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코스 : 봉강(황전)터널-마사치-철쭉군락지-3개면경개-깃대봉(858.2m)
기념 산행 행사-3개면경개-안치-산림욕지대-심원마을
★계족산 깃대봉 안내★
산의유래
순천시 서면 구상리 청소골 계곡과 구상리 마을 뒤쪽에 높게 자리 잡고 있는 산이 바로 계족산(鷄足山)이니
그 유래는 다음과 같다.
닭 발바닥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계족산이라 하고, 계족산 중턱에는 지금부터 약 1600년 전 혜조 국사가
창건한 정혜사가 자리 잡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혈이라 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계족산은 해발 682m로 능선과 능선으로 이어지며8부 능선을 지나면 구상마을 계곡으로 내려오는데 이 또한
물이 너무 깨끗하여 바로 마시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정혜사(定慧寺)역사(歷史)와 유래.
위치: 전남 순천시 서면 청소리 716 번지
계족산(鷄足山) 중턱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大韓佛敎曹溪宗第十九敎區)에 속해 있는 사찰(寺刹)이며 정혜사(定慧寺)는 지금으로 부터 약 1260년 전 신라 경덕왕 1년 서기 742년 혜조국사(慧照國師)가 창건한 사찰이다 제2창건은 혜철 국사(慧哲國寺)가 중창 하였으며 이 지방에서는 아주 오래된 사찰이란 뜻으로 "고사절" 이라고 이름이 나 있습니다. 또는 1150년 전(前) 통일신라시대 말에 보조국사(普照國師)체징(體澄)서기 804년-880년 이 정혜사를 창건 했다고 하나 이에 관한 기록은 없어 확실 하지 않습니다. 한편 송광사 제6세 원감국사(圓監國寺) 충지(沖止) 서기 1226년-1293년 에 그의 스승에 대해 쓴 혜소국사 제문(慧炤國寺祭文) 등에 보면 정혜사는 혜소국사가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혜조국사가 여생을 보내기 위해 정혜사를 창건 했으나 생시에 완성하지 못하고 제자들이 뒤를 이어서 큰 도량(道場)을 이루었으며, 그 뒤 또다시 절이 황폐화 되었으나 원감국사 충지 대사(圓監國師沖止大師)가 관음기도(觀音祈禱)로서 원력을 세워 다시 절을 부흥시켜 창건 당시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전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관음기도 도량(觀音祈禱道場0으로 명성이 나 있으며 현재까지도 간절히 기도발원(祈禱發願)하면 꼭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영험(靈驗)있는 도량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뒤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연혁(沿革)은 잘 알려진 것이 없지만 서기 1616년 광해군 10년에 나온 신증승평지(新增昇平誌)에 보면 옛날에는 큰 사찰이었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 다시 절을 중창하였고 그리고 18세기에 편찬된 가람고(伽濫考)에 정혜사(定慧寺)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이 무렵까지 계속 법등(法燈)이 이어진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순천읍지와 여승람에 본 정혜사에 부처님의 진신 치사리(眞身齒砂利)를 봉안 하였다는 기록이 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으므로 애답고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순 항쟁과 6.25 사변을 겪는 동안 국보급 쾌불 등 귀중한 문화재가 화재로 소실을 당하고 잃어 버렸습니다. 이곳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2칸 단층 팔작으로 각 구간마다 1구씩 공포를 짜얹은 다포계이며 1984년 11월 30일 국가지정 문화재 보물 제804호(文化財寶物第804號)로 지정이 되었으며 그밖에 산내 곳곳에 파손된 탑과 부도탑 등이 있으며 순천에서 넘어 가는 이 길을 옛날에는 한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이였다고 합니다.
원감국사 충지 (圓監國寺沖止)서기 1226년-1293년 고려 고종 13년에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나 속 성명은 위원개(魏元凱)이고 원감국사는 그의 익호(謚號)입니다. 1242년에 1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合格)하고 1244년에 19세에 례부시(禮部試)에 장원(壯元)으로 뽑혔습니다. 그 후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국위를 선량 하였고 금직옥당(禁直玉堂)에서는 문체가 수려하여 많은 선비들이 탄복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초지대로 세속(世俗)을 떠나 29세에 승려가 된 후 41세(1266년)에 김해현의 감로사(甘露寺)의 주지(住持)가 되었다. 주지가 된3년 후인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그 후 감로사를 떠나 정혜사로 오시게 되었는데 이때가 1270년 그의 나이 45세 때의 일입니다. 감회(感懷)를 아래와 같이 시를 지어 동료들에게 알렸다고 합니다.
계족봉전고도량(鷄足峰前古道場).계족봉 앞 옛 도량. 금내산취별생광(今來山翠別生光). 이제와 보니 푸른 산 빛 유별나네. 광장자유청계설(廣長自有淸溪舌). 부처님의 소리 바로 맑고 시냇물 소리인데. 하필남남갱거양(何必南南更擧揚).무엇 때문에 귀찮게 다시 이름을 드날리리. 정혜사에 와서 부처님 소리가 자연(自然) 자체인 것을 깨닫고 시냇물 소리가 부처님 설법(說法)이란 것을 깨닫는 경지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그 동안 정혜사에서 14년 동안 주석 하면서 정진(精進)하다가 조계6세 국사(曹溪六世國師)가 되기 2년 전인 1284년에 지리산(智異山)에 가서 끝없는 무아의 경지인 입정에 돌입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선림(禪林)의 중임을 맡아 오다가 1286년 61세 4월16일 조계 육세 국사(曹溪六世國師)가 되었다. 그로 부터 6년 후 1292(壬진辰)년 8월 초순에 국사께서 조금 편찮으시다가 1293년(癸巳) 정월 7일에 병이 더욱 중해 졌는데도 10일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깨끗이 하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문입에게 말하기를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인간 세상의 일이다. 나는 가리니 너희들은 잘있거라 라고 하시며 미시(未時)가 되자 조용히 열반(涅槃) 드셨습니다.
얼굴빛이 깨끗하고 희며 살아 있는 것 같아 다비(茶毘)를 하고 십골(拾骨)을 하였는데 뼈에 다섯 가지 빛깔이 서로 밝게 비추고 서기(瑞氣)가 하늘에 뻗쳐 한 달 간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금(충렬왕)께서는 이 소문을 듣고 슬퍼하여 상서를 내려 문도를 위로하고 익호를 원감국사(圓監國師)라 하고 탑호(塔號)는 보명(寶明)이라 하였습니다. 부도(浮屠)를 조계사(曹溪寺) 북동 (지금의 감로암)에 세우니 국사의 나이 67세이고 법납(法臘)은 39세였습니다. 이와 같이 원감국사가 14년 동안 정혜사(定慧寺)에서 떠나지 않고 주석 하시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 내습니다.
첫댓글 어머나~~제가 또 한번
가보고싶은산행지네요~
감사합니다^^
산행도중 거의 그늘이구~
맨발로 황톳길
걸으면서 ~~힐링하기 딱 좋은곳이더라구요~
그리고 산대장님~~
우리 산악회서는 곰배령 ~
안 가나요~ㅎ
천상의 화원이라는데요~
예 감사합니다 자주나오세요 그래야 좋은산행지 가지요 오후도 행복하시길..........
대장님 수고많습니다,,,더운날씨에 잘계시죠,,즐건하루되세요,,
예 감사 감사 합니다 건강하시고 산행 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