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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해석학의 아버지, 슐라이어마허
(F.Schleiermacher)
프리드리히 다니엘 에른스트 슐라이어마허. (1768년 11월 21일부터 1834년 2월 12일까지)는 계몽주의 비판과 전통적인 개신교 기독교를 조화시키려는 시도로 유명한 독일의 개혁 신학자, 철학자 , 성서 학자였습니다. 서구의 전통적 종교인 크리스트교는 계몽주의 운동에 의해 미신으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습니다. 즉 종교는 비과학적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진리가 아니다 라는 것이 계몽주의 사상의 기본입니다. 이런 상태애서 전통적인 종교를 다시 구원하기 위한 여러 가지의 철학적, 신학적인 노력이 일어났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슐라이어마허입니다.
그는 또한 고등 비평의 발전에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작업은 현대 해석학 분야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고등 비평. (higher criticism)이란 기독교의 전통적 성서해석 방법인 역사적 성경해석에 포함되는 근대의 성경 해석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이는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활용하였던 역사 문법적 성경해석에서 발전한 형태로 "텍스트 뒤에 있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고대 텍스트의 기원을 조사하는 비평학입니다. 이는 정통 신학에서 볼 때는 성경의 무오류(無誤謬)성을 벗어나서 인본주의적으로 말씀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이후의 기독교 사상에 미친 심오한 영향으로 인해 종종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어 집니다. 따라서 그는 자유주의 기독교의 초기 지도자로 여겨집니다. 20세기의 신정통주의 운동은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적으로 성경을 해석을 하는 것을 다시 비판합니다. 이런 경향은 칼 바르트가 주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바르트가 여러 면에서 슐라이어마허의 영향력에 도전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철학자로서의 슐라이어마허는 독일 낭만주의의 지도자였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장 칼빈과 칼 바르트 사이의 가장 중요한 개신교 신학자로 여겨집니다.
(1). 마음의 철학
슐라이어마허는 영혼(또는 정신)이 신체에 강하게 의존하며, 실제로는 그들의 동일성에 대해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 방향의 환원주의에도 저항하며, 그가 "영성주의"(즉 신체를 정신으로 환원하는 것)와 "유물론"(즉, 정신을 신체로 환원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 모두 오류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대신 "생명"이라고 옹호하는 정신과 신체의 비환원적 통일성을 언급합니다. 즉 정신과 신체는 각기 다른 존재이지만 인간 속에서 이 양자는 신비하게 결합이 됩니다. 이를 슐라이어마허는 생명이라고 명명한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또한 영혼(또는 마음)을 "힘"과 동일시합니다. 따라서 그는 이미 자유론. On Freedom. (1790에서1793)에서 영혼이 "힘 또는 힘의 복합체"라고 썼습니다. 즉 힘과 생명은 모두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능의 초월적인 교류(交流)를 가르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또한 영혼(또는 정신)이 그 자체 내에서 통일되어 있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영혼은 별도의 능력.(예: 감각, 이해, 상상력, 이성, 욕망)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즉 감각과 이성이 어떻게 조화되고 결합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그는 종종 정신의 "유기적"(즉, 감각적) 기능과 "지적" 기능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이중적인 구분을 두고 작업하지만, 그는 이것들도 근본적으로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유기적이란 동식물의 수준을 말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인간의 정신은 확실히 유사점을 공유하지만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사람과 성별과 같은 사회적 집단뿐만 아니라 같은 집단에 속한 개인의 수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개인 정신의 깊은 독특성이 때때로 사회 전체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정치, 윤리적 영역. (그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개인을 "영웅"이라고 부름)과 사고와 예술 영역.(그는 그들을 "천재"라고 부름)에서 모두 해당합니다. 그는 개인 정신의 독특성은 어떠한 계산 과정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모든 인간 정신이 동일하게 시작해서 그들의 발달에 대한 다른 인과적 영향으로 인해 다르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실수라는 것입니다.
(2). 해석학
슐라이어마허는 생전에 해석학에 관해 광범위하게 출판하지는 않았지만, 이 분야에 관해 광범위하게 강의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해석학을 특정한 해석 방법.(예: 성서나 고전 텍스트를 해석하는 방법)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성경을 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었지만 모든 텍스트에 적용할 수 있는 해석 체계를 확립한 후에야 제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과정은 체계적이거나 엄격하게 언어학적 접근 방식이 아니라 그가 "이해의 예술"이라고 부른 해석학을 말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텍스트를 저자가 텍스트를 만들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전달하는 데 사용하는 수단으로 보았습니다. 즉 글을 쓰기 전에 저자는 어떤 생각 또는 체험 등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인 체험의 표현이 텍스트입니다.
이러한 내적인 생각이 있기 때문에 저자는 텍스트를 생산합니다. 즉 사람들은 평소의 생각과 체험 등 때문에 글을 쓰고 혹은 동영상을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즉 동기가 외적 표현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텍스트가 생성되는 순간에 이러한 "내면의 생각"은 언어로 "외부 표현"이 됩니다. 따라서 텍스트를 해석하기 위해 해석자는 저자의 내면의 생각과 그가 텍스트를 쓰는 데 사용한 언어를 모두 고려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독자는 이해의 대상 즉 텍스트의 현실에 몰두해야 합니다. 꼭 글쓰기가 아니라 동영상 제작이나 유튜브 활동이 바로 그런 온갖 테크닉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런 텍스트 혹은 작품을 보는 독자들은 나름대로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즉 텍스트 해석이 문제가 됩니다. 물론 고전 국어 등을 읽기에는 엄청난 지식이 필요합니다.
텍스트 해석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문법적 해석"과 "심리적 또는 기술적 해석"이 모두 포함됩니다. 전자는 텍스트의 언어를 다루고, 후자는 저자의 생각, 감정, 의도 및 목표를 다룹니다.
저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발화자와 청취자 사이를 감각적이고 외적으로 매개하는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허에게 해석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최고의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 입니다. 저자가 텍스트를 쓸 때 경험한 것과 동일한 생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를 몰입(沒入)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텍스트의 바다에 잠긴다는 뜻으로 잠수(潛嫂)라는 말을 씁니다.
슐라이어마허가 그렇게 중시하는 이해.(Verstehen) 개념은 저자가 쓴 맥락과 텍스트의 원래 독자가 언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 배우는 역사적 과정입니다. 이해는 또한 직관과 해석자와 저자 간의 연결에 기반한 심리적 과정입니다. 독자와 저자는 모두 인간입니다. 인간으로서 그들은 어느 정도 공유된 체험과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공유된 체험 덕분에 독자는 저자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의 예술로서의 해석학은 당연히 오해를 피하려고 합니다.
슐라이어마허는 오해를 피하는 것이 해석학의 과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의 과정에서 오해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허는 두 가지 형태의 오해를 식별합니다. 즉 질적오해와 양적오해입니다.
질적 오해는 문법적 해석의 실패입니다. 즉, 텍스트의 언어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단어의 의미를 다른 단어의 의미와 혼동하는 것입니다." 양적 오해는 기술적/심리적 해석의 실패입니다. 제대로 문해(文解)를 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저자의 "영역"에서 뉘앙스를 오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전자 즉 질적오해는 말이나 글의 형식에 관한 오해로, 그것이 함축하고 있는 본래적 의미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말합니다. 후자 즉 양적 오해는 말이나 글의 어감에 관한 오해로, 그것으로부터 잘못된 인상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오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 슐라이어마허 해석학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영어를 해석할 때 이런 경우가 발생합니다, 즉 부정의문문 예를 들어 Are you not studying English? 라고 불어 볼 때, Yes 라고 답하면 영어를 공부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에 한국어의 경우 “예”라고 하면 공부를 안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처럼 문법을 몰라서 오해가 생기는 것이 질적인 오해입니다. 양적인 오해는 예를 들어서 말썽을 부리는 아이에게 엄마가 “참 예쁜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라고 비판을 하는 말을 진짜로 예쁜 짓을 하는 아이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통역사는 저자 자신보다 그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특정 작품이 제작된 이유를 발견하고, 다른 작가가 비슷한 장르로 제작한 다른 작품들 내의 통일성이나 같은 작가가 어떤 장르로 제작한 다른 작품들 내의 통일성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는 저자보다 저자의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장했지만, "좋은 해석은 단지 근사하게 될 수있을 뿐"이며 해석학은 "완벽한 예술"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이 예술은 "모든 이해 조건을 스스로 소유하게 함으로써" 해석자를 최상의 위치에 놓습니다. 그러나 해석자가 텍스트를 이해하는 정도는 텍스트를 오해할 가능성에 의해 제한됩니다.
슐라이어마허의 작업은 해석학 분야에 심오한 영향을 미쳐서, 그를 종종 "일반 연구로서의 현대 해석학의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그의 작업은 특정 분야(예: 법이나 신학)와 분리된 일반적인 연구 분야로서의 해석학의 시작을 알립니다. 20세기에 하이데거, 가다머 , 리쾨르 와 같은 철학자들은 텍스트 표현의 해석 이론에서 실제 경험의 해석 이론으로 해석학을 더욱 확장했습니다.
(3) 신학적 방법
슐라이어마흐는 종교라고 하는 것이 진정한 인간에게 필연적으로 있게 마련인 어떤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인간경험에 기초하는 신학을 시도하려고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실천이상에 두려 했던 칸트의 시도나 절대정신이 역사를 통하여 진행하는 것을 탐색하는 새로운 사변적 합리주의에 신학의 기초를 놓으려고 했던 헤겔의 노력과 함께, 계몽주의의 여파 속에서 신학을 시도했던 세 번째 주요한 노력입니다.
슐라이어마흐는 직관을 통하여 하나의 대안적 접근 방법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이며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 곧 실재 전체에 대한 의존 감정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종교의 본질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합리적 증거나 초자연적으로 계시된 교의 또는 교회적 의식이나 절차 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문화 속에 있는 ‘근본적이고, 쉽게 식별이 되는 통합적 요소’즉 유한한 것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무한한 것에 대하여 전적으로 의존하는 감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슐라이어마흐가 종교를‘감정’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독일어의 감정 즉 Gefuehl이라는 말은 영어로 감정.(sensation)이라는 말의 뜻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깊고 심오한 의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느낌’이라는 말은 의식 중에 ‘성찰, 이전적 상태, 곧 뚜렷한 사고나 감정 이전 혹은 그 밑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주장하기를, 진정한 종교의 핵심은 모든 유한한 것들이 무한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존재하며, 모든 일시적인 것들이 영원한 것 안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함을 직접적으로 의식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한 종교적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또 그것을 종종‘경건’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경험 안에 근본적으로 존재하며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4) 신론(神論)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돌리는 그의 모든 속성들이 하나님 안에만 특별하게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절대 의존 감정이 하나님과 관련되는 방식에 있어서 특별한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항상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진술은 하나님 그 자체. (God in himself)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는 어떤 방식을 묘사하는 것입니다.
슐라이어마흐가 재구성한 하나님 이해는 전통적 기독교 사상에 대하여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이 죄와 악의 창시자라는 사실은 피조물의 의존성에 의한 필연적 귀결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 문제를 하나님이 아닌 그 외의 다른 대리자의 몫으로 돌리게 되면, 그의 전능성이 제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이 죄라는 것을, 그속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정하셨다고 합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슐라이어마흐는 중보 기도의 효과를 부정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일의 진행 과정을 바꿔 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그 일이 하나님과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음을 그리고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의존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삼위일체의 교리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기독교 신앙] 맨 뒤에 나 는 짤막한 결론 부분으로 가지고 냉담하게 진술하기를, 그것은 “종교적 의식에 관한 언급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있습니다.
슐라이어마흐는 하나님을 이 세상으로부터, 혹은 세상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기를 거절했습니다. 하니님이 인격적이라고 하지만, 신인동형론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즉, 하나님을 멀리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어떤 위대한 인간과 같은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슐라이어마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절대적이며,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 안에 내재하는 초인격적인 능력인데, 피조성이 그 존재에 부과하는 모든 차별성을 뛰어 넘는다고 합니다.
(5) 기독론
슐라이어마흐는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고 그 대신 ‘하나님-의식’이라는 경험에 기초한 기독론으로 그것을 대치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애초부터 절대적으로 막강한 ‘하나님, 의식’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 외에는 나머지 인간들과 완전히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속자는 인간본성이라는 정체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같으나, 그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의 일정한 힘 때문에 모든 인간들과 구분됩니다. 그것은 그 안에 계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슐라이어마흐에 의하면, 예수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식’은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을 표현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이상성입니다. 곧 그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니님 의식’의 이상이며, 완전한 경건의 궁극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구속 사역은 그가 이러한 하나님 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재생산성.(Vorbildlichkeit)입니다.
[출처] 슐라이에르마흐의 사상|작성자 종
슐라이어마허는 그의 삶의 여러 시기에 종교적 감정의 특성과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다른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초창기에는 그것을 우주에 대한 감정 또는 직관, 이성과 자연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 유한하고 시간적인 것 안에서 무한하고 영원한 것에 대한 의식이라고 불렀습니다.후년에 그는 그것을 절대적 의존의 감정이라고 묘사했거나 같은 의미로 신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이라고 했습니다. 종교에 대한 연설. (1799) 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종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깊은 욕구에 대한 해답입니다. 그것은 형이상학도 도덕성도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본질적으로 직관과 감정입니다. 교리는 적절하게 말해서 종교의 일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종교는 무한과 직접 관계를 맺는 기적이며 교리는 이 기적의 반영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과 개인적 불멸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종교의 일부가 아닙니다. 신이 없는 종교를 생각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주에 대한 순수한 관상일 것입니다. 개인적 불멸에 대한 욕망은 오히려 종교의 부족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종교는 자신의 유한한 자아를 보존하기보다는 무한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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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5: 교회
현대 신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YOUN
2011. 5. 9.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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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학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
비록 자유주의 신학이 오늘날에는 엄청난 비판을 받고 있다지만, 그것이 현대 신학에 끼친 막대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다. 특히 자유주의 신학의 시작을 열었던 슐라이어마허가 없었다면 과연 오늘의 그리스도교 신앙은 도대체 어떤 상태일 지 나는 상상조차 잘 되지 않는다. 아마 그리스도교는 근본주의의 맹목적 믿음을 따르는 신앙이 되었거나, 아니면 근대의 합리적 학문에 발이 잡혀서 소멸되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인 바르트조차 슐라이어마허를 '영웅'이라 부르면서 현대 신학자들 중 슐라이어마허의 영향 아래 있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말하였다.

슐라이어마허는 신학에 있어 코르페니쿠스적 대전환을 일으켰다. 코르페니쿠스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다고 주장하며 당시의 천문관을 완전히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