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마지막황제 부의
12대 선통제/부의 (재위 1908~1912)
1911년 7월 6살의 어린황제 푸이는 자금성에서 황제 공부를 시작했다.
몇달 뒤 손권에 의한 산해혁명은 500년 역사의 만주족 청나라는 망하고 말았다.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푸이(선통제)는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므로 수천년을 이어져내려온 기나긴 중국 왕조를 마감했다.
산해혁명 후 새로 들어선 중화민국 정부는 옛황실에 대한 예우로 마지막 황제 푸이를 자금성에서 계속 살 수 있도록 했다.
자금성 밖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으나 자금성 안에서는 여전히 푸이를 황제로 모시며 내시와 하녀들을 거느린 황제의
생활을 지속했다.
높은 자금성의 벽도 새로운 문물을 막지는 못해 황제 푸이는 자신의 손으로 청나라의 상징인 변발을 가위로
자르고 자신의 침실에 전화를 설치했으며 자전거를 배워 갓난아기때 황제가 되어 자금성에 유배되다시피한 자신의 답답한
심정을 자전거를 타면서 해소시켰다.
어린 황제에게 영어를 가르켰던 영국인 존스턴은 영어만이 아닌 인생의 스승으로 진심으로 어린황제를 가르키고 보살폈으며
영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마지막 황제의 영어스승이었던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1924년 11월 푸이는 자금성에서 쫒겨났을때 자금성에는 내시 470명과 궁녀 100여명이 있었다.
푸이는 자신의 가족, 시종 몇명과 개인적으로 소유하던 재물등을 5대의 차에 싣고 자금성을 떠났다.
일본정부가 푸이의거처를 마련해줘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 머물다가 텐진의 일본인의 유락시설인 장원으로 이주했다.
이로써 일본군과 푸이의 긴밀한 관계가 시작되어 서로 공생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일본군으로는 만주족인 푸이를 이용해
만주로 진출하는 기회를 잡게된 것이다. 국민당에 의해 건륭제와 서태후의 묘가 파괴되고 약탈하게 되자 푸이는 외부 세력과
손을 잡고라도 청나라의 재건을 꿈꾼다.
1934년 일본 관동군은 만주를 침공해 꼭두각시 왕조 만들어 텐진에 있던 푸이를 탈출시켜 만주국의 황제로 내세워 만주국의
황제로 즉위하며 강덕제가 되었다. 한나라의 황궁으로는 위험이 부족하다고 생각해 만주국의 황궁을 새로 지었으나
일본관동군의 도청을 두려워해 정작 푸이 자신은 한번도 만주국 황궁을 이용하지 않았다. 만주국의 황제였으나 관리의
임명등 모든 일은 일본관동군의 동의가 없으면 할 수 있는게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허수아비 황제였으며 거의 대부분의
만주국 관리는 일본인이 차지했다.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일본으로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중국으로 넘겨진 후 10년간 수용소에서
사상교육을 받고 특사로 풀려나 정원사로 일을 하다가 1967년 베이징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푸이에게는 5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중 정식부인인 황후가 일본 장군의 아이를 낳게 되자 갓난 아이를 화롯불에 던져 죽이는
사건까지 발생하게 된다.
황후는 파란 만장한 자신의 삶을 맨정신으로는 도저히 살 수없어 아편 중독에 빠져 타락 생활을 즐기다가 1946년 연길의
감옥에서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이 병사하고 말았다. 그녀는 죽을때까지 푸이가 화롯불에 던져 죽은 아이가 살아있는
줄 알았다.
두번째 부인은 1931년 이혼을 허락받고 학교를 설립해 아이들을 가르치며 평민으로 혼자 살아가다가 1950년 병사했다.
푸이가 가장 사랑한 3번째 아내는 17세의 학생때 귀인으로 발탁된 후 24세때 갑자기 사망했다.
네번째 아내는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푸이와 헤어져 장춘에서 푸이의 옥바라지를 했으나 황제의 첩이라는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29살때인
1956년 푸이의 이혼 후 평범한 남자와 재혼했다.
다섯번째 아내는 부의가 1950년~1959년까지 10년간 전범 관리소에서 평민으로 새롭게 살기위한 개조교육을 마친 후
중국 정부의 소개로 30대 처녀간호사로 만나 암으로 푸이가 사망하기까지 마지막 5년간을 옆에서 지켰다.
푸이는 그 많았던 여자사이에서 후손이 없었으며 죽은 후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3번째 부인과 합장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가 사후 28년 황제로 복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