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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윤상호1
[樓亭詩 紀行]
慶州 獨樂堂
자연은 자연대로 나는 나대로
매화꽃이 피어나는 이른 봄날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은 고요했다. 옛 선비의 고택(古宅)에 봄은 찾아왔지만, 피어나는 꽃송이를 어루만지며 완상할 주인은 없었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독락당은 동쪽 세 칸은 마루이고 서쪽 한 칸은 온돌방을 들였다. 앞쪽 현판에는 ‘옥산정사(玉山精舍)’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고 마루 안쪽 벽에 ‘독락당’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좌우로 걸린 수많은 기문과 시판이 집 주인의 학문과 시 그리고 풍류를 가늠케 한다. 옛 주인은 조선 초기의 학자 이언적(李彦迪, 1491~1553)이었다.
본관은 여주(驪州)로 자는 복고(復古)이고 호는 회재(晦齋)이며, 또 하나의 호는 자계옹(紫溪翁)이다. 초명(初名)은 적(迪)이었으나, 정덕(正德) 갑술년에 등제하였을 때 중종의 명령으로 언(彦) 자를 가하였다. 경인년에 사간(司諫)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전리(田里)에 돌아갔다가 7년 만에 김안로(金安老)가 패사(敗死)하게 되자, 다시 부름을 받아 관직을 역임하고 이조판서가 되었다. 인종[仁廟] 초에 특별히 좌찬성(左贊成)을 배수하고, 화(禍)가 일어나자 강계(江界)로 귀양 갔다가 귀양 간 곳에서 죽었다. 사람됨이 충효(忠孝)가 천성으로 뛰어났으며, 학문이 정심(精深)하였다. —중략— 선생이 김안로(金安老)를 논박하다가 파직되고, 고향에 돌아와 자옥산(紫玉山) 안에 자리를 잡았는데 바위와 구렁이 기이하게 둘러 있고 시내와 못이 청결한 것을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짓고 살며, 이름을 독락당(獨樂堂)이라 하고, 소나무와 대나무, 화초를 심고, 좌우에 책을 쌓고 세상일을 사절한 채 모두 7년을 고요한 가운데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자연 속에서 자연으로 살기
조선 중기의 학자 권별(權鼈, 생몰년 미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인명사전인 <해동잡록>에서 이언적을 절개가 곧고 학식이 뛰어난 학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황(李滉)도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와 이언적을 동방사현(東方四賢)이라 추앙해 마지않았다.
사화(士禍)가 거듭되던 시대를 살다간 선비 이언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는 그의 높고 맑은 정신이 깃든 곳이다. 그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지어진 옥산서원(玉山書院)과 7년간 낙향 생활을 하던 독락당과 계정(溪亭)이 시냇가 맑은 바람 속에 자리하고 있다.
독락(獨樂), 홀로 즐거운 경지는 어떤 것일까? 중앙 정치무대의 차가운 바람을 안고 낙향한 이언적은 그 울분과 외로움을 어떻게 독락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을까?
그 궁금증을 푸는 열쇠는 가까이 있다. 독락당의 별채로 지어진 기역(ㄱ) 자 형의 양진암(養眞庵)이 계류에 바짝 다가서 있는데, 계류와 병행하는 두 칸에 마루를 깔았다. 앞과 뒤를 개방하여 시원한 정자 역할을 하게 했다. 계곡물 쪽으로는 난간을 내었고, 그 아래 암반에 기둥을 세워 난간을 받치고 있다. 계곡에서 보면 그대로가 정자다. 그래서 ‘계정(溪亭)’이라 쓴 현판이 시내 쪽 바람벽에 걸려 있다.
독락의 시작은 자연에 다가가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자연이 될 때 세상의 풍파를 잊을 수 있고, 자연이 되어 자연의 이치를 궁구함으로 사람의 도리를 양생시키는 힘을 얻는 것이다.
離群誰與共吟壇이군유여공음단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가 함께 시를 읊나
巖鳥溪魚慣我顔암조계어관아안 산새와 물고기가 나의 낯을 잘 안다오.
欲識箇中奇絶處욕지계중기절처 그 중에서 특별히 더 아름다운 정경은
子規聲裏月窺山자규성리월규산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이언적 ‘독락’ <회재집> 제2권
이언적의 독락은 무리를 떠나 홀로 살며 낮에는 산새와 물고기를 친하고 소쩍새 우는 밤에는 산을 엿보는 달을 감상하는 것이 전부다. 자연과 둘이 아니게 합일되는 자리에서 홀로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는 단순히 자연을 감상하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알아차림으로써 무한 생명의 실상을 자각하는 자리다.
계정 아래 널찍한 바위는 어른 열두어 명이 둘러앉을 수 있다. 그 아래로 흐르는 계곡은 겨울 가뭄 중에도 물이 제법 깊고, 피라미들이 오가는 게 훤히 들여다보인다. 이 바위를 이언적은 ‘관어대(觀魚臺)’라 이름 붙였다. 바위 아래 형성된 소(沼)에 노니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며 하루해가 가는 줄 몰랐을 것이다.
계정 건너편의 바위에는 영귀대(詠歸臺)라는 이름을 붙였다. 역시 자연 속을 소요하다 시를 읊조리며 돌아온다는 안빈낙도의 상징이다.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이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온다”고 한 고사와도 관계있는 말이다.
어떤 바위에는 갓끈을 씻는다는 의미의 탁영대(濯纓臺)란 이름을 얹고 또 어떤 바위에는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의미의 징심대(澄心臺)와 세심대(洗心臺)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臺上客忘返대상수망반 대 위에서 나그네는 돌아가길 잊었는데
巖邊月幾圓암변월기원 바위 옆에 뜬 저 달은 몇 번이나 둥글었나.
澗深魚戲鏡간심어희경 깊은 시내 거울같이 맑은 물에 고기 놀고
山暝鳥迷煙산명조미연 어둑한 산 연무 속에 새가 길을 잃는구나.
物我渾同體물아혼동체 물아가 혼연히 한 몸이 되었으니
行藏只樂天행장지락천 나가건 들어앉건 자연을 즐길 뿐이로세.
逍遙寄幽興소요기유흥 소요하며 그윽한 흥을 부쳐 보노라니
心境自悠然심경자유연 마음속이 저절로 한가로워지는구나.
이언적 ‘징심대에서 경치를 읊다’ <회재집> 제2권
독락의 극치를 보이는 작품이다. 어쩌면 이 작품으로 이언적은 독락의 이치를 다 말하고 돌아누워 계정의 맑은 바람이나 쐬었을지도 모른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거듭해도 그것은 달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니다. 맑은 물에 노니는 물고기도 그저 물고기일 뿐이지 사람과 관계없다. 산에 어둠이 내려 새들이 돌아가는 길을 잃건 말건 그 역시 사람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그렇게 자연은 자연대로 나는 나대로 아무 상관없음이 오히려 물아(物我)의 혼연일체이니 ‘자연 너머의 자연’을 알아차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물아의 일체 속에서는 나가고 들어감도 따질 것 없으니 하늘을 즐길 일만 남는 것이다. 하늘을 즐긴다? 이미 하늘의 이치를 꿰뚫었으니 해와 달이 지고 뜨기를 반복하는 그 무상의 행로가 즐겁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러니 그윽한 흥을 부쳐 저절로 한가로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징심이 세심이고 세심은 독락이다.
白頭至紫玉백두지자옥 백두산부터 자옥산에 이르니
融結方最奇융결방최기 정기 모여 가장 기특하네.
東賢至晦齋동현지회재 우리나라 현인은 회재에 이르러
道脈正於斯도맥정어사 도맥이 이에 바로 잡혔다오.
如何終絶徼여하종절요 그런데 어이하여 먼 변방에서 별세하여
永作山河悲영작산하비 길이 산하의 슬픔이 되었는가.
幸賴有著述행뢰유저술 다행히 저술이 남아 있어
的訓日星垂적훈일성수 훌륭한 가르침 해와 별처럼 드리워져 있네.
所樂自可尋소락자가심 즐거워하시던 것 스스로 찾을 만하니
不須杖屨隨불수장리수 굳이 지팡이 짚고 신 신고 따를 것이 없다오.
장현광 ‘독락당 벽 위에 있는 시운을 빌다’ <여헌집> 제1권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은 독락당과 계정을 답사하며 조선 성리학의 학문적 기초를 닦은 이언적의 업적을 크고 높은 산에 비유했다. 먼 변방의 귀양지에서 생을 마친 비통함은 온 산하의 슬픔으로 남았다며 안타까운 마음도 드러낸다. 그러나 저술을 통해 그 가르침이 해와 별처럼 남아 있으니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가르침의 유적들이 자연의 경물이고 보면, 스스로 찾을 만한 것이어서 굳이 지팡이 짚고 신 신고 따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물아일체와 안빈낙도
이언적의 안빈낙도와 물아일체를 통한 독락이 본래부터 쉬운 것이라는 말은 아니다. 이미 독락당과 계정의 주인이 그 길을 열어 두었으니 후학이 따르기 쉬운 것이라 읽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시에서 장현광이 “굳이 지팡이 짚고 신 신고 따를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이언적의 시구를 인용한 것이다.
春入雲林景物新춘입운림경물신 깊은 숲에 봄이 와서 경치가 새로우니
澗邊桃杏摠精神간변도행총정신 시냇가의 복사 살구 생기가 충만하네.
芒鞋竹杖從今始망혜죽장종금시 지금부터 짚신 신고 지팡이 짚고 나가
臨水登山興更眞임수등산흥갱진 시내와 산을 찾아 참된 흥취 느끼리라.
이언적 ‘이른 봄[早春]’ <회재집> 제2권
봄날의 자연을 즐기러 나가는 선비의 마음이 밝고 가볍게 다가온다. 자연으로 나아가 자연과 하나 되는 것, 그것이 선비의 독락이니 시냇가 복숭아와 살구의 생기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언적의 전원생활은 자연과의 합일로 향하는 행로였던 것이다. 독락당에 살며 읊은 계절 시가 모두 그 행로의 기록임은 말할 것도 없다.
春深山野百花新춘심산야백화신 봄이 깊어 산과 들에 온갖 꽃들 새로운데
獨步閑吟立澗濱독보한음입간빈 한가하게 읊조리며 홀로 걷다 시냇가에 서노라.
爲問東君何所事위간동군하소사 묻노니 봄의 신은 하는 일이 무엇인가
紅紅白白自天眞홍홍백백자천진 붉은 꽃 하얀 꽃이 저절로 피었거늘.
이언적 ‘늦봄[暮春]’ <회재집> 제2권
又是溪山四月天우시계산사월천 시내와 산이 다시 사월을 맞이하니
一年春事已茫然일년춘사기망연 한 해의 봄이 이미 아득하게 사라졌네.
郊頭獨立空惆悵교두독립공추창 교외에 홀로 서서 공연히 슬퍼하며
回首雲峯縹緲邊회수운봉표묘변 고개 돌려 구름 덮인 산봉우리 바라보네.
이언적 ‘초여름[初夏]’ <회재집> 제2권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이치를 탐구하고 그 이치를 통해 마음을 비우는 처신이 한결같다. 이언적의 시편들에 무상감이 짙은 것은 그가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이다. 독락당에서 가까운 곳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신라 고찰이 있다. 30리 인근의 양동마을이 출생지인 이언적은 어릴 적 이 절에서 독서를 했고, 나이 들어 독락당에 살면서도 정혜사 스님과 교류가 잦았다. 독락당 별채의 당호를 양진암(養眞庵)이라 한 데서도 그의 불교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다.
고려나 조선의 선비들 가운데는 학문적으로 유학을 숭상하면서도 불교를 공부하고 승려들과 시를 나누고 선문답을 거량한 경우가 많다. 배척하기보다는 서로를 품으면서 더 높은 경지의 학문과 인격을 닦아가고자 하는 포용력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空山中夜整冠襟공산중야정관금 빈산에서 한밤중에 정좌(正坐)하고 있노라니
一點靑燈一片心일점청등일편심 한 점의 푸른 등불 한 마음을 비추누나.
本體已從明處驗본체기종명처험 본체를 밝은 데서 이미 징험하였기에
眞源更向靜中尋진원갱향정중심 진원을 고요한 가운데서 다시 찾네.
— 이언적 ‘관심(觀心)’ <회재집> 제2권
어느 선승의 게송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선불교(禪佛敎)의 경계가 읽히는 시다. 전반부에는 조용한 산중 사찰에서 참선에 들었다가 푸른 등불 앞에서 몰록 깨달음의 열락을 맛본 정황이 그려지고 있다. 선승의 오도송이라 해도 믿을 만하다. 나아가 후반부에서는 본체를 밝은 데서 징험했다고 함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소소영령(昭昭靈靈, 마음이 깨어 있어 밝고 신령스러움)한 본성 즉 불성의 자리를 체험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참된 마음의 근원을 고요 속에서 찾으니, 선불교가 추구하는 열반적정의 경지를 드러낸 것이라 할 만하다. 마치 십우도(十牛圖)의 아홉 번째 그림인 ‘반본환원(返本還源)’을 연상케 한다.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정신이 자주 드러난다.
萬物變遷無定態만물변천무정태 만물은 변천하여 일정한 자태 없고
一身閑適自隨時일신한적자수시 한 몸은 한적하게 절로 때를 따르노라.
年來漸省經營力연래점성경영력 연래로 경영하는 힘을 점차 줄인지라
長對靑山不賦詩장대청산불부시 산을 오래 바라보며 시도 짓지 않네.
이언적 ‘무위(無爲)’ <회재집> 제2권
山雨蕭蕭夢自醒산우소소몽자성 산속에 비가 내려 절로 꿈이 깨었는데
忽聞窓外野鷄聲홀문창외야계성 홀연히 창밖에서 들려오는 들꿩 소리.
人間萬慮都消盡인간만려도소진 인간세상 온갖 걱정 모조리 사라지고
只有靈源一點明지유영원일점명 오직 한 점 마음만이 밝은 빛을 드러낸다.
— 이언적 ‘존양(存養)’ <회재집> 제2권
물론 <회재집>의 시들은 선비의 입장에서 자연 경물을 통해 우주의 이치를 관철하는 정신세계를 표현한 것이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다만, 이언적과 정혜사의 인연을 따지고 보면 불교적 정서로 그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미 써진 시는 쓴 사람의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의 것이라 하지 않던가.
今我行年未五十금아행연미오십 내 나이 오십 세가 아직 되지 않았지만
已知四十五年非기지사십오년비 사십오 년간의 잘못 이미 잘 알겠네.
存心却累閑思慮존심각루한사려 생각이 나태하여 마음 보존 못 하는데
體道安能貫顯微체도안능관현미 현미를 꿰뚫어서 도를 체득하겠는가.
爲義爲仁不用極위의위인불용극 인과 의를 행하는 데 힘을 다 못 쏟았고
處人處己又多違처인처기우다위 남에게도 스스로도 잘못한 게 많았어라.
從今發憤忘身老종금발분망신로 지금부터 발분하여 늙어 가는 것도 잊고
寡過唯思先哲希과과유사선철희 선철만을 본받아서 허물을 줄이리라.
이언적 ‘지비음(知非吟)’ <회재집> 제2권
본래 이언적은 철저한 유학자, 조선 성리학의 이론을 정립한 학자다. 46세에 쓴 이 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근신 탁마했는지 알 수 있다. 시의 제목은 자신의 삶과 행동을 돌이켜 보고 잘못을 후회한다는 뜻이다. ‘지비(知非)’는 <회남자(淮南子)> 원도훈(原道訓)에 나오는 고사다. 춘추시대 위(衛)나라의 거백옥(蘧伯玉)이 나이 50이 되어서 49년 동안의 잘못을 알았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이언적은 자신의 게으름 때문에 마음을 제대로 보전하지 못했으므로, 현미(顯微) 즉 밖으로 드러난 현상(現狀)과 드러나지 않은 도의 본체(本體)를 투과하는 도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라고 철저한 반성을 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부터라도 늙어가는 것도 잊고 앞 시대 스승들의 가르침을 따르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옥산서원의 봄 풍경
독락당과 계정 아래 물가를 배회하며 이언적의 발자취를 더듬다 보니 커다란 바위들이 예사롭지 않다. 500여 년 전 한 선비가 걸터앉아 물속의 물고기들을 구경했을 바윗돌. 사람도 물도 물고기도 그때의 것이 아니고 나무와 바람마저 그때와 다를 테지만, 오직 바위만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자리를 지키고 있음을 생각하니 이언적이 바위마다 이름을 붙인 이유도 이해가 되는 듯하다.
계정 아래 물길을 따라 위쪽으로 올라가다가 차도로 올라서 잠시 걸어가니 정혜사 옛터다. 절은 흔적도 없고 구조가 독특한 석탑 한 기가 우뚝 서 있을 뿐이다.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 13층석탑이다. 단층의 기단부가 높은 것과 탑신이 짧고 옥개석이 급하게 줄어들며 쌓아 올린 모습이 상당히 독특한 탑이다. 남한에 전하는 탑으로는 유일하게 10층이 넘는다니,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귀인을 만난 듯한 마음에 한참 동안 탑돌이를 했다. 이언적도 이 탑을 오른쪽으로 돌았을까? 탑을 돌며 시대의 안녕을 빌고 세상의 행복을 빌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탑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청렴하고 고결한 정신을 고양하려는 다짐은 하였을 것이라 생각하며 마을길을 천천히 걸었다.
독락당에서 옥산서원까지는 700여m. 매화꽃이 피는 밭둑길을 지나 냇물을 건너다가 커다란 바위에 ‘세심대(洗心臺)’라 쓰인 굵직한 글씨를 발견했다. 이언적이 마음을 씻는 곳이라 이름 지은 바위일 것이다. 옥산서원의 선비들이 공부하다가 혼침이 찾아오거나 마음이 번잡해지면 이 개울에 나와 흘러가는 개울물에 발을 담그고 마음을 씻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언적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다시 책을 들었을 것이다.
사적 제154호인 옥산서원은 1572년(선조 5)에 경주부윤 이제민(李齊閔)이 지방 유림의 뜻을 모아 지은 서원으로 1574년에 사액서원이 되었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 폐지 때도 훼철되지 않는 서원이다.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니 마당 가득 봄 햇살이 들어차 있었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 대신 뒷산에서 딱따구리가 나무를 쪼는 소리가 목탁소리처럼 또르르 또르르 들렸다.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의 정면에는 ‘옥산서원’이라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또렷하고 좌우로는 선비들의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와 은수재(誾修齋)가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규모로 자리하고 있다. 구인당 맞은편은 누마루인 무변루(無邊樓)가 서 있다. 사방에 적당한 높이의 건물들이 서 있어서인지 마당이 참으로 아늑하게 느껴진다.
옥산서원의 창고는 보물창고였다. 이언적의 수필 고본은 보물 제586호로, 김부식 원저 <삼국사기> 완본 9책은 보물 제525호로, <정덕계유사마방목>은 보물 제524호로, <해동명적> 2책은 보물 제526호로 지정되었으니 말이다.
紫玉山中訪古祠자옥산중방고사 자옥산 속에 와서 옛 사당을 찾아보고
洗心臺上獨躕躇세심대상독주저 세심대 위에 서서 홀로 서성거리노라.
千秋遺恨無人問천추유한무인간 천추에 남긴 한을 물어볼 이 없는데
吾道如何又至斯오도여하우지사 우리 도는 어쩌다가 또 이 꼴이 되었을까.
윤증 ‘옥산서원을 찾아’ <명재유고> 제2권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학문을 닦았던 윤증(尹拯, 1629~1724)의 이 시 제목은 ‘옥산서원을 찾아 회재 선생 사당을 배알하고 느낌이 있어’이다. 윤증과 송시열의 학문적 견해차이로 인한 갈등은 조선 중기를 뒤흔든 사건이었다. 결국 노론 소론의 분열로 이어진 당시 정치 상황을 놓고 볼 때, 윤증의 마음은 이언적의 ‘독락’이 무척이나 부러웠을 것이다.
그저 초야에 묻혀 학문에만 전념하려는 자신은 오히려 논쟁의 핵심에 서 있으니 이언적의 유적지에서 느끼는 감회는 참으로 ‘천추에 남긴 한’이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降我先生任繼開강아선생임계개 하늘이 우리 선생을 내시어 계개의 임무를 맡기니
河南道脉海東來하남도맥해동래 하남의 도맥이 우리나라로 왔네.
而今獨抱虹橋恨이금독포홍교한 지금 홀로 도맥이 끊어진 한을 안고 있으니
寒月空留水上臺한월공유수상대 차가운 달빛 부질없이 물가의 누대에 머무르네.
— 장복추 ‘옥산서원에 묵으며’ <사미헌집(四未軒集)> 제1권
조선 말의 선비 장복추(張福樞, 1815~1900)도 ‘옥산서원에 묵으며 공경히 계정의 현판 시에 차운하여 짓다’는 절구를 통해 이언적의 높은 덕을 기리면서 도학의 맥이 끊어진 시절인연을 탄식하고 있다. 첫 행의 ‘계개’는 <중용>에 나오는 말이다. 지나간 성인을 계승하고 앞으로 올 후학들에게 길을 열어준다는 뜻이다. 이언적이 그러한 선비로서의 사명을 잘 지킴으로써 ‘하남의 도맥’ 즉 성리학의 정맥을 이어받았다고 노래한 시인은 자신의 시대에 그 맥이 사라진 것을 통탄하고 있다. 셋째 행의 ‘홍교의 한’이란 주희(朱熹)의 ‘무이도가’에서 홍교가 끊어진 것을 도맥이 끊어진 데 비유한 것을 인용한 것이다.
한 시대 스승의 가르침은 그 시대에만 머물지 않는다. 시간을 따라 그 가르침이 더욱 절실해지기도 하고 흐지부지 사라져 버리기도 한다. 성인의 가르침은 시대를 따라 더욱 빛나고, 그렇지 못한 이의 가르침은 그 수명이 길지 못하다. 그것은 가르침의 내용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고 시절과 인심의 변화에 따른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다만, 절대적인 진리란 어떤 경우에도 부침하지 않고 빛나는 것이라는 것이 우리의 보편적인 믿음이다.
독락당의 주인이 남긴 가르침이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어떤 감화로 다가올지 단정 짓기는 어렵지만, 자연과 더불어 살면서 자연의 이치를 궁구하여 마침내 초자연적인 열락의 기쁨을 얻으려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자연으로 바짝 다가서 있는 계정에 앉아 흐르는 물을 보고, 관어대 너럭바위에 쭈그리고 앉아 물속에 노니는 물고기를 한참 바라보라. 어느 순간 마음은 가벼워지고 몸도 투명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500여 년 전 이언적의 힐링 공간에서 21세기의 사람들 역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唯心> 85호. 2015년 05월 01일(금) 임연태 mian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