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1-6 중매함 2006. 8. 6
1 원컨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컨대 나를 용납하라 2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3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4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 하는구나 5 내가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 생각하노라 6 내가 비록 말에는 졸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여러분이 혹 중매를 해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몇 번 소개는 한 적이 있는데 성사가 된 적은 한번 뿐인 것으로 압니다. 중매를 하면 남자를 여자에게 소개하든 여자를 남자에게 하든지 간에 그 사람에 대하여 소개하는 것입니다. 직업은 무엇이며 집안은 어떠한지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이 소개하는 사람이 귀하고 좋은 사람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소개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바울사도는 자신을 중매쟁이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도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그리스도의 향기로 그리스도의 편지로 소개하는데 오늘 말씀에서 중매한다고 하는 것은 참 적절한 표현입니다. 바울이 소개하는 신랑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얼마나 대단한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사랑에 질투가 없다면 참다운 사랑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바람을 피우는데도 아무른 질투가 없다면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야하는데도 늘 다른 곳에 마음을 둡니다. 이것을 우상숭배라 하고 음란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다른데 마음을 둘 때에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냅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심판을 행하여서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게까지 하셔서 하나님의 열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의지할 만한 다른 나라까지 심판을 하셔서라도 이스라엘이 다른 곳에 눈을 돌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열심을 자기 언약에 신실하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호세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하라고 합니다. 고멜은 처음부터 음란한 여인입니다. 그런 여인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선지자의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호세아와 고멜 사이에서 자식을 낳게 되자 하나님께서 이름을 짓게 하시는데 그 이름들이 다 심판의 이름입니다. 아들을 낳아 이스르엘이라고 합니다. 이스르엘 골짜기에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딸을 낳게 되자 ‘로루하마’라고 합니다. ‘로’는 부정 접두어입니다. ‘루하마’는 긍휼입니다. 그러니 자녀의 이름이 긍휼을 입지 못하다는 이름입니다. 또 아들을 낳으니 로암미라고 하라고 합니다. 내 백성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을 행하신 후에 다시 암미라 하고 루하마라고 부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심판을 행하신 이후에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까? 호세아 2:19-20절입니다. “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장가든다는 것입니다. 온갖 음란한 죄를 다 지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심으로 여호와를 알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며 음란한데서 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0-4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지만 아브라함을 이렇게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것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자기들의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보고 마귀에게서 났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마귀에게서 난 증거이며 그것이 음란한 데서 난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아무리 정결한 처녀 총각이라고 하여도 예수님을 알지도 믿지도 못한 단군의 후손들이기에 더욱더 음란한 데서 난 자들입니다. 이런 이방인들을 한 남편인 그리스도의 정결한 신부로 드리려고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중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의 이런 열심도 사실상 하나님의 열심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미 아담의 모든 후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인이고 다 더럽혀지고 다 음란한 자들인데 어떻게 정결한 처녀가 된다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5:17절에서 이런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바로 앞의 말씀에서 성도란 아무도 육체대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과거를 따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평가할 때에 과거의 이력과 경력을 보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새로운 피조물인 것입니다. 그러면 음란한데서 태어난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까? 고린도 후서 5: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호세아서에서 보았던 그 하나님의 은총과 긍휼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 속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과거가 어떠하든 새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결한 신부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물론 병 고침을 받기 위하여 떡을 먹고 배불러서 기적을 보고서 따라온 자들이 대부분 이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만나주신 병자들과 세리와 창기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병자들은 죄인이라서 병자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여기며 살았던 자들입니다. 세리도 창기도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들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먼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은 자기 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만든 의란 누더기와 같은 것입니다. 독사의 독과 거미줄로 짠 옷을 입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것으로 옷을 만들지도 못하지만 만들어서 입는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한 처녀가 되어 한 남편인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에서 끊어지게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한 것처럼 오늘날 성도를 유혹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뱀의 미혹으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그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스스로 선악을 챙기며 살게 된 것입니다. 선과 악이 동시에 들어왔기에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기 원하지만 또 하나의 악이 자기를 잡아당기는 것입니다. 이 딜레마 속에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선으로 악을 이겨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사망의 몸입니다. 아무리 선을 쌓아서 악을 상쇄시켜 보려고 하여도 이미 그 노력 자체가 범죄 한 이후의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죽도록 선행을 하여도 그 속에서 악이 더 강하게 따라 붙는 것에 대하여 인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된 상태에서 인간들이 스스로 정리하여 내린 진리관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비록 죄를 안 지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죄를 짓지 않게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나는 가상히 봐 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최소한 51%의 선을 행하면 선 쪽에 무게가 더 나가기에 지옥에야 보내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나의 갸륵한 정성을 받아 주지 않는 신이라면 그 신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들의 실상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무슨 정결함이 나오겠습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음란한 것이란 남녀의 성적인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지 않는 것이 음란한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다 음란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정결한 신부가 된다고 하였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도 정결한 신부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느 정도로 정결하게 되는지 에베소서 5:26-27절을 봅니다.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남편과 아내에 대한 말씀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성도가 교회인 것입니다.
이 멋진 신랑을 소개하는 것이 바울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신랑 되시는 예수님의 소개가 어떻습니까? 직업: 목수 하다가 지금은 실직자, 학력: 무 학력, 가정형편: 가난한 집안의 장남, 재산: 전세방도 없음, 외모: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음, 이런 이력으로 소개하여야 합니다. 이런 예수님을 소개하면 중매쟁이가 받을 대접이 무엇이겠습니까? 중매 잘 서면 술이 석 잔이고 잘못서면 뺨이 석대라고 하는 말이 있는데 바울사도가 가는 곳마다 매 맞고 쫓겨 다닌 이유가 있습니다.
중매한 신랑감이 형편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나를 뭐로 보고 그런 신랑감을 소개하는가 하면서 죽이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창녀이고 자신이 죄인이고 장애인이고 결혼은 꿈도 못 꾸는 그런 사람에게는 그래도 이 신랑이 얼마나 멋지고 좋은 신랑입니까? 그러나 오늘날은 이럴 것입니다. 무엇이 멋집니까? 차라리 결혼 안하고 살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멸망 받은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능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상에 아무른 힘과 도움도 주지 못하는 예수님을 우리의 영원한 신랑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 아무도 이런 신랑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미혹을 받은 것처럼 지금 고린도 교인들이 아니 오늘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마음에서 떠나 부패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4절을 봅니다. 오늘날의 미혹은 바울이 전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원한 신랑은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영광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죽으면 그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 안에 완벽한 죄 사함이 있습니다. 영원한 용서가 있습니다. 흠도 티도 없는 정결한 신부로 세우시는 능력이 그 보혈 안에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습니다. (계 19:1-10)
http://www.evergreen17.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