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 맹사성(孟思誠)
봄
江湖(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興(흥)이 절로 난다. 濁 溪邊(탁료계변)에 錦鱗魚(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閒暇(한가)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여 름 江湖(강호)에 녀름이 드니 草堂(초당)에 일이 업다. 有信(유신)한 江波(강파)는 보내나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늘해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가 을
江湖(강호)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잇다. 小艇(소정)에 그물 시러 흘리 띄여 더뎌 주고, 이 몸이 消日(소일)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겨 울 江湖(강호)에 겨월이 드니 눈 기피 자히 남다. 삿갓 빗기 쓰고 누역으로 오슬 삼아, 이 몸이 칩지 아니해옴도 易君恩(역군은)이샷다.
[1]강호에 봄이 찾아 드니 참을 수 없는 흥취가 저절로 나는구나 / 막걸리 마시며 노는 시냇가에서 잡은 싱싱한 물고기가 안주로 좋구나. / 이 몸이 이렇게 한가롭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이시다. [2] 강호에 여름이 찾아드니 별채에서 할 일이 없다 / 더위를 잊게 해 주는 듯 미덥게 느껴지는 강물결은 시원한 바람을 보내주는구나. / 이 몸이 이렇게 서늘하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이시다. [3] 강호에 가을이 찾아드니 물고기마다 살이 쪄 있다 / 작은 배에 그물을 싣고 물결 흐르는 대로 띄워 던져두고 / 이 몸이 세월을 재미있게(고기잡이) 보낼 수 있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이시다. [4] 강호에 겨울이 찾아드니 눈 깊이가 한 자가 넘는구나 / 삿갓을 비스듬히 쓰고 도롱이로 옷을 삼아 입으니 / 이 몸이 춥지 않게 지내는 것도 임금님의 은혜이시다.
[창작 배경]
작자는 좌의정의 벼슬에까지 오른 재상으로, 청렴결백한 생활로 많은 사람의 우러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 작품은 말년에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가 한적한 전원 생활을 지낼 때 지은 것으로, 임금의 은혜를 생각하는 내용을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수씩 노래하였다. 맹사성(孟思誠)
1360(공민왕 9)∼1438(세종 2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자명(自明)·성지(誠之), 호는 동포(東浦)·고불(古佛). 아버지는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희도(希道)이며,
최영(崔瑩)의 손서(孫淚)이다. 온양 출신. 1386년(우왕 12)에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이 되었다. 이어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랑(起居郎)·사인(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수원판관이 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태조 때 예조의랑(禮曹議郎)이 된 이래, 정종 때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가 되었다. 태종 초에 좌사간의대부(左司諫議大夫)·동부대언(同副代言)·이조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407년(태종 7)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이 되어, 진표사(進表使)로 명나라에 가는 세자를 시종관(侍從官)으로서 수행하여 다녀왔다. 1408년 사헌부대사헌이 되어 지평(持平) 박안신(朴安信)과 함께 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태종의 딸 慶貞公主의 부군)을 왕에게 보고하지 않고 잡아다가 고문하였다. 이 일로 태종의 큰 노여움을 사서 처형될 뻔했으나 영의정 성석린(成石璘)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1411년 다시 기용되어 판충주목사로 임명되었다. 그러자 예조에서 관습도감제조(慣習都監提調)인 그가 음률(音律)에 정통하므로 선왕(先王)의 음악을 복구하기 위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여 바른 음악을 가르치도록 건의하였다. 그 이듬해에도 그가 풍해도도관찰사(淵海道都觀察使)에 임명되자, 영의정 하륜(河崙)이 음악에 밝은 그를 서울에 머물게 하여 악공(樂工)을 가르치도록 아뢰었다. 1416년 이조참판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생원시에 시관(試官)이 되어 권채(權採) 등 100인을 뽑았으며, 왕이 친림한 문과 복시에 독권관(讀卷官)이 되었다. 그 해 노부(老父)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을 원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역마(驛馬)와 약을 하사받았다. 이어 호조판서가 되어서도 고향의 노부를 위해 다시 사직을 원했다. 그러나 왕은 그를 충청도도관찰사로 삼아 노부를 봉양하게 하였다. 1418년 공조판서가 되어 또다시 노부의 병간호를 위해 사직하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19년(세종 1) 이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421년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를 역임하고 1427년에 우의정이 되었다. 그는 우의정 재임시에 ≪태종실록 太宗實錄≫ 편찬 감관사(監館事)로서 감수하였다. ≪태종실록≫의 편찬이 완료되자 세종이 한번 보고자 하였다. 그러자 그가 “왕이 실록을 보고 고치면 반드시 후세에 이를 본받게 되어 사관(史官)이 두려워서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 하고 반대하니 세종이 이에 따랐다. 1432년 좌의정에 오르고 1435년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나라에 중요한 정사(政事)가 있으면 반드시 그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와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 나아가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히고, 돌아갈 때에도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효성이 지극하고 청백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 : 봉급으로 받은 쌀)로 하였다. 출입할 때에는 소(牛)타기를 좋아하여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영의정 성석린은 선배로서 그의 집 가까이에 살았는데, 매번 그의 집을 오고 갈 때는 그 집 앞에서 말을 내려 지나갔다. 그는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다. 품성이 어질고 부드러웠으나, 조정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할 때에는 과단성이 있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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