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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牧師)인가? 牧童과 目四와 木死인가?(엡 4:11~12)
◾강중노회 설교(2023. 4. 10)
◾博士 學位 論文集 草案(#105)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牧師(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說敎大指(설교대지)
1. 牧師(목사)는 牧童(목동)이다
2. 牧師(목사)는 목사(目四)이다
3. 牧師(목사)는 목사(木死)이다
3. 牧師(목사)는 목사(木死)이다
* 序論(서론) 및 背景(배경)
✔ 牧師(목사)라는 직분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이 되었다. 牧師(목사)라는 단어가, 신구약 성경 중에서, 단 한 번 나오는, 유일무이한 직분이다.
✔ 한글 성경에 牧師(목사)로 기록된 헬라어는, ≪포이메나스≫의 원형인 ≪포이멘≫이다. 이는 "보호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근에서 유래가 되었다.
✔ 牧師(목사)라는 단어인 헬라어의 ≪포이멘≫은, "가축 지기"와, "양을 치는 목동"과, "목자"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자신의 신분을 말씀하실 때에,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다(요 10:11). 목자라는 단어도, ≪포이멘≫을 사용했다.
✔ ≪포이멘≫과 같은 어근에서 발생한 ≪포임네≫가, 양떼를 의미한다는 것(눅 2;8, 고전 9:7)은, 이 ≪포이멘≫이 양과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자라는 것을 나타 낸다.
✔ 목사에 이어서 등장하는 교사와 목사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Augustine, Jerome, Meyer)와,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견해(Ambroes, Calvin, Beza)가 있다.
먼저 목사와 교사를, 동일한 직분으로 보는 견해는, 교사를 가리키는 헬라어 ≪디다스칼루스≫라는 단어 앞에, 관사인 ≪두사≫가 없다는 점을, 그 근거로 든다.
✔ 이 견해에 따르면, 목사는 곧 "가르치는 교사"라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2장 28절에서, 사도와 선지자 다음에, 교사가 언급되는 점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 반면에 목사와 교사를, 다른 직분으로 보는 견해는, 먼저 목사를 감독과 장로로 나누어 지는, 교회를 다스리는 직분으로 보고, 교사를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영적인 직분으로 본다.
✔ 실제로 목사라는 용어는, 빌립보서 1장 1절이나, 디모데 전서 3장 2절에서는, 감독이라는 용어로,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도행전 14장 23절이나, 디모데 전서 4장 14절에서는, 감독이라는 단어를, 장로라는 용어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
✔ 이상 목사의 두 가지 견해 중에서, 헬라어의 문법으로 보면, 전자가 타당하다. 즉 목사는, 곧 "가르치는 교사"라는 것이다(Hendriksen).
신학자인 F. F Bruce도, 이 사실을 지지하면서, 가르치는 일은, 목회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교사라는 두 용어는, 서로 결합된 한 가지 사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했다.
✔ 현재 교회에서는, 선지자와 사도의 직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나, 전도자나, 목사의 직분은 지속되고 있다.
✔✔ 그렇다면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을 볼 때에, 목사(牧師)인가? 아니면 牧童과 目四와 木死인가? 당연히 목사(牧師)가 아니라, 牧童과 目四와 木死이다.
1. 牧師(목사)는 牧童(목동)이다
✔ 양치기라고 하면, 격이 아주 낮은 듯해서, 잘 사용을 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목자와 목동이라 부르면, 격이 맞지 않을까?
✔✔ 예수님 당시에 목동들은, 사회적인 약자들이었다. 단순히 약자이기 이전에, 비천한 직업이 목동이었다. 예루살렘에서 분뇨를 처리하는 직업보다, 훨씬더 천한 직업군이, 바로 목동들이었다.
✔ 목동들은 오히려 주인의 양새끼를, 도둑질 한다는 오해와, 양새끼를 슬쩍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이러한 오해와, 사회적인 편견에도 불구하고, 목동들은 밤에 잠을 자지도 못하고, 양떼를 지킨 것이다.
혹시라도 양을 잃거나, 이리에게 찢기기라도 하면, 목동이 대신 물어 주어야 했다. 그러므로 가난한 목동들은, 온 힘을 다해서 양들을 돌보아야 했다.
✔✔ 목동은 실로, 고달프고 천한 직업이었다. 세리가 소문난 도둑놈인 것처럼, 일설에 의하면 목동들도, 도둑놈의 취급을 받았다.
✔✔ 목사는 벼슬이 아니다. 사(師)자가 붙어서, 그럴듯하게 보인다. 그러나 사실 놈자(者) 이상이 아니다. 목사는 천한 목동들이라는 것을, 아멘으로 인정을 해야 한다.
스승 사자라는 단어가, 사람을 높혀서 부르는 단어이다. 그러나 성경적인 목사는, 존경을 한 몸에 받아야 할 직업은, 결코 결코 아니다.
목사들은 들판에서 양을 돌보는 천한 목동들처럼, 밤낮 수고를 해야 하는 직업이 목사이다. 예수님과 사도들과 바울이, 그렇게 살았던 것어다.
✔✔ 존경을 받고, 높임을 받고, 명예를 얻고, 돈과 인기와 명성을 얻고 싶다면, 목사직을 내려 놓는 것이 어떨까? 왜냐하면 목사란 명성과 존경을 받는, 그러한 직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 목사는 이름도 없이 섬기고, 빛도 없이 섬기다가, 죽어야 할 이름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목사의 전성시대를 구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이 맡긴 양떼들을, 목숨을 바쳐서 죽도록 돌보고, 잘 섬긴 목동들은, 비록 이 땅에서는 고난을 겪고, 아픔을 당하고, 애통의 눈물을 삼킬 것이다.
그러나 훗날에 하나님이, 친히 눈물을 닦아 주시고, 넓은 품에 안아 주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다.
✔✔ 이러한 믿음과 소망과 사명감으로, 목동의 사명을 바르게 잘 감당해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목사가 아니라, 목동이라고 불리우는 것이, 가장 성경적이고, 가장 큰 영광이 될 것이다.
2. 牧師(목사)는 목사(目四)이다
✔ 목사(目四)란 무엇인가? 이는 다시 말해서, 목사는 눈이, 4개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사의 4개의 눈이란 무엇인가?
(1) 건강한 눈이다
✔ 만일 육신의 눈이 멀게 되면 구약의 이삭처럼, 에서와 야곱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육신적으로도, 건강한 눈을 가져야 한다.
육신의 눈이 침침해서, 김집사인지 이집사인지도 알아보지 못하면, 교인들이 시험에 든다. 목사는 사역하는 동안에, 무엇보다도 건강해야 한다.
(2) 상식의 눈이다
이성적 판단은, 나쁜 것이 아니다. 상식이 풍부해야, 이성적인 안목을 가질 수 있다. 요즘 상식이 부족한 목사들이 많은 것 같아서, 심히 안타깝고 서글프다.
✔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눈으로, 교회와 목사를 바라 보지 않는다. 상식의 잣대로 라 보고 판단을 한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목사를, 사회가 인정하겠는가? 사례비와 생활도, 상식을 벗어나서는 안된다.
억대의 연봉이,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근로자의 평균 임금 이하로 사례비를 정하고, 그것으로 만족하게 여기면 얼마나 좋을까?
(3) 성경의 눈이다
✔ 목사가 성경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찌 말씀을 바르게 전할 수 있겠는가? 말씀을 말씀답게 전하는 목사가, 비로소 바르게 목양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말씀을 공부해서, 영적인 지력(知力)을 키워야 한다. 말씀을 보는 혜안(智慧의 눈)이 있어야, 양들을 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다.
말씀의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양들을 인도하는 목사가 되려면, 말씀을 바로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목사다운 목사가 된다.
(4) 예수님의 눈이다
✔ 아무리 육신의 눈이 밝고, 상식의 눈을 가졌고, 말씀의 눈이 있다고 해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지 않으면, 목사다운 목사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의 눈으로 양들을 보게 될 때에, 양들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게 된다. 목사는 양떼를 인도하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선도양(先導羊)으로서, 양무리를 예수님께로 이끌어야 한다.
✔ 목사들의 마음이 청결하므로, 늘 예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비로소 바른 목양을 할 수 있다. 예수님의 눈으로, 양떼를 돌아 보아야 한다.
목사는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영안이 열려야 하고, 예수님의 눈 빛만 보아도,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목사라면, 더할 나위가 없이, 좋은 목사가 될 것이다.
3. 牧師(목사)는 목사(木死)이다
✔ 목사(木死)란 무슨 뜻인가? 이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는 다는 것이다. 십자가(十字架)는 형상화 된 글이다. 한자 문화권에 사는 우리로, 의미를 잘 알기 때문에, 그대로 사용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성경에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나무기둥은,
헬라어로 ≪스타우로스≫이다. 십자가 사형틀은, 페니키아인들의 사형 방식이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가져다가 사용을 했다.
✔ 형장에 세워 놓은 나무 기둥을, 우리는 십자가로 번역해서 사용을 하고 있다. 가로목을 지고 가서, 손에 못을 박고서, 나무기둥에 매어 달았다.
윗 부분에는, 죄목을 적은 판대기를 붙혔다. 나무 형상이, 열 십자를 닮았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나무 기둥에 달려서 돌아가셨다.
그런데 신약을 눈여겨 보면, 나무 기둥≪스타우로스≫이라 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냥 나무≪크실론≫라고 하고 있다.
사도행전과 베드로서가, 그렇게 말하고 있다.
✔ 십자가는 예수님이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린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율법에 보면, 저주를 받은 자마다, 나무에 매달았기 때문이다.
✔✔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저주를 받으신 우리 주님이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단순한 나무 기둥이 아니라, 실로 생명나무이다. 예수님 자신의 피와 살을, 죄인들을 살리기 위해서 내어 주신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서,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나무 과일과 같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떡과, 생명의 음료수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생명나무 이전에,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였다. 모든 사람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나무의 실과를 먹었고, 범죄한 아담의 후손들이 되었다.
✔✔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그 나무≪크실론≫에 달리셨다. 모든 자가, 선악의 지식나무(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나무이다. 그것을 기록한 말씀이, 십자가의 복음 곧 나무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해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 선악의 지식나무도, 예수님과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죽었다. 믿는 자에게, 더 이상 선악의 지식나무는 없다.
영적으로 보면, 우리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은, 죄악된 세상의 한 중앙으로서, 영적으로 애굽 혹은 소돔이였다.
✔ 세상 중앙에 우뚝 선, 그 나무에 달리신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온 세상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 이것이 예수님이 나무를 지신(달리신) 이유와 의미이다.
십자가의 그 나무가, 생명나무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역설적인 신비이다. 바울의 복음에서도,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죽은 자를 살리는, 생명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님을 따르는 자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오라고 하셨다.
일반 성도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목사는 특별히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의 그 죽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삼아야 한다.
✔✔ 목사는 십자가에 달려서, 날마다 죽어야 하는 직분을 맡은 자이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는 의미로, 목사(木死)라고 하는 것이다.
죽지 않고 시퍼렇게 살아서, 목회하는 자가 누구인가? 목사가 죽지 않았는데, 성도들에게 죽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발 좀 바울처럼, 날마다 죽기를 바란다.
✔✔ 목사는 예수님 죽으신 그 나무에, 예수님과 함께 달려서 죽어야 한다. 그런데 어찌하여, 산 냄새를 풀풀 풍기는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바울처럼 날마다 죽자! 그래야 부활 할 것이 아닌가?
4. 牧者(목자)와 牧師(목사) 중에서 어는 것이 聖經的(성경적)인가?(엡 4:11~12)
"그가 혹(或)은 사도(使徒)로, 혹(或)은 선지자(先知者)로, 혹(或)은 복음(福音) 전(傳)하는 자(者)로, 혹(或)은 ✔목사(牧師)와 교사(敎師)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聖徒)를 온전(穩全)케 하며, 봉사(奉事)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 신.구약 66권 성경 중에서, 牧師(목사)라는 단어가 과연 있을까? 물론 있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 목사라는 단어가 딱 한 번 나온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성경이 기록되었던 1세기에, 과연 지금의 목사에 해당하는, 사역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까? 아니다. 절대로 없었다.
✔ 상식적으로 보아도, 15세기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목사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 그 후에도 언제부터, 목사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는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牧師(목사)는 "牧者"(목자)의 분명한 오역이라 것이다.
※ 牧師(목사)가 "牧者"(목자)의 오역이라 성경적인 근거
(1) 에베소서 4장 11절에서, 목사로 번역한 헬라어 ≪포이멘의 원형, 포이메나스≫을, 다른 곳에서는(요 10:2, 11, 14, 눅 2: 8. 히 13:20 등)모두다, "牧者"로 번역을 했다.
≪카이 아우토스 에도켄 투스 멘 아포스톨루스 투스 데 프로페타스 투스 데 유앙겔리타스 투스 데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헬라어 원문).
✔ 왜냐하면 이상의 다섯 구절에 나오는, "牧者"라는 단어를, 牧師라는 단어로 代置(대치)을 해서 읽으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2) 예수님께서 시몬 배드로와 제자들에게, 내 양들을 잘 돌보라고 명령을 하셨다. 즉 "牧者"(목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셨다(요 21: 15~17).
(3)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선한 "牧者"(목자)라고 말씀을 하셨다(요 10:14).
(4) 목사의 "師"자는, 스승 "師"자이다. 그래서 글자 그대로의 뜻은, 양을 치는 스승과, 양을 치는 선생이다.
(5) "師"(사)자에는, 선생이라는 뜻도 있다. 신약 성경에 보면, 선생이라는 단어를, 오직 예수님에게만 사용을 했다.
✔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불렀다. 이는 예수님은 제자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존칭을 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불렀다.
(6) 야고보서 3장 1절에 보면, 이러한 말씀이 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7) 마태복음 23장 12절에 이러한 말씀이 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 지리라".
✔ 따라서 양(성도들과 교인들을)을 치는 일을 하는 사람의 호칭은, 마땅히 牧師(목사)가 아니라, 반드시 "牧者"(목자)가 되어야 한다.
✔✔ 참고로 한글 성경 가운데, 현대어 성경과, 킹 제임스 성경과, 회복역 성경과, 공동 번역 성경과, 한자어 성경은, 牧師가 아니라 "牧者"로 번역을 했다.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과, 표준 새번역 성경과, 헬라어 직역 성경은, 牧師로 번역을 했다.
✔ 영어 성경과, 현대어 영어 성경은,
"Pastor"(목사)로 번역을 했다. 고어 영어 성경은, "Shepherd"(목자)로 번역을 했다.
✔✔ 그러므로 "牧者"로 번역을 해야, 성경의 본래의 뜻을 살리는 번역이 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牧師로 번역을 했을까?
✔ 한문 성경을 한글로 번역한, 1937년에 발행된 신약 전서에서도, 야고보서 4장 11절을, 牧師로 번역한 것을 보고서, 다음과 같이 추정해 볼 수가 있다.
한국의 선교 초창기에는, 성경을 우리 말로 번역을 하는 선교사들과 함께, 성경 번역에 동참한 조선 사람들이 있었다.
✔✔ 학식과 믿음을 함께 갖추고, 지도자로 세울만한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양반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리고 스승을 의미하는 "師"자를 붙여서, 牧師(목사)라고 부른 것이다
✔ 비록 牧師(목사)라는 단어가 정착이 되기는 했다. 그러나 오역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牧者"가 성경적으로 옳다면, 당장 시정을 해야 한다.
✔ 또한 야고보서 3장 1절과, 마태복음 23장 12절을 근거로, 양을 치는 스승인 牧師(목사)가 아니라, 양을 치는 사람인 "牧者"로 訂正해야 한다.
다윗도 시편 23편 1절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여호와는 나의 "牧者"(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다.
✔✔ 예수님도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선한 "牧者"(목자)라고 했다. 하물며 죄인인 우리가 언감생심, 선생을 의미하는 牧師(목사)라고 할 수가 있을까? 어째야 쓰까!!
✔ 교회의 이름을 보더라도, "선한 牧者"(목자)라는 교회는 있다. 그러나 "선한 牧師"(목사)라는 교회가 없다.
✔✔ 이는 "牧者"(목자)는 성경적이다. 그러나 牧師(목사)는 비 성경적이고, 인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생각을 하실까? 하나님은 양을 먹이는, "牧者"(목자)를 더 좋아 하실까? 아니면 선생을 뚯하는, 牧師(목사)를 더 좋아 하실까?
✔ "Which does the Lord prefere". 자! 그렇다면 결론으로, "牧者"인가? 아니면 牧師인가? 이는 당연히 牧者가 맞다. 왜냐하면 牧者는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면 목자장(牧者長)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榮光)의 면류관(冕旒冠)을 얻으리라"(벧전 5:4).
"나는 선(善)한 목자(牧者)라. 선(善)한 목자(牧者)는 양(羊)들을 위(爲)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이시다(시 23:1).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요 10:11). 예수님은 목자장이시다(벧전 5:4). 그러므로 목사는 목자이다.
✔ 자! 그렇다면 다음 주일부터, 주보와 전도지와 요람과 간판과 명암에, 牧師 대신 牧者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좀 쑥스럽고 어색하지만, 牧者가 성경적이지 않는가?
✔✔ 아직까지도 전통과 관습과 편견과 선입견과 고집때문에, 牧師를 牧者로 고치지 않는다면, 어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다고 할 수 없다. 전통과 내 생각보다 말씀을 우위에 두고, 겸손하게 복종을 해야 한다.
🔥 헌신의 기도/ 손양원 목사
▪저는 과연 하나님 아들의 영광 이외에, 다른 무슨 영화를 위하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진심으로 오직 내 주님의 영화만을 위하여, 제 것을 희생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저라는 인간 자체는, 저의 집을 위하여, 제가 사랑하는 교회를 위하여, 대한의 기독 교회를 위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저 지체는 녹아 지고, 썩어 지고, 낮아 지고, 죽어 지는, 희생 자체가 되게 하소서.
▪저의 가족을 위하여, 제 일신(一身)을 희생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저의 교회를 위하여, 일신과 일가(一家)를 희생시키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저의 나라를 위하여, 저의 일신과 일가와 일교회를 희생시키는,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내 주를 위해서, 일신과, 일가와, 일교회와, 일국가까지 희생을 하고, 우리 만국 만민의 하나님을 위하여는, 모든 일체를 희생하는, 사랑의 사람이 되고 싶나이다.
🔯 보너스: 목사들의 가장 큰 죄는 무엇인가?
(1) 본문 말씀의 의도를 모르고 설교를 하는 것이다.
(2) 성경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전하는 것이다.
(3)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4) 짝퉁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5) 유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6) 사이비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7) 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8)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19) 기복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0) 긍정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1) 가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2).사람들의 비위를 맟추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3).인기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4) 코메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5).유행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6) 감정을 자극하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7) 회개가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8) 회개의 복음을 하찮캐 전하는 것이다.
* 結論(결론) 및 敵用(적용)
지금까지 신학교에서 목사라는 단어를, 신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를 기반으로, 해석을 하지도 않았고, 가르치지도 않았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혹시 무지와, 무관심 때문이 아닐까? 매우 안타깝지 않는가?
목자는 예루살렘에서 분뇨를 처리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낮은 직업이었고, 양의 새끼들 도둑질한다는, 오해를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아는가?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서, 목사라는 단어는, 오직 단 한 번 밖에 기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사(원어 목자)라는 용어를, 마치 불문률로 사용을 하는 의도는 무엇인가?
선지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의 사역을 볼 때에, 목사(牧師)가 아니라, 牧童과 目四와 木死라는 것을 알고서 인정을 하는가?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이, 목사(牧師)의 사역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牧童과 目四와 木死라는 사역을 하고 있는가? 깊히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
만시지탄!! 비록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한국교회의 모든 목사들이, 목사(牧師)의 사역이 아니라, 牧童과 目四와 木死의 사역을 하는 것이, 성삼위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아는가?
오늘날 일부 목사들은, 성도들이 힘들게 연보한 돈을 가지고, 혹시라도 귀족생활과, 상류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부터 목사(牧師)의 사역을 내려 놓고, 牧童과 目四와 木死의 사역을 하는 것이, 성경적이고, 예수님이 원하시고, 모든 성도들이 바라는 목사상이라는 것을 아는가?
▪≪Nadulbok≫ Church bnk Pastor.
▪Doctor of ≪Preaching≫.
▪Doctor of ≪Missiology≫.
▪≪Thailand≫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
▪≪Laos≫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
▪≪Myanmar≫ Reformed Theological Seminary & College Profess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