라고는 먹어본 사람들의 입소문과 우연찮게 지역 언론에 보도되는 경우가 전부였다. 처음 2년 동안 그야말로 악전고투가 이어졌다. 진짜 전환점은 〈케네디 우주센터〉에 매장을 연 1992년이었다. ‘미래의 아이스크림’이라는 별명과 함께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그 후로 놀이동산과 쇼핑센터, 운동 경기장 등에 우리 매장이 들어서는 등 서서히 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지금은 미국 전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디핀다트〉가 진출해 있다. 제품이 다양해졌고, 프랜차이즈 사업을 통해 우리 아이스크림을 팔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 내가 만든 아이스크림에 끝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 그것이 우리의 성공의 비결인 셈이다.
〈디핀다트〉의 창업자이자 회장인 커트 존스는 여전히 왕성한 창의력을 발휘해 〈아밀라아제 엔터테인먼트〉라는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 테네시 주 내슈빌에 본사를 둔 〈아밀라아제 엔터테인먼트〉는 아티스트 관리와 음반 전문 회사인데, 최근에는 영화 산업에도 진출했다. 〈아밀라아제 엔터테인먼트〉 상근 작가의 시나리오를 영화화하는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밀라아제’라는 이름은 존스의 전공인 미생물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존스에 따르면 아밀라아제는 촉매로 작용하는 효소의 이름이다. 자신은 가만히 남아 있으면서 다른 물질을 변화시키는 것이 촉매의 역할이다. 커트는 〈디핀다트〉가 오늘날과 같은 성공을 거두기까지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으며, 새로운 회사에서도 그런 자세가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