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50세, 일과 사랑 그리고 로망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 시대가 바뀌었어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50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현실이다. 본지 인터뷰에 응한 여성 50인도 신체의 변화가 가져온 크고 작은 충격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 이상 그네들의 사랑과 열정을 막지 못한다. 2009년 현재, 만 나이 혹은 한국 나이로 50을 맞은 그들은 보다 성숙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자신 앞에 펼쳐진 새로운 삶에 조용히 도전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한 흰머리, 불규칙해지거나 영원히 멈춘 생리, 침침하고 뻑뻑해진 눈, 거울 속의 탄력 잃은 얼굴과 몸매…. 그녀들에게 50세 문턱의 높이를 가장 실감케 하는 건 역시 몸이다. 그동안 별탈 없이 받아왔던 건강검진에서 혈압에 대한 경고를 받고(김정희), 동기 모임의 주요 화제가 어느새 자녀교육 등에서 건강문제로 바뀌어(조은영) 있었다. 또 커피를 마시고 난 뒤 잠이 안 와 괴로워하다가(이성미), 높은 굽 구두를 신발장 깊숙이 밀어넣으며(권은정), 쉰이란 나이를 문득문득 느끼기도 한다. 직장에선 직원들에게 했던 말을 자꾸 반복하거나 같은 걸 되풀이해 물어보게 될 때(고영희), 혹은 자식 같은 연령대의 사람들을 업무로 만날 때(최선희)도 "내가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부쩍 자란 자녀들의 모습도 세월의 흐름을 느끼게 만든다. "아이를 (우리 나이로) 마흔에 낳았기 때문에 40을 더하면 딱 내 나이"라는 송옥숙씨는 "아이가 열 살이 됐으니 내가 쉰이란 건 알겠는데 아직도 와닿지 않는다"며 웃는다. 누군가 물어보거나 서류에 기입해야 할 때야 비로소 '50이란 숫자'를 인식하는 이들조차 급격히 떨어진 체력과 건강이 걱정되는 것만큼은 여느 동년배들과 다를 바 없다.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몸에 좌절을 느끼기도 하고(유경), 아프면서 너무 오래 살까 봐 불안하기도 하다(홍선주). 흐려진 기억력(김진형·박경숙·손애리) 때문에 벌써부터 치매 걱정까지 생긴다.
남편이나 부모·시부모 등 가족의 건강 역시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관심사다(권은정·김화미·이동연·이연주). 지내온 시간보다 남은 시간이 적다(곽정숙)는 생각이 부쩍 드는 시기라서 그런지,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 대한 걱정도 많다. 이성미씨는 "어머니가 46세에 돌아가셔서 46세가 되는 순간부터'엄마보다 더 오래 살았네' 하는 생각을 해왔다"며 "나중에 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게 잘 죽으려면 그것도 준비가 필요한 것 같다"고 말한다."만개한 장미가 시간의 숙명을 준비해야 할 것 같은 초조감을 느낀다"는 정옥임 씨처럼, 경제적·정신적인 노후준비(강의모·박순덕·김정희·조경남) 역시 그들에겐 걱정이다.
약해지는 체력이 걱정스러운 만큼 헬스나 걷기·등산·요가·수영·자전거 타기 등의 건강관리는 그녀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일상이다. 점심을 굶더라도 매일 한 시간은 운동을 할 정도(박영아)인 열성파도 적지 않다. 스포츠댄스의 매력에 푹 빠진 이들(전경희·조경남)도 있다. 적절한 식사도 건강을 챙기는 좋은 방법이다. 세 끼 꼬박꼬박 먹고(정옥임), 소식(少食)을 하거나(곽정숙·이동연·이성미), 여성호르몬 부족에 좋다는 검은콩 반찬을 먹는다(김혜영). 비타민제도 열심히 복용한다(최란).
40대 유부녀 연기자들이 TV를 점령하는 것에 격세지감을 느끼며, 외모관리도 안 할 수 없다. 영양크림·아이크림이나 안티에이징 제품을 이용해 기초화장에 좀 더 정성을 들이는 건(김혜영·전경희·홍정순) 기본. 집이나 전문숍에서 정기적으로 마사지를 하며 피부에 신경을 쓴다. 그 정도는 '나를 위한 작은 투자'(이은주)라고 생각한다. "발레를 하는 사람이라 얼굴보다 몸매가 탄력을 잃는 게 더 신경 쓰인다"는 최태지씨는 시간 날 때마다 몸 전체에 아로마테라피를 하면서 오일 마사지를 받기도 한다.
보톡스같이 보다 적극적인 피부관리 방법에 대해서도 비교적 긍정적이다. 보톡스 시술이나 쌍꺼풀 수술 정도는 받아볼 생각이 들기도 한다(곽정숙·권은정·유경). 차화연·최란씨는 "보톡스는 맞아봤다. 부자연스럽게 보일 정도만 아니면 괜찮은 것 같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본격적인 성형수술도 "나는 하기 싫지만 남들이 하는 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이들이 많다. 그래도 자연미인에 대한 로망은 여전하다. 나이에 따른 얼굴의 주름도 아름답게 여긴다는 여성이 적지 않다(김정숙·양현아·최태지).
물론 그렇게 관리한다고 20~30대 때와 같은 여성적 매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외형적 매력은 분명 준 것 같고(권은정·유경·조경남), 사회생활의 풍파 속에서 중성화됐다는(김진형·윤미량·최란) 느낌도 든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꽃에는 향기가 있다. 단지 다를 뿐"(안필연)이다. "섹시하다"는 단어에 거부감까지 느껴왔던 이들(문경란·이성미·홍정순)은 물론 한때는 '섹시한 여배우'로 분류됐던 연예인(송옥숙)도 이젠 50대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인간적·모성적 아름다움에 자부심을 갖는다. 아니, '표피적 아름다움에서 내공이 쌓인 원숙미로'(김혜경), '보졸레 누보에서 말르상 보르도로(햇포도주에서 오래 묵은 포도주로라는 의미)'(유재하), '남자에게 안기기 위한 매력에서 남자를 품을 수 있는 매력으로'(홍선주) 자신들의 아름다움은 오히려 진화했다고 믿는다.
그녀들은 나이 쉰에 진정한 자유를 느낀다고 말했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김진형·박성혜).아이들이 대학에 들어갔거나 취업을 앞둔 이제는 자신에게 더 많은 시간과 관심을 쏟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했다. 가족 내에서뿐 아니라 사회 생활에서도 여유와 안정을 찾게 되면서(양현아) 더 자유로워졌다. 자신을 증명하려 애쓰며, 남들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던 시기는 지났다. 여성이라는 '굴레'에서도 꽤 자유로워졌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에게 말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고(이동연), 남자 후배의 팔짱을 끼어도 뭐랄 사람이 없다(윤미량)는 것이 달라진 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더 관대해지고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도 행복한 일이다. 전에는 나와 다른 남을 보면 비난하기 바빴지만 이제는 그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생각의 틀이 넓어지고, 나만의 주관이 생겼다(김유니스·오혜란)고 느낀다. 이은주씨는 "전에는 외모의 아름다움에 눈이 팔렸다면 이제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더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김이숙씨는 인생을 산에 비유하면서 "지난 인생을 산을 오르는 시기에 비유한다면, 앞으로의 인생은 올라갔던 산을 내려가는 시기"라고 말했다. 천천히 산을 내려가면서 주변의 풍광과 산새의 노랫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이제 인생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50세가 된 이들에겐 해보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곽정숙·오혜란). 남들이 좋다는 게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행복하고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일들이다(김영혜). 책도 쓰고 싶고(강의모·윤미량), 혼자서 여행도 가고 싶다(서은숙). 가장 많은 사람이 하고 싶다고 꼽은 것은 '봉사'였다(이경희·정옥임 등). 이성미씨는 "마음 아픈 사람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후배들에게는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선배, 친구와 이웃들에게는 언제나 행복을 주는 사람, 같이 있으면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박경숙·김진·고영희)
새로운 것을 배우려는 의지도 강했다. 벌써 그림(조경남), 중국어(이은주), 첼로(송옥숙)를 배우기 시작했다. 예전엔 바빠서, 다른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나이 쉰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남은 후반전을 어떻게 마칠지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는 있었지만 여유 가득한 시도였다. 이선희·김영선씨는"집착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니라 일단 해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동연씨는 연애소설 한 편, 안필연씨는 시간의 허구와 모순을 주제로 한 작품, 차화연씨는 몸을 불사르는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예전의 꿈과 새로 꾸게 된 꿈들을 다시 꺼내보고 있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묻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대부분 '가족'이었다. 가족의 소중함은 세월이 갈수록 더했다. 박영아·최태지씨는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 내 삶의 원동력이자 버팀대다"라고 말했다. 유재하씨는 "지금까진 어리고 날카로워서 감사함을 몰랐지만 이젠 내 입을 통해 감사가 터져나온다"고 했다.온갖 세상 풍파를 같이 겪으면서 더 많이 사랑하고 존경하게 된 친구이자 동반자(최란·김연주·지희정·김혜경). 50세의 그녀들에게 남편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세월의 무게 때문에 처지는 어깨가 안쓰럽다고 느끼고 있었다(이행자). 이연주씨는 "죽는 날까지 남편과 건강하게 함께 살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의 소중함도 새삼스러웠다(김연주·이경희). 조은영씨는 "얼마 전 동창회를 다녀왔다. 화제가 모두 건강에 모아졌다. 우리 모두 항상 "건강하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동호회 등을 통해 마음과 취미를 함께하는 친구들을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경란씨는 이제부터는 "죽을 때까지 함께할 친구들을 만들어 가는 시기"라고 말했다. 그들이 50에 발견한 것은 "명예·승진·감투·성공·돈이란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이었다(박미경).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 바로 자신의 행복이라고 느꼈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손애리씨는 "지금은 사람이 우선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보는 눈이 생겼고, 본질에 더 가까워진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 생활을 하고 있는 응답자 중에는 미혼도 꽤 있었다. 아직도 사랑을 기다리냐는 질문에 대부분 "결혼 안 하겠다고 한 적 없다"고 답했다. 일에 바빠 결혼이 늦어졌을 뿐 이들에게 사랑과 결혼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었다. 13년 전 남편과 사별한 전경희씨는 아이들이 모두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재혼을 미뤄놨었다. 그는 "이제야 정말 멋진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자신했다. 이들이 기다리는 사랑은 능력이나 외모, 남들의 평판이 중요하지 않았다. 김영선씨는"같이 먹는 음식, 같이 듣는 음악, 듣기 좋은 칭찬 한마디" 같은 것들을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추석의 의미도 예전과 조금 달라졌다. 전에는 추석에 친척들이 모이는 것도 싫고, 엄청난 제사 음식을 만드는 것이 싫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가족들이 어울려서 떠들썩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나누는 것이 좋다고(권은정·김정숙) 느낀다. 친지들이 해외나 지방으로 흩어져서 추석에 보기 힘든 것도 쓸쓸하다(조은영). 어쩌면 부모님이나 시부모님들과 함께하는 추석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유경).
이들에게 50에 맞는 추석의 느낌은 특별했다. 예전보다 감사하고 정겨웠다. 홍선주씨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꽉 찬 느낌"이라고, 박순덕씨는 "추석의 풍요로움을 진정으로 느끼게 됐다"고 말했다.
첫댓글 ㅎㅎ 재미있네요.... 올해가 만으로 50, 남의 일이 아니라 다 읽어보게 됐다는.. ㅋㅋ ~~ 몸의 변화가 느껴지고, 마음의 자유와 여유가 생기는 것에 공감입니다.. 좀 더 수용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고, 베풀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 생기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