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저녁 마신 맥주한잔의 후유증이 아침까지 이어진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몸이 찌뿌등하다.
4810m의 고소에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오랜만에 마신 탓인지 골이 울리고 숨이 막혀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가빠지는 숨을 못 견뎌 한밤중 밖에 나가 서성거리기도 하고 반가부좌로 명상을 시도해
보았으나 별 효과를 못보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이른 아침 자리를 털고 일어나 롯지 뒤쪽 언덕위에 있는 쥬툴푹 사원에 오른다.
사원은 이미 깨어 두런두런 거린다.
정문 앞에는 사람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굴뚝에서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미묘한 파장의 바이블레이션에 낮은 저음의 염불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둠을 가르며 여명을 여는 진언 송은 영혼을 울리는 소리다.
신을 부르고 신과 만나는 울림의 파동이며 우주의 텔레파시다.
바닥을 모르는 심저에서 물결치듯 낮게 깔리며 스며드는 떨림의 염불소리.
심장의 박동과 공명하며 큰 울림으로 가슴을 저리게 하는 마약 같은 묘한 끌림이 있다.
깨질 듯 아프고 무겁던 머리가 맑아지고 몸도 가쁜 해진다.
티벳의 대표적 고승이자 음유시인인 밀레라빠(1052~1135)가 그 옛날
은거해 수행했다는 천년고찰이다.
모든 것이 낡고 색이 바래 고색이 창연하다.
새벽의 정적 속에 이 사원을 거쳐 간 수많은 고승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숨결을 통해
그들의 신성과 지혜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듯하다.
전설에 의하면 밀레라빠가 뵌교의 고승과 힘겨루기로 동굴파기 시합을 해 이기면서
생긴 동굴이 쥬툴푹사원이며 카일라스 정상까지 아침햇살을 타고 순식간에 올라
뵌교 고승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꼭두새벽에 불청객나그네가 사원 안을 기웃거리며 사진을 찍는데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미소로 맞는다.
맞은편의 높은 산과 그 밑 제법 넓은 냇물이 흐르는 계곡은 아침안개에 잠겨 꿈속 같다.
강변 계곡벌판에는 순례자들의 텐트와 야크 떼가 아스라이 보인다.
이 물줄기는 카일라스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물로 티벳의 젖줄인 얄룽창포강의 최상류다.
이 냇물은 여러 지류가 몸을 섞으며 얄룽창포강이 되고 히말라야산맥 동쪽 끝을 돌아
부탄과 방글라데시의 부라마푸트라강이 된다.
이강은 다시 인도에서 갠지스강과 합쳐 인도양으로 흘러든다.
어제저녁 특식으로 짜장 밥이 나왔는데 컨디션이 안좋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오늘 아침도 밥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몇 숫갈 뜨고 출발한다.
구름이 잔뜩 낀 초가을 날씨로 걷기에는 최상의 조건이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잔설이 없어지고 길가에 푸릇푸릇한 잡초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고개를 내민다.
텅 빈 길을 텅 빈 마음으로 계속 걷는다.
내리막길에 왼쪽으로는 강줄기가 벌판을 때론 깊은 계곡을 지나고
오른쪽으로는 암갈색의 카일라스 산줄기가 계속 우리를 따라 붙는다.
일행들도 체력상태 등 컨디션에 따라 제 페이스대로 걷기 때문에 대개 혼자 걷게 된다.
선두와 후미가 심할 땐 1시간 이상 차이가 난다.
타루쵸가 휘날리는 마니석 돌무더기를 지나 언덕배기를 오르는데
구름색이 검게 변하더니 소나기 우박이 한바탕 쏟아진다.
무거운 카메라와 배낭을 맨 내가 우의를 입느라 쩔쩔매고 있는데 뒤 따라 오던
티벳 순례자가 입는 것을 거들어 준다.
답례를 하며 보니 앳돼 보이는 티벳 청년이다.
순례자의 대부분이 중노년 층인데 대학생 또래의 젊은 친구가 혼자
순례 길에 나선 것이 기특하다.
라싸에서 왔단다.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하는 20세의 학생으로 사라져갈 위기에 처한 조국의 불교문화에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는 대로 티벳의 주요 성지를 순례하고 있단다.
함께 걸으며 티벳의 독립과 미래에 대해서도 짧은 영어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첨단을 달리는 컴퓨터공학도의 조국사랑이 대단하다.
이 젊은이를 보고 티벳의 희망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기념으로 에베레스트에서 산 등산 손수건과 쵸코릿을 주니 고맙게 받는다.
왼쪽으로 수십 길의 깊은 협곡위로 타루쵸가 펄럭이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넓은 평원과 큰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30분 남짓 걸어 호수 옆 코라 트레킹의 종착지에 도착한다.
6km남짓한 거리로 몸이 풀릴만하니 끝이다.
53km의 카일라스코라 완주, 성취감보다 아쉬움이 더 크다.
식당 겸 가게인 천막 안에 들어가 수유차를 마신 후 셔틀버스가 올 때까지 저 멀리
怪湖 락샤스탈 호수가 보이는 강가 벼랑 끝 바위에 앉아
힘들면서도 벅찼던 코라를 되새김해 본다.
타임머신을 타고 신화의 시대에 잠간 다녀온 듯한 느낌이다.
2박3일간 문명세계와 동떨어진, 속세와는 거리가 먼 카일라스라는 신의 거처에서
신과 만나고 영혼과 대화하며 꿈속을 헤매다 온 것 같다.
카일라스가 아직도 종교의 성지, 창세기, 기원신화 등 신비스러운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신화시대에 머물고 있어 그 어느 곳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던
색다르고 독특한 경험을 했다.
특히 해탈의 고개, 조장 터, 사자의 서가 발견됐다는 전설이 있는
토마봉 등을 보면서 삶과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는 기회를 가졌다.
해탈의 고개에서 헛된 욕망과 아집에 찌들어 있던 나를 던져버리고 새롭게 태어난 듯한
착각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생각 만으로라도 나의 내면 깊숙히 숨어있던 자아를 들여다 볼 기회를
가졌다는 게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바르도 퇴돌(티벳사자의 서)은 49일 간의 사후 세계의 여정과 환생과정을 상술한 안내서로
내용은 물론 책이 발견되는 과정 등이 하나의 전설이다.
바르도(Bardo)는 둘(do)사이(bar)란 뜻으로 이 세계와 저 세계의 틈새,
즉 사람이 죽은 후 다시 환생할 때까지 머무는 중간상태를 말한다.
이기간은 49일로 알려졌다.
퇴돌(Thos-grol)은 듣는 것으로(thos) 영원한 자유에 이르기(grol)란 의미다.
즉 바르도 퇴돌은 “사후 세계의 중간상태에서 듣는 것만으로 영원한 자유에
이르는 길”로 번역된다.
1천2백년 전인 8세기에 쓰여진 경전으로 인간이 피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인
죽음과 환생의 세계를 3단계로 묘사한 죽음의 바이블이다.
1단계는 치카이 바르도로 죽음의 순간에 일어나는 정신적 현상을 설명한다.
2단계는 초에니 바르도로 사후에 곧바로 일어나는 꿈의 상태와 이른바
카르마(업보)의 환영을 다룬다.
3단계는 시드파 바르도로 환생을 갈구하는 사자의 본능과 환생직전에 일어나는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세계적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에 의해 현대심리학의 이론적 바탕을
제공하는데 큰 보탬이 된다.
또 히피문화의 리더였던 하버드대 티머시 리어리교수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환각제 복용의 안내서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사자의 서에 나오는 사후세계의 죽은 자의 경험과 환각제 복용에 의한
환각경험이 거의 흡사하다는 것이다.
당시 이 책이 히피들의 바이블로, 록음악과 독립영화, 실험예술 등의 주제로
널리 쓰였다는 것은 아이로니하다.
서기 8백년 인도탄트라(밀교)의 대가로 신비과학에 정통한
파드마 삼바바(연꽃 위에서 태어난 자)에 의해 쓰여진 사자의 서는 6백년 가까이
비밀의 장소에 숨겨져 있다가 1350년경 발견되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이책은 파드마 삼바바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라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내용을
최초로 기록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파드마 삼바바는 ‘사자의 서’가 천기를 누설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거나
주술사가 악용할 경우 큰 화를 불러 온다고 판단, 비밀의 장소에 숨겨두고
누가 언제 발견 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다.
이경전은 그 후 자취를 감추고 전설로만 나돌다가 14세기 초 환생자로 게시를 받은 유능한
테르퇸(보물을 끄집어내는 자)인 릭진 카르마 링파라는 구도자에 의해 발견된다.
그는 티벳 캄보다르 산군에서 암호로 된 지도를 찾아
암호를 해독하고 카일라스 토마봉의 바위와 돌이 쌓여있는 중간에 숨겨진
책을 발견, 티벳불교에 르네상스적인 변화를 몰고 온다.
전설에 의하면 아직도 비밀의 장소에 숨겨진 108권의 경전 중 65권만이 발견됐고
나머지 秘傳의 경전은 히말라야 만년설산의 동굴에서 자신을 찾아올
현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티벳 전통장례문화의 교본이 되고 티벳불교의 기둥인 죽음과 환생 등
윤회사상의 비밀을 풀어주는 최고의 경전으로 티벳불교의 정신적 바탕이 된다.
서양에 알려져 세계적인 비서(秘書)로 떠오른 것은 1927년 옥스퍼드대 종교학 교수인
월터 에반스 웬츠에 의해 영문판 책이 발간되면서 부터다.
그 후 1964년 하버드대의 티머시 리어리교수가 환각제복용의 안내서로
새로운 시각서 번역해 히피문화의 바이블이 되기도 했다.
이경전의 주 내용인 죽음과 환생이라는 윤회사상은 현대 물리학의 에너지 보전의 법칙과
유사해 많은 학자에 의해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에너지가 한번 생성되면 계속 순환하게 되는데 비슷한 원리로 의식(영혼)이
우주를 구성하는데 인간은 공간이나 에너지의식을 파괴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이경전은 죽은 후 새로 태어나기까지의 49일간 여정을 그리면서
전생에서의 카르마(업보)에 의해 다음 생이 결정된다고 말한다.
즉 선행과 공덕을 많이 쌓으면 신의 세계로 들어가거나 더 좋은 생으로 태어나고
악행을 저지른 자는 동물이나 악귀로 태어나거나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쓰여 있다.
사후 심판의 관문인 염라대왕은 카르마거울에 비친 죽은 자의 일생을 조사해 선행한 자는
하얀 자갈을, 악행을 저지른 자는 검은 돌을 던져 전생을 심판한다.
환생의 문인 3단계에서는 자신의 다음 생을 결정지을 미래의 부모를 만나고
부부가 아기를 잉태하기 위해 함께하는 순간을 보게 된다.
미래의 부모가 쾌락으로 가득 찬 성적 합일의 순간, 정신을 집중시키는 명상으로
악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좋은 부모를 선택하게 된다.
정자와 난자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영혼은 환희에 떨며 모든 것이 환생을 시작,
어두운 터널(자궁)에서 눈부신 광명(탄생) 속으로 들어간다.
사후세계가 끝나고 새로운 생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영혼이 자신의 미래를 볼 수 있고 자신이 다음 생을 선택 할 수 있다”
“죽음의 예술은 삶의 예술의 결정판이다”
티벳인들의 불심과 사생관을 깔끔하게 함축한 말이다.
영적지혜와 경험적 통찰력 없이는 이러한 초차원적인 영적 가르침이 존재할 수가 없다.
인간 정신비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의 완성판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죽음을 직시하면서 살아있을 때 선행, 보시 등 공덕을
수행하고 깨달아야 한다.
이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구도와 자기 성찰의 첫 걸음이다.
이 경전은 또 고통을 겪고, 남의 고통을 이해해 봐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해준다.
천 년 전에 환생의 원리가 생명의 잉태를 생물학적 견지에서 접근하고 다윈의 진화론을
과학적으로 더 연장하고 수정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카일라스 코라 3일간 계속 우박이 쏟아지는 흐린 날이어서 근경이던 원경이던
온전한 카일라스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게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중국정부가 문명과 동떨어진 신의 땅 카일라스에 자동차가 다니는 일주도로 건설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져 그들의 발상에 어안이 벙벙해진다.
셔틀버스로 다르첸에 도착하니 점심시간 전이다.
모처럼 만에 한가롭고 여유 있는 시간을 갖는다.
첫댓글 대단한 경험이네요~
중국인들이 티베탄에게 이야기하는
시대의 역설속에 인생의 삶에의미를
다시한번 느끼게하는 좋은글과사진
잘 보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메멘토모리"
생의 목적을 찾고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 중 가장 손쉽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의 죽음과
진지하게 대면해 보는 일일 겁니다..
티벳사람들이야말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알아 그것을 편안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