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E. 피어리 컬렉션 1906
북극 탐험에 나선 탐험가 로버트 E. 피어리.
케나다 헉슬하이버그 섬의 토머스허버드 곶
사진 출처:내셔날 지오그래픽
메이너드 오웬 윌리엄스 1925
그린란드의 한 노인이 1890년대에 북극 탐험가 로버트
피어리로부터 직접 받은 그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출처:내셔날 지오그래픽
북극의 개척자
로버트 피어리 (Robert E. Peary 1856-1920)
피어리는 1856년에 미국의 펜실베리아주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어머니와 메인주로 이사. 보드인대학에서 지리학과 측량학을 전공하고, 대학을
졸업한 후 해군측량대로 들어가 운하 건설을 위한 측량을 하였다. 1886년 여름에 3개월의
휴가를 얻어, 그린란드로 여행을 떠난 그는 이 여행에서 그는 일생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하여 1909년까지 23년이라는 세월을, 오직 북극점 도달이라는 꿈에 모두 바쳤다.
피어리가 그린란드에 이처럼 집착한 것은 그 북쪽의 해빙위를 걸어서 북극점에 도달
하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북극점 도달만이 그의 염원이었던 것이다.
1891년 피어리는 그린란드로 가서 서해안에 기지를 세웠고, 그 이듬해 기지를 떠나 그린
란드를 북상하여, 동해안의 독립만까지의 왕복에 성공하였다.1898년에는 세 번이나 그린
란드에 갔다. 이 무렵 피어리는 물자를 운반하는 무리한 여행을 했는데, 결국은 동상에
걸려 발가락 일곱 개를 자르고 말았다. 이러한 고통속에서 그는'인간은 어떠한 고통에도
익숙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한다.1900년에 처음으로 피어리는 북극점 정복에 도전하지만
실패, 다음을 기약한다.
그의 나이 45세. 건강이 쇠약해진 피어리를 본 한 의사는 극지탐험가로서의 피어리의
생명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1902년 다시 북극점을 향하지만, 그는 되돌아 올 수 밖에
없었다.그 이듬해 그는 해군에 복귀하여, '피어리 북극클럽을 결성하였다. 이 클럽의
결성으로 자금이 원활이 조달되어, 특별히 설계된 배를 만들었다. '루즈벨트호' 1905년
피어리는 이 배를 타고 뉴욕을 떠났다.하지만 그는 북극점에서 315km 지점에서 뱃머리를
돌린다.
1908년 7월 피어리는 수많은 군중들의 환송을 받으며 뉴욕을 출발하였다. 52세가 된 그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피어리는 대원의 대부분을 지원대로 하고, 본대는
될 수 있는 한 적은 인원으로 하는 극지법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북극점에서 245Km 떨어진
곳에서 마지막 지원대를 돌려 보냈다.
1909년 4월 6일 오전 10시에는 육분의를 이용하여 자신들이 북위 89도 57'인 곳에 도달하
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그들은 북극점을 도달한 것이다. 피어리는 아내가
만들어 준 국기와, 15년의 극지탐험동안 가지고 다녔던 국기를 지구의 정상에 꽂았다.
그로부터 30시간 동안 얼음을 깨어 그 밑의 바다의 깊이를 재고, 기상 관측을 한 다음
귀로에 올랐다.
피어리는 잠시나마 북극점에 누가 먼저 도달했느냐에 대한 추잡한 논쟁에 휩싸이게 되지만,
곧 진실이 밝혀졌다. 피어리야말로 최초의,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의 북극점 도달자이다.
피어리는 메인주에 있는 시골에 은퇴하여, 탐험기나 회상록을 집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1920년에 별세한 그는 엘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첫댓글 묵묵히 자신의 갈길을 걸어 간 <피어리>에게서 배워야 할 점들이 너무 많습니다 임교수님께서도 그런 분이 셨습니다 귀중한 자료로 자리를 빛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꽃삽 어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