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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사적(史蹟) 제232호 남해 관음포 이충무공 유적 (南海 觀音浦 李忠武公 遺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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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전사한 마지막 싸움이자, 임진왜란 당시 바다에서 벌어진 최후의 대규모 해전이었다. 1592년(선조 25)의 1차 침입에 이어 1597년에 다시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킨 일본군은 그해 9월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하였으며, 지상전에서도 점점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밀려 고전하였다. 다음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일본군은 그의 유언에 따라 순천 등지로 집결하면서 점차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순신은 명나라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과 함께 고금도 수군진영을 떠나 노량 앞바다에 이르렀다. 이어 명나라 육군장 유정(劉綎)과 수륙합동작전을 수행하여 왜교(倭橋)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대를 전멸시키고자 했다. 그결과 고니시는 수륙양면으로 곤경에 처하게 되어 진린에게 뇌물을 주고는 후퇴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간청했다. 진린은 이를 받아들여 고니시가 마지막으로 애원하는 통신선 1척을 빠져나가도록 방조하고는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통보했다. 이에 이순신은 적을 너무 쉽게 놓아주었음을 보고 크게 노하여 진린을 꾸짖었다. 이순신은 고니시가 이 통신선을 이용하여 사천(泗川) 등지에 나가 있는 시마쓰[島津義弘]와 남해, 부산 등지에 있는 소오[宗調信]에게 연락하여 이들 수군의 구원을 받아 조·명 연합수군을 협동공격하면서 퇴각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이순신은 조·명 연합함대의 진영을 재정비하여 쳐들어올 왜군에 대비했다. 과연 11월 18일 500여 척의 왜선이 노량수로와 왜교 등지에 집결하여 공격할 자세를 갖추었다. 200여 척의 조·명 연합수군밖에 보유하지 못했던 이순신은 배가 넘는 적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모든 병사들에게 전투태세에 들어갈 것을 명령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곧 적선 50여 척을 격파하고 200여 명을 죽이니, 적들은 이순신을 포위하려 했다. 이때 진린의 명군이 와서 왜적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수군이 격파되고 패잔선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났다. 이순신은 관음포로 마지막 도주하는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적을 격파하여 포위되었던 진린을 구했다. 이어 남해 방면으로 계속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전쟁과정에 미칠 영향을 염려하여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고 전사하여 노량해전에서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알려졌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이외에도 명나라 장수 등자룡(鄧子龍)과 가리포 첨사 이영남(李英男), 낙안군수 방덕룡(方德龍), 홍양현감 고득장(高得藏) 등 많은 명장들이 사망했다. 한편, 순천 왜교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의 군사들은 남해도 남쪽을 거쳐 퇴각하여 시마쓰의 군사들과 함께 부산에 집결한 후 철수했다. 노량해전의 승리는 정유재란을 끝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金武勇 글
시마즈 요시히로(일본어:
1597년 정유재란 당시 1천여 척의 일본 전선을 총집결시켜 연합 함대를 조직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元均)의 조선함대를 격파하였고, 이듬해 (1598년) 사천 선진리성에서 7천명의 병사로 약4만명 이상의 조·명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사천 전투)
같은 해 12월 순천왜성에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구출하기 위해서 500척의 함대를 이끌고 갔으나, 노량 해전에서 조·명 연합 함대와의 야간 해전에서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퇴로 확보라는 목적 달성에는 성공하였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서군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고작 1천 5백명의 병력만 이끌고 오자 명색이 다이묘인데 데리고 온 병력이 1만명도 안된다며 마구 꾸짖고 미워했다. 그래도 전투 의지가 있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기습작전을 건의하였으나 병력이 1천 5백명밖에 안되는 주제에 말이 많다는 답변을 들으며 이시다 미쓰나리에게 무시를 당했다. 결국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이 연달아 배신하자 시마즈 요시히로는 서군은 이미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적진을 정면으로 돌파해 철수하였으나 참전했던 1,500명의 병사 중 300여명만이 살아남는 피해를 입었으며, 전진철수 중에도 계속 동군의 공격을 받아 300여명 중 80여명만 살아남아 사쓰마로 도주했다.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이 나오마사(井伊直政),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화해를 도모하지만 도쿠가와 측에서 화해를 거부하자 군비를 증강한다. 그러자 이에야스는 규슈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를 주축으로 한 토벌군을 사쓰마로 보내지만 번번이 패하였고, 장기전을 우려한 이에야스는 철수 명령을 내렸다.
1602년 시마즈 가문의 영지를 아들 시마즈 다다쓰네에 양도하는 조건하에 영지를 보존받을 수 있었다. 1619년 음력 7월 21일 요시히로는 오스미 가지키에서 숨을 거둔다. 향년 85세였다.
조선왕조실록에 시마즈 요시히로을 심안돈오(沈安頓吾)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Shimazu Yoshihiro을 발음을 대입해서 한문으로 적은 것으로 보인다.
센간엔 (仙巖園)
사츠마번의 번주 시마즈家의 별장
일본의 전통정원과 중국, 또한 류큐왕국(현재 오키나와)의 양식이 혼재된
일본의 전통정원美와 다양한 양식을 볼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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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유는 정법화경과 범본 법화경 제5 약초유품에 나온다.
“가섭이 부처님께 여쭙되 삼승이 없다고 하는데 어떤 까닭에 보살·연각·성문이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묻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비유를 들자면 도예가가 진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되 혹은 감로의 꿀을 담는 그릇이 되기도 하고, 혹은 발효유나 우유를 담는 그릇이 되기도 하고, 혹은 짠 기름을 담는 그릇이 되기도 하며, 음식을 담는 막그릇이 되기도 하지만, 진흙은 본래 한 가지이며, 만들어진 그릇에 각기 다른 것이 담길 뿐이니라. 그 근본에서 또한 그러하여 한 가지로 평등해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각기 행하는 역할에 따라 상중하가 생겨나느니라.”
진흙으로 만든 그릇에 꿀을 담으면 꿀단지가 되고, 우유를 담으면 우유그릇이 되고, 참기름이나 들기름을 담으면 기름그릇이 되며, 일반 음식을 담으면 음식 그릇이 되는 것과 같이, 그릇의 성분은 진흙이되 그 기능에 따라서 그릇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성문·연각·보살도 부처님이 되기 위한 수행법에서는 똑같지만 자신의 수행과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원력에 따라서 보살이 되기도 하고 성문이나 연각이 되기도 한다는 가르침이다. 향을 싼 종이는 향내가 나고, 생선을 쌌던 종이는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똑같이 수행을 하더라도 그 목표를 상구보리 하화중생에 둘 때, 진정한 대승의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임을 도예가의 비유로 표현하고 있다.
법화경 도예가의 비유를 읽을 때 마다 생각나는 것이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예가들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이삼평과 심수관 가문이다.
일본이 자랑하는 사가(佐賀)현 아리타(有田)자기의 시조로 추앙 받는 이삼평(李參平, 출생년 미상~1655)도 정유재란 당시 조선 침략에 나선 히젠국(肥前) 사가번(佐賀藩)의 번주(藩主)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1536~1618)의 군대에 사로잡혀 끌려온 조선 도공이었다.
이삼평이 자기 생산에 적합한 흙을 찾아 나베시마의 영지 일대를 전전하다가 1616년 아리타 동부 이즈미야마(泉山)에서 양질의 자석광을 발견하고, ‘덴구다니요(天狗谷窯)’를 열어 일본 최초의 백자기를 생산했고, 오늘날 이삼평은 도조(陶祖)로 추앙받고 있다.
이삼평이 도조(陶祖)로 불리었다면 그와 견줄만한 사람은 일본 도예계를 이끌고 있는 심수관가(家)이다. 심수관가의 시조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심당길(深當吉) 후손이다. 심당길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살다가 사쓰마(현재 가고시마현)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끌려간 조선 도공이었다. 심수관가의 13대부터는 이름까지 그대로 습명하는 전통을 만들었으며 그 후손들은 뛰어난 예술혼으로 ‘사쓰마 도자기’의 명성을 드높였다. 심수관 가는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 금수목단문화병을 출품해 사쓰마 도자기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도예명가로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두 전쟁을 통해서 조선의 무고한 백성들이 학살당하는 등 큰 고통을 겪었는데, 이 전쟁을 흔히 도자기 전쟁으로도 부른다. 그 이유는 무수한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갔고, 그들이 일본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케이넨(慶念)이라는 스님은 일본 안양사의 주지승이었는데 규슈의 우스키성의 성주인 오오타 히슈우(大田飛州)라는 무사의 군의승(軍醫僧)으로 정유재란 때 조선에 오게 된다. 그리고 1597년 6월부터 1598년 2월까지 8개월 동안 조선에 머물면서 왜군의 진공루트를 따라서 목격한 경상도와 전라도의 전투상황과 조선인의 참상과 피해 등을 상세히 기술한 ‘정유재란종군기’를 남긴다.
‘1597년 8월6일-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산사람은 금속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어간다. 어버이는 자식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 처음 보게 되었다.’
‘11월19일-왜에서 상인이 왔는데 그 중에 사람을 사고파는 자도 있어 본진의 뒤에 따라 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 줄로 목을 묶어 앞으로 몰고 가는데…잘 걷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는 모습은 지옥의 아방이 죄인을 잡아들이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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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 스님 법화경 연구원장 freewheely@naver.com
일본의 유력한 무사가문.
12~19세기 규슈[九州] 남단을 지배했다. 일본의 변경지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봉건가문으로서는 유일하게 중세와 근대를 통틀어 일본사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 : 1603~1867]에 이 가문의 영지였던 사쓰마 한[薩摩藩]은 일본에서 3번째로 큰 봉건영지였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서 시마즈 가문의 무사들은 조슈 한[長州藩]의 모리 씨[毛利氏]에 충성하는 무사들과 함께 1867년 도쿠가와 정권을 전복하고 천황정부를 수립했다. 사쓰마 한 출신의 사람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정부를 지배했으며 그뒤에도 계속 일본 해군을 장악했다.
시마즈 가문은 12세기말 규슈 남부지역의 통치자로 임명된 뒤 시마즈라는 성(姓)을 쓰기 시작한 시마즈 다다히사[島津忠久 : 1179~1227]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조선 및 류큐[琉球]와의 교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16세기 무렵에는 일본 남서부의 주요세력이 되었고 규슈 대부분의 지역을 지배했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 1537~98]가 일본을 통일해가고 있던 1587년 마침내 시마즈 가문도 히데요시에게 패하고 말았다. 히데요시는 이 가문으로 하여금 그들의 영지인 남부지방을 계속 지배하도록 했으며, 그뒤 시마즈 가문은 히데요시의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1600년 시마즈 가문은 일본 서부의 대영주들과 협력하여 히데요시의 계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 1543~1616]의 집권을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난 뒤에 이에야스와 강화(講和)했으며 자신들의 영지를 계속 보유해도 좋다는 보장을 받았다.
1609년 시마즈 가문은 류큐 제도를 정복하여 사쓰마 한에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했다. 류큐 주민들은 전통적으로 중국과 조공무역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사쓰마 한에서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 중국 사치품을 접할 수 있었다. 도쿠가와 바쿠후는 이후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점차 쇄국정책을 강화했지만 시마즈 가문은 류큐와 무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편 도쿠가와 가문에 대해서는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적대감을 키워나갔다. 1867년 사쓰마는 도쿠가와 바쿠후를 무너뜨리는 운동을 이끌었으며 그뒤 메이지 신정부하에서 가고시마 현[鹿兒島縣]으로 개편되었다. 시마즈 가문의 상속자에게는 세습적으로 공작작위가 수여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위와같이 시마즈 가문의 후손인듯 추정 되고 있다
강항(姜沆: 1567-1618)
본관은 진주.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사숙재(私淑齋). 전남 영광군 불갑면 금계리 유봉
마을에서 태어났다.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주서·교서관박사를 거쳐 96년 공조좌랑에
이어 형조좌랑이 되었다. 97년 휴가로 고향에 머물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 군량미 수송임무를
수행했고 고향에서 김상준(金尙寯)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영광이 함락 당하여 가족과 함께
해로를 통해 탈출하려다가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일본의 승려 요시히도[好仁]와 교류하며 그로부터 일본의 역사·지리·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몰래 본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98년 교토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어 이곳에서 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등
일본 성리학 학자와 교류하며 성리학을 가르쳤고, 특히 후지와라는 그에게 배운 것을 토대로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4년여의 억류생활을 하였는데, 일본 막부의 귀화요청을 조선 선비답게 단호히 거절하고 두 제자의 도움을 받아 1600년
가족과 함께 귀국하였고 1602년 대구교수(大邱敎授),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일본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 그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 <소학> <근사록(近思錄)> 등 16종의 글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겨 일본의
내각문고에 소장되어 있으며,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그림에도 뛰어나 인물화와 송화(松畵)에 특기가 있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운제록(雲堤錄)》 《강감회요(綱鑑會要)》 《좌씨정화(左氏精華)》 《간양록(看羊錄)》
《문선찬주(文選纂註)》 《수은집(睡隱集)》등이 있다
▷ 간양록(看羊錄)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갔던 강항이 일본에서 견문한 풍속·지리·군사 정세 등을 기록한 책으로 목판본 1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규장각도서이다.
간양(看羊) 은 흉노에 포로로 잡혀갔던 소무(蘇武)의 충절을 뜻하는 말로, 본래의 제목은 죄인이라는 뜻에서
《건거록(巾車錄)》이라 하였으나, 1656년(효종 7) 책이 간행될 때 제자들이 강항의 애국충절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간양으로 고쳤다.
3년 동안 지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본의 지리·풍토·인문·병비(兵備) 등과 도요토미[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또한 포로가 되었을 때부터 귀국하였을 때까지의 일기를 <섭란사적(涉亂事蹟)>이라 하여 권말에 첨부하였다
▷ 유적지
강항을 배향한 내산서원(內山書院)은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 산 22-4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의 형식이다. 내산서원 입구의 정렬문은 강항이 52세를 일기로 타개하여 이곳 산기슭에
묻히자 식음을 전폐하고 그의 뒤를 따른 부인 함평이씨에게 내려진 열녀문이다
강항이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두고 온 조국을 생각하며 읊조린 시 한편이다.
봄비에 젖은 마음 고향 그리는 마음 한이 없어라.울 아래 내 집 울 아래 아롱진 꽃들 언제나 보게 될까! 언제나 보게 될까!
그는 또 자신의 책에 일본으로 잡혀와 탈출하다 잡혀 극형에 처해 죽은 전라 좌병영 우후 이엽이 탈출하기 전 남긴 그의 시를 소개하였다.
봄은 동녘에서 오는가 한 많은 봄이로세.바람, 너는 서녘으로 가느냐 맘만 들떠 바쁘이.새벽달, 어버이 한숨 실은 새벽달일세.밤길도 더듬더듬 헤매신다.촉대로 새운밤을 그 누가 알랴.그 누가 알랴, 아침 햇빛에 북받치는 내 설움을!글방 옛터에 피고 진들 누가 알리 선영 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고.삼한의 피를 받아 굵어진 이 뼈어찌타 짐승 놈들과 섞일 수가 있으랴!
看羊錄
이국땅 삼경이면 밤마다 찬서리고어버이 한숨쉬는 새벽달일세
마음은 바람따라 고향으로 가는데선영뒷산에 잡초는 누가 뜯으리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피눈물로 한줄한줄 간양록을 적으니임그린뜻 바다되어 하늘에 닿을세라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허야
감합무역
일본이 조공 형식을 취하는 감합무역은 관세도 없고 체제비도 명이 부담하여 많은 슈고와 사원들이 이에 가담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두고 많은 다툼이 있었을 것 같은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사람들 간의 다툼은 없었나요?
2.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쇼군의 권위를 높이고 차츰 전제적인 정치체제를 확고히다지기 위해 막부의 정치기구를 갖추었습니다. 삼관 밑으로 만도코로, 문추조, 사무라이도코로도를 두었는데 이는 가마쿠라 막부 때에도 있었던 기구입니다. 무로마치 막부 때의 이 기관들은 가마쿠라에 비해 그 권한이 축소되어 단순한 사무기관에 지나지 않았는데, 좀 더 강력한 정치를 하려고 했던 요시미쓰인데 왜 삼관 아래에 있던 기구들의 권한이 축소되었나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해로부터 4백20년 만인 2012년 임진년이다. 임진년을 맞아 새해 벽두부터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다룬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인기 소설 개정판, 임진왜란의 흔적을 좇아간 사진집,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 임진왜란 관련서 등 다양하다. 그중 일본인들은 임진년의 전쟁을 어떻게 해석하고 기록했는지 엿볼 수 있는 <그들이 본 임진왜란>이 눈길을 끈다. 이 책의 저자 김시덕씨는 국내 대학 일어일문학과 학부·대학원·강사를 거쳐 2010년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총합연구대학원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까지 일본 문헌학·전쟁사·근세문학을 파헤쳤다. 2011년 일본의 한 출판사를 통해 <이국정벌전기(異國征伐傳記)의 세계>를 펴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 나온 여러 ‘외국 정벌기’를 분석해 일본어로 펴낸 단행본인데, 이 저술로 40세 미만 일본 고전 문헌 연구자를 대상으로 주는 상인 ‘일본고전문학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들이 본 임진왜란>은 그런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한국인에게 ‘일본인이 기록한 임진왜란의 기억’을 쉽게 소개하는 책이다. 기존의 임진왜란 관련서가 우리 역사가들의 해석과 평가에 기초했던 것에서 벗어나 일본 근세의 야사·외전·군담소설 등을 분석해 일본인들의 의식 및 무의식에 투영된 전쟁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저자는 특히 에도 시대 2백여 년간 베스트셀러였던 오제 호안의 <다이코기>, 하야시 라잔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보> 등 전기물, 호리 교안의 <조선정벌기> 같은 군담과 역사소설에 주목했다. 저자는 일본인들의 사랑을 받은 대중적 읽을거리에서 일본 작가들이 일본의 침략 전쟁을 어떻게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보고 싶어 한 전쟁의 이미지’는 무엇이었는지 들려준다. 저자는 “임진왜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에서 나온 여러 임진왜란 관련 문헌이 ‘조선 침략’을 ‘정벌’이라고 한결같이 옹호하는 반면, 외국에 의한 일본 ‘정벌’은 부당한 침략으로 서술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하야시 라잔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보>에서 도요토미가 ‘예부터 중화는 우리나라를 여러 번 침략했으나 우리나라가 외국을 정벌한 일은 진구코고(신공황후)가 서쪽 삼한(三韓)을 정벌한 이래 천 년 동안 없었다’라며 임진왜란의 개전을 선언한 대목을 인용해 임진왜란이 ‘불의에 대한 정당한 전쟁’임을 주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은 중국의 부당한 침략에 대한 자기방어라는 것이다. 이는 사쓰마 번을 지배한 시마즈 가문이 작성한 임진왜란 문헌 <정한록(征韓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조만간 조선의 황거를 함락시키고 곧장 명나라로 쳐들어가 옛날 원나라 장수 아자한, 범문호 등이 우리나라로 난입한 복수를 하려 한다’라며 원과 고려의 침공에 대한 복수라는 논리로 조선 침략을 정당화했다.
한편 이순신이 일본에서 ‘영웅’으로 불리게 된 계기를 정리한 대목도 눈길을 끈다. 18세기 초 유성룡의 <징비록>이 일본으로 유입되면서 임진왜란에 참가한 일본인들의 기록이나 명나라 문헌 등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씌어졌던 경향에 변화가 생겼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언어 정책을 알게 되는 것도 새롭다. 일본 문헌에 남아 있는 우리말의 흔적이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또한 이 책에는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 일화나 ‘도요토미 히데요시 독살설’ 등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 관련 에피소드들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丁酉再亂 때 왜군의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鄭希得(1573 1640)이 일본에서 포로생활 중 겪은 일을 기록한 책이다. 鄭希得은 자는 子吉, 호는 月峯으로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형과 함께 왜군의 포로가 되어 일본에 갔다가, 1599년에 본국으로 돌아왔다. 본서는 1613년(광해군 5)에 쓰여진 정희득의 <自敍>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때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며, 인조의 즉위를 경하하는 내용의 <陳賀疏>는 후에 간행하면서 첨가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본서의 여러 序文·跋文 중에 정희득의 6 세손인 鄭澗의 것이 1847년(崇禎4 丁未)으로 가장 뒷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아 이 때에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책의 내용을 보면, 권1에서는 尹鳳朝와 趙斗淳의 序文, 趙 의 跋文, 그리고 魏伯珪가 지은 “忠孝傳”이란 이름의 行狀이 있다. 이어서 <自賊倭中還泊釜山日封疏> <陳賀疏> <附日本總圖> <海上日錄> 등 수록되어 있다. <自賊倭中還泊釜山日封疏>는 정희득이 본국에 귀환한 즉시 왕에게 올린 상소인데 일본에서 보고들은 내용을 상세히 기록한 것으로 復讐雪恥의 뜻을 담고 있으며, <陳賀疏>는 仁祖의 즉위를 경하하는 내용이다. <附日本總圖>에서는 일본의 상세한 지형과 제도·문물·법률 사회상을 기술하였고 또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정치적 상황 및 왜란에 파견된 일본군의 규모와 장수들의 명단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海上日錄>에서는 1597년 8월 12일부터 1599년 7월25일까지의 포로로 잡히게 된 과정, 일본에서의 포로생활, 귀환과정 및 함께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들의 생활상 등을 일기식으로 기록하였는데 당시 포로생활의 고통,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권2에서는 포로생활 중 정희득이 지은 詩文들을 모아놓았으며, 부록에 정희득의 自敍와 墓銘 등이 실려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상황과 조선인 포로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강문식)
임란 때 日에 진주 목사 머리 보낸 문서
(진주=연합뉴스) 부산시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66) 소이구로다 마사나가(黑田政長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공격한 왜장) 가문이 소장한 문서 속에서 발견한 주인장. 주인장에는 '금일(今日) 청취한 머리, 코, 또는 생포한 숫자. 首(수) 拾三(13), 鼻(비) 貳拾五(25), 生捕(생포) 貳人(2명) 위 건을 확실히 보냈습니다. 慶長貳年(1593년) 8月(월)17日(일)'이란 내용이 적혀 있다. 2011.2.4 <<지방기사참고, 한일문화연구소>> shchi@yna.co.kr |
한일문화硏 김문길 소장, 왜장 가문서 찾아
(진주=연합뉴스) 지성호 기자 = 부산시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66) 소장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 미상∼1593) 장군의 머리를 일본에 보냈다는 문서(주인장 朱印狀)를 발견했다고 4일 주장했다.
김 소장은 최근 한일문화연구를 위해 일본 기타큐슈(北九州)를 방문했으며 이곳에 있는 구로다 마사나가(黑田政長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공격한 왜장) 가문이 소장한 문서 속에서 주인장을 찾았다고 밝혔다.
주인장에는 '금일(今日) 청취한 머리, 코, 또는 생포한 숫자. 首(수) 拾三(13), 鼻(비) 貳拾五(25), 生捕(생포) 貳人(2명) 위 건을 확실히 보냈습니다. 慶長貳年(1593년) 8月(월)17日(일)'이란 내용이 적혀 있다.
주인장에는 서예원 장군이란 글은 없지만 1907년 일본 도쿄대학교 호시노 히사시 교수가 발표한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은 서예원 성주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 일본으로 보내 도요토미 대불전 앞에 묻었다.'란 논문 내용을 볼 때 주인장 내용 중 수(首)에 서예원 장군이 포함됐다는 것이 김 소장의 주장이다.
특히, 김 소장은 지금까지 왜군이 귀를 베어 갔다는 문서는 발견됐지만, 머리에 관한 문서는 이번이 처음이며 서예원 장군이 1593년 5월 29일 순국한 기록과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가는 선박 편이 3개월 정도 소요되는 사실을 생각하면 서예원 장군이 확실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서예원 장군의 머리는 교토(京都) 귀 무덤에 묻힌 사실을 관련 문서로 확인했다고 덧붙였다.
서예원 장군은 1591년(선조 24년) 김해 부사로 부임했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과 공방전을 벌이다가 패주했다. 제1차 진주성싸움에서 김시민 목사를 도와 왜적과 항전했고 1593년 진주 목사로 부임했으나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순국했다.
김 소장은 "정부에서 서예원 장군의 머리 무덤에 대한 환국 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말했다.
현대에만 스파이, 간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나라 간 정보전이 치열했고 그 속에는 기밀을 전달해 전쟁의 승세를 바꾸거나 나라간 밀약을 추진하게 하는 첩보원이 있었다.
오는 12일(목) 방송되는 KBS1 <역사스페셜>에서는 우리나라의 운명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중국 첩보원 ‘사세용(史世用)’을 소개하고 역사 속 뒷얘기를 들어본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명일(明日)간에는 ‘조선분할통치’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조선을 지원하던 명나라가 일본과의 벽제관 전투에서 참패하고 난 뒤 부담을 느껴, ‘조선을 분할 통치하자’는 협정을 맺고 전쟁을 일단락 지으려는 계책이었다. 협정이 체결될 경우 조선팔도의 절반인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상황. 그때 등장한 첩보원 사세용은 기밀을 폭로해 한반도를 분단 위기에서 구하고,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이와 같은 첩보전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명나라 ‘석성’은 임잰왜란이 더 많은 정보를 얻은 쪽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정보전이란 사실을 간파하고 사세용을 첩보원으로 발탁, 일본의 사쓰마(지금의 가고시마)로 파견한다. 그곳에는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네트워크가 존재했고 정탐활동 도중 만난 조선인 포로를 통해 그는 극비 정보를 입수한다. 이날 방송에서는 적국 일본의 날카로운 경계 속에서 펼쳐진 이 모든 정탐작전을 추적해본다.
‘조선분할통치안’이 물거품이 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조선을 재침략한다. 이때 사세용은 혼란에 빠진 조선의 임금 선조에게 일본의 극비정보를 담은 「왜정비람」을 바쳐 두터운 신망을 얻는다. 사세용은 이런식으로 조선에서 영향력을 키워가는 한편, 비밀리에 또 다른 공작활동을 진행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적국 일본과 내통했던 것.
- 출연 :
한상권 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