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카타콤
카타콤바를 설명하기 전에
도미틸라 카타콤바의 성 네레우스와 성 아킬레우스 바실리카 를 설명드릴께요.^^*
교황 성 다마수스(Damasus)에 따르면 성 네레우스(또는 네레오)와 성 아킬레우스(Achileus)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로마(Rome) 군인이었으며,
더 이상의 군복무를 거절하여 참수되어 아르데아티나 가도의 도미틸라 묘지에 안장되었다고합니다.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들은 플라비아 도미틸라의 종들이었는데, 그들의 종교 때문에 그녀와 함께 귀양을 가서 사형되었다고 합니다.
도미틸라는 지역명이고요. 바실리카는 건축양식을 말합니다.
바실리카양식
초기의 교회양식.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에 의한 그리스도교 공인(313년) 직후에 볼 수 있었던 일반적인 장방형 성당 건축 형태이다. 같은 이름의 직사각형 로마건물을 모방하는 한편, 카타콤바의 예배 장소를 본 딴 흔적도 보인다. 보통 원주(圓柱)가 늘어선 회랑(回廊)이 달린 안마당이 있으며 3개 이상의 출입구를 통해 본 건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중앙에는 큰 회중석(會衆席)이 하나 있으며, 양쪽으로 2개, 혹은 4개의 회랑이 열주(列柱)에 의해 구분되어 있다. 초기에는 원주로 수평의 처마도리를 지탱하였으나 후기에는 아치를 사용하였다. 회중석의 지붕은 양옆 회랑의 지붕보다 높이 솟아 있으며, 채광층(採光層)에는 창문이 달려 있다. 동쪽으로 복도가, 맞은 편의 아치나 반원의 후진(後陣)부분에는 제단이 놓이는데 제단은 후진의 한가운데 벽으로부터 돌출해 있다. 제단 바로 아래에는 부분적으로 바닥 높이 아래로 내려가서 수호성인의 유해를 담고 있는 순교자의 묘 혹은 지하 성당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바실리카란 교황에 의한 특권을 누리고 있는 특별한 성당들만을 일컫는 말이며, 대·소로 나뉜다. 로마 교회에는 4개의 대 바실리카가 있는데, 라테란(교황을 위한 바실리카),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 바오로, 그리고 산타 마리아 마조레 바실리카 등이다. 로마와 전 세계에는 수많은 소 바실리카가 있다.
카타콤바의 역사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 공동묘지를 갖지 못했다. 자기 토지가 있는 사람들은 자기네 친지들을 그 땅에 묻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교도들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묘지에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유로 베드로 사도는 바티칸 언덕에 있던 네크로폴리스(necropolis: "죽은 이들의 도시")에 묻혔다. 그곳에는 누구나 묻힐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바울로 사도는 오스티아 가도의 네크로폴리스에 묻혔을 것이다.
서기 2세기 중엽에는 신도들의 토지 기부와 허락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 죽은 이들을 지하에 매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카타콤바 묘지가 비롯하였다. 카타콤바는 대개 유복한 신도들의 가족 묘지를 중심으로 생겨났는데, 묘지 주인들은 갓 입교한 신도로서 가문의 묘지에 친지만 묻지 않고 신앙을 함께하는 교우(敎友)들도 묻힐 수 있도록 묘지를 개방하였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묘역은 확장되었고 흔히는 교회가 앞장서서 확장 사업을 벌였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이다. 교회가 공동사업으로 직접 이 묘지의 개설과 관리를 맡았던 것이다.
서기 313년 2월,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두 황제의 공동명의로 밀라노 칙령이 반포된 다음, 그리스도신도들은 더 이상 박해를 받지 않게 되었다.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고, 로마 성벽 안팎에 경신례를 올릴 장소와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으며, 토지를 매입해도 몰수를 당하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카타콤바는 5세기 초엽까지 공식 공동묘지의 역할을 해냈다. 5세기에 들어와서부터는 교회가 죽은 이들을 지상 묘지에 매장하거나 순교자들에게 봉헌된 대성당 안에 매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 말기에 고트족과 롱고바르드족 같은 야만족들이 이탈리아를 침공하고 로마로 진군하면서 역사적 기념물들을 조직적으로 파괴하였고 종교 건물들을 약탈하였으며 카타콤바도 그냥 두지 않았다. 야만족들의 거듭된 약탈과 파괴에 속수무책이던 교회는 8세기말과 9세기초 무렵부터 교황들의 주선으로 카타콤바에 보존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로마 시내의 성당으로 옮겼다. 안전상의 이유였다.
유해가 옮겨가고나서는 카타콤바에는 더 이상 신도들이 찾아오지 않았을뿐더러 완전히 잊혀지고 말았다. 예외가 있었다면 성세바스티아노, 성로렌조, 성팡크라시오 카타콤바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흙이 무너져내리고 초목이 무성해지자 카타콤바 입구들마저 감추어져 버렸고 아예 입구를 찾을 길마저 없어졌다. 중세 후기에는 카타콤바가 어디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카타콤바에 대한 탐사와 과학적 연구는 여러 세기가 흐른 뒤 안토니오 보시오(Antonio Bosio: 1575-1629)라는 인물에게서 비롯하는데 그에게는 "로마 지하세계의 콜럼부스"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난 세기에는 카타콤바에 대한 체계적인 탐사가 이루어졌고 특히나 칼리스토 카타콤바에 대한 발굴이 활발하게 진척되었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죠반니 바티스타 데 로씨(Giovanni Battista de Rossi: 1822-1894)였다. 그는 그리스도교 고고학의 창시자요 어버이로 받들어지고 있다.
묘지 소개
카타콤바는 지하 갱도(坑道: gallery)들로 얽히설키 엮어져 있어 미로(迷路)처럼 보이며, 한데 연장한다면 수 킬로미터에 달한다. 응회암(凝灰巖: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흙을 투포[tufo]라고 부른다)을 땅속으로 파서 갱도를 만들고 갱도의 벽에 수평으로 묘혈을 팠는데 대개는 직사각형 벽감(loculus)이며, 크기는 매우 다양하다. 보통은 시체 한 구가 들어가는 공간이지만, 둘을 안치한 곳도 드물지 않았고 심지어 그 이상이 묻힌 경우도 발견되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매장은 극도로 단순하고 소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매장을 본떠서 그리스도인들은 관을 쓰지 않고 얼굴을 덮는 수건과 염포로만 시신을 감아서 묻었다. 그리고 묘혈(墓穴)은 대리석 판으로 덮거나 대부분 기와장으로 막고서 회반죽으로 틈을 메웠다. 또 석판이나 기와에는 죽은 이의 이름을 새겼고 그리스도교 상징이나 천국에서 평안을 누리라는 기원문을 새겨 두었다. 흔히는 무덤 곁에 조그마한 올리브 등잔이나 향료 그릇을 놓아두고는 하였다.
무덤을 쓰는 데는 벽에다 판 무덤들이 위아래로 겹치는 형태를 띠어서 묘소가 층층 침대로 만들어진 커다란 침실을 연상시킨다 그래서 이런 묘지를 체메테리움(coemeterium)이라고 불렀다.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쉬는 곳"을 의미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믿는 자기 신앙을 이런 식으로 표명코자 하였던 것이다. 땅바닥보다는 흙벽에 벽감(壁龕) 모양으로 묘혈을 팠기 때문에 "사각형 벽감"(loculus)들이 일반적이지만 그밖에 다른 형태 묘들도 있어서 아치형 묘소, 석관, 평장, 침실형 묘소, 경당형 묘소 등을 볼 수 있다.
아치형 묘소(arcosolium)라고 하면 서기 3세기와 4세기의 전형적인 묘혈로 그 위를 아치 형태로 해서 벽에 깊숙하게 타원형 벽감(nicchia)을 파들어간 묘이며 상당히 큰 편이다. 대리석판은 수평으로 해서 무덤을 덮었다. 대개는 한 가족 전체의 묘소로 만들어진 것이다.
석관(sarcophagum)은 대리석이나 다른 돌로 만든 관이며 관 외부에 부조(浮彫) 형태로 조각을 하거나 비문을 새겨 넣거나 하였다.
평장(平葬: forma)은 토굴형이든 침실형이든 복도형이든 묘소의 바닥에다 평평하게 파서 시신을 안치한 묘혈인데 현존하는 것 대부분이 순교자의 무덤 곁에 위치해 있다.
침실형 묘실(墓室: cubiculum *원래는 그냥 "방"을 가리킨다)은 벽에 작은 방을 따로 파서 그 안에 사각형 벽감을 여려개 마련한 것이다. 가족 묘지로 사용된 듯하다. 가족 묘지는 굳이 부유한 사람들만의 특권은 아니었다. 침실형 묘실이나 아치형 묘실은 대개 벽화로 장식되어 있으며 성서의 장면들을 재현하고 있다. 주로 세례, 성찬, 부활을 주제로 삼고, 이 주제를 요나의 일대기를 상징으로 그려내기도 한다.
경당형 묘소(crypta)는 훨씬 큰 방이다. 성다마소 교황 시기에 순교자들의 묘지 대부분이 경당(經堂)의 형태로 변하였다. 다시 말해서 지하 소성당 형태로 바뀌고 그림과 모자익이나 다른 치장물이 첨가되었다.
카타콤바는 "갱부(坑夫)"라고 부르는 전문 노동자 단체가 도맡아서 작업을 하였다. 그들은 갱도(galleria)를 하나씩 파들어 갔으며 희미한 등잔불 밑에서 작업을 하였고 파낸 흙을 바깥으로 옮기는데는 바구니나 부대자루에 담아서 날랐는데 때로는 채광창(採光窓)을 통해서 옮기기도 하였다. 채광창은 경당형 묘소나 침실형 묘실 혹은 갱도의 천장에 뚫려 있었다. 채광창은 지표면까지 도달하는 거대한 구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굴착 작업이 끝나면 채광창은 공기와 빛이 드나들게 그냥 남겨 두었으므로 자연히 환기통으로, 조명장치로 이용되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바"라는 말을 쓴 것은 아니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구덩이" 또는 "웅덩이"를 뜻한다. 로마인들은 아피아 가도의 한 곳을 카타콤바라고 불렀는데 근방에 지금은 투포(tufo)라고 부르는 응회암을 파내면서 만들어진 구덩이가 군데군데 있었던가 보다. 바로 그 근방에다 성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가 개발되었던 것이다. 서기 9세기에 와서는 카타콤바라는 말이 지하 묘소를 가리키는 특정한 의미를 띠고서 모든 공동묘지로 확대되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 카타콤바>
상징물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살던 사회는 이교(異敎)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그리스도교에 적개심을 보이던 사회였다. 네로 황제의 박해 시기(서기 64년 이후)에는 그리스도교가 "이상스럽고 탈법적인 미신"으로 간주되었다.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불신하고 거리를 두었으며 지극히 악독한 죄명을 붙여서 그리스도인에게 혐의를 씌우고 단죄했었다. 신도들을 박해하고 투옥하고 유배나 사형에 처하였다.
종교 신앙을 드러내놓고 고백할 수 없던 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상징(象徵)을 이용하였다. 카타콤바의 벽에다 상징물을 그리고 흔히는 무덤을 봉하는 비석에 그 상징을 새겨 넣기도 하였다. 고대인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상징을 무척 좋아하였다. 상징은 그들의 신앙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주었다. 본디 "상징(symbolum)"이라는 말 마디는 구체적인 기호나 형상을 가리키는데,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서 어떤 이념이나 정신적 실체를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카타콤바에 사용한 주요 상징물들은 "착한 목자", "기도하는 사람",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모노그램", "물고기" 등이다.
"착한 목자"는 어깨에 양을 메고 있는 모습인데 구세주 그리스도와 그가 구원한 영혼을 상징한다. 이 상징물은 특히 벽화에 자주 등장하고 석관의 부조에도 많이 나타난다. 석상이나 무덤을 덮은 비석에 새겨넣은 문각(文刻)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기도하는 사람": 이 형상은 대개 두 팔을 벌려 들어올린 모습인데 이미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서 사는 영혼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Monogramma)": 그리스어 알파벳 Χ(키)와 Ρ(로)라는 두 글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리스도(Christus)를 발음하는 그리스어 단어 ΧΡΙΣΤΟΣ의 처음 두 글자를 나타낸다. 이 모노그램이 어느 무덤에 새겨져 있으면 그 고인이 그리스도인이었음을 가리킨다.
"물고기" : 그리스어로는 물고기를 ΙΧΘΥΣ(ichtous: "익투스"라고 읽는다)라고 한다. 이 단어들을 위아래로 나란히 늘어놓으면 ΙΗΣΟΥΣ(Iesus: 예수) ΧΡΙΣΤΟΣ(Christos: 그리스도) ΘΕΟΥ(Theou: 하느님의) ΥΙΟΣ(Uios: 아들) ΣΩΤΗΡ(Soter: 구세주) 첫머리 글자들과 맞아떨어진다. 이런 단어를 합체문자(合體文字: 그리스어로 acrosticos)라고 한다. 어떤 단어들이나 문구들의 첫 글자들을 따서 합성하는 단어이다. 물고기를 그린 이 형상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가장 널리 보급된 상징이었으며, 어쩌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요 표징이라고 하겠다.
카타콤바에서 발견되는 그밖의 다른 상징물로는 "비둘기", "ΑΩ(알파-오메가)", "닻", "불사조" 등을 볼 수 있다.
"비둘기" : 주둥이에 올리브 가지를 물고 있는 형상인데 하느님의 안식에 든 영혼을 상징한다.
"ΑΩ" : 알파와 오메가는 그리스어 알파벳의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이다. 그리스도가 만유의 시원(始原)이요 종국(終局)임을 의미한다.
"닻" : 구원의 상징이자 무사히 영원한 항구에 접어든 영혼의 상징이기도 하다.
"불사조" : 아라비아에 산다는 전설적인 이 새(Pheonix)는 죽은지 여러 세기가 흐르면 자기의 잿더미에서 되살아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믿음이었다. 그래서 부활의 상징물이 된 것이다.
순교자들의 무덤과 묘실 및 아치형 묘소의 벽은 벽화의 기법으로 그려낸 그림으로 장식이 되곤 하였다. 이런 벽화들은 구약과 신약의 성서 일화들을 표상하고 어떤 것은 상징적 의미에 직결되기도 한다.
카타콤바에 그려진 상징물들과 벽화들은 한결같이 복음서(福音書)의 요약판이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간추리고 있다고 하겠다.
카타콤바의 중요성
로마에만 60여개의 카타콤바가 있다. 그 갱도(坑道)들을 연장한다면 수백 킬로미터가 넘고 무덤 숫자로 말하자면 수십만개가 된다. 로마 외에도 중부 이탈리아의 키우시(Chiusi), 볼세나(Bolsena), 나폴리에 카타콤바가 있고, 시칠리아 동부와 북아프리카에서도 발굴되었다.
땅속을 파내려가는 기술과 방법은 그리스도인들이 발명한 것이 아닐뿐더러 굳이 박해에서 연유된 것도 아니다. 그저 카타콤바가 그리스도인들의 공동묘지로 사용된 것뿐이고 땅속 깊숙히 파내려간 점만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전에 쓰이든 굴착 기술을 채택하여 발전시켰고 한 층의 높이를 엄청나게 만들고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한 터널망을 구축하였으며 층층이 파내려갔던 것이다. 이것은 신도들의 숫자가 날로 불어나는 거대한 공동체가 신도들의 매장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기도 했다. 몇몇 카타콤바는 급속히 거대하게 확장된 바 있는데 이것은 거기에 묻힌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과 결부시켜서 보면 설명이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은 한사코 순교자들의 무덤 가까이 묻히고 싶어하였고 그렇게 해서 그들의 수호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카타콤바들은 그 비중이 커서 오늘날 전세계 방방곡곡에서 한 해에 수십만 순례자들이 찾아들고 있다. 카타콤바의 그림, 비문, 조각품 등은 소중한 유산을 이루어 그야말로 초대 그리스도교의 문서고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초대 교회 당시의 관습과 습속, 예식과 교리 등이 어떻게 가르쳐지고 이해되고 실천되었지 한 눈에 볼 수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네 신앙과 삶을 지하에다 묻어버리지 않았다. 자기네 가정과 사회에서, 그리고 노동과 직업과 활동 중에 일반인과 똑같은 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어디서나 자기네 신앙을 증언하였지만 이 영웅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카타콤바에 가서는 온갖 시련과 박해를 견뎌낼만한 힘과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기도를 올렸고 순교자들이 하느님 앞에서 자기들을 위해서 바쳐줄 전구(傳求)를 빌었던 것이다.
정말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놀라운 증언(證言)을 하였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리기까지 하였으므로, 오히려 순교야말로 교회의 자랑스러운 표지가 되었다.
카타콤바가 우선 공동묘지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이 묘지들은 순례자들과 방문자들의 심금에 호소하는 소리없는 언어, 그러면서도 힘있는 언어를 간직하고 있다. 카타콤바는 죽음보다도 삶에 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나가는 모든 갱도, 맞닥뜨리는 일체의 상징과 그림, 찾아읽는 모든 비문이 과거를 생생하게 되살려줄 뿐더러 그리스도교 신앙의 메시지, 그리스도교 증언의 메시지를 뚜렷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카타콤바를 찾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네 방문이 단순한 관광 코스나 예술적, 문화적 답사로 그치지 않고 신앙의 순례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관계자들의 바램이다. 지난 날의 무수한 순례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초세기 로마 교회의 삶과 순교를 보여주는 가장 의미깊은 역사적 유적을 찾아가는 진정한 순례가 되었으면 한다.
카타콤바의 정신
초세기 어느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칼리스토 카타콤바의 넓다란 영역을 순례하면서 어느 지점에선가 자기가 흡사 신비로운 예루살렘을 찾은 기분이 들었던가 보다. 순교자들의 피로 붉게 물든 도성, 순교자들을 받드는 영광으로 빛나는 도성에 온 듯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는 카타콤바를 나오면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입구에 철필로 긁어 남겼는데 지금도 읽어 볼 수 있다.
JERUSALEM CIVITAS ET ORNAMENTUM MARTYRUM DEI
이곳은 예루살렘, 하느님의 순교자들의 도성이요 영예여라!
오늘날 신앙인으로 이곳을 찾는 순례자든 관광객으로 고적을 찾아오는 비그리스도인이든 여기서 느끼는 감동은 저 사람의 것과 유사할지 모른다. 교황으로 목숨을 바쳐 순교한 사람들이든 종교적 동기에서 동정(童貞)의 신분으로 순교한 사람들이든 정체를 남기지 않은 저 무수한 그리스도인들의 무리든 간에 그들을 사로잡았던 정신, 그리스도인들이 "영성"(靈性)이라고 일컫는 이 정신의 깊숙한 비밀을 이곳 카타콤바에서 직감하리라 믿는다.
수차에 걸친 야만족들의 침략과 약탈, 그리고 스무 세기 가까운 도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남아 있는 그림과 비문들은 한결같이 저 비밀이 무엇인지 일부나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저 고대의 어느 그리스도인 묘비명 그대로 TAUTA O BIOS("이것이 우리의 삶이올시다!")는 속삭임이 귀에 들리는 듯하다.
카타콤바의 정신, 혹은 카타콤바의 영성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영성 그대로이다. 종교가 갖 발생하여 번창하던, 청년 같은 기개로 로마 제국을 점령해 가면서 순교의 피를 뿌리던 정신 그대로이다. 성서를 핵심으로 삼는 이 영성은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것이었다.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교 전례(典禮)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정신이었다. 다시말해서 카타콤바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영성의 원천에 접했던 것이다.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나 순례자들에게 참고가 되도록 카타콤바의 정신 혹은 영성을 몇 가지 측면에서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영성
카타콤바의 정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 인물로 삼는다. 현대의 가톨릭 신도가 예수의 영상을 눈 앞에 떠올릴 적에 그리스도의 선량함을 상징하여 "예수의 마음", 곧 예수 성심(聖心)을 연상하듯이, 고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착한 목자"가 떠올랐다. 카타콤바의 표상들 중에 가장 자주 눈에 띠는 것이 착한 목자 예수상이다. 이 상은 천정에 그려져 화초로 장식되어 있기도 하고 비석에 조잡하게 새겨져 있기도 하고 석관의 뚜껑에 부조(浮彫)되어 있기도 하고 우리가 아는 그리스도교 석상 가운데 가장 우아한 그리스풍으로 조각되어 있기도 하다(4세기 작품. 바티칸 박물관 소장). 그의 어깨에 메어 있는 어린양을 목자의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있는데 이 양은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그림 주변에는 바울로의 다음 말처럼 어떤 깊은 신뢰의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로마 8,35).
구세주가 사람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경우도 흔하다. 석관의 부조나 벽화에는 예수가 소경의 눈을 만져 낫게 하거나 라자로를 무덤에서 되살아나게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빵이 많아지게 하거나 물을 술로 바꾸는 기적도 묘사되어 있다. 은혜를 베풀면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상징물들이 나온다. 카타콤바의 영상들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들을 꼽는다면 그리스도가 상징의 베일을 쓰고 형상화하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콘스탄티노 대제 이전에는 십자가가 매일같이 노예와 외국인들을 처단하는 형구로 사용되던 터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의 가증스러운 측면을 살짝 가려서 상징물로 표현하였는데 예를 들자면 "닻"이 대표적이다.
또 카타콤바의 그리스도인들은 효성스러운 종교심에서 예수 곁에 동정녀 마리아를 즐겨 그려 놓았다. 그래서 프리실라 카타콤바에는 3세기초엽에 해당하는, 애정어린 마리아상(像)이 그려져 있다. 성모가 가슴에 예수를 꼬옥 끌어안 구약의 인물 발라암이 그의 머리 위에 빛나는 별을 가리켜 보이는 정경이다.
그런가 하면 다른 그림에는 동정녀가 아들을 품에 안고 있는 가운데 동방박사들이 다가와서 예물을 올리는 정경이 나온다. 동방박사의 경배는 여러 카타콤바에서 그림으로, 조각으로, 그밖의 귀중한 장식품(유해함, 상아 조각, 목걸이, 반지)으로 거듭 나온다.
2. 성사(聖事) 본위의 영성
카타콤바의 정신 내지 영성은 가톨릭 신도들이 "성사적"(聖事的)이라고 부르는 영성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사(聖事 sacramentum)라고 하는 것은 외부의 물질 세계와 인간 행사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을 이루어주는 표지(標識)이자 도구(道具)로 변모함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것이 세례(洗禮)와 성찬(聖餐)이다. 물로 씻는 예식이 죄를 사함받고 새 생명으로 재생하는 표지가 되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드는 예식이 그리스도의 삶을 모방하고 그의 신비에 참여하는 표지가 된다.
로마의 그 많은 지하 무덤 가운데서도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의 "성사들의 묘실"만큼이나 성사의 표징들이 많이 그려져 있는 곳이 또 없다. 문헌이 가장 많은 성사들을 언명해 본다.
- 세례 성사
이 성사를 집전하거나 기리기 위해서 화려한 건물(라테란 대성당의 세례당을 생각해 보라)을 세우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례는 가정 교회(domus Ecclesiae), 즉 가정의 처소에서 흔히는 비밀리에 거행되었다. 하지만 이 성사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성사임은 이미 알려져 있었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6장)에서 이 성사의 비중을 장중한 어조로 언명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례 예식을 받거나 그 의식에 입회하면서 그 예식으로 인간이 신비스럽게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부활함을 체험하였고, 구원을 주는 이 행위를 통해서 당사자가 신성한 생명에 결부된다고 의식하였던 것이다.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에서도 "성사들의 묘실"에 있는 가장 오래된 그림 하나가 세례를 표상하고 있다. 물위에 어부가 한 사람 앉아 있고 낚싯줄로 고기 한 마리를 낚아내는 그림이다. 그 인물에게서 신도들은 사도(使徒)를 연상하며,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마르코 1,17)던 예수의 명령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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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붙들린" 사람으로 자처하였고(필립보 3,12) 심각한 내면적 체험을 겪은 다음 세례를 받는 순간 자기에게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절감하였다. 여기서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의 트리코레(Tricore)에 새겨진 어느 묘석에 나오는 이름이 이해할 만하다. 거기에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흔한 이름, RENATUS가 나오는데 "나는 세례로 다시 태어났노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성찬 성사
"성사들의 묘실"의 보석이라고 할 작품을 소개한다. 성찬을 표상하는 세 폭의 그림이다. 첫번 벽화를 보면 성찬의 식탁에 둘러 앉은 사람의 숫자가 일곱이다. 그들은 제자로서 호숫가에서 부활한 예수 주변에 모여 있다. 그들 앞에 놓인 접시에는 물고기가 담겨 있다. 물고기(ΙΧΘΥΣ)는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를 가리킨다.
왼편 그림에는 사제가 식탁 위로 손을 펼치고 있으며 식탁에는 성찬의 빵이 차려져 있다. 당시 성직자들이 빵을 축성(祝聖)하던 행위를 표상함에 틀림없다. 식탁의 다른 편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팔을 높이 쳐들고 있어 천국에 들려면 축성된 빵(가톨릭 신도들은 이것을 성체(聖體)라고 부른다)을 먹어야 함을 가리키는 듯하다.
오른편에 그려진 세번째 화폭은 후대에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노래로 엮은 장면이기도 하다. (아브라함이 외아들)"이사악을 희생제물로 바칠 적에 그리스도의 자기 제헌이 표상되었느니"(In figuris praesignatur cum Isaac immolatur).
또 한 편의 그림을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오래되었다는 점에서나 사목적 가치가 크다는 점에서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기 2세기말로 소급되는 "루치나의 경당"에는 입구 정면 벽에 물고기 두 마리가 대칭을 이루어 그려져 있다. 그 앞에는 빵이 든 광주리가 둘 놓여 있다. 광주리 안으로는 포도주 잔 두 개가 들여다 보인다. 신도들에게 물고기는 그리스도, 빵과 포도주는 그리스도가 성체 안에 현존하는 두 표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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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보는 것은 그리스도교가 발생하던 초창기에 해당한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행전 4,12)는 바울로의 말을 의식하고 있었을 테고, 그리스도가 설정한 성사(聖事)를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가까이간다는 생각이 강하였던 것 같다.
3. 사회적 영성
카타콤바의 종교 정신은 또한 "사회성"(社會性)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올릴 적에도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길들어 있었다. 하느님의 가족으로서는 인간이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어 산다는 의식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수효는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로마 12,5)는 말 그대로였다. 이처럼 한 신앙으로 이루어진 한 몸을 그리스도인들은 "신비체"(神秘體)라고 언표하였고, 카타콤바에는 신비체 사상을 드러내는 이미지들이 수두룩하다. 신비체 속에서는 교계(敎階)라는 것이 기능적인 역할을 하고 신도들은 한 얼로 뭉쳐서 한데 모이는 것이다. 순교자인 교황들이 이름없는 무수한 신도들과 더불어 한 묘지에 묻혀 있는 모습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어느 석관의 앞면 부조를 보면 젊은이 하나가 기도하는 자세로 하느님을 뵙고 열락을 우리는 형상이 그려져 있다. 그 사람 양옆에는 베드로와 바울로, 곧 로마 교회의 창립자 두 사람이 서 있어 그 젊은이를 행복의 나라로 인도하는 인상을 준다.
도미틸라 카타콤바를 가면 아치형 묘실 벽화에 베네란다(Veneranda)라는 여인이 여행복 차림으로 본향(本鄕)에 돌아온 그림이 그려져 있다. 유배 생활을 마치고 순례객으로서 고향땅 경계를 밟는 모습이다. 그 묘소에 묻힌 성녀 페트로닐라(Petronilla)가 온화한 얼굴로 그여자를 맞아 안내하는 광경이 인상적이다.
그리스도교 여러 지역 사이에 기도를 주고 받던 흔적도 보인다. 아피아 안티카 가도의 "기념총"(記念塚: memoria)에 묻혀 있을 바울로와 베드로(성세바스티아노 카타콤바에 있다)에게 기도를 당부하는 글이 수 백편 새겨져 있다. 트리클리아(triclia: 위로 천정이 뚫리고 장례 중에 회식을 하던 장소)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들이 무수히 철필로 긁어 새겨져 있다. "바울로와 베드로여, 빅톨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베드로와 바울로여, 소조메노의 마음에 깃들이소서."
성칼리스토 카타콤바에 있는 교황들의 묘소 입구에는 벽이 온통 기도문들로 덮여 있다. "성식스토여, 아우렐리오 레펜티노를 기억하소서!" "거룩한 영들이여, 베레콘디노가 선친들과 더불어 [저승의] 여행을 무사히 치루게 하소서!" 흔히는 명시적인 기도문도 없고 그저 이름만 나오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호소가 담긴 경우가 있다. "펠리치온, 사제요 죄인."
산 이들이 죽은 이들을 위하여 바치는 기도문이나 죽은 이들에게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것을 호소하는 문구도 수 천 개나 발견된다. "신비체"의 사회적 의식에 의하면 각 사람은 교회 전체와 맺어져 있는 까닭이다.
4. 종말론적 영성
그리스도인들은 종말(終末 escata)을 향해서 인생의 방향을 잡고 사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말하는 종말이란 결정적으로 확립되는 "영원한 삶"을 가리킨다. "이 땅 위에는 우리가 차지할 영원한 도성이 없습니다"(히브리 13,14)라거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필립비 3,20)라는 신념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 신념이 얼마나 강렬하였는가를 알려면 아무 카타콤바나 한 곳을 죽 둘러보면 충분하리라.
교황들의 경당으로 내려가는 층계에서 그 예를 보게 된다. 층계참 왼편 벽에 아그리피나를 기리는 비석이 있는데 "죽은 이가 빛 속에 들어간 날"(CUIUS DIES INLUXIT)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 여자가 죽은 날을 빛 속으로 들어간 날, 고대하던 행복에 들어간 날로 간주하는 말이다. 조금 아랫켠에는 아다스라는 여자의 그리스어 비문이 나오는데 ΕΚΟΙΜΗΤΗ(잠들었다)라고 씌여 있다. 예수가 가파르나움의 소녀를 가리켜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다!"(마르코 5,39)라고 하던 말을 연상시킨다. 신앙인들에게는 부활이요 생명이 되는 분의 부름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어느 경당을 보면 구약의 인물 요나가 죽음을 표상하는 괴물의 뱃속에서 살아나온 다음 아주까리나무 그늘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는 착한 목자가 어린양을 어깨에 단단히 붙들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고 예수가 그를 데려다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느 묘실에서는 그리스도인 다섯 명이 팔을 높이 쳐들어 예배를 올리는 동작을 하고 있는데 주변에는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정원이 에워싸고 있다. 천상 낙원인 천국을 표상함에 틀림없다. 카타콤바의 가장 오래된 비문 하나에는 닻 모양의 십자가가 새겨져 별이름(Hesperos)을 딴 그리스도인 여자가 천상 항구에 당도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밖에 이 묘지의 분위기는 평화가 가득하다는 느낌을 준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그 해답이 들어 있다고 하겠으니 카타콤바의 정적에서 아마도 그들은 다음과 같은 성서 말씀이 들려옴을 느꼈을지 모른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루가 24,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요한 11,25). "걱정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코 5,36).
5. 성서적 영성
카타콤바에 작품을 남긴 화가나 명각을 새긴 이, 조각가나 묘비 제작자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드는 성서에서 영감을 얻고 그 말씀에 심취한 사람들로 보인다. 이곳에서는 구약성서도 신약성서에 비추어서 재음미하고 재해석하였다. 복음서와 사도들의 서간들은 각별한 관심을 받았고 카타콤바에 그려진 주요 테마를 제공하였다. 신도들의 전례(典禮)와 교부(敎父)들의 문학이 그러했듯이 카타콤바의 종교 정신 역시 성서에 의해서 함양되고 영감을 얻는 것이었다. 순교자 체칠리아의 경우가 그러했으니, 그의 순교록에 의하면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서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semper evangelium Chrsti gerebat in pectore)". 그리고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순간에도 자기 손가락으로 삼위일체 하느님을 상징적으로 가리켜 보였다고 한다.
6. 참신하고도 인간을 변모시키는 영성
카타콤바는 그리스도교가 초래한 인간 혁명을 엿보게 해 준다. 당시 그리스도교 세계에 위대한 정신력을 보여주는 두 인물상이 있었으니 "순교자"(martyr)와 "동정녀"(virgo)였다. 순교자는 종교적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쳐서 그 신념이 옳음을 증거하는 사람이다. 인간의 온갖 잔학과 고문을 견디면서 평온하게, 또 아우성치는 일도 없이 목숨을 내놓았던 것이다. 죽어가면서도 자기를 살해하는 사람을 증오하는 일이 없었고 심지어는 그의 잘못을 하느님이 용서해 주도록 빌면서 죽어갔다. 카타콤바에 묻혀 있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숭고하게 피를 흘려 순교를 당한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교 "동정녀"(童貞女)의 모상도 카타콤바에는 나타난다. 그런 뜻에서 다마소 교황이 자기 누이 이레네를 기리던 송가는 의미심장하다. 칼리스토 카타콤바에 묻혀 있다.
그녀는 아직 이승을 살 적에 그리스도께 서원하여 성스러운 순결이 동정녀의 영예를 받을 만함을 입증하였거니와... 그러니 하느님이 나를 찾아오실 적에 오 동정녀여, 이 오라비 다마소를 기억해 다오. 너의 찬연한 횃불이 나를 비추어 주도록. |
성칼리스토 카타콤바를 나오면서 층계 아래에서 보는 마지막 커다란 묘석은 바키스(Baccis)라는 소녀의 묘비에 해당한다. 회색 돌판에 커다랗고 거친 글씨로 붉은 색을 곁들여 적어 놓은 묘지(墓誌)에는 소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신앙의 눈으로 이 비문을 음미하는 사람이라면 거기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하나는 죽은 소녀의 가녀린 얼굴이요 하나는 딸을 여읜 아버지의 선굵은 얼굴 모습이다. 눈물을 가득 흘리면서도 애정어린 미소를 담은 어버이의 얼굴 말이다.
바키스, 사랑스러운 영혼. 주님의 평화 중에. 열 다섯 해하고 75일을 살다. 12월 초하루 전날에 죽다. 아버지가 지극히 사랑하는 딸에게. |
그리스도 신앙으로 말미암아 이 소박하고 평범한 가정에 성스러운 순결과 자상한 애정이 깃들어 왔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어느 날 사랑하는 여인을 잃은 괴로움을 달래러 한 사나이가 카타콤바(밀티아데스 구역의 "소프로니아 묘실")로 내려왔다. 기도를 하면서 층계를 내려오던 이 성묘객은 층계참의 벽을 철필로 긁어 사랑하던 여인이 먼저 세상을 떠난 친지들 틈에서나마 행복하게 살도록 염원하는 글을 새겼다. "오, 소프로니아여, 그대 사랑하는 이들과 살지어다!"(Sofrania, vivas cum tuis!). 층계를 다 내려와서도 여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느님 안에서 영면하기를 염원하는 글이다. "오, 소프로니아여, 그대 주님 안에 살지어다!"(Sofronia, vivas in Domino!). 그리고 아치형 묘실 가까운 여인의 묘실에 와서는 세 번째 문구가 나온다. 기도 중에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면서 그의 쓰라린 마음은 불사불멸을 바라는 희망으로 가득찼던가 보다. "오, 사랑스러운 소프로니아여, 그대 하느님 안에 d언제까지나 살아 있으리!"(Sofronia dulcis semper vives in Deo). 그는 묘실 벽에 높다랗게 글을 새겼다. 그러나 약간 안정된 그의 마음에서는 다시 애정이 솟아올랐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그 밑에다 다시 한 문장을 보태어 새겼다. "그래, 소프로니아, 그대는 살아있으리!"(Sofronia, vives...). 방문객의 눈에 띠기 어려운 이 글귀들은 죽음과 그 슬픔에 시달리는 인간 드라마가 마음을 위로하는 신앙의 위안과 어떻게 교차하는가 보여준다. 그 위안은 죽음을 넘어서는 삶, 사랑하던 이들 가운데서 누릴 삶, 영원한 생명,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삶으로 이어진다.
가족 관계와 더불어 신앙인의 사회 관계도 승화됨을 엿볼 수 있다. 이교도들의 무덤에는 고인의 직위와 영예와 업적을 으레히 명기하는데 비해서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은 직책과 위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관례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카타콤바의 묘지에는 "디오니시오, 의사이자 사제"처럼 고상한 직책만 아니고 평범한 직업과 심지어 이교도 현자들에게 으레히 멸시받는 비천한 직종 즉 "노동자"(banausoi)라는 직업도 당당하게 명기되어 있다. 성칼리스토 카타콤바만 해도 농부 발레리오 파르도(Valerius Pardus)가 한 손에는 야채 한 단을 들고 한 손에는 낫을 든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귀부인 마르치아 루피나(Marcia Rufina)에게는 해방노예 세쿤도 리베르토(Secundus Libertus)가 비석을 세워 바치는데 거기 큰망치와 모루를 그려 본인의 직업이 대장장이였음을 소개한다. 어느 아치형 묘실에는 야채 장사가 야채 다발 사이에 앉아 있는 보습으로 그려져 있다. 나자렛 목수가 세운 종교는 육체 노동을 그만큼 승화시킨 것이다.
7. 침묵의 영성
침묵(沈默)의 영성이라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 모른다. 얼핏 본다면 침묵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는 공허, 그냥 말이나 생각이나 감정이 결여된 상태를 가리키는 까닭이다. 하지만 실제로 말의 침묵, 영상의 침묵, 정신의 침묵은 인간을 구성하는 근본을 이룬다. 침묵은 인간 내면의 세계를 지켜주는 호위자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조건이며 인간 의사소통에 필수적인 전제이므로 어쩌면 인간의 본질에 속한다.
카타콤바의 갱도들을 걷노라면, 또 경당이나 묘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노라면 침묵의 분위기에 휩싸이게 된다. 오래된 무덤으로부터 우러나는 침묵이다. 하지만 그 침묵이 우리 내심을 흔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죽음의 침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전에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모조리 상실하고 애도하는 침묵이 아니기 때문이다. 카타콤바에 서리는 것은 충만함에서 오는 침묵, 순교자들의 음성으로 가득한 침묵이다. 우리와 똑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 그러나 자기 종교 신앙을 용감하고도 꾸준하게 증언한 사람들, 종교 자유를 누리던 평화시에만 아니라 특히나 박해가 치열할 적에 신앙을 증언한 사람들의 음성으로 가득하다.
이 침묵은 평화가 충만한 침묵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광명에 비추임받으며 보다 나은 후세 생명을 바라는 희망으로 충만하다. 카타콤바의 침묵은 역사와 신비가 충만한 침묵이다. 성스럽고 의미깊고 말보다 더 웅변적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초기 교회에 관해서 명상하게 만들기 때문에, 순교자들의 영웅적인 증언과 더불어 단순하고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의 일상적인 증언을 사색하게 만들기 때문에 종교인의 심경을 풍부하게 만든다.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은 카타콤바에다 자기네 신앙을 한데 매장해 버리지 않고 나날의 일상 생활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노동으로, 직책과 직업으로 그 신앙을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이 침묵은 전달하는 바가 풍부한 침묵이다. 순례자들의 마음과 머리에 말을 건넨다. 초대 교회라는 미지의 세계를 드러내 보여준다. 초대 교회의 사회적 계층, 그들의 정서와 감정, 카타콤바에 묻힌 그리스도인들의 고뇌와 희망에 관해서 들려주는 바가 많다. 방문객으로서는 이런 침묵을 압살해 버릴 도리가 없다. 침묵 스스로가 말을 건네고, 어느 의미에서는 단호하게 외치는 까닭이다. 대(大)그레고리오 교황은 "침묵의 굉음"(strepitus silentii)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카타콤바의 침묵에야말로 정확하게 이 표현을 해당시킬 만하다고 하겠다.
이 침묵의 분위기,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희생을 환기시켜 주는 이 분위기야말로 신앙인들에게는 영적 명상을 행하는 자리요 삶을 변혁하는 자리이며 신앙을 쇄신하는 자리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이 감행한 용감하고도 충실한 증언이 각자에게 호소하는 바가 있다. 신의 사랑에 현대인은 어떻게 응답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과거처럼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이 아닐지 모르지만 종교 가치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관심한데, 그러한 사회에서 종교인이 신의 사랑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과제가 여전하다.
카타콤바는 어쩌면 소리없는 신앙의 메시지를 현대인에게 전달하고 있다. 소리가 없지만 선명하다. 현대는 소음과 외형과 피상적인 병으로 앓고 있으므로 필수적인 메시지이다. 이곳에서는 말이 소용없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카타콤바 자체가 말을 건네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것이다. 가장 간결하면서도 진지한 어조로 말하자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교이다. 순교자와 증거자(證據者)와 동정녀(童貞女)들의 모습에 서린 그리스도교, 카타콤바에서 이천년의 세월을 두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추앙을 받아온 저 경당들과 갱도와 벽화와 비문을 통해서 웅변을 펴온 그리스도교가 바로 이런 것이다. 초보적이고도 효과적이며 또한 결코 다함없고 본질적인 이 특성, 바로 그것 때문에 로마의 카타콤바들은 그리스도교 순례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목적지가 되는지도 모른다.
서기 2000년, 즉 삼천년대를 앞둔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순교자들과 초대 그리스도신자들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자기네 신앙을 철저하게 혁신하고자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기 2000년을 성년(聖年)으로 정하고서, "하느님 안에서 충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뜻에서 진정하고 깊이있는 신앙 쇄신을 도모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교황 요한 바울로 2세, [삼천년기], 6항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