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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족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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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회 소식 스크랩 남양홍씨해봉공종중회관
홍왕식 추천 0 조회 76 15.09.13 21: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양홍씨석벽공의후손해봉공중중회관인데,서울지하철5호선아차산역부근에있다.

해봉장학재단도운영한답니다.

석벽공홍춘경선생의증손자,해봉홍명원선생의후손종중이며...

 

남양() 홍씨는 고려 때 태사()를 지낸 홍열()을 그 시조로 삼는데, 충평공() 홍관()과 광정공() 홍규()가 절의와 공로로 당대의 명신이 되었고,

아조()에 와서는 우국재() 홍경손()이 시()로 국가의 융성함을 구가()하였으며,

벼슬아치를 대대로 배출하여 세상에서 갑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해봉선생의증조는는 홍춘경()인데 관찰사(使)를 지내고 영상()에 추증되었고,

조()는 홍일민()인데 현감()을 지내고 참찬()에 추증되었으며,

아버지는 홍영필()인데 진사()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해봉공()은 홍명원()인데 경기 관찰사(使)를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다.

아드님에홍처대公이계신즉........

 

에스컬레이터공사를하는가보다.

해봉선생의아드님홍처대에대한기록이니참조하시라.....

세상 사람들이 홍씨() 가문에 어진 공경()이 많다고 말하는데,

근대()의 해봉공(, 홍명원()을 말함)이 문장()과 행의()로써 선조()와 인조() 연간에 이름이 드러났다.

그는 슬하에 장부다운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세 아들이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재상()의 반열에 올라서 그 복록(祿)이 겨룰 자가 없었는바, 그중의 한 사람이 바로 公으로,

휘()는 처대()요 자()는 중일()이다.

공은 만력() 기유년(, 1609년 광해군 원년) 8월 29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기품과 모습이 의젓하였고 함부로 장난하거나 웃지도 않았으므로 선배들이 모두 원대한 인물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25세 때에 생원과 진사의 두 시험에 합격하였고,

 31세 때에 알성과()에서 제4명()으로 급제하여 형인 관찰공()과 함께 연벽()으로 괴원(, 승문원의 별칭)을 거쳐 한원(, 예문관의 별칭)에 들어간 뒤 전적()ㆍ감찰()에 올랐으며 병조()의 낭관으로서 수의(, 암행어사의 별칭)가 되어 호남() 지역을 암행하였고,

그로부터 화관() 현직()을 두루 거쳤다.

 미원(, 사간원의 별칭)에서는 정언()ㆍ헌납()ㆍ사간()을 역임하였고,

백부(, 사헌부의 별칭)에서는 집의()가 된 것이 두 번이었으며, 여섯 번이나 논사()의 직임을 맡으면서 수찬()ㆍ교리()가 되고 다섯 차례나 주연(, 세자시강원의 별칭)에서 모시면서 설서()ㆍ사서()ㆍ문학()ㆍ보덕()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천관(, 이조()의 별칭)에서는 좌랑()ㆍ정랑()을, 중서(, 의정부()의 별칭)에서는 검상()ㆍ사인()을 지내면서 언제나 삼자함(, 지제교()를 말함)을 띠고 있었고, 중간에 병조 낭관으로서 한학 교수()를 겸직하기도 하였고, 군자감()ㆍ태복시()의 정() 및 경기 도사(), 금산 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곧 삼사()로 돌아오곤 하였다.

그때 공의 백씨()와 중씨() 두 분이 서로 뒤이어 영각(, 홍문관()의 별칭)에 올랐는데,

공은 중씨와 함께 반직()을 가장 오래하기도 하여 온 세상 사람들이 그들을 영예롭게 여기었다.

공이 사성()에서 동부승지()로 발탁 기용되었을 때, 어느 날 임금이 연석()에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모(, 홍처대를 말함)가 옥당()을 떠나고부터는 강()을 잘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여러 차례 옮긴 끝에 좌승지()에 이르고 호조ㆍ예조ㆍ병조ㆍ형조의 참의()와 판결사()를 역임하였으며, 중간에 부개(, 부사(使)를 말함)로서 중국을 다녀오기도 하였다.

 안변 부사(使)ㆍ경주 부윤()을 거쳐 관서백(西, 평안도 관찰사를 말함)으로 발탁되어 승진하였는데, 이때 공을 좋아하지 않는 대관()이 있어 당로자()의 뜻에 영합하여 까닭 없이 발탁했다는 이유를 들어 체직할 것을 논하자, 얼마 뒤에 임금이 특별히 호조 참판에 제수하였다.

그리고 또 임금의 명을 받들어 북지()를 다녀왔고, 이어 병조와 형조의 참판, 도승지()ㆍ우윤()을 역임하였으며, 국장도감()에서 애쓴 공로로 가의 대부()에 올라 금오(, 의금부의 별칭)ㆍ총부(, 도총부를 말함)를 겸임하면서 ≪현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병진년(, 1676년 숙종 2년)에 조정에서 무과()를 설행하면서 중신()을 뽑아 각도()를 나누어 맡길 때, 공의 품계를 자헌 대부()으로 특별히 승급시켜 서추(西, 중추부()의 별칭)의 직임을 띠고 영남()으로 가게 하였는데, 도중에 병에 걸려 군위()에 이르러 객관()에서 죽으니, 그때가 바로 1월 23일로 향년은 68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조시()를 중지하고 조제()를 내렸으며, 삼도()로 하여금 영구()를 호송하도록 특별히 명하였다.

 그해 4월 18일에 안산읍() 치소의 서쪽 초지()의 유향() 자리에 장례를 치렀다.

남양() 홍씨는 고려 때 태사()를 지낸 홍열()을 그 시조로 삼는데,

충평공() 홍관()과 광정공() 홍규()가 절의와 공로로 당대의 명신이 되었고,

아조()에 와서는 우국재() 홍경손()이 시()로 국가의 융성함을 구가()하였으며,

벼슬아치를 대대로 배출하여 세상에서 갑족()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조()는 홍춘경()인데 관찰사(使)를 지내고 영상()에 추증되었고,

 증조()는 홍일민()인데 현감()을 지내고 참찬()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는 홍영필()인데 진사()로서 참판()에 추증되었다.

해봉공()은 홍명원()인데 경기 관찰사(使)를 지내고 찬성()에 추증되었다.

공의 어머니는 정경 부인() 파평 윤씨()로서 첨추(, 첨지중추부사()를 말함) 윤민준()의 딸이다.

공의 배위()는 정부인() 한양 조씨()로서 부인의 아버지는 승지()인 현주()
조찬한()인데 고봉() 기 선생(, 기대승()을 말함)이 그 외증조()이다.

 부인은 타고난 자질이 현숙하고 명철하여 부도()가 매우 갖추어져 규문() 안이 엄숙하면서도 화목하였는데, 나이 72세로 기미년(, 1679년 숙종 5년) 10월 22일에 세상을 떠나 공의 묘소 왼쪽에 부장(?)하였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홍수용()은 현감()이고,

홍수관()은 현령()이고,

홍수익()은 감역()이며,

홍수완()은 일찍 죽었고,

홍수인()은 군수()이며,

딸들은 부사(使) 이관주()와

현령() 윤보()에게 각각 시집갔다.

 홍수용은 1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홍우조()로 진사()이고,

딸은 사인() 이만장(),

참봉() 김세중(),

사인() 이일형()에게 각각 시집갔다.

 홍수관은 1남 2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홍우령()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영남백(, 경상도 관찰사를 말함)이고,

딸은 사인() 곽만화()와

이세운()에게 각각 시집갔다.

 홍수익은 1남을 낳았는데 홍우희()이다.

홍수완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홍우기()이고,

딸은 사인() 정현선()에게 시집갔다.

 홍수인은 뒤를 이을 자식으로 홍우집()을 두었다.

이관주는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덕명()이고,

세 딸은 현감() 황하영(),

장령() 구만리(),

 사인() 조명덕()에게 각각 시집갔다.

 윤보는 3녀를 두었는데,

참봉() 한배한(),

사인() 이덕수(),

 심몽현()에게 각각 시집갔다.

내외의 증손()과 현손()이 모두 1백여 명이나 된다.

공은 마음가짐이 충직 성실하고 겉모양을 꾸미지 않았으며, 악()을 미워하는 성품이면서도 남의 과실은 말하지 않아서, 꾸짖는 소리가 종들에게도 미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온화하고 조용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는 사람 같다가도 일을 대하면 잘 풀어 나가서 널리 통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조정에 있는 30여 년 동안에 한 마음으로 게으름 없이 착실히 공무를 수행하였는데, 대각()에 있을 때는 남을 헐뜯기 좋아하는 행위를 미워하였으며, 강연()에 올라서는 임금을 옳은 길로 계도하는 도움을 주었다.

주부()를 두루 맡으면서 부임한 곳마다 위은()을 남겨 후임자들이 모두 그의 능력에 감복하였으며, 공이 죽자 소식을 들은 영남() 사람들이 마치 저들의 어버이를 잃은 듯 통곡을 하고 심지어 최복()을 입은 자까지 있었는데, 그야말로 실지로 혜택이 사람들의 몸속에 깊이 배어들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리 되었겠는가?

언젠가 옥당() 관원으로서 재상()의 시호()를 올리는 일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그 시장() 속에 감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여 임금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다른 여러 신하들과 함께 견적()을 당했다가 3개월 만에 용서를 받은 일도 있었다.

 사간()으로 있을 당시에는 홍우원()이 재이()로 인하여 응지()한 내용 중에 “선왕()이 사랑하던 여인을 죽이고 사랑하던 자식을 귀양 보냈다.1)” 하는 등의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은 그것이 임금을 핍박하여 자기의 직명(, 임금에게 직언()을 한다는 명성)을 사려는 행동이라고 탄핵하였는데, 당시 논의가 대부분 홍우원을 두둔하고 공을 탓하였기 때문에 늘 공의 앞길이 트였다가는 곧 막히곤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홍우원의 간흉이 무르익고 현자()를 해친 끝에 결국 그의 말이 자성()을 겨냥했다는 이유로 귀신과 사람에게 죄를 얻었으니, 어쩌면 공의 밝음이 그의 간특함을 미리 간파하고서 그랬던 것이 아니겠는가?

여 헌가()의 선견지명에 대하여 당시 제현()들마저 믿지를 않았으니2), 사람을 알아보기란 역시 어려운 일인가 보다.

공은 독실한 효자로서 대부인()을 섬김에 항상 즐거운 낯빛으로 기쁘게 해드리는 도리를 다하였다. 평소 온화하고 검소하여 과거에 급제한 때부터 당상관에 올랐을 때까지 화사한 옷이라곤 입지 않았으며, 밥상 위에도 여러 가지 반찬이 없었다.

 평소 교유()를 좋아하지 않아 동료들도 서로 왕래한 일이 드물었고, 언제나 일찍 일어나 단정히 앉아서 종일토록 책만 보았다.

그중에도 더욱 정자()와 주자()의 글을 좋아하여 늘 손수 초록()하고 이름하여 ≪자경요어()≫라 하고는 책상 위에 놔두고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초서()와 예서()를 좋아하여 권태를 느낄 때면 곧 글씨로 즐겼고 꽃이 피고 달이 밝을 때이면 집안의 자제들과 술을 나누고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였다.

나는 공과 중표()의 사이로서 공이 집에 있을 때 담담하고 벼슬을 담당해서는 삼가고 조심하는 것을 익히 알기 때문에 공에 대해 언제나 흠탄()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영남백(, 홍우령을 말함)으로부터 공의 묘도 문자()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의리상 감히 사양할 수 없어 삼가 그 대략을 이상과 같이 적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당세를 압도할 재주가 있으면서도 너무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였으니 비단옷 위에 홑옷을 걸치는 심경이었던가?

지위는 존귀한 경상()이었으면서도 겸양의 덕을 좋아하였으니 자신을 낮춰 수양하는 자가 아니었던가?

원천이 깊으면 길게 흐르는 법이니 후손의 번창함을 보면 알지 않겠나?

내가 그의 숨겨진 광채를 드러내어 끝없는 후세에 분명히 보여 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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