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역사나 일부분만 해석하다보면, 킹왕짱 국가가 될 수도 있고 허접안습국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신라, 고구려, 고려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거의 없고 이미 다른 분들께서 말씀해 주셨으니 저는 나름대로 공부한 조선군과 조선시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허약한 조선군.
당연한 이야기지만, 조선군은 약하다는 선입견이 강합니다(편견이 아닙니다). 그도 그럴 수 밖에 임진왜란 개전 당시 한달도 채 못되서 수도가 함락되고 전 국토의 대부분을 빼앗기는 상황이 연출 됩니다. 병자호란 당시 역시 비슷하지요. 거기에 국토가 불타고죄 없는 백성들이 죽고, 여자들이 끌려가고 도자기 사업이 망하고...이러면 더더욱 조선군과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한 혐오감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위의 열거한 말들은 <분명한 사실>이지요.
그러나 저렇게 떼어놓고 볼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흐름 및 주변 정세와 당시의 한계에 대해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전국시대를 종결한 일본군? 한때 스페인 ㅡ.ㅡ과 비교될 정도로 뻥튀기가 되었습니다. 1세기 가까이 전쟁의 시대를 겪었으니 풍부한 장수들과 병사들을 갖춘 것은 물론이고, 일본의 전국시대의 "아기자기-_-'한 전투이지만 전쟁에 대한 경험도 풍부하지요.
비슷한 시대의 유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이 근현대적인 국가와 군대가 등장하는 것이 이 시기지요.
그럼 당시 일본 백성들 및 유럽 백성들의 생활은? 굳이 답변해드리지 않겠습니다 ㅡ.ㅡ;
반면에 조선은 개국 이후 200년 동안 내부적인 반란 및 자잘한 혹은 약간 규모가 큰 오랑캐의 침입을 제외하고는 나름의 태평성대와 중앙집권화된 관료국가로서 안정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심심하면 조선시대 양반 / 백성들의 평균 식사량을 조사해 보세요. 잔칫집에서 수 그릇, 집에 와서 수 그릇 먹다가 배 터져 죽었다는 기록이 똑똑히 남아 있는게 조선시대입니다. 관찰사가 백성들이 밥 대신 치킨을 먹고 싶다고 보리밥을 싫어하고 쌀밥을 달라고 징징거려서 고민이다는 장계와 그에 따른 회의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에 남아있는 것도 조선입니다-_- 이런 경향은 국가 체제의 모순이 극대화된 구한말까지 계속-_- 됩니다.
그리고 조선이 단순히 수세적인 국가로 이해해서도 곤란합니다. 오랑캐가 좀 컸다 싶으면 경험치를 올리기 위해 북방의 안정화를 위하여 심심하면 여진족을 털어주던 국가가 조선이고, 그것은 심지어 임진왜란 <당시>와 임진왜란 <직후>에도 계속됩니다. 실록에 <노토>나 <여진>으로 검색해 보세요. 부락민이 전부 산으로 숨고 울부짖고, 잔인한 침략자 조선군은 곡식을 불태우고 가옥을 박살냅니다 ㅡ.ㅡ
심지어 <조광조 하앍하앍>거리던 시기, 그러니까 조광조를 정치적으로 제거하기 이전에 중종도 "오랑캐를 뒤치기하는 건 군자가 아니라능"이라는 조광조의 주장을 반대합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치트공과 조선수군>에 대해서는 언급을 생략합니다. 모르는 사람도 없고...
반면, 그렇게 강한 조선수군이 나올 수 있는 배경에 대해서는 밑에서 언급하겠습니다.
2. 조선이라는 국가
조선시대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몇 안되는 중앙집권형 관료국가였습니다. <중앙집권>이라는 말과 <관료국가>라는 말에 주목해 주십시오. 이것을 대단찮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주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중앙집권을 한다는 것은 곧 중세 봉권적인 호족/귀족체제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 당연히 계급으로서 양반(귀족)은 남아있었죠. 하지만 그네들이 장원(영지)을 소유하거나 개인적인 사병을 보유하는, 서양사적인 의미의 귀족은 태종 이방원 때 이미 착착 정리가 됩니다.
힘 없는(?) 양반들은 결국 철밥그릇 공무원이 될 수밖에 없죠. 아, 그렇다고 소작농 체제는 뭐냐! 라고 말하시면 곤란합니다. 왕이 파견한 사또나 토지를 소유한 양반이 행패를 부리는 것과, 그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왕으로 군림하는 귀족이나 기사가 행패를 부리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어쨌든 중앙집권적인 모습을 갖춘 나라는 <당연히> 정부에서 통제하는 정부군을 갖게 됩니다. 여기서는 서양의 국민군대와는 조금 뉘앙스가 다르죠.
아무튼, 조선군은 <그 당시 치고는> 나름의 비슷한 무기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말이나 무기나 갑옷을 일정 수준 이상은 병사가 부담해야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였으니 태클 거시면 곤란.
하여튼 간에 그 대표적인 예가 <조선수군>입니다. 동아시아 최강의 수군으로 군림했던 조선 수군은, 철저히 서양의 기준으로도 근현대적인 해군입니다. <국가가 소유 및 유지>하는 <선박 / 군인>에 <국가에서 경영>하고 <일정 거점을 기준으로 활동>하는 해군은 당시 조선이 유일했습니다.
판옥선(그 이전에는 맹선, 대맹선 등등)이라는 일정한 규격을 갖춘 전함과 전문적인 직업 군인(당시 육/해군 간부 구별은 없었음)을 갖춘 나라는 몇 안됩니다. 거의 조선이 유일할 정도 ㅡ.ㅡ
스페인 아르마다와 드레이크 제독의 영국해군? 네덜란드 해군? 차후 나폴레옹과 붙게 되는 넬슨 제독 시기는 좀 와야 국가에서 배를 만들고 해군을 양성합니다. 그 이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상선을 징발하거나 필요하면 마을을 덮쳐서 노숙자나 청년들을 끌고가는 실정입니다 ㅡ.ㅡ;
아, 가장 중요한 <원거리 사격>을 뺴먹었군요.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원거리 함포 사격은 1~2회나 최소한으로 그치고 선상백병전은 결국 존재했을 것이다라는 것으로 귀결되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교리면으로 원거리 함포 사격을 채택한 나라는 다섯 손가락으로도 꼽을 겁니다.
반면에 일본은 중앙집권형 국가도 아니여서, 해전(?)의 경험이 많은 왜구가 고니시 휘하의 장수로 속해서 육지-_-에서 열심히-_- 싸우는 결과가 초래되고, 일본수군+일본해적+일본육군수송함대가 조선수군에게 처절하게 개박살-_-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사적으로, 해적+수군(선상백병전^^)+육군수송함대가 뒤섞인 것을 수군이라고 불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추가로 선박들의 규격이 통일되어 있지 않고 무기체계도 서로 다른 건 뭐 말할 필요 없겠죠.
참고로 한산대첩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음과 같은 단편명령을 내립니다.
"이세 신궁을 제외한 모든 산을 벌목^^"
"선박을 만들 SCV들을 진급히 섭외^^"
"모든 토목 공사 ALL STOP^^"
"(그나마 배수량이 큰) 안택선의 도면 긴급 제출^^"
임진년 중기만 가면, 티거+판터 만난 셔먼이 GG 치듯 일본해상세력은 줄줄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숨습니다 ㅡ.ㅡ
3. 맺음말 & 기타
어쩌다 보니 조선에 대한 일방적인 옹호 ㅡㅡ가 되어 버렸는데 나름의 역사적 사실과 공부한 사실들 + 인터넷 고수님들의 지식을 바탕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정 못 믿으시겠다면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세요.
아, 조선왕조실록이 있었죠.
한글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기록 시스템입니다. 요즘 현대인들도 기록을 남기기 꺼려하는데 무려 근세 시대에 <왕이 쓰지 말라고 했다>는 기록을 남긴 국가입니다.
제가 봤을 때 국보 1호는 훈민정음, 2호는 조선왕조실록으로 바꿔야합니다 ㅡㅡ;
어쨌든 나름 반박아닌 반박을 했습니다. 왜 조선이 임란 당시까지, <군대가 무너지게된 대표적인 원인>이 된 <제승방략>을 선호했는지, 병자호란 당시 시간을 조금만 더 끌었으면 오히려 청 태종이 인질로 잡힐 뻔했다는 사실 등등도 있지만 일단 1차적으로 위의 상황만 적습니다.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욤(기왕이면 임진왜란으로 ^^;)
첫댓글 가장 큰 이유는 조선이 아마도 '자주적'으로 큰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였다, 즉, 원숭이군과 청군을 물리치지 못했기 때문아닌가 합니다.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자주적으로 당을 물리쳤고 고려는 자주적으로 거란을 물리치고 여진을 침략했으며 몽골에게 40년간 유린당하지요. 그렇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에게 작전권을 빼았겨 질질 끌려다니고 병자호란 때는 청나라에게 항복하지요. 이러한 상황이 근대 이후 민족주의가 발달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조선이 허약해 보이지 않게 되었나 합니다.
오오 청태종이 인질이 될뻔한 얘기는 모르느느데 설명 부탁드리므니더
남한산성을 포위공격해서 인조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당시 정황상 조금만 더 시간을 끌었으면, 지방의 군대들이 결집하여 청태종이 역으로 포위될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은 그닥 높지 않습니다. 일단 조선군의 패인 중 하나가 지방군의 결집-편성을 통한 조직적인 반격의 실패인데, 이걸 막은 가장 중요한 요인이 청군의 교통요지 장악이었어요...-_-; 청군은 수원의 '판교'를 일찍부터 장악하여 지방군 간의 연락과 연합공격을 차단합니다. 일부는 '천안'까지 내려갔고요. 때문에 조선의 지방군은 각개격파...ㅜㅜ
또한 시간을 벌면 좋은 것이 명군의 참전입니다. 실제로 정묘란 때는 명군 3만5천이 후방으로 다가오면서 후금이 강화를 재촉한 전례가 있죠. 근데 병자란 당시의 명은 관외가 다 털린 상황이었고 구원병을 배로 보내야 했는데, 병력편성 중에 전쟁이 끝나버리죠.
왔어도 규모나 전투력은 어차피 시망이고... 청군이 남직례(강소성, 안휘성) 북부까지 털어가도 못막았던 것이 명군인지라...-_-;
역포위는 좀 무리고, 위협을 느낀 청군을 돌려보내는 건 가능합니다. 식량만 넉넉했다면 남한산성을 공략하는건 참 기약없는 이야기고(17세기 군으로 20세기 군을 막아낼 수 있단 말까지 나오는 지형보정...) 교통로 잡고 각개격파로 구원군을 연거푸 막아내고는 있지만(질때도 조선군이 재정비가 필요한 정도의 피해를 입히면서 지죠.) 보급문제도 그렇고, 청도 장기전 치르긴 힘든 상황이니까요.
bookmark// 글쎄요. 우선 과연 청군이 위협을 느끼고 돌아갈만 한 상황이 있을만한 요인 자체가 적지않나 합니다...^^; 국제적으로 명나라는 이미 청에대한 '공격능력'을 거의 상실한 상황이었고, 또다른 위협요인인 '몽골(내몽골)'도 투항과 복속의 패턴을 밟은 다음이었습니다. 병자란 당시 조선에서 동원한 군사의 수가 거의 10만에 달했지만 이미 전투력에서 청의 적수가 못되었고, 기본적으로 '재정비'를 수행할 [지휘부 수립] 자체가 문제였다는 점이 상황을 더욱 암울하게 만들었죠. 의병이 일어나고 하면서 거국적인 저항으로 갈 수도 있겠지만, 딱 "왕이 항복하지 않는 수준"에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게... 거기서 더 버티면 청군은 굶어죽을 상황이라. 인조대 농사환경이 그리 좋지 않은건 잘 알려진 바고, 10만+마필 보급은 전근대시기엔 어떤 군대나 난감하기 그지없죠. 수성전이 언제나 유효한 건 장기적으로 들어가면 적군을 자동적으로 굶게 만드는 게 되거든요. 이걸 극복하려면 갈수록 넓은 지역에 군을 흩어서 계속 현지약탈을 해야 하는데 그게 진행되면 될수록 의외의 패전을 경험할 확률도 올라가고, 초토화된 범위가 넓어지면 질수록 보급에 애로사항을 겪게 되죠. 특히 마필보급은... 보급이 난감해지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게 말이라... 이런 상황을 감수하느니 돌아갔다가 적당히 농사지으면 다시 오는게 낫죠.
청군이 [둔전]을 경영하고, 조선에 눌러 앉아 '행정통치'를 전개할 가능성이 꽤나 있습니다...-_-; 정묘란 당시에도 "한양에 머무르며 농사를 지을 것이다"라면서 위협한 전례가 있었고, 정묘화약을 체결한 후에 조선군이 물러나는 후금군을 공격하자, 이를 빌미로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에 주둔하면서 조선여인을 현지처로 삼고 농사를 지을 채비까지 한적이 있었어요...-_-;; 또한 한인을 통치한 경험이 있었던 청은 조선의 지방관이나 백성들을 회유하면서 통치할 역량도 있었습니다...-_-;;;
3만명이던 정묘호란이야 수확철까지 어찌어찌 버틴다 해도, '10만 이상', '다수 마필', '한겨울' 에 들어온 병자호란의 청군이 둔전을 지어 수확할때까지 버틴다...는건 말 그대로 허황된 이야기죠. 차라리 말이 없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말 한필은 사람의 10배를 먹어치우니 다수의 기마전력을 유지하는 시점에서 청은 단기전을 수행할 수밖엔 없습니다. 말 다 잡아먹으면서 버틴다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행정력으로 둔전을 지으려고 해도 수확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버티려면 한반도 전역의 모든 성과 창고를 털어먹어야 될 판이라...
치킨이 먹고 싶군요.
조선을 까는 공식을 일본에 대입하면 더 찌질하게 까입니다.
이건 왜정때 왜곡,날조한 각종 식민주입을 논파하는 저만의 제한적인 공식이기도 하지요.
100년동안 단련된 군대를 가진 왜군이 200년동안 평화를 누려 사용법을 몰라 총통을 녹여 쓴 나라에게
자는 사람 밟는 식으로 기습했다가 "곧" 골목길에 몰리는 건 100년트레이닝왜군이 약했다는 방증으로도 먹힙니다.
시스템의 위력.
조선은 기본적으로 전쟁이 터지면 지방군이 병력을 모아서 집결시켜두면 한양에서 지휘관을 파견해 지휘케 해서 대응했죠.
이게 내란이나 반란등의 진압에는 유용했지만 외국의 본격적인 침공군 앞에서는 무력했다는게 참...
임진란 초기에 조선최대의 수퍼스타로 각광받던 신립이 이해할수 없는 전투지휘끝에 탄금대에서 격파당한것도 그렇지요. 그에대해선 귀신에 홀렸(...)단 얘기에서부터 긁어모은 군사를 믿지않아 그랬다 상대해야 할 왜군이 너무 많아 서두르다 그랬다. 설이 많지만 아무튼 기본적으로 반란 진압에나 통하는 체제를 조선은 끝까지 바꾸지 않았죠.
아무리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 세운게 조선이라지만 장군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병력따로 지휘관따로 이런식의 군대로는 외국의 정규군을 상대로한 군사작전은 아무래도 무리라는건 당시 사람들도 모를리가 없었는데 이걸 끝까지 유지한 이유를 알수 없더군요.
아뇨 모르니까 임진란때 까지 유지했겠죠 그래서 나중에 방법을 바꿨구요.
지금 우리시대의 군대들이 가진 전략,전술들이 미래에 까지 유지되지 않을 것입니다 꾸준히 바뀌거나
미처 따라가지 못하거나 할것이고 이는 고대부터 현대까지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사 모두에서 이런모습을
보여왔고 앞으로도 계속 나올것이구요.
현재시점에서 우리가 200년 동안 전쟁없이 살고 있다면 지금의 군대전략들이 얼마나 크게 바뀔수 있겠나요.
그리고 제승방략이 제가 고등학생 시절 배웠을땐 단순히 반란진압이나 할려고 한게 아닌걸로 배웠습니다.
먼저 뉴타잎님께서는 임진난 당시 왜 조선이 제승방략 체제였는가를 다시 알아보셔야 겠습니다
비록 이 방법은 실패로서 역사에 남았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여러가지 전쟁방법 중
어떤것이 좋고, 어떻게 하면 좋을것일까 하며 고민했던 당시의 과정을 한번 생각해 보셔야 할듯 합니다.
조선초기 군제개혁으로 진관체제를 만들어 운영하다가 제승방략으로 바꾸고 임진란후 진관으로 되돌아온 뒤 속오군까지 가는 과정을 보면 나름 역사에서 잊혀지지 않기위해 노력한 조선을 볼수있으니 한번 다시 알아봐 주세요.
바로 지금 뉴타잎님이 말씀하신 것에 해답이 있습니다. 조선은 기본적으로 외침보다는 내부의 반란을 더 우려해서 실질적 혹은 형식적 최고 지휘관이 중앙 정부에서 파견나가는 인원으로 선발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실질적 주장인 관찰사 / 병마사 / 방어사 / 조방장 및 사또라고 불리는 목사, 현감, 현령 등등에게 병력을 쪼갰죠.
<당연히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어리석은 선택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직후의 조선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고요. 일본에서 돌아온 강항은 거의 중세 봉권시대 수준ㅡ.ㅡ으로 한 장수가 계속적으로 병력을 잡고 있어야 한다는 일빠?스러운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를 살았던 우리 조상들이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그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기가 절대로 무진장,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먼 미래의 통일된 혹은 북한이라는 실질적 위협세력이 사라진 우리 후손들은 이렇게 욕할지도 몰라요. '어차피 당시 시대적 상황을 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도 적은데 육군을 기형적으로 키울 것이 아니라 해군, 공군, 우주군(???)을 키워야 했다!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어리석다!' -> 가깝거나 혹은 먼 미래의 후손들이 당연히 내세울 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어떻죠?
어떠한 체제나 모순이 존재하면, 그 모순이 <어떻게, 그리고 왜> 존재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어느 정도 질질끌면서 유지해야 했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뉴타잎님 스스로도 위의 글에서 밝히셨듯, 뉴질랜드와 캐나다 사람들이 어리석고 불쌍해서 군사력을 약하게 하고 있는게 아니니까요.
고려시대에 일어난 무신난크리만 보아도 봉건제의 문제점이 확연히드러나는것이고 외적의 침입보다 내부의 분열이 훨씬 더위험하거든요. 당나라 절도사만 보아도 --;;; 중국은 이미 송이후부터 그런 문제점때문에 조선과 비슷한 군제도를 실행하였고 말이지요.
1. 조선의 제1 주적은 여진족과 왜구인데.. 둘 다 규모는 크지 않아서 일종의 선방어 개념으로 진관체제가 유지됩니다.
2. 중종 때 삼포왜란이 터졌는데 이때 동원된 왜구는 무려 5000명 수준이었습니다. 기존의 진관체제하의 선방어 개념으로는 대응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도입된 것이 제승방략이었습니다. 중앙에서 지휘관이 오면 인근 부대를 규합하여 격파하는 거죠..(실제로 삼포왜란 당시 이런 식으로 처리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제승방략 넘기고 이런 대규모 왜군의 내습은 또 없었습니다. -_-;;
3. 사실 고위 지휘관을 지방에 상주시키면 될 문제긴 한데..(정치장교 형태로 대간을 감시로 붙이면 되긴 하고..) 군사 소요가 워낙 없다 보니까 이런 대비 자체를 가지고 말들이 많았습니다. 일부 병마사들은 성쌓고(...) 훈련한다고 대간들이 탄핵하는 수준이었으니까요;;(그런데 장교 없는 조선군이라 이런 훈련 과정 자체는 개판이라;;)
4. 반란을 두려워 했던 것은 맞고 그 때문에 구조적으로 아예 군 기동을 못하게 막아버린 것은 분명합니다. 위수지역에 대한 관리가 지독하게 철저했죠.. 그래도 송보단 좀 낫고..(중앙에서 내려간 고위 지휘관에 의해서 기동 자체는 일단 되니까..) 의도적으로 간부진 양성을 피한 것도 맞습니다.
마지막으로 뉴타잎님 생각보다는 조선군은 의외로 실전 경험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국가간 총력전을 경험해본 적이 전혀 없다는 점이 발목을 잡았죠.. 일본군은 내전 막바지에 이런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히데요시가 말년에 일본 통일한다고 큐슈에 20만 대군 돌린 적이 있었는데.. 이 자체로 굉장한 경험입니다. 실례로 일본군에는 1만 이상을 지휘한 경험을 가진 지휘관(사단장급..)이 20명은 너끈히 나오겠지만 조선에서 이 정도 규모를 지휘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