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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니저 박성혜와 손잡은 배우는 좀체 그녀 곁을 떠나지 않는다. 비결이 뭘까? 김혜수는 한때 충무로를 들썩였던 ‘장희빈 사건’을 예로 들었다. <바람난 가족> 주연 계약을 맺었던 김혜수가 드라마 <장희빈>의 주연을 맡아 두 작품을 함께해나겠다고 하자 영화사가 거세게 반발했던 사건이다. 김혜수가 전하는 매니저와의 당시 마지막 전화가 이랬다. “장희빈 꼭 하고 싶은데 그러면 문제가 될까?” “생각보다 심각해질 수 있어.” “그래도 하고 싶네.” “…알았어. 그럼 해.”
박성혜는 자신이 난처한 처지에 빠질 것을 뻔히 알면서 왜 동의했을까. “혜수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장희빈을 꼭 해보고 싶어했어요. 김혜수라는 배우가 그럴 거 같지 않은데, 어쨌든 배우 평생 꼭 해보고 싶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면 해야지 했던 거죠. <바람난 가족>은 혜수씨랑 잘 어울릴 캐릭터라 생각했고, 영화사와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만 말이죠.”
김혜수는 매니저 박성혜의 비즈니스 감각이 아주 우수한 편은 아니라고 했다. 그러기에는 너무 정직한 성품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자산은 영화에 대한 깊은 애정, 그리고 배우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파트너십이라고 했다(나중에 물어본 박성혜의 넘버원은 <8월의 크리스마스>였다. 그 다음은 무순으로 <반칙왕> <개그맨> <파이란>을 들었다. 겸손한 건지 솔직한 건지 자기 배우의 작품은 내놓지 않았다).
“성혜씨와 계속 일하는 이유는 배우의 본질을 놓고, 이 배우가 진짜로 뭘 하면 좋은지 진지하게 함께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하면 빨리 출세하느냐, 어떻게 하면 빨리 돈을 버느냐가 아니라 배우로서 어떤 아이덴티티를 갖추기를 원하느냐에 충실한 사람인 거죠. 끊임없이 배우로서의 자아를 갖도록 힘을 주고, 또 배우가 영리하지 못한 선택을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믿어줘요.”
박성혜의 무용담을 들어볼 차례다. 최근 스타덤에 오른 황정민과는 어땠을까.
“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보고 같이하게 됐는데 황정민은 배우로서 정말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매니저가 두려울 게 없었어요. 이상할 정도로 그런 느낌이 확 들었어요. 첫 작품이 <로드무비>였는데 좀 무리를 해서 밀어넣었고, 그때 많은 상을 받았어요. 이후 <바람난 가족> <YMCA 야구단> <마지막 늑대> 등 조금씩 조금씩 넓혀갔기 때문에 난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배우가 힘들어했어요. 특히 <바람난 가족> 때. 하지만 그건 배우가 고민해야 할 문제였어요. 저는 작품 들어가기 직전과 직후만 관여하지 촬영 들어가면 일체 간섭하지 않거든요. <너는 내 운명>은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지 그렇게 인기를 얻을 줄은 몰랐어요. 그렇다고 전도연한테 끼워팔기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던데, 알다시피 전도연이란 배우가 그렇게 일하는 배우도 아니고. 도연이가 먼저 정민이 오빠 어떠냐고 그랬거든요. 정민씨는 매니저로서 해피한 경우예요.”
어째 좀 싱겁다. 진짜 무용담은 지진희에게서 나왔다.
“지진희랑은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진희는 배우로 만난 게 아니라 우연한 경우로 만났어요. 사진스튜디오의 어시스턴트를 하고 있었는데 우연히 보고 너무 괜찮아서 배우할래 했더니 안 한다고 단박에 거절하더라고요. 1년 동안 쫓아다녔어요. 한달에 한번씩 스튜디오로 찾아가는 거지. 술 마시면서 아직도 안 바뀌었어, 응 그러면, 그럼 술이나 먹자, 그 다음달에 또 가고. 딱 1년이 되는 날, 2년만 주면 스타로 만들어주겠다는 게 아니라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매력적인 것인지 느끼게 해주겠다고 했더니 그럼 1년 주겠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알고보니 IMF라서 스튜디오가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데 다 유부남이고 자기만 총각이라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시점이었다더군요. 배우의 꿈도 꾸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연기의 연자도 모르죠. 그때 왠지 진희를 알아줄 것 같아서 황인뢰 감독을 만나게 했는데 무척 맘에 들어하면서 무조건 자기가 데뷔시킬 것이라고, 연기 공부도 시키지 말라고 했어요. 2년 가까이 기다리면서 뮤직비디오와 <베스트극장> 단막 정도만 했는데 감독님 드라마가 좀체 진전이 없었어요. 그러다가 다른 감독님의 드라마 <00>의 주인공이 돼 아주 기쁘게 촬영까지 다 마쳤어요. 근데 방영 얼마 앞두고 잘린 거예요. 맘에 안 맞는 것도 있었지만 상대 배우가 모종의 사건으로 사회문제가 되자 진희까지 한꺼번에 날린 거죠. 그 얘기를 들은 날, 지진희한테 여의도로 나오라고 해서 낮 1시부터 술 마시기 시작해서 밤까지 소주 18병을 먹었어요. 실려갔죠. 둘 다. 그랬던 시절이 있는데 이런 얘기 워낙 많아서…. 황정민은 연기를 보고 했다면, 지진희는 그 친구가 갖고 있는 느낌을 가지고 했던 경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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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더스HQ의 이름난 배우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스타성이 강한 경우와 연기로 승부하는 경우. 박성혜 본부장이 발탁한 배우들은 후자에 속한다. 잘생기고 예쁜 외모도 좋지만 사람의 매력이 느껴지는 배우를 우선시하는 맥락과 통한다. 박성혜 본부장은 나흘 뒤, 12년지기인 전도연이 주연을 맡은 이창동 감독의 <시크릿 선샤인> 고사에 참석하러 밀양으로 향했다. 홍익대 대학원 문화콘텐츠 과정의 종합시험을 일주일도 채 남겨놓지 않은 때였다.
9월7일 오후 4시30분 IHQ 회의실. 박 본부장 주재로 ‘스타존’ 회의가 시작됐다. SKT가 싸이더스HQ의 대주주가 되면서 배우와 영화, 드라마 등의 콘텐츠가 모바일, DMB 등 새로운 플랫폼으로 확장될 것이란 예측이 쏟아졌더랬다. 네이트에 유료 서비스되는 스타존 콘텐츠는 자사 소속 배우들의 화보와 동영상, 스타옥션 등으로 운영되는 일종의 파생상품이다. 회의 참석자들은 네이트의 모바일 유저가 1300만명이라는 점을 되새기면서 단순 파생상품이 아닌 미래의 주력상품이 될 수 있는 방안들을 찾고 또 찾았다. 콘텐츠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 배우들의 직접 참여를 원활케 하는 솔루션 문제, SKT와의 마케팅 협조 체제 구축 등을 놓고 1시간가량 논의가 오갔다. 여기서 정리된 콘텐츠의 모범 사례를 다음 매니지먼트 사업본부 회의에서 팀장들에게 먼저 브리핑하고 순차적으로 현장 매니저들을 교육하기로 하고 회의를 마쳤다.
9월8일 오전 11시 IHQ 회의실. 역시 박 본부장 주재로 사업기획회의가 열렸다. 스타존 서비스와 또 다른 종류의 사업 아이템을 구상하고, 구체안을 마련하는 중요한 전략 회의다.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나누고, 단기와 중장기별로 나눠 아이템을 하나씩 점검해 나간다. 파트너가 될 가능성이 있는 기업에 대한 정보와 분석도 주고받는다. 배우 한명 한명의 시간대별 이미지 매핑도 여기서 해야 할 일이다. 박 본부장이 하나씩 정리를 해나갔다.
“손댈 만한 곳은 많은데 어디서부터 할까. 배우는 가급적 괴롭히지 않는 게 원칙이야. …회사 바깥에서도 끊임없이 이야기가 나오는 아카데미 사업은 신인 캐스팅 TFT로 넘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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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두 회의는 이제 매니지먼트가 단순히 배우의 캐스팅이나 일정 관리 수준에 머무를 수 없음을 보여줬다.
“지금의 매니지먼트는 옛날 아날로그 방식에서 디지털로 가는 딱 중간인 것 같아요. 기본적인 매니지먼트 말고 새로운 분야가 계속 들어오는데 그걸 공부하는 동시에 판단해야 하니까 어려워요. 스타존 서비스처럼. 그리고 배우들도 캐스팅 문제뿐 아니라 미래의 총체적인 자산설계를 해주길 원해요. 이 점에선 배용준씨가 큰 자극이 됐어요. 매니지먼트가 다른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아 금융시장에 상장하면서 기업화됐고, 그 뒤를 이어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실행하는 건 저 같은 사람인데 어려움이 많아요. 외국의 윌리엄 모리스처럼 변호사 집단이 전문적으로 구성돼 있는 것도 아니고. 아마 매니지먼트 업계 사람 모두가 갖고 있는 숙제일 거예요. 주먹구구식 도제식 매니지먼트였는데 거기서 벗어나라고 시대가 압박하고 있으니까. 크리에티브도 있어야 하고, 시장을 보는 산업적 머리도 있어야 해요. 지금 이걸 못 쫓아가면 도퇴될 수밖에 없는 시기죠.”
박성혜 본부장은 최근 ‘나라에서 녹을 먹는 분’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연예산업을 키우기 위해 국내 매니지먼트의 실태를 조사해서 규제할 것과 지원할 것을 정리한 법을 준비 중이라며 외국의 경우까지 2년째 연구 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한국형 매니지먼트는 매니지먼트와 에이전시 기능이 법으로 분리된 미국과 달리 두 역할이 혼재돼 있다. 정부 관계자는 이 기능의 분리 가능성과 더불어 에이전트의 면허화를 검토안의 하나로 놓고 있었다. 이래저래 매니지먼트 안팎의 변화가 급물살을 타고 있는 것이다. 박성혜 본부장이 바쁜 일정을 쪼개 대학원의 문화콘텐츠 석사과정을 공부하는 것이나, 배우보다 적게 자면서 배우를 돌보는 후배 매니저 가운데 창의적으로 자기 개발을 하고 아이디어를 내는 친구를 보면서 미래의 매니저를 가늠하는 건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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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1일 밤 11시 학동사거리 부근의 지하 술집. 호화찬란한 거리에 이런 허름한 집이 있었나 싶은데 초무침한 문어와 삭힌 홍어 맛이 일품이다. 이명세 감독이 찾아냈고, 박성혜 본부장, 김병철 ‘더 맨 매니지먼트’ 대표(강동원, 이천희 등 남자배우만 8명을 두고 있다) 등의 술친구가 단골로 닦아놓은 집이다. 김병철 대표는 허세 대신 친근하고 겸손한 스타일로 충무로의 신임을 얻고 있는 중이다. 박성혜 본부장과 친하게 지낼 기질이 금방 느껴졌다. “누나가 있어 외롭지 않아요.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얼큰하게 술이 오른 김 대표에게 코멘트를 요청하자 말을 아꼈다. 사실 이건 최선을 다한 코멘트일 것이다. 박성혜 본부장은 매니저의 위기가 홀수차로 닥쳐온다고 했다.
“1년차에 관두는 경우는 이게 연예인하고 다니니까 굉장히 재밌는 줄 알고 했다가 1년 지나고 보니까 진짜 힘들고 빛도 안 나고 여기서 뭐하나 하는 생각에 그만둬요. 3년쯤 되면 매니지먼트가 뭔지 좀 아는 것 같아, 그러니까 욕심도 생기고 여러 가지 생각이 생겨서 이직하거나 그만둬요. 5년차는 자기의 욕심이나 꿈 때문에 자기 회사를 차리죠. 제 고비는 도연이가 잘 아는데, 7∼8년 이후에 심각하게 왔어요. 늘 배우를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그리고 크리에이티브한 사람들을 주로 만나다보니까 내가 너무 없는 것 같고, 누구누구의 매니저 박성혜로만 있고 인간 박성혜는 없다보니까, 생활도 일 위주로 돌아가니까 친구도 없고. 내가 잘사는 건가 싶어 우울증도 오고. 2년에 한번씩 꾸준히 오고 있어요. 지금은 오히려 그 단계를 약간 초월해서 감사하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지만요.”
영향력 큰 매니저가 됐지만, 스크린쿼터 시위에 나가면 ‘누구세요?’ ‘매니전데요’ ‘줄 바깥으로 나가주세요’라는 대접을 지금도 받는다. 매니저에게는 그림자 같은 외로움이 숙명처럼 따라붙는다. “우리는 영화인도 아니고, 방송인도 아니고, 연예인도 아니고”란 말처럼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제3자적 존재라는 걸 문득문득 깨달으면서. 그러니까 김 대표의 “누나가 있어 외롭지 않다”는 말은 최대의 찬사이자 존경의 표시일 것이다. 하필, 취재 일정 대부분의 시간 동안 머리를 질끈 묶고 다니는 바람에 볼 수 없었던 사자갈기 머리가 이날 제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