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遷位 기행 .24] 야계 송희규(1494~1558)
'훌륭한 송공(宋公)은/ 타고난 성품이 강렬(剛烈)하여/ 정색(正色)하고 조정에 서니/ 아무도 그 뜻을 꺾지 못했도다/ 좌우에서 두드리고 흔들수록/ 절의와 지조는 더욱 굳었도다/ 비록 사람과는 어긋났어도/ 하늘에는 한 점 부끄러움 없었도다.’
갈암(葛巖) 이현일(1627~1704)이 야계(倻溪) 송희규(1494~1558)의 묘비명(墓碑銘)을 지으면서,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인품을 표현한 시의 일부다.
이처럼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던 야계는 당시 사회의 최고 덕목이었던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누구보다 잘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그래서 모두가 칭송하는 인물이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와 우애롭게 지내며, 국가와 사회를 위해 열성을 다하는 것은 지금 사회에서도 누구나가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부친 위독때 궂은일 마다않으며 병구완
을사사화땐 목숨·관직 걸고 직언·상소
이황·이언적과 교유하며 학문적 소통
◆효도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
'몸가짐은 다만 효도하고 공경함이며(持身祇是孝而悌)/ 뜻을 세움은 마땅히 신의와 충성이다(立志要當信與忠)/ 만약 사람마다 이 도리를 안다면(若使人人知此道)/ 어찌 망국하고 패가할 일 있으랴(則何亡國敗家有).’
야계가 7세 때 지은 시 '독소학(讀小學)’이다. 남달리 총명했던 그에게 어릴 때부터 이같은 덕목이 자신의 삶을 지배할 핵심 가르침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는 8세 때 할머니가 별세하자, 부친과 함께 항상 빈소에 머물면서 고기 반찬이나 마늘 양념을 들지 않았다 한다.
10세 때는 '맹자’를 읽다가 '인(仁)이 있으면 그의 부모를 잊어버리지 못하고, 의(義)가 있으면 그의 임금을 뒤로 하지 못한다’ 라는 글귀를 보고 감탄하면서 “자식이 되어서 불효하면 사람이 아니고, 신하가 되어서 불충하면 또한 사람이 아니다"고 말했다.
야계는 효제와 충신을 아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 실천했다. 부모가 살아있을 때는 정성을 다해 봉양했고, 부친이 위독할 때는 목욕시키면서 대변을 맛보며 건강 상태를 보살폈다. 1523년 5월에 부친이 사망하자 3년 동안 여막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두 형과 세 아우가 있었는데 우애가 각별했다. 집안의 재산은 사사롭게 쓰는 법이 없었으며, 모두 형제에게 나눠주고 못사는 친척들에게 베풀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감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중(1543년)에 이같은 사실에 대해 경상도 관찰사로 있던 회재(晦齋) 이언적이 장계(狀啓)를 올리니, 조정에서는 정려(旌閭)를 내렸다. 왕조실록의 기록이다. 야계 연보(年譜)에는 야계가 별세한 해인 1558년에 칠봉(七峯) 김희삼이 그 효행을 관에 알렸고, 관에서 그 일을 나라에 보고해 정려각이 세워졌다고 전하고 있다.
◆뼈가 갈리더라도 내 뜻을 빼앗을 수 없다
을사사화(乙巳士禍) 당시의 일이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1545)하자 인종의 외숙인 윤임(대윤)과 인종의 이복 동생 경원대군(후일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소윤)이 세력다툼을 한다. 같은 해 인종이 아들 없이 사망하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니,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며 윤원형을 시켜 대윤 일파를 숙청하게 했다.
문제는 소윤이 명분없이 대윤 일파를 숙청하려 하고, 숙청이 조정 대신들의 공식 논의를 거치지 않고 문정왕후의 밀지(密旨)에 의해 단행됐다는 점이다. 이에 대간(臺諫)을 중심으로 한 관리들이 밀지의 불가함을 들어 연일 상소를 올렸다. 야계는 당시 사헌부 집의(執義)로서 이 일의 부당함을 가장 강경하게 주장했다.
'연려실기술’은 당시 야계의 언행에 대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중학(中學)에서 회의를 하던 날 공(야계)은 스스로 그 사태를 짐작하고 동료에게 말하기를 '대신에게 죄가 있으면 드러내 죽일 일이지, 태평성대에 밀지를 내리는 것이 어찌 밝은 세상의 일인가’ 했다. 대사헌 민제인이 밀지를 극렬히 추진하려고 하자 공은 '윤원형이 임금의 외숙으로서 임금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하고 도리어 비밀히 국모에게 의뢰해 사람들을 해치려 하니 이것이 될 말인가. 오늘 반드시 먼저 이 사람을 제거해야만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설 것이다’ 하고 김저, 박광우 등과 더불어 팔을 걷어붙이고 큰 소리를 지르는데 의기가 늠름하여 건드릴 수가 없었다."
윤원형의 무리는 외모가 왜소한 야계를 협박하기도 하고 회유하기도 했지만, 야계는 “내 머리가 부숴지고 내 뼈가 갈리더라도 내 뜻을 빼앗을 수는 없다"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충재(沖齋) 권벌은 이 말을 듣고는 감탄하며 말하기를 “사람을 용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이 사화로 많은 사람이 화를 입었고, 야계도 파직당했다.
◆5년 유배 후 고향 성주에서 '倻溪散翁’으로 지내
'사람의 욕심이 들어올 틈이 없으니/ 천리(天理)는 오직 밝고 빛나네/ 학문은 세상에 영합하지 않고 속이지 않으며/ 덕업은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닦아졌네/ 움직이면 천하에 도가 되고/ 말을 하면 천하에 법이 되네/ 우주의 동량을 부지(扶持)하면서/ 생민(生民)의 주석(柱石)되어 안정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세상에 이름난 참 선비(眞儒)이니/ 성인의 덕으로 정중(正中)한 자이다.’
야계가 남긴 '진유부(眞儒賦)’의 일부다. 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글이다.
야계는 을사사화 이후 1546년 대구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화 여파인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돼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귀양처에서 거처하는 집의 이름을 '양정(養正)’이라 짓고 날마다 주변의 유생과 더불어 강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경학(經學)에 심취하며 자적(自適)하였다. 많은 고을 선비들이 야계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5년간의 유배생활 후 1551년에 사면되어 고향인 성주 고산정(高山亭) 마을에 돌아와 집(百世閣)을 짓고 '야계산옹(倻溪散翁)’이라 스스로 호를 지어 유유자적했다. 다시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야계는 1515년 성균관에서 함께 수학한 회재 이언적과는 오랫동안 교유했고, 퇴계 이황과도 가깝게 교유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라도 귀양에서 돌아온 후 퇴계와 소백산 유람을 약속했으나 병으로 가지 못했고, 이듬해에는 퇴계와 청량산에서 모이기로 했으나 퇴계가 대사성에 임명돼 서울로 가게 되면서 성사되지 못했다.
야계는 1558년 집에서 별세했다. 1870년에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贈職)되었고, 1871년(고종 7년) '충숙(忠肅: 임금을 섬기는데 절개를 다하는 것이 忠이고, 자기 몸을 바르게 하고 아랫사람을 잘 거느리는 것을 肅이라 함)’이라는 시호가 하사되었다.
■송희규 약력
△1494년 성주 출생 △1513년 향시·진사시 합격 △1519년 병과(丙科) 합격 △1529년 현풍현감 △1533년 예조 정랑 △1534년 흥해군수 △1545년 사헌부 집의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으로 전라도 귀양 △1551년 사면돼 성주 귀향 △ 1558년 고향 집에서 별세 △1735년 사림이 봉강서원 건립, 야계 위패 봉안 △1871년 시호 '충숙(忠肅: 事君盡節曰忠 正己攝下曰肅)’ 하사
■'야계 불천위’이야기
종택은 훗날 독립운동의 근거지 되다
야계 불천위는 1871년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면서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야계 20세 종손 송만수씨(1950년생)의 설명이다.
야계 불천위 제사(기일은 음력 4월18일)는 야계종택인 백세각(성주군 초전면 고산리) 안채 대청에서 비위 신주를 함께 모시는 합설로 지낸다. 제사 시간은 제관들의 편의를 위해 8년 전부터 기일 초저녁으로 바꿨다. 참석하는 제관들이 점점 줄어드는 상황이라 제사 시간을 변경했다. 시간 변경 후부터는 50여명의 제관이 참석한다.
야계 불천위 신주는 백세각 왼편에 있는 사당에 봉안돼 있다. 사당 중앙에 불천위 신주가 있고, 좌우에 4대조 신주가 모셔져 있다.
1992년에는 불천위 내외 신주가 도난당하는 일이 발생, 종손을 혼비백산하게 했다. 신주를 보관하는 감실을 도난당하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감실은 놔두고 신주만을 훔쳐가는 경우는 처음 듣는 일이었다. 다행히 두 달 뒤에 신주가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대구에 살던 종손은 종택으로 들어와 살기로 작심했다고 한다. 종손은 14년 전 홀로 종택으로 들어와 집을 지키고 있다.
종택인 백세각은 야계가 1551년 귀향, 건축을 시작해 이듬해인 1552년에 완성한 'ㅁ’자형 가옥이다. 청렴했던 그가 비교적 큰 가옥인 백세각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종손은 야계 아들 정자공의 부인 고령박씨가 많은 재산을 가져와 가능했다고 설명했다.
백세각은 1919년 3·1 운동 후 경북 유림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를 기초하며 모의한 장소이자, 성주장날(4월2일) 만세시위운동에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보관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백세각 사랑채 마루에는 한석봉 글씨의 '백세각’ '야계고택’ 현판이 걸려 있는데, 원본은 아니고 1995년 후손의 실화로 사랑채가 불타면서 타다 남은 현판을 토대로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송만수 종손은 “야계 선조는 청렴하고 강직한 분으로 그 삶을 '안분지족(安分知足) 백세청풍(百世淸風)’으로 요약하고 싶다. 후손들도 이 정신을 이어받고자 노력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