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니 제인 크로스비는 1820년 3월 24일 뉴욕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출생했는데, 태어난지 6주만에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치료로 시각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아이가 보게 될 암흑의 세계를 생각하고는 한없이 슬퍼했습니다. 패니가 갓 돌을 지났을 때 그녀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존 크로스비가 중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때 어머니 머시 크로스비의 나이 21세였는데, 패니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큰 도시로 가 부잣집 하녀로 일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11살 되었을 때는 그녀를 눈물과 기도와 말씀으로 키우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38세 되던 1858년 그녀를 깊이 이해하고 사랑하던 시각장애인 교사 밴 앨스틴과 결혼한 후 귀여운 아기를 낳았지만, 곧 아기를 잃는 슬픔을 당했습니다. 패니와 밴은 부부이자 서로 돕는 배필로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녀가 사랑했던 남편마저 1902년 먼저 하늘 아버지의 집으로 갔습니다. 패니 크로스비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슬픔의 여인이었습니다.
세상서 가장 행복했던 여인 하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하나님과 동행한 삶을 살았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세상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언젠가는 돌아간다는 소망의 밧줄을 마음에 잡고 살았던 그녀의 삶은 천국 그 자체였습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그녀의 눈이 되어주었습니다. 외할머니는 늘 그녀의 곁에서 기도와 성경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한적한 교외를 함께 자주 거닐며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게 함으로써, 패니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을 직접 경험하게 해주었습니다. 8살 때 크로스비는 이런 씨를 썼습니다.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비록 보이지 않다 해도 이 세상을 나는 만족하리/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축복을 나는 얼마나 많이 누리고 있는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한숨짓고 눈물지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한숨짓고 눈물지으려 하지도 않으리.” 패니의 삶에는 특별한 특징 다섯 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그녀는 부지런한 일꾼이었습니다. 댄스홀과 술집, 거리의 여자들, 건달들이 있는 불결한 뒷골목에 함께 살면서 그들의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이 그녀 생애의 큰 사명이었습니다. 밤낮으로 늘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 영감어린 찬송시들을 써나갔습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있을 때마다 성경을 암송하고 골방에 들어가 기도했습니다. 둘째로 모든 면에서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이타적인 마음씨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소유한 것들을 남을 위해 철저히 썼습니다. 넷째로 어린아이처럼 항상 기쁨에 차 있었고, 슬퍼하거나 후회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는 놀라운 평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발길이 머무는 곳이면 어디든지 불쌍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로했습니다. 1905년 3월 24일에 그녀는 85세가 되었고, 뉴욕의 교회들은 이 날을 ‘패니 크로스비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이틀 후 주일, 미국 전역에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녀가 만든 찬송가 ‘결코 포기하지 마라’를 부르기 위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마라. 결코 포기하지 마라. 당신의 슬픔에 결코 포기하지 마라.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들을 벗어나게 할 것이다. 주를 믿으라. 주를 믿으라. 당신의 시련이 가장 클 때 노래하라. 주를 믿고 마음을 다하라.”
마지막까지 위로 전한 천사 패니 크로스비는 자신의 실명을 한 번도 원망하거나 실망한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패니의 찬양에는 그녀가 95세를 살면서 하나님과 동행한 마음속 깊은 눈물어린 고백이 담겨있습니다. 한 구절 한 구절 하나님을 향한 그녀의 사랑과 은혜의 간증이 녹아있습니다. 그녀는 90세 되던 10월, 지나온 세월을 정리하는 간증의 시간을 갖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많은 슬픔들이 내 인생의 여정을 가로질러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내주신 두 천사 곧 자비와 진실은 오랜 삶 가운데에서도 결코 부족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주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때는 내 뜻대로 안되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내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바로 그것이 나의 단순한 삶이 지금까지 인도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어느날 기자가 “어떻게 당신이 장애인임에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나요. 당신의 눈을 상하게 한 의사를 용서하기가 어려웠을 텐데요”하고 물었습니다. 패니는 손을 저으며 말했습니다. “그 사람을 비난하지 마세요. 그를 다시 만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귀한 선물을 제게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말할 거예요. 할머니는 나를 의자에 앉혀놓고 하나님께서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가르쳐주셨지요. 결국 그 분은 그렇게 하셨어요. 주님은 보이지 않는 나를 사용하셔서 그분의 뜻대로 하신 거랍니다. 만일 당신이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을 찾았다면, 그 사람을 보여주세요. 내 행복의 잔은 사랑하는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항상 넘치고 있어요.” 그리고 패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친구들의 얼굴이나 들판의 꽃, 푸른 하늘과 아름다운 별들을 볼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는 ‘만족’이라고 부르는 작은 보물을 평생 내 마음에 담아두겠다고 다짐했답니다.” 1915년 2월 12일 금요일 아침에, 금세기의 가장 뛰어난 찬송가 작사가인 패니 크로스비는 95세를 일기로 조용히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인 목요일 오후 9시에 딸의 죽음으로 슬픔에 잠겨있는 이웃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의 시 한편을 받아쓰게 한 후였습니다. “머잖아 아름다운 날에 그대 강가에 이르리/ 머잖아 아름다운 날에 그대 사슬이 풀리리/ 아름다운 인생의 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이들이 기다리리/ 머잖아 아름다운 날에 그들의 기쁨을 그대가 함께 할 때까지.” 장례식에서 패니가 다녔던 제일감리교 감독교회의 지오 브라운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많은 친구들에게 찬사를 받았습니다. 찬송가의 여왕이 죽음의 사슬을 끊어버리고 하늘의 영광으로 통과되었을 때에는 당당한 환영이 있어야만 합니다.”
찬송가 1만2000곡 작시 크로스비 여사는 믿음으로 사는 행복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성령과 피로서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 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204장) 우리가 즐겨 부르며 깊은 은혜를 받는 찬송의 많은 곡들이 패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시한 것들입니다. 그녀가 쓴 1만2000여 곡의 찬송시는 지금 지구촌의 성도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찬송곡들이 됐습니다. 한국 찬송가에도 24개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녀는 ‘찬송가의 여왕’ 이었습니다.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31장) △‘찬송으로 보답할 수 없는’(40장) △‘예수 나를 위하여’(144장) △‘주가 맡긴 모든 역사’(240장) △‘너희 죄 흉악하나’(255장) △‘인애하신 구세주여’(279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장) △‘기도하는 이 시간’(361장) △‘나의 생명 되신 주’(380장) △‘나의 갈길 다 가도록’(384장) △‘오 놀라운 구세주’(391장) △‘주 예수 넓은 품에’(417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435장) △‘십자가로 가까이’(439장) △‘주와 같이 되기를’(454장) △‘저 죽어가는 자 다 구원하고’(498장) △‘자비한 주께서 부르시네’(531장) △‘주께로 한 걸음씩’(532장)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540장) △‘예수 사랑하심을’(563장) △‘예수께로 가면’(565장) △‘후일에 생명 그칠 때’(608장) △‘언제 주님 다시 오실는지’(통일찬송가 163장) △‘주의 십자가 있는데’(통일찬송가 501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