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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으로 이동하는데 근 5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버스는 독일 최첨단을 자랑하는 벤츠였다.
버스는 소음이 전혀 없었을 뿐아니라 기존의 차량보다 시야가 훨씬 확보되어 관광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기사 또한 충직하고 성실 했을 뿐 아니라 시종 미소를 지으며 소임을 깔끔하게 완수하였기 때문에 동요 되었던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우리를 인천국제공항에서부터 인솔한 가이드 김 진희님은 롯데관광여행사에서 10여년 이상 근무한 베테랑으로 여행에 대한 식견과 경험이 누구보다 탁월했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했기 때문에 학생들을 지도하거나 사람을 다루는 것이 무엇보다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인솔 가이드 김 진희님은 창밖의 사소한 것까지도 꼼꼼하게 챙겨 양파껍질을 하나하나 벗겨가듯 베일에 감춰진 역사적인 것과 자연 절경을 소개하고 안내해주었다.
그럴때마다 나는 환호성을 지르고 때로는 감동을 받았다.
마리엔 광장
마리엔광장 마리아의 탑
뮌헨 신시청사
창밖의 이국적인 자연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었는데 버스는 독일의 자동차전용 고속도로인 Autobahn(아우토반)을 달리고 있었다.
도로는 편도 2차선 이거나 3차선이었다.
그런데도 도로는 소통이 원활하여 신나게 달릴 수 있었다.
도로 조건이 특별하게 좋은 것도 아니었다.
우리나라와 비슷했다.
그런데도 소통이 잘되고 있었다.
마리엔광장에서 멧돼지 입을 만지다.
세계적인 맥주집 뮌헨시에 있는 호프브레우하우스
성 미카엘 교회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복합적인 것일 수도 있겠으나 도로의 차선 마다 이동하는 차량이 속도를 다르게 제한을 받고있었다.
이것도 모든 도로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아우토반은 확실한 것 같았다.
1차선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은 무한 질주를 할 수 있었다.
단 1차선 도로를 달리다가 후행차량이 뒤따르면 선행차량은 재빨리 2차선 도로로 이동해야 하였다.
후행차량이 마음껏 달리도록 길을 터주기 위해서였다.
잘츠부르크시내
하늘은 전선이 지상은 사람이 접수하다.
잘츠부르크 시내 모습
우리나라에서 처럼 1차선 도로에서 느긋하게 달릴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원활하게 소통된 아우토반 도로 상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시원하게 뮌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갑자기 도로가 정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1km 이상 차량이 늘어서서 거의 기어가다 시피 하고 있었다.
무한질주를 줄길 수있다는 아우토반에서 달리는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상황을 알고보니 도로공사 때문이었다.
미라벨 정원
“Sound of Music” 이 촬영되었던 곳
독일 아우토반에서도 도로공사 중엔 어쩔 수 없었다.
잠깐동안 지체 되기는 하였으나 공사현장을 빠져나온 버스는 뮌헨시로 다시 질주하기 시작하였다.
주위 이정표를 바라보니 뮌헨시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로에 차량이 점점 증가하고 있었다.
늦은 밤인 데도 차량은 도무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이전 공사현장에서 처럼 도로가 다시 정체되기 시작하였다.
차선도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인천국제공항에서 프랑크푸르트 마인공항까지 12사간이 소요 되었다.
다시 프랑크푸르트에서 뮌헨시까지 5시간 30분이 소요되는 등 오늘 하루의 일정때문에 온몸이 나른하고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영화 Sound of Music에서 마리아가 도레미송을 불렀던 곳
뒷편에 호엔잘쯔부르크 성이 보였다.
미라벨 정원, 정원수의 화려한 탈바꿈
뮌헨시에 도착한 것은 독일 시간 밤 12시가 넘어서였다.
눈꺼풀이 뒤틀리고 피곤이 엄습해 와 뮌헨 야경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 회사 건물이 눈에 띄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지도가 세계적으로 높기때문에 우리나라 현대∙기아자동차회사와는 분명 다를것이라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늦은 밤인 데도 회사 건물에 불빛이 번쩍거렸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다.
화려하고 빼어난 미라벨 정원
외양으로 보아서는 현대∙기아자동차회사와 별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서민 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무엇때문에 이들 회사가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기술인 것 같았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나라다.
때문에 독일의 기술은 세계를 압도하였다.
이러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차와 미사일을 제조하였다.
이것을 시동할 수있는 핵심 기술이 바로 엔진이었다.
독일은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디젤잠수함과 강력한 전차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그당시 수많은 무기가 만들어졌으나 세상에 발표되지 않은 무기도 수천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지금도 자동차 중에 가장 최고라고 할 수 있는 BMW,아우디,벤츠 등은 모두 독일브랜드다.
최강 전차부대를 이끌었던 기술력으로 자동차를 만들었니 최강자동차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세계에서 몇 안되는 자동차 생산국이다.
그러나 끝없는기술력 갱신 없이는 자동차 생산국가 대열에서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다
모차르트생가, 지금은 박물관으로 활요하고 있다.
버스는 어느덧 숙소인 Atlas Hotel안으로 들어갔다.
아침 식사 후 곧바로 바이에른 주 주도인 뮌헨 시로 이동했다.
시내를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뮌헨은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의 주도이다.
바이에른 주는 알프스 산지에 가까우며 시내는 이자르강이 흐르고 있다.
이곳 바이에른 주의 주도 뮌헨은 베네딕트 16세가 수도한 베네딕투스회를 기원으로 성립된 도시다.
1157년 바이에른 공작이던 하인리히 사자 공이 수도사 들에게 잘츠부르크로부터 이자르강에 이르는 곳에 시장을 개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였다.
이듬해 이자르강을 건널 수 있는 다리가 건설되고 시장 주위로는 성이 구축되었다.
1180년 바이에른 공국을 계승한 비텔스바흐 가문은 1255년 뮌헨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 가문 출신으로 최초로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인물은 루트비히 4세였다.
그에 의해서 국가 규모가 크게 확장되고,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선 제후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되었다.
도플러생가
잘츠부르크를 관통하는
잘자흐 강
그러나 구교와 신교 간의 종교전쟁인 30년전쟁으로 한때 구스타브 2세 휘하의 스웨덴군에게 점령 당하고 1634년에 전염병인 페스트가 창궐하여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하고 말았다.
1825~1848년까지 재위해 있던 바이에른 국왕 루트비히 1세는 오늘날의 뮌헨을 기획하고 탄생시켰다.
그가 선임한 건축가 들에게 공공 건축물을 통해서 뮌헨의 상징적인 모습을 살리도록 지시하였다.
그후 19세기에 종교적 색채가 짙은 오늘날의 도시로 모습이 정착되어 갔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원을 받은 신교도 들도 로마가톨릭의 도시라 할 수 있었던 이곳에서 처음으로 시민권을 획득하였다.
1854년 10만 명에 불과하였던 인구는 1900년에 50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어 즉위한 루트비히 2세는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후원 함으로써 음악과 무대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기도 하였다.
비텔스바흐 왕조는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에 루트비히 3세가 퇴위 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잘츠부르크시의 최대 번화가 게트라이데
게트라이데 거리
그 후 뮌헨은 우익 정당들의 온상이 되었다.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치스당에 가담하여 지도자가 되었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1923년 바이에른 당국에 저항하여 폭동을 일으키려고 모의하였던 맥주 창고는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정치적 기반 이었던 뮌헨시가 연합군의 공습을 받지않았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결국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공습을 받아 뮌헨시 절반 이상의 건축물이 파괴되고 말았다.
때문에 과거의 온전한 건물은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뮌헨시는 변화를 시도한 것 같다.
구시가지는 기업 활동의 중심지로 점차 탈바꿈해 갔다.
그러나 아직도 남아 있는 건축물 가운데는 7개의 성문 중 카를스, 젠들링거, 이자어 등 3개가 남아있는데 14세기에 세워진 건축물이다.
게트라이데 거리
모차르트 생가
그외 중세의 건축 물로 뮌헨대성당, 프라우엔교회, 구시청사 등이 있었다.
주변에 1169년 건립된 장크트페터성당도 있었으나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된 것을 최근에 복원한 것이었다.
또한 과거 무기고였던 건물은 2016년 현재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이들 중세 건물 이외에도 바로크와 로코코 양식의 건축물이 먼발치에서 눈에 띄었다.
뮌헨시는 마리엔 광장을 중심으로 관광명소가 몰려있었다.
광장에 수호신 마리아의 탑이 서있었고 개성적인 의류나 액세서리 따위를 취급하는 비교적 작은 규모의 부티크와 레스토랑이 밀집되어 있었다.
마리엔 광장은 뮌헨 여행의 핵심지가 되는 곳으로 자동차가 다니지 못하는 보행자 구역으로 획정되어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부근에 뮌헨 신 시청사, 뮌헨 프라우엔 교회 등 많은 볼거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카페와 레스토랑, 쇼핑 센터도 많았다.
게트라이데거리
잘츠부르크 대성당
프라우엔 교회는 붉은 색의 두 탑과 원형 지붕이 눈길을 끌었으며 85m 높이의 탑과 종루의 특수 장치, 인형, 시계 등이 미적 감각을 더 강화시켰다.
겉모습이 약간 검붉은 색깔을 띠고 있어 수백 년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100여 년의 비교적 짧은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신 시청사 탑 에서는 뮌헨의 아름다운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다볼 수 있었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유로를 지불하고 보라는 가이드의 말에 한사람도 귀를 기울 이지 않아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중앙의 종루 에는 독일 최대의 특수장치 인형시계인 글로켄슈필이 매일 오전 11시에 10분간 작동하며, 5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정오 12시와 오후 5시에도 작동한다.
오전 11시가 되자 조그마한 인형 들이 출연해 빌헬름 5세의 결혼식 중에 실감나는 기마 전이 한바탕 벌어졌다.
그후 1517년 페스트가 만연해 외출금지가 되었을 때와, 페스트가 없어짐을 알리고 사람들이 이를 기뻐하며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 등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해 나의 시선을 끌었다.
잘츠부르크 성당 내부
옛 바이에른 왕가의 궁전이었다가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 중인 레지덴츠 궁전은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등 다양한 양식으로 장식된 100여 개의 방에 미술품과 보석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다른 볼거리로는 유명 미술관인 알테 피나코테크 등이 있었으며, 그외 관광 명소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BMW의 박물관, 영국정원 등이 있었다.
뮌헨 시도 잘츠부르크 시처럼 맥주가 명물이었다.
맥주축제인 '옥토버페스트'가 매년 9월에 열리고 있었다.
옥토버페스트는 10월을 뜻하는 '옥토버(Oktober)'와 축제를 뜻하는 '페스트(fest)'의 합성어로, 1810년 바이에른 왕국의 빌헬름 1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에서 기인되었다.
맥주가 물값 보다 저렴 하다는 말은 대한민국에서도 많이 들었다.
실제 이것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을 것 같아 관심을 놓고 있었으나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있는 호프보레우하우스를 지나칠 수 없었다.
주교관 건물
모차르트가 탄생한 잘츠부르크시로 이동했다.
시간은 대충 1시간 30분이 소요 되었으나 가는 곳마다 자연경관이 나를 감탄하게 하였다.
맨 먼져 도착한 곳이 “미라벨 정원”이었다.
미라벨 정원은 영화 “Sound of Music”에서 여주인공 마리아와 아이들이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이었다.
정원안으로 들어갈 대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으나 정원 내부 깊숙이 들어갈수록 나를 매료시켰다.
깜찍하게 단장되어 있는 정원이 중앙의 분수대를 중심으로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A4용지를 양쪽으로 접어 놓은 것과 같았다.
이러한 구조를 바로크 풍 양식이라 한다.
플라타너스 나무 또한 어린 학생들을 이발해놓은 것과 같았다.
이러한 조경이 우리나라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어서 정감이 갔다.
이렇게 아름답고 깜찍한 정원에서 영화 “Sound of Music” 을 촬영한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모차르트 초콜릿으로 유명한 집
미라벨 정원은 잘츠부르크 신시가지의 미라벨 궁전 앞에 펼쳐져 있는 정원으로, 중앙 역에서 라이너슈트라세를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오른쪽에 있었다.
미라벨 궁전은 1606년 볼프 디트리히 대주교가 사랑하는 여인 살로메를 위해 건조했다.
당시는 알트나우라고 작명 하였으나 후임자인 마르쿠스 시티쿠스 대주교가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정원은 1690년 바로크 건축의 대가인 요한 피셔 폰 에를라흐가 조성하여, 18세기에 건축가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개조 하였다.
그러나 1818년 화재로 거의 파괴 되어버리고 옛모습은 산재된 석조물 몇개만 볼 수 있었을 뿐 거의가 현대적으로 다시 복원된 모습 뿐이었다.
과거에는 정원이 궁전에 소속되어 있어 일반인들은 관람은 엄두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는 완전 개방되어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있었다.
정원은 당시 유행했던 바로크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시대적인 요구를 반영하여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분수와 연못, 대리석과 조각물들이 당시를 연상하게 하였다.
잘츠부르크시에서 가장 작은 집
중앙분수 주위에는 1690년 모스트가 그리스 신화 속 영웅을 조각한 작품이 늘어서 있었고 그 옆에는 유럽의 많은 바로크 예술 품들을 전시해 놓은 바로크 박물관이 있었다.
그리고 정원 서쪽에 1704부터 1718년까지 만들어진 극장이 있었으며 북쪽 문 앞에는 정교한 청동조각으로 장식된 패가수스 분수도 있었다.
미라벨 궁전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음에도 콘서트가 자주 열리는 곳이었다.
이곳 잘츠부르크 출신인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그 중심에 있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1756년 1월 27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그에서 태어났다.
4세 때 건반악기 지도를 받고 5세부터 때 곡을 작곡하여 신동이란 명성을 얻었다.
6세때부터 여행을 시작하여 1762년 궁정이 있는 뮌헨에서 연주를 하고, 다시 비엔나로 건너가 마리아테레지아 여황제 앞에서 연주를 했다.
8세 때 바이올린 소나타와 최초의 교향곡을 작곡 하였으며 3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 기간 동안 교황으로부터 황금박차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1777년 까지는 주로 잘츠부르크에 머물며 미사 곡과 사교적인 작품을 작곡하였다.
중∙고등학교 시절 고전주의 음악가에 대하여 학습 했던 기억을 더듬어보려했으나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하이든, 모차르트 등을 제외하고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들이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고전파”라 이름 하였으며 모차르트를 일컬어 천재 음악가 이며 신동이라고 설명했던 음악선생님이 머리에 떠오를 뿐이었다.
잘츠부르크시를 방문하니 주위는 온통 모차르트 일색이었다.
명불허전이라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같았다.
이러한 모차르트도 삶의 말기는 불운 했던 것 같다.
1791년 이후 과로가 겹쳤기 때문이다.
진혼곡의 주문을 받은 것이 그 해 7월이었다.
그보다도 9월 초에 프라하에서 상연해야 할 2막의 오페라 “티투스 왕의 자비”를 18일 동안에 완성해야 했다.
모차르트가 세례받은 곳
이어서 9월 30일 초연의 “마적”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무리가 그의 목숨을 앗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2월 5일에 숨을 거두고, 눈이 펑펑내리는 이튿날에 빈민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 장지 에는 매장 인부 이외는 아무도 없었다.
적막과 고요함가운데 그가 작곡한 선율만 쓸쓸하게 흐르고 있었다.
인생의 허무 함을 표현할 때 흔히사용하는 말이 “공수래 공수거”다.
모차르트의 경우는 정말 들어 맞는 것 같다.
인간은 우주의 티끌에서 비롯되었다.
죽움이 삶의 연장이지 끝은 아니다.
따라서 슬퍼할 것도 없을 것 같다.
원래대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죽지 않고 모든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었다.
그의 경쾌한 음악은 세계 인들을 감동시키고 가는 곳마다 그를 찬양하고 있었다.
모차르트가 자주 다녔던 곳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궁전 내 대리석 홀에서 대주교를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바이올린 선율에 심취되어 더욱 심연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인간의 모든 위계 질서가 무너지고 오로지 사랑만 존재할 뿐이었다.
인간과 영혼, 천사들이 나란이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때로는 장단과 고저의 선율이 관중들의 정곡을 찌르기도했으나 다시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선율은 은은하게 흐르고 있었다.
나의 가슴이 뛰기 시작하였다.
모차르트가 나의 가슴 속에도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 마리엘 궁전에서 지금도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이 연주되고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가장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나자 꽃 장식 마차를 탄 주인공이 시내를 돌고 있었다.
꿈같은 도시의 모습이었다.
모차르트도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어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는 중세와, 근대, 현대가 공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라벨 정원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여주인공 마리아가 아이들과 '도레미 송'을 불렀던 곳이다.
이 아름다운 정원 미라벨을 뒤로 하고 모차르트 생가로 이동했다.
모차르트가 생가를 떠나 잠시 머무르기로 했던 노란 집이 보였다.
현재는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나 건물 뒤에 있는 대학광장에서 농부들이 직접 재배한 꽃, 약초, 채소, 과일 등이 거래 되고 있었다.
옛 모습을 그려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그가 걸었던 길은 상상해 볼 수 있었다.
스타츠교를 건너 게트라이데 거리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골목골목 사이에 수많은 인파들이 장시진을 치고 있었다.
파도처럼 인파를 따라 골목 사이를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쯤 걸어 가고 있었는데 게트라이데 거리가 나타났다.
게트라이데 거리는 잘츠부르크 시내 중심인 슈타츠 다리를 지나 동서로 뻗어 있었다.
도시의 상징인 호헨잘츠부르크성을 향해 아름다운 쇼핑 가를 이루고 있었으며 거리의 양쪽은 보석가게, 꽃집, 옷가게 등과 레스토랑, 커피숍 들이 “모차르트”라는 이미지를 내걸고 무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이 게트라이데 거리를 따라 대성당으로 걸어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는 것이 잠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선천적인 자질도 있었으나 노력과 환경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거리를 따라 올라가면 호헨잘츠부르크성이 있다.
여기서 다시 아래를 내려다보면 그림같은 미라벨 정원이 있다.
이 아름다운 자연을 감상하면 자연적으로 영감이 떠오를 것도 같았다.
게트라이데 거리의 건물마다 독창적인 수공 간판이 걸려서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간판은 가게의 정체성을 철에 새긴 예술적인 수공 간판이었다.
절 처마끝에 달려있는 풍경처럼 은은하게 소리가 나지는 않았으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나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게 만들었다.
이곳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쇼핑거리가 된 것은 모차르트가 일조 하기도 했으나 멋지게 만들어진 수공 간판이 아닌가도 싶었다.
중세는 학문의 암흑 시대라 할 수 있었다.
종교철학외 다른 학문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맹 율이 최고조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거의 대다수 사람이 글을 읽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상인 입장에서는 가게의 인지도를 높여야 하였다.
그래서 글씨 대신 판매하는 상품을 직접 그렸다.
우산 가게는 우산을 시계 가게는 시계를 새겼다.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었다.
커피집은 커피의 향이 그윽한 잔을 그려 놓았다.
이러한 철제 수공장식은 200년 이상이나 된 것도 있으며 거리 분위기에 맞추어 현대의 패스트푸드 상점들도 철제간판을 매달아 놓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수공 간판만 전문적으로 수리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뮌헨 호프브레우하우스에서
게트라이데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모차르트 생가가 눈에 띠었다.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모차르트 생가는 1756년 1월 27일에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태어난 집으로,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번화한 게트라이데 거리9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모차르트는 12세기에 지어진 이 건물 3층에서 태어나 17세이던 1773년까지 살았다.
1917년 국제모차르테움협회에서 인수한 후 모차르트 기념관으로 사용 중이며, 전시 품들을 통해 당시 중산층의 전형적인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명소로, 1층에는 모차르트가 사용했던 침대, 피아노, 바이올린, 자필 악보, 서신 등이 있고, 2층에는 유명한 오페라 “마술피리”를 초연할 당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소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3층과 4층은 모차르트의 가족들과 잘츠부르크에서 생활하던 당시의 모습을 각각 소개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모차르트 CD와 각종 기념품을 파는 기념품 판매점과 카페가 있었으며 관람시간까지 상세하게 적어두고 있었다.
다시 잘츠부르크 대성당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은 1779년부터 모차르트가 오르간을 연주 했던 성당으로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은 성당 이기도 했다.
17세기에 세워져 가톨릭 전파에 큰 역할을 했던 역사적인 성당 이기도 하며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영세를 받았다.
이곳에서 모차르트는 어린시절 미사에 참석하여 파이프 오르간과 피아노로 연주를 했다.
심지어 그의 몇 작품이 이 곳에서 초연되는 등 모차르트와 인연이 깊은 곳이었다.
대성당은 744년 창건되어 1598년 대 화재로 소실된 후 1655년에 복원되었다.
16세기 말 대주교였던 볼프 디트리히는 잘츠부르크를 ‘북쪽의 로마’로 만들기 위해 레지덴츠와 대성당 개축에 착수했다.
잘츠부르크 대성당을 로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과 필적할 수 있도록 거대한 규모로 건설하려 하였다.
두 건물 모두 완성을 본 것은 2대 후의 대주교인 팔리스 로드론 때인 1655년 이었다.
외관은 밝은 대리석으로 치장해 단조로우 면서도 우아한 느낌을 주었고 건물 양끝에 있는 높이 80m의 탑은 좌우로 대칭을 이루며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내부는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하얀 대리석과 벽화로 장식되어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모차르트”라는 이미지는 오스트리아에세 모든 것을지배하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사람들에게는 특히 더했다.
그래서 모차르트의 이미지가 식품까지 점령하고 있었는데 그대표적인 곳이 모차르트의 이름을 내건 초콜릿가게였다.
외부는 조그마한 가게로 보였으나 엄청 많은 사람들이 가게 앞에서 줄을 서고 있었으며 가게 앞 광장에 별도로 의자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내가 바라본 가게 앞은 아주 작고 허름하게 보였다.
그러나 내부는 그렇지 않았다.
이렇게 초라하게 보인 가게가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이었다.
처음 가게를 개설한 사람은 1884년 파울 퓌르스트다.
슈타이어마크에서 잘츠부르크로 이사와 작은 제과점을 차린 것이 그 시초였다.
수제 초콜릿을 만들어 유명해진 그는 190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모차르트 초콜릿’으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14년 베를린의 잼 공장 파스벤더가 기계로 만든 모차르트 초콜릿을 내놨고 몇몇 독일 회사가 뒤를 이었다.
퓌르스트는 법원에 소송을 냈다.
그러나 효력이 없었다.
처음 개설 했을 때 특허 등록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퓌르스트 제과점은 은박지에 싸서‘오리지널 잘츠부르크 모차르트쿠겔’을 가내 수공업 형식으로 소량 생산하고 있었다.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맞았던 2006년 ‘모차르트 해’는 무려 200만 개를 팔았다.
예년에 비해 60%가 신장된 것이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의 미라벨 등 기계로 만들어 내는 대형 회사와는 수입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헤이즐럿 누가 크림을 입혔으나 지금은 짙은 초콜릿을 발랐다.
이 좁은 지역에 모차르트 이름을 내건 초콜릿 회사 만도 자그마치 네개나 되었다.
어디 초콜릿 뿐인가.
소시지, 맥주잔, 손목 시계, 요구르트, 인형, 밀크셰이크, 머그컵, T셔츠, 케이크, 와인, 맥주, 골프공, 심지어 브래지어까지 ‘모차르트 상품’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잘츠부르크는 아예 모차르트 기념품만 만들어 판매하는 ‘모차르트란트’라는 회사가 있다.
잘츠부르크 공항이 ‘모차르트’란 이름으로 바낀지 꽤 오래되었다.
근처 스키장 이름도 ‘아마데 스포츠 월드’라고 들었다.
모차르트의 이름인 ‘볼프강 아마데우스’에서 따온 것이다.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나 ‘음악의 도시’ 비엔나로 이사 갔으나 지금도 고향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모차르트의 브랜드 가치는 가격으로 얼마나 될까?
그 가치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거의 오스트리아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