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제가 고달사지를 다녀와서 쓴 답사기와 고달사지 부도에 대한 견해 그리고 부도의 명칭에 대한 견해를 적은 글입니다. 고달사지 답사기는 두가지가 실렸는데 어떻게 생각이 변화되는 가에 대한 모습을 보실 수 있을 것 같아 올립니다. 고달사지 부도에 대한 글은 과연 고달사지 부도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또한 부도명칭에 대한 기원과 사용 예를 저나름대로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보니 내용이 쓸데없이 길어졌습니다. 모니터 상으로 보시기 힘들 것 같습니다. 되도록이면 출력을 하여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00년 10월 15일(일) 맑음
김영구가옥의 답사를 마치고 고달사지로 떠났는데 고달사지로 가는 길을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았다. 요사이는 이전에 갔던 길이라고 하더라도 새로이 길을 확장하거나 새로 만들어 놓아서 예전의 감각으로 길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다. 고달사지도 이리저리 헤매다 겨우 찾아갔다. 승용차로 여주에서 고달사지를 찾아가시는 분은 골프장인 700클럽의 이정표를 따라 가면 편하게 찾아갈 수 있다. 고달사지는 골프장 고개 너머에 있기 때문에 골프클럽을 지나 고개가 끝나는 지점 좌측에 있는 고달사지 입구라는 표지판을 따라 가면 된다. 고달사지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광장에 주차시키고 걸어 들어갔다. 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전에는 차를 불대좌 근처에 주차시키고 답사를 하였고 걸어 들어가면서도 불대좌가 한눈에 들어왔는데 사지 쪽에 언덕으로 가려져 있어 불대좌를 볼 수가 없었다. 조금 들어가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발굴을 하면서 나온 흙을 길가에 옮겨놓았기 때문에 언덕이 생긴 것이다.
고달사는 원종대사비문에 의하면 고려 고종이 조칙을 내려 '국내의 사원 중 오직 삼처(三處) 만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이 상속(相續)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을 정도로 대단한 절이었다. 여기서 삼처란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 고달원(高達院)으로서 선맥을 이어온 삼대선원으로 유명한 곳이다. 언덕에 올라 고달사지를 보니 건물의 주초와 기단이 많이 발굴되어 있었다. 사역이 대단하였음을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불대좌(보물 제8호)가 있는 금당을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건물이 배치되었던 것 같다. 예전에는 현재 사람들이 진입하는 곳이 전면이려니 생각하였는데 지금 진입하는 곳은 예전에는 고달사의 뒷편이 되는 곳이다. 불대좌가 있는 곳에 가서 보니 앞에 석등의 초석과 석탑의 심초석의 위치가 눈에 띈다. 문화재청 자료를 보니 석등의 초석자리 근처에서 지금 경복궁에 보관되어있는 석등의 지붕돌이 나왔다고 한다. 금당은 정남을 향하여 위치하였고 그 앞에 석등, 석탑의 순서로 배치되었다. 예전에는 기단부가 흙에 묻혀 기단의 높이를 몰랐는데 이제는 기단 하부까지 발굴되어 있어 그 높이를 알 수 있는데 다른 곳의 기단과 비교하여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았다. 기단의 좌측 모퉁이에는 활주의 초석같은 것이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예전에도 활주를 많이 사용하였던 것 같다. 특이한 것은 금당 우측에 암키와를 일렬로 덮어놓은 것이 눈에 띄었다. 무엇 때문에 그러한 시설을 하였는지 판단하기가 매우 힘들다. 하수구 같지도 않고 온돌의 흔적도 아닌 것 같아 아리송하기만 하다. 나중에 발굴에 관계하였던 사람과 통화를 하였는데 그도 아직 그것의 용도를 모르겠다고 한다. 2차 발굴이 곧 있을 예정인데 그때는 용도가 어는 정도 밝혀질 것 이라고 생각한다고 이야기 하였다. 매우 흥미로운 유구이다.
불대좌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대좌가 보물로 지정된 것 만 보더라도 이 불대좌가 검상한 것은 아니다. 크기나 솜씨에 있어 국내의 어는 불대좌보다도 뛰어남을 보여주고 있다. 오늘 이 불대좌를 보니 이전에는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 것이 혹시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상의 형태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이 절이 이미 통일 신라시대에 절의 기본 구조가 완성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달사는 764년(신라 경덕왕 23)년에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원감선사 현욱(圓鑑禪師 玄昱: 787-869)이 문성왕 2년경에 혜목산록에 기거하였다고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경문왕(景文王:861-875)이 원감선사를 고달사에 주석토록 명하였다고 하는 정도이면 이 고달사가 통일신라말기에도 대단한 절이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그러므로 중요한 전각 및 시설들은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완성되어 있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주변의 주초를 보면 그러한 추측이 무리는 아닐 것이다. 정교하게 조각된 주좌나 고맥이 부분과 주초의 높이가 높은 것을 보아 아마도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 있다. 아직은 주초에 대한 식견이 일천하여 조금도 공부하여야 하겠지만 그러한 상상은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상상을 하면서 옆에 조금 떨어져 있는 원종대사 부도비로 향하였다. 원종대사 부도비로 가는 도중에 있는 기단에서는 배수구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주변 건물의 초석과 고맥이 돌은 그 화려함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화려한 주초와 고맥이 돌을 보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이 곳의 절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 여기 저기 널려있었다. 예전에 찾아왔던 고달사지는 기껏해야 불좌대나, 원종대사 부도비를 보고는 놀라는 정도였으나 발굴하여 놓은 주초나 기단을 보고는 찬탄을 금할 수가 없다. 아이들도 주초를 보면서 놀라는 눈치가 역력하다. 특히 우주부분의 아름답고 정교한 모서리처리는 다른 어느 곳에서 보지 못하였던 것들이다. 보면 볼수록 옛사람의 정성에 다시 한번 감복하게 된다.
원종대사(元宗大師: 869-958)는 법명이 찬유(璨幽)로서 881년(헌강왕 7)에 출가하여 봉림사 진경대사의 제자인 융체(融諦)에게서 배우고자 했는데 융체가 '혜목산의 심희(審希)에게 가서 섬기라'고 하여 심희에게서 공부하다가 890년(진성여왕 4) 삼각산 장의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후 892년 당나라로 들어가 석두 희천(石頭 希遷)의 법손이 되는 대동(大同)에게서 법을 얻고 921년 귀국하여 봉림사의 심희를 찾아 인사한 뒤 태조의 청으로 천왕사 주지로 있었다. 뒤에 혜목산 고달사로 옮겨 대선림을 이루었다. 계보로 보아 원종대사는 선문의 9산문 중 봉림산문의 3대조인 셈이다. 958년(광종 9)에 입적하자 광종이 원종대사로 시호하고 탑호를 혜진이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는 昕弘, 同光, 幸近 傳印등 500이 되었다고 한다.
원종대사혜진탑비(보물 제6호)도 발굴되어 있었는데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기단 부분이 보였다. 낮은 기단이 두 단 설치되어 있는데 장대석에 쇠시리를 배설하여 설치하였다. 예전에 느낄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이다. 2중 기단에 모셔진 원종대사부도를 보면서 원종대사의 위상을 다시 한번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원종대사탑비의 귀부는 다른 곳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를 자랑하고 있다. 또한 그 조각의 굵고 강인한 선 때문에 더욱 크고 강하게 느껴진다. 이러한 귀부, 이수, 비신(역대고승비문에는 비신의 크기가 9자 3치로 기록되어 있다.)까지 제 모습을 갖추었다면 그 장대한 모습은 모든 사람을 압도하였을 것이다. 나는 사지(寺址)를 찾아보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데, 사지를 즐겨 찾는 이유는 상상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유구로 과거를 복원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은 집이 가득한 산사를 찾아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자신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다. 특히 건축을 전공한 덕분에 머리 속에서 수많은 집을 지었다 부셨다 할 수 있는 훈련이 되어있어 그 즐거움은 더욱 배가된다. 마지막으로 그 곳에 오가는 스님들까지도 상상하여 본다면 그 재미는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 되는 것이다. 오늘도 과거 원종대사부도의 모습을 상상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원종대사부도 근처에는 목이 없는 귀부가 하나 더 있다. 크기야 원종대사의 것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정교한 조각솜씨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꼭 들려 보아야 할 귀부이다.)
상상의 즐거움을 만끽한 후 발길을 돌려 국보 제4호인 고달사지 부도로 향하였다. 고달사지에는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부도와 보물 제7호로 지정된 원종대사부도가 있다. 두기의 부도 모두가 대단한 부도이지만 근처에 함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원종대사부도가 손해를 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고달사지를 방문하시는 분은 아래쪽에 있는 원종대사 부도를 보고 위에 있는 고달사지 부도를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두 번 놀라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야 이미 몇 번을 본 것이라 우선 국보인 고달사지 부도로 향하였다. 언덕 위에 정중하게 모셔진 부도가 누구의 것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종의 계통을 보면 아마도 봉림산파의 시조인 현욱의 부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부도가 있는 위치나 크기 조각의 솜씨로 보아서는 원종대사 찬유보다는 윗대의 조사인 것은 분명한데 심희의 부도는 봉림사(현재는 경복궁 중앙박물관 마당에 있음)에 있고, 융체는 공주 삼랑사에 주석하였기 때문에 이곳에 부도가 있을 까닭이 없다. 원종대사비문에는 융체는 원종대사를 심희에게 소개하여 준 정도의 관계이지 사제의 관계는 아닌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원종대사가 중국에서 돌아와 심희에게 인사를 하였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융체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는 없으니 융체를 스승으로 모셨을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남는 분은 봉림산문의 초조인 현욱과 심희의 수제자였던 경질(景質)이나 경질과는 사자(師資)의 관계가 아니므로 결국은 초조인 현욱의 부도로 생각된다.
그러나 고달사지 부도에 대한 모든 설명이 고려 초의 부도라고 하고 있다. 자료를 검토하여 보면 이 부도의 주인이 될 만한 분이 고려 초에 입적하신 분이 없으니 두 가지 가정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이 부도가 고려 초의 것이 되려면 선대의 스승이 입적한 후 고려 초에 이 부도를 만들어 다시 모셨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봉림산문의 역사로 보아 이 부도를 현욱의 부도라고 가정하여 이 부도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 말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하여간 나는 이 부도의 조성연대를 통일신라 말로 보고 싶다. 고승비문에 의하면 어느 사람이 진경대사 심희에게 묻기를 '다른 나라에 가서 훌륭한 분을 참례하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니 심희의 대답이 '선종이 동쪽으로 왔으니, 배우는 사람이 무엇 때문에 서쪽으로 가겠는가' 하고 대답할 정도로 스승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도의 부도로 모실 분은 현욱 뿐일 것이다. 또한 사자산문 초조인 도윤(826-868)의 부도가 화려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 속에는 힘과 절제를 보여주고 있고, 동리산문의 적인선사 부도 역시 절제된 힘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후의 부도는 이러한 강인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강인함을 보여준다는 것은 문화의 초기적 현상이다. 즉 사회가 혼란스러웠을지는 몰라도 새로운 사상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는 우리나라 선종의 초기에서는 이러한 강인함이 분명 표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솜씨를 보일 수 있는 때는 아마도 철감선사 부도를 만들던 선종의 초기가 아니었나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 동안 집사람과 아이들이 부도를 열심히 관찰하였다. 현우가 갑자기 구멍이 나있다고 한다. 가서 보니 중대석 부분의 운용문을 조각하면서 완전하게 몸통을 중대석과 분리하여 조각하였던 것이다. 그간 찾아보지 못하였던 것을 발견하였다는 즐거움에 현우와 같이 사진을 찍어 놓았다. 집사람이 운용문 조각을 보면서 좌우의 형태가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지 않는다고 하였다. 자세히 보니 좌우의 솜씨도 같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신영훈 선생님께 이러한 사실을 말씀드렸더니 '아마도 두 명의 석공이 작업한 때문이라'고 하신다. '하나의 대상을 몇 사람이 작업한 흔적이 많다'고 하시면서 '석굴암도 자세히 보면 그 솜씨가 다른 몇 사람이 작업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다. 고달사지부도가 워낙 커서 혼자서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여 철감선사부도는 솜씨가 일정한 것으로 보아 한 사람의 솜씨가 분명한 것 같다. 우리가 이 고달사지 부도를 보면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지붕돌에 있는 귀꽃이다. 귀꽃을 조각하는 정성에 대하여 느낄 수 있을 때 이 고달사지 부도를 만든 장인의 정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달사지 부도를 뒤로하고 원종대사 부도를 찾았다. 원종대사 부도로 가는 도중에 보니 '전방후원분 가는 길'이라고 써있는 안내판이 보였다. 최근에 설치된 것 같았다. 산 속에 시대가 오랜 무덤이 있는 것도 신기하여 볼까하였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하였다. 원종대사부도는 비문에 의하면 광종의 명에 의하여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부도를 만들도록 하였고 한다. 부도탑비가 원종대사가 입적한 19년 뒤인 977년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아마 부도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졌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원종대사탑비에는 權施石戶封閉라고 쓰여져 있는데 이것은 역대고승비문의 주에 의하면 '기초를 튼튼히 구축한 다음 그 위에 석호(石戶), 즉 석함(石函)을 놓고 신좌(神座)를 넣고는 덮어서 봉폐(封閉)한다는 것이니, 임시로 유해를 안장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보면 아마도 부도를 제작하는 동안 가매장하였다가. 부도가 완성된 후 다시 안치하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던 것 같다. 또한 화장이든 매장이든 간에 지금과 같이 사리만을 찾는 그러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원종대사 부도의 중대석 부분의 거북과 운용문의 조각을 보면 위에 있는 부도에 비하여 한 결 솜씨가 떨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거북의 머리가 옆으로 돌려져있는 것은 위의 부도에서 머리가 정면으로 향하여 튀어나온 것과 비교하여 볼 때 돌의 크기나 조각하는 어려움에서 많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조각도 힘이 많이 떨어져 섬약함을 보이고 있다. 원종대사 부도가 고달사지부도에 비하여 조금 격이 높아 보이는 것은 상륜부이다. 고달사지 부도는 극히 절제하여 단순화 한 것에 비하여 화려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 외의 솜씨는 고달사지의 부도와는 격을 달리하고 있다. 현정이가 상륜부 지붕돌 밑에 새겨진 연화문을 보면서 '이 연화문은 물끊기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한다. 현정이의 돌을 보는 눈이 많이 깨어 있음을 느꼈다. 이제는 자기 나름대로 볼 수 있는 식견이 어느 정도 구비된 것 같아 그간 같이 데리고 다닌 보람을 느낀다.
원종대사부도의 답사를 마치고 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주차장 근처에 오니 저기서 황의수 선생님께서 오시는 것이 아닌가. 손을 흔드니 황의수 선생님과 같이 오던 사람들이 의아해 한다. 한겨례 답사팀과 같이 왔다 하신다. 오랜만의 만남이고 우연한 만남이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는데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인사만 여쭙고는 헤어졌다. 아쉬운 만남이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울로 차를 몰았다.
2002년 02월 10일 흐림
식사를 하고 고달사지로 향하였다. 고달사지를 찾아가는 것은 얼마 전 나의 화두로 떠오른 국보 4호의 부도가 과연 누구의 부도인가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이번으로 고달사지의 답사가 다섯 번째이다. 자주 가본 곳도 늘 새로움을 느끼기 때문에 같은 곳도 또 가보게 된다. 이 번의 고달사지의 답사는 부도의 주인을 확인하고자 함도 있지만 새로이 발굴한 부분에 대한 재확인하고자 함도 있다. 고달사지 입구로 들어서자 모든 것이 바뀌었다. 8개월 전쯤 이곳에 왔을 때만 없었던 주차장이 초입에 생겼다. 또한 주변에 있었던 건물도 모두 철거되었지만 정리되지 않아 가뜩이나 흐린 날씨 때문에 더욱 을씨년 한 분위기가 되었다. 차를 안에 있는 절 앞에 주차시키고 고달사지로 향하였다. 황량하지만 정감 어린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를 지나 목적지인 금당으로 향하였다. 금당의 불대좌 앞에서 나침반으로 두 부도의 향을 확인하였다. 두 부도 모두 북서쪽에 있었다. 원종대사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의 부도를 '혜목산 북서쪽 기슭에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다. 나침반의 확인 결과는 현재 원종대사부도라고 불리는 부도는 북북서 방향에 위치하였고 국보 4호인 부도는 북서쪽에서 약간 남으로 기울어진 곳에 위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슭이라는 의미에서 본다면 국보 4호인 부도가 더 기슭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은 현 국보 4호가 원종대사부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침반으로 부도의 위치를 확인한 후 주변을 돌아보았다. 금당의 주변을 돌아보니 금당의 기단 주변에 돌이 90㎝ 정도의 폭으로 깔려져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돌의 포장은 주변에 많이 있었다. 이러한 모습은 건물간에 연결을 위하여 만든 답도(踏道)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포석은 석등 자리와 석탑 자리로 연결되어 있었고 주변의 건물지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고달사지는 이러한 돌포장 답도로 연결되어있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과거의 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보였다. 오늘 이곳에 온 목적하나가 이미 달성되었다. 그간 보지 못하였던 것이 다시 눈에 보인 것이다. 답사는 시간을 가지고 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 나름의 답사의 방법을 제시한다면 여러 곳을 보고, 반복하여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보는 것과 공부하는 것을 병행하여야 한다. 무조건 많은 시간을 가지고 본다고 하여도 알지 못하면 보이지 않으므로 시간이 아까울 때가 많다. 한 곳을 가더라도 공부를 하고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또한 많이 보지 못하면 비교가 되지 않아 문화의 깊이와 시대적인 구분을 할 수 없어 깊이가 깊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는 같은 곳이라도 반복하여 가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의 답사는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달사지 부도로 향하기 전에 목 없는 귀부를 찾아보았다. 작지만 최고의 귀부라고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어느 하나 흠잡을 수 없는 부도이다. 특히 비좌 옆에 있는 날개의 모습은 최고의 솜씨이다. 거북의 둥 옆에 있는 문양은 고달사지 귀부의 문양과 비슷하여 시대적으로 비슷한 시대에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운다. 나는 이 귀부가 지금 우리가 칭하는 원종대사의 부도와 관계가 있고 지금 원종대사의 부도는 국보 4호인 부도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여 보았다. 그러한 상상을 하면서 국보 4호로 향하였다. 국보로 올라가는 길에 이곳을 답사하러 온 부부와 같이 올라갔다. 올라가면서 고달사지에 대하여 간략히 소개를 하여 주었다. 고달사는 고달원(高達院)이라고 불렸으며 희양원(曦陽院), 도봉원(道峰院)과 함께 삼대선원이었다. 고달사는 764년(경덕왕 23년)에 창건된 절이다. 경문왕 때(861년-875년) 원감 현욱(圓鑑 玄昱)이 왕의 청으로 이곳에 주석하여 법을 폈으며 봉림산문의 개산조가 된 심희가 이곳에 와서 현욱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후 현욱의 제자인 찬유가 이곳에 머물면서 크게 번성하였다. 1530년(중종 25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도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전후로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올라가서 본 고달사지 부도는 늘 그렇듯이 장엄함을 드러내어 보이면서 말없이 서있다. 누구를 위하여 이렇게 정성을 들였을까 하는 생각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머리 속에 가득한데 속시원하게 대답하여 주는 이는 없다. 부도 기단의 문양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역시 한사람이 만든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솜씨의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우측을 담당한 이의 솜씨가 더욱 뛰어난 것임을 느낀다. 고달사지 부도의 용두를 보면 용두를 장식했던 촉의 구멍이 있다. 어떠한 형상의 것을 만들어 놓았을 것인가 상상하여 보았다. 기린의 뿔같은 것 아니면 벼슬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잘 어울리는 형상이 무엇일까 생각하여 보았지만 그리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몇 가지 예로 스켓치를 하여볼 것이다. 다음으로 늘 궁금한 것이 앞에서 있는 석물들이다. 바닥에 깔려있는 석물은 석등과 배례석 자리로 이해되는 데 그 앞에 좌우로 나란히 서있는 석물은 전혀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무엇일까 상상하여 보아도 짧은 소견으로는 일말의 힌트조차 느낄 수 없다. 아직 공부가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아래 있는 원종대사부도로 향하였다. 원종대사의 부도를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것은 위의 부도에 비하여 힘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위에 있는 부도에서는 강한 힘을 느낄 수 있는데 원종대사부도에서는 그러한 힘을 느낄 수 없다. 전반적으로 섬약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온다. 이러한 느낌이 오는 것은 기단부에 있는 용조각 때문인 것 같다. 위에 있는 국보 4호 부도는 귀부가 정면을 바라보고 강하게 앞으로 나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또한 옆에 있는 용 문양도 강하게 용트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반하여 원종대사부도의 용은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면서 정면관을 보이지 않고 측면으로 머리를 돌린 형상을 하고 있어 강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용의 목이 가늘고 약하게 표현 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표정도 강한 힘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문양의 깊이도 두 부도간에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위의 부도는 구름과 서기(瑞氣)의 문양이 매우 깊어 짙은 음영을 드리우는데 비하여 원종대사의 부도는 그리 깊지 않다. 이러한 차이는 석공의 안목의 차이에서 비롯한 것일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두 부도에서 느끼는 힘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래의 부도도 좌우의 솜씨가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용두에서 나오는 서기와 용의 발의 표현을 보면 정면에서 볼 때 좌측의 것이 더욱 깊은 맛을 보여주고 있다. 우측의 용의 발은 전체적으로 드러나 보이는데 비하여 좌측의 용의 발은 서기에 가려 조금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좌우의 용을 비교하여 보면 좌측의 용에서 더욱 긴장감과 신비로움이 강하게 느껴지고 있어 좌측의 용이 한 수위의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래의 용이 '정면을 보지 않고 머리를 돌리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여 보았다. 단지 돌의 크기가 부족하여 머리를 돌린 것은 아닐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혹시 위에 있는 부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나름대로 상상이 머리를 스쳐간다. 위의 부도와 아래의 부도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잠시 이러한 상상이 나를 즐겁게 한다. 이러한 상상의 답은 차후로 미루고 고달사지를 떠났다.
● 고달사지 부도에 대하여
이 글은 ㅎ씨가 경기도 박물관에 질의한 내용을 보고 저의 의견을 피력한 글입니다.
■ㅎ씨가 고달사지 부도에 대하여 경기도 박물관에 질의한 내용(2001/02/24)
안녕하십니까? 지난 일요일에 귀관의 주도로 발굴되고 있는 여주 고달사지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99년1월에도 갔었는데 경기불황의 여파인지 발굴기간이 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도 발굴은 완료되지 않고 연장된 기간을 다시 초과하고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더욱이 절터입구의 몇몇 민가들이 없어졌더군요. 절 복원계획이 있습니까? 그리고 궁금한 점은 원종대사의 비와 부도는 안내판대로 같은 짝일까요? 비의 크기를 보았을 때 찬유스님의 혜진탑은 현재의 것이 아닌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부도가 아닐까요? 그렇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현재의 혜진탑에서 무슨 기명이라도 나왔나요? 겉에서 보면 아무런 표시가 없는데요.
알려주시면 인사드리겠습니다.
■박물관의 답변내용(2001/02/24)
안녕하십니까? 평소 우리 문화에 많은 관심과 아낌없는 문화재사랑에 감사드립니다. ㅎ님이 질의하신 고달사지는 사적 382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것으로 경기도박물관에서 1998-2000년까지 2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나 현재 진행중인 발굴조사는 기전문화재연구원에서 실시하고 있다는 점을 우선 알려드립니다. 발굴조사기관은 변경되었지만 고달사지는 현재 일부분만 조사되었으며 앞으로 연차발굴조사가 계속 진행될 예정에 있습니다. 그리고 민가들이 위치하였던 지점도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있고 발굴조사가 끝나고 나면 고달사지를 정비하여 역사문화탐방장소로 꾸밀 계획이 있어 작년에 국가에서 매입하여 철거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원종대사혜진탑비와 부도가 과연 제 짝인지는 현재 이의를 제기한 연구자가 있습니다만 그 누구도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현재 그 부분에 대하여 관련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있지만 고달사지가 계속 조사되고 있는 관계로 고달사지에 관한 학술대회가 조만간 열릴 가능성도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자세한 대답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애정 어린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자세한 사항에 대한 것은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실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 윗 글에 대한 본인의 견해
과거의 모니터 자료를 검색하다보니 ㅎ씨 작성한 고달사지에 대한 보고서를 보게되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고달사지를 수 차례 답사한 적이 있고 특히 부도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보아왔습니다. 특히 국보 4호로 지정되어 있는 부도에 대하여는 우리 나라 최고의 부도 중 하나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와 부도비에 대하여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ㅎ씨가 지적하였듯이 지금 원종대사부도와 부도비를 보면 솜씨에 있어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전문가에게 ´원종대사의 부도비와 부도를 보면 솜씨에 있어 너무 많은 차이를 보인다´고 여쭈어 본 적도 있었습니다. 그 때 답변은 ´예전의 유물을 보면 솜씨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고달사지 부도를 보면 중대석의 용문양이 좌우가 그 솜씨를 달리하고 있어 여러 장인이 동원되어 만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와 문화재청 뿐만 아니라 여러 문헌에서 위의 부도는 주인을 모르고 아래의 부도는 원종대사의 부도라고 적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단 아래의 부도를 원종대사 부도라고 인정하고 국보 4호로 지정된 부도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대하여 지금까지 고민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고민을 하여왔던 저에게 ㅎ씨가 지적한 보물로 지정된 부도가 과연 원종대사의 부도가 맞는가 하는 것에 대한 지적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동안 앞에서 말한 문제도 있었지만 저는 아래의 부도를 원종대사부도라고 전제하고 위에 있는 국보로 지정된 고달사지 부도를 원종대사가 속한 봉림산문의 개산조인 심희나 심희의 스승인 현욱의 부도일 것이라고 가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심희의 경우 봉림사에 그의 부도와 부도비를 설립하였기 때문에 실제적인 개산조이고 이곳에서 주석하였던 현욱의 부도가 아닐까 생각하여왔습니다. 단지 양식적으로 통일신라시대 말에 만들어진 부도의 전형인 팔각당형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생각은 이 곳 고달사지를 크게 부흥시킨 원종대사 때에 와서 스승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만든 것이 아닌가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게된 것은 국보인 부도와 보물인 아래의 부도를 보면 그 위치에 있어 이미 스승과 제자의 관계인 스님의 부도인 것이 느껴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가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고달사지에는 탑비가 두 개있습니다. 하나는 원종대사의 것이고 하나는 머리가 없는 귀부 만이 남아 있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이 듭니다. ㅎ씨의 견해대로 라면 현재의 원종대사탑비는 국보로 지정된 부도와 관계가 있고 귀부 만이 남아있는 탑비는 아래 보물로 지정된 부도와 관계가 있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짝짓기 하는 것은 검증이 되어있지 않아 위험한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적으로 주인 없는 귀부에 대한 학술적인 검토 즉 석재를 다루는 기법 또는 문양 등의 상세한 검토가 있은 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선 이렇게 가정하여 봅니다. 저는 ㅎ씨의 보고서를 보고 다시 원종대사부도비의 전문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후반부에는 원종대사 부도를 건립하게된 내용이 있습니다. 비문에는 ´다음날 신좌(神座)를 혜목산으로 옮겨 감실을 열고 보니 안색이 생전과 같았다. 터를 고르고 석호(石戶)를 시설하여 유골(遺骨)을 봉폐(封閉)하였다. 임금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선월이 일찍빠짐을 개탄하시고......시호를 원종대사, 탑호를 혜진이라고 추증하였다. .....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층총(層塚)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을 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을 준수한 것이다.´(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3: 이지관역)라고 기록되어있었습니다. (원문: 翌日 奉遷神座於慧目山 龕觀 顔色如生 權施石戶封閉 上聞之慨禪月之早 ........... 追諡元宗大師 塔號惠眞 ...... 仍令國工 攻石封層 門人等 號奉色身 竪塔于慧目山西北崗 遵像法也) 이 비문을 보면 장례에 대하여 몇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선 다비에 대한 기록이 애매하다는 것과 사리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가매장하였다는 것과 마지막으로 부도를 모신 장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비와 매장법에 대한 이야기는 주제에서 벗어난 이야기이므로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전에도 비문을 읽어보았지만 그 위치에 대하여 그렇게 신경을 쓰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록대로 ´혜목산 서북쪽 산기슭´에 모셨다고 하면 현재 불대좌가 남아 있는 금당을 기준으로 볼 때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부도의 위치가 서북쪽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직은 도상으로 검토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또한 원종대사의 부도비를 보면 기단을 별도로 만들었고 보호각을 건립하였던 흔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호각을 만든 흔적은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적인선사 부도, 광양 옥룡사의 부도전 등 과거에는 이렇게 보호각을 만들어 부도나 부도비를 모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원종대사의 부도비가 보호각을 만들어 모실 정도이라면 실제 몸이 들어가 있는 부도는 어떻게 모셨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이 된다고 봅니다. 국보로 지정된 부도를 보면 앞에 배례석이 있고 배례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ㅎ씨의 가정이 그리 무리가 없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러 곳을 답사를 하면서 느끼지만 우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고정관념을 깨뜨리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저의 경우 이곳 고달사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점에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뜨려 새로운 발상으로 전환하여 저에게 고달사 부도에 대한 그간의 고민에 대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하여주신 ㅎ씨에게 존경 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윗 글을 본 분의 질문
정확히 어느 문헌, 혹은 어느 금석문에 나왔는지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부도´보다는 ´승탑´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부도라는 말은 ´탑´과 같은 의미라고 알고 있는지, 고려시대부터 스님들의 부도(승탑)에 구체적으로 ´****之塔´이라는 명문을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시 주로 쓰였던 명사를 후대에 불러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거든요. 이제 막 찾았는데, 불타의 번역, 혹은 스투파의 전음이라고 한다더군요. 그리고 승려도 부도라고 한 기록도 있다고 합니다.
습관적으로 팔각원당형의 통일신라 부도의 조형적 특징을 유지하고 있는 고려초기까지의 승탑을 주로 부도라고 하는것 같고, 이 이후의 승탑을 승탑이라 부르는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지?
● 윗 글에 대한 저의 답
불교용어사전에는 ㅇ씨의 의견대로 부처를 칭하는 말이라는 해석과 또한 스투파의 번역이라는 뜻도 통칭하여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일주문씨의 의견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도'라는 단어가 승탑을 지칭하여 사용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입니다. '부도'에 대한 탑비에 나온 글을 만을 참고하여 보면 층총(層塚), 탑(塔),부도(浮圖),부도(浮屠). 솔도파(率堵波), 석종(石鐘)등 다양한 명칭이 보입니다. '솔도파'와 '석종'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 이후의 탑비에서 주로 보이고 있는데 '석종'이라는 단어는 고려시대 말부터 탑비에 단어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름의 특징을 보면 '석종'은 형태에서 나온 것이고 '솔도파'는 탑의 음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도'라는 명칭은 조선조에도 꾸준히 사용되어왔습니다. '부도'라는 명칭을 사용한 가장 오래된 예는 813년(헌덕왕 5년)에 단속사에 세워진 신행의 탑비문에서 '부도(浮圖)'라고 사용한 것입니다. 앞서 어느 분이 언급하신 경문왕대 보다 앞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과 같은 단어인 부도(浮屠)를 사용한 예는 872년(경문왕 12년)에 곡성 대안사에 세워진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예를 보면 '부도'가 여러 명칭으로 불려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석탑을 '부도'라고 불리운 예도 있습니다. 봉암사의 정진대사원오탑비문에서 보면 '어느 날 밤 3층 석탑 위에 앉아있는 꿈을 꾸었는데(夢坐于三層石浮圖上者)'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보이고 있습니다. (상기의 예는 교감역주역대고승비문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처럼 예전에는 '부도'와 우리가 말하는 '석탑'의 명칭을 혼동하여 쓴 예가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실제의 부도의 정식명칭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언급하여 보겠습니다. 고려시대까지만 하여도 고승이 돌아가시면 시호와 탑호를 같이 내렸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잘 아는 법천사의 '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을 보면 '지광'은 시호이고 '현묘'는 탑호입니다. 그러므로 정식명칭은 '지광국사현묘탑'이 정식명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남대문'을 두고 정식 명칭으로는 '숭례문'이 있고 별칭으로 남대문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탑비가 있었던 부도에서는 이렇게 부도의 주인에 대한 경력과 탑이 세워진 연유에 대하여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리 혼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려말 이후 국가의 경제력이 약해지고 불교의 교세가 약해지면서 부도는 만들었으나 탑비를 세울 여력이 없어지면서 주인을 알게 하기 위하여 특히 조선조에는 부도에 '00당'이라고 새겨 넣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확인한 부도 중에서 부도에 직접 주인의 이름을 전각한 예로 가장 시대가 올라가는 것은 경복궁 내있는 고려시대 초에 만들어진 '원공국사부도'입니다. 그 이전에도 그렇고 최소한 조선조 초기까지 이렇게 부도에 모신 분의 이름을 직접 글을 써넣는 예는 없는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부도가 만들어 졌지만 비를 옆에 세운 예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조선조 초기에는 고려시대의 격식을 따라 탑과 탑비를 같이 세웠지만 이러한 전통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대부분 중기 이후의 예가 되겠지만 비를 세운 경우는 '서산청허당 휴정대사비명' 등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비문이 없는 경우라면 부도의 명칭을 앞에 글씨가 새겨진 것처럼 '00당 부도' 또는 '00당 승탑'으로 불리울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 명칭의 문제를 보면 우리가 어떠한 대상의 이름을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쉽게 이렇게 저렇게 부르자고 섣부르게 결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같은 아마추어보다는 학계에서 결정할 문제라고 봅니다. 광역의 의미에서 '부도'를 '승탑'으로 부르자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은 학계에서도 '부도'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승탑'이라는 단어를 과거에 써왔던 예를 그리 많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승탑'이라고 부르는 것도 최근에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부도'라는 단어가 우세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부도'라는 단어는 이미 1300년 전부터 사용하여 왔고 조선시대에도 '부도'라는 단어를 많은 비문에 일관되게 사용하여 왔기 때문에 '승탑'을 '부도'라고 통칭하여도 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첫댓글 강추 / 한줄기 시원한 빛
좋은정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많은 기르침 부탁드립니다.
선생님을 모시고 고달사지를 꼭 방문하고 싶습니다.
조금전에 방송한 KBS. TV책을말한다에서 한승원 착가의 艸衣가 소개되었습니다. 프로그램 말미에 대흥사(대둔사)부도원을 비춰주는데, 원구형부도 한복판에 "草衣塔"이라고 음각되어 있더군요..
좋은 글 이네요.. 감사 합니다 .홈에 가보았는데 상큼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지척에 사는 한 동네 이웃~
정말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네요 몇일전 또 가보았는데 목없는 귀부는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요? 저번 답사때 그냥 스쳐 지나간것이 아닌가 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