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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팝의 전설을 꼽을때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마이클 잭슨 이렇게들 말하잖아요.
하지만, 몇몇 마이클 잭슨 팬들께서 비틀즈는 뭐 나름대로 이해가 되지만 엘비스는 왜 유명하고 전설적인 아티스트에 꼽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라고 고개를 갸우뚱 하시는 분들이 계신데요.
그래서 오늘은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해 알고 싶은 몇가지것들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것을 읽으면서 아주 재밌는것들을 발견하실 수가 있는데 엘비스건 비틀즈건 그들의 음악적 뿌리는 흑인 음악에 있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멍청한 백인들은 그것들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죠.
어찌되었건 엘비스로 인해 마이너리티 문화였던 흑인 문화가 메인스트림에서 성공하는 혁명을 일으켰고 락큰롤이 정리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기게되었습니다.
그냥 편하게 읽어보시고 아... 엘비스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라고 고개를 끄덕이신다면 제가 의도한것이 된것이어서 기쁘겠어요.
그리고 제발 마이클 잭슨을 비교하려면 레벨과 볼륨이 맞는 사람들과 비교했으면 하는게 저의 정말 절실한 소원입니다.
정말 엉뚱한 사람들과 비교하는건 정말 보기 흉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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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는 트럭운전사로 일을 하던 중에 자신의 어머니의 생일에 선물로 주기위해 썬Sun 레코드에서 노래를 녹음했다.
당시에는 누구나 돈을 주면 노래를 녹음할 수 있는 시대였다. 마침 그 스튜디오에 있던 로저 맥컨이 그의 독특한 그의 목소리와 백인도 아니고 인디언도 아니고 흑인도 아닌 묘한 모습의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습에 주목하게 된다.
엘비스는 결국, 데뷔를 하게됐고 그가 선택한 장르는 놀랍게도 락큰롤이었다.
멤피스는 전형적으로 컨트리 취향의 도시였지만 엘비스 프레슬리는 트럭 운전을 하면서 흑인들과 함께 어울렸다. 흑인들의 바에서 술을 마셨고 흑인들의 클럽에서 흥얼거리며 라이브를 즐겼다.
흑인들의 빅 스윙과 블루스 그리고 트위스트 리듬이 마구 마구 혼합된 락큰롤은 처음에 트위스트와의 장르 구분이 모호했다. 하지만 척 베리에 와서 내지르는 듯한 락큰롤 특유의 창법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컨트리와 달콤한 어덜트 컨템포러리에 익숙한 멤피스와 남부의 백인들에게 매력적인 외모의 남자가 기형적으로 머리를 세우고 마치 풍차처럼 허리를 돌리며 악을 쓰듯이 부르는 엘비스의 노래에 처음에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하지만, 흑인들은 금요일밤을 바와 클럽에서 지새웠다. 무엇이든 그렇듯이 이러한 마이너리티쪽에서는 엘비스의 음악이 당시에 자신들의 사운드였던 락큰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엘비스의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을 추었고 허리를 흔들었다.
엘비스의 음악은 서서히 레디오 스테이션에서 디제이들에게 호평받기 시작했다.
엘비스의 출발과 그의 전설적인 업적을 말할 때 장르의 혼합과 장르의 메인스트림화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당시에 프랭크 시나트라, 로이 오비슨, 앤 마거릿 같은 백인 가수들은 컨트리 앤 웨스턴 스타일의 음악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들은 멜랑콜리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사운드를 구사했다.
프랭크 시나트라는 40인조 팝스 오케스트라를 뒤에 세우고 멋진 수트를 입고 달콤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송들을 불러제꼈다. 앤 매가릿 역시 허벅지가 트인 멋진 드레스를 입고 40인조 팝스 오케스트라를 뒤에 세운 채 달콤한 러빙 유 러빙 미를 불렀다.
엘비스가 구사한 음악은 절대로 백인들에게 어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싸구려였고 그것들은 무례했으며 그것들은 너무 저질스러웠다.
고고하고 위엄과 우아함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것이 없는 백인들에게 그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엘비스는 백인이었지만 여기저기에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마이너리티한것들을 모두 다 받아들였다.
가죽재킷을 입고 백스트릿 보이스들처럼 어슬렁거리며 허리를 미친듯이 흔들었고 또한 흑인들처럼 혀를 낼름 낼름 거리면서 한쪽발을 들고 성기있는 부분을 앞으로 뒤로 들쭉 날쭉 거리며 무대를 희롱했다.
그것은 일대의 센세이션이었다.
2차대전이후에 전쟁세대들과 종전후에 태어난 세대들간에 많은 괴리감이 있었다. 여전히 전쟁 세대들의 문화밖에 없었던 미국의 팝 컬쳐에서 엘비스는 혁명이었다.
젊은이들은 엘비스처럼 몸에 꼭 끼는 까만 줄무늬가 쳐진 스트라입 티셔츠를 입고 가죽 재킷을 아무렇게나 걸치며 머리를 기형적으로 세우고 구렛나루를 기르기 시작했다.
몸에 바짝 붙는 하얀 바지와 허리에는 쇠사슬에 연결된 지갑을 가지고 다녔으며 담배를 필때는 한쪽눈을 찌그러트리며 거칠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게다가 백인들을 경악하게 만든것은 엘비스의 음악을 완성한 뮤지션들이 전부 흑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엘비스는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함께 고생한 멤버들과 무대에 올랐다.
백인들과 눈도 마주쳐서는 안되는 시대에 엘비스는 그런것따위를 상관하지 않았다. 멤피스에서 엘비스는 영웅으로 떠올랐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들에게 환영받고 백인들에게서 완성된 스타가 나타난 것이다.
엘비스의 초창기 사운드들이 락큰롤의 창시자라고 불리우는 척베리의 사운드와 많이 다르지 않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엘비스의 초창기 사운드는 흑인들의 빅 스윙과 트위스트 그리고 블루스와 소울등의 것들을 모두 받아들였으며 이것들을 최초로 메인스트림에서 성공시켰다.
그리고 엘비스는 당시까지는 넓은 댄스 플로어가 있거나 혹은 디너 식사를 하고 있는 클럽에서 공연을 하던것에서 벗어나 최초로 투어라는 것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리사이틀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엘비스 리사이틀은 멤피스에서 시작해 하다못해 하와이에서까지 공연을 했다.
이것이 미국 팝스 역사상 최초의 전국적인 투어의 시작이다.
엘비스는 최초의 앨범 광고를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엘비스는 버닝 러브 Burning Love의 싱글을 위해 드라마와 주요 쇼프로의 중간에 버닝 러브의 일부분을 인용해 광고를 했다.
하카 하카 하카하카 버닝 럽~ 하면서 엘비스와 함께 불타오르지 않겠습니까? 하며 엘비스가 윙크를 하는것으로 마무리지어진 그 광고는 최초의 싱글을 위한 티뷔 커머셜이 되겠다.
엘비스는 최초의 멀티플레이어라는 기록을 가지게되었다.
그는 무대위에서 울고 웃고 쓰러지며 자신의 음악의 가사에 맞는 행동들을 함께 취하며 드라마가 있는 무대를 선보였다.
돈 비 크루얼에서는 제발 잔인하게 그러지 말아요 하는 부분에서 손을 양옆으로 흔들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하운드 독에서는 개가 오줌누는 듯한 모습을 하며 손으로 왼쪽 허벅지를 찰싹 찰싹 때리며 무대위를 개처럼 뛰어다녔다.
핫브레잌 호텔에서는 무대뒤에 Hotel이라는 네온 사인이 하얀 천에 가리워진채 마치 안개에 쌓인듯이 나타났고 홀로 스폿라잇을 받은 엘비스는 미친듯이 허리를 흔들며 상심하게 만들지 말라고 호소했다.
이러한 투어의 내용들은 어느 주에서나 똑같았고 다만, 뉴욕주에서만 핫 브레잌 호텔에서 길거리 창녀같은 사람들이 호텔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듯한 모습으로 왔다 갔다 한 후에 갑자기 치마를 찢고 엘비스의 주변에 모여들어 함께 춤을 추었다.
엘비스는 최초의 콘서트가 중계되었고 수출되었다.
1974년 엘비스는 하와이에서 공연을 했다. 타이틀은 Aloha from Hawaii였다. 그것은 오랫만의 컴백 공연이었고 이 공연은 NBC에서 최초로 중계되었다.
이 공연은 전세계에 수출되었으며 극장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백인들은 리듬 앤 블루스 아티스트로 인정하는것을 굳이 거부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컴플렉스를 드러내는 것일뿐 그는 유감스럽게도 리듬 앤 블루스 아티스트이다.
그의 음악적 뿌리와 그의 인생에서 불렀던 대부분의 음악들이 그가 트럭 운전수로 일을 하면서 어울렸던 흑인들의 영혼에서부터 시작된것들이었다.
백인들이 그가 리듬 앤 블루스로 분류되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하는 몇 몇 곡들 예를 들면 Can't help falling in love나 Love me Tender 같은 곡을 예로 드는데 유감스럽게도 러브 미 텐더는 남부 흑인들이 목화밭에서 고단한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부르던 노래에서 따왔다.
그 단조로운 멜로디에도 불구하고 그 노래가 감상적으로 들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흑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백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멜로디였기 때문이었고 엘비스는 그 노래가 히트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하지만 그 노래는 히트했다. 이제는 이렇다할 미국을 대표할 만한 가곡이 없는 상황에서 그 노래는 일종의 미국을 대표하는 가곡처럼 되어버렸다.
한때 롤링스톤과 빌보드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바이오그래피에 리듬 앤 블루스가 아닌 컨트리 앤 웨스턴으로 장르를 기재함으로써 뉴욕타임스에서 이의를 제기했었다.
많은 논란끝에 평론가들과 현역 레디오 디제이들은 그가 리듬 앤 블루스 와 컨트리를 구사한 아티스트로 합의를 봤다.
하지만 이것은 정말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짓인가?
누가 엘비스의 노래를 듣고서 그가 컨트리 앤 웨스턴 아티스트라고 생각하겠는가? 예를 들어 그가 10곡의 노래를 불렀다면 컨트리 앤 웨스턴 스타일의 노래는 단 한곡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컨트리 앤 웨스턴 가수로 분류한다는것은 정말 백인들의 컴플렉스를 그대로 드러내는 우스꽝스러운 짓이 아닐 수 없다.
엘비스의 업적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팝 뮤직 씬에서 일으킨 혁명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최초로 마이너리티 문화였던 흑인들의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메인스트림에서 꽃피웠다.
2. 최초로 전국 투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리사이틀로 불리웠음)
3. 최초로 콘서트가 중계되었고 미국이 아닌 나라에 수출되었다.
4. 최초의 미국이라는 로컬 스타가 아닌 월드와이드한 스타가 되었다.
5. 최초로 미국의 레코드사가 엘비스 프레슬리의 앨범을 팔아치우기 위해 영국과 독일에 레코드회사 브랜치를 열면서 직배를 시작했다.
6. 콘서트에 드라마틱한 구성 요소들을 적용했다. 스펙테클러한 조명과 무대장치 그리고 온갖 다양한 포즈들과 각 노래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7. 최초로 콘서트장에서 의자를 없애버렸고 스탠딩 라이브를 시작했다.
8. 최초로 흑인 뮤지션들을 백 밴드로 무대위에 세웠다. 당시에 그런것들은 금기시되는 것이었지만 엘비스는 고집을 부렸고 그것은 성사되었다.
9. 최초의 워너비들을 생산했다. 기절 Fainted라는 단어를 유행시켰고 콘서트장에서 많은 소녀들이 기절했다. 엘비스의 공연장에 앰뷸런스는 마치 백밴드처럼 당연한 것이었고 소녀들은 열광했으며 소년들은 엘비스처럼 구렛나루를 기르고 거칠게 허리를 흔들었다.
10. 최초의 틴 컬쳐를 형성했다.
11. 최초의 멀티 플래티늄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12. 최초의 Fans Only라는 앨범을 발표하면서 EP앨범의 시대를 열었다.
엘비스는 1957년 1월 Loving You라는 앨범을 팬들만을 위한 앨범으로 발표했다. 이것은 정규 앨범이 아니었지만 정규 앨범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했고 결국
1958.59년도에 각각 Elvis Golden, Elvis Gold 2로 나뉘어 또 다른 팬스 온리 앨범을 발표하게되었다.
13. 최초의 부클릿을 시작했다.
팬들을 위한 앨범이었던 엘비스 골드의 부제는 His Story였고 그동안 엘비스가 팬들에게 사랑받았던 노래들과 신곡을 포함해 발표했으며 패키지로 엘비스의 대형 포스터와 사진 그리고 스티커같은것들이 박스에 담겨 판매되었다.
14. 최초의 대중적인 수퍼포스를 지난 팝 아이컨
엘비스는 미국이라는 로컬 스타를 벗어나 전 지구적인 스타로 발돋움했으며 영국과 독일등의 투어에서 국빈 이상의 대우를 받았다.
15. 최초의 스타왕국을 만들었다.
엘비스는 당시에는 가장 완벽하고 전세계에서 가장 큰 개인 저택인 그레이스 랜드를 건축했다.
집세를 못내 유대인 주인으로부터 쫓겨나 트럭에서 며칠 동안 가족들을 태우고 이곳 저곳을 방황해야만 했던 엘비스는 훗날 자신의 가족들을 쫓아냈던 유대인 주인으로부터 그 집을 사들여 당시에 개인 저택으로는 전세계에서 가장 크며 가장 화려하고 가장 스펙테클러한 주택을 건축했다.
그레이스 랜드 : 그레이스랜드는 멤피스의 남부에 위치한 슬럼가에 지어졌다. 왜 엘비스가 힐러웃 근처의 화려한 스타들의 거리에 집을 얻지 않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는 미국내에서 가장 형편없고 누구라도 한번쯤 찾아올 만한 이유가 없는 이 슬럼가에 그레이스 랜드를 세움으로써 전세계의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로 만들고 말았다.
코끼리와 사자 우리가 있는 작은 동물원과 놀이동산 그리고 연습실과 스튜디오가 있는 이 그레이스 랜드는 지금도 미국의 유산으로써 독일의 수상과 일본의 총리가 방문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되었다.
현재 동물원은 박물관으로 개조되었고 놀이동산은 보수작업을 거쳐 관광객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놀이 동산은 리사 마리를 위해 만들었는데 엘비스는 리사 마리에 대한 사랑이 대단해서 대형 요트의 이름도 리사 마리로 지었고 놀이 동산 이름도 리사 마리이다.
지금은 통상적으로 그레이스랜드 파크로 불리우고 있다.
그레이스 랜드에는 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개인 극장과 수영장, 동물원, 놀이동산, 숲, 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과 크고 작은 스튜디오들등이 있다.
16. 최초의 멀티플레이어
엘비스는 노래, 영화, 드라마, 쇼, 뮤지컬 등 대중 문화의 거의 전반적인 장르에서 활동했으며 또한 모두 성공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잘 알려진것처럼 굉장히 그림을 잘 그리는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신의 그림에 시를 함께 써 넣었고 몇가지 것들은 자신의 음악으로도 만들어졌다.
또한 지금으로보면 비디오 케머라와 같은 개념인 당시에 부자들만 소유했던 8미리 케머라로 숏필름등을 찍어 발표하기도 했다.
17. 최초의 뮤직비디오 형식을 도입
엘비스는 1959년 엘비스와의 데이트 A date with Elvis 앨범에 담긴 젖소의 블루스 Milk Cow Blues를 애니메이션과 실사가 섞인 형식의 음악극으로 만들었다.
별로 발표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 엘비스는 이것을 광고형식으로 드라마의 중간 중간에 내보냈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18. 최초의 자선 행사
엘비스 프레슬리는 스타로서는 처음으로 고아원에 도네이션을 함으로써 대중 스타가 대중들로부터 받은 사랑을 사회에 다시 환원해야만 한다는 모범을 보였다.
그는 군복무중에도 독일의 고아원을 방문해 세탁 시설과 샤워 공간을 만들어주었으며 홀랜드에서는 양로원에 침대를 도네이션하기도 했다.
이것이 당시에 엘비스는 길거리에 백불짜리 돈을 뿌리고 다닌다라는 소문을 만들어냈는데 어찌되었건 그는 살아 생전에 미국 뿐만 아니라, 캐나다, 홀랜드, 독일, 스위스, 영국 등지의 고아원과 양로원 그리고 전쟁 중에 다친 사상자들을 위한 재활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기부를 했다.
19. 스튜디오 앨범 기록
엘비스는 미국에서 120.3 million, 전세계적으로는 200 million장의 앨범을 팔아치웠다.
20. RCA를 멀티 기업으로 만든 장본인
엘비스 프레슬리는 RCA와 계약을 했고 알시에이는 엘비스의 앨범들을 직접 해외에서 팔면서 보다 많은 이익을 남기고자 했다.
결국, 알시에이는 영국과 독일 등 유럽에 지부를 설치했고 다국적인 연예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알시에이는 엘비스의 음반을 듣기 위한 오디오를 생산해내기 시작했고 티뷔와 냉장고를 생산하는 종합 전자회사로 키워나갔다.
알시에이는 레코드 소매점을 직접 운영했고 그것을 종합 전자제품 판매장과 결부시켰다. 알시에이는 영화와 음반, 그리고 티뷔 드라마와 쇼 프로를 제작하는 회사에서 그것들을 보고 들을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 회사로 급부상했다.
알시에이는 당시에 미국의 전자 제품 생산회사였던 GE 즉 지너럴 일렉트릭과 Zenith를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찰리 채플린의 몰락과 함께 별볼일 없던 영화사였던 RCA는 엘비스와 계약을 함으로써 그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는 절대 강자가 되었다.
RCA는 엘비스의 블루 하와이 같은 영화들을 제작해서 박스 오피스를 강타했고 또한 오리지날 사운드 트랙을 함께 팔아치우며 대단한 상술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엘비스의 사망과 함께 더 이상 엘비스와 같은 스타를 발굴해내지 못한 RCA는 이름뿐인 영화 음반 회사로 전락해버렸고 여전히 전자제품을 생산해내고 있지만 예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지는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팝스씬에서의 음반 기록 같은것들은 제외했습니다. 그것들은 워낙 많이 알려져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미국에서도 그 기록들이 정확한것인지에 대해서는 다들 의구심이 많아서요.
엘비스를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자료: An American Icon: Elvis Prsley
Revolution : Frist Pop Icon of Minority
Burning Lover : Elvis Story
Elvis Gold : Fans Only
Elvis.com
R & R is Dead
Dirty Rock : Elv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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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이클 팬들이 엘비스에 대한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한다는 것이.. 이상해요~ 전 비틀즈보단 엘비스에 더 가깝다 생각하는데..^^ 제 생각임.
전동의했어는데; ㅎ 지식인 보면 마이클하고 비틀즈는 다들인정하고 비교하는데 엘비스 얘긴 없길래 전 그냥 엘비스 징그러운 아저씬줄 알았는데 읽어보니 괜찮군요.... 언제 음악 한번 들어봐야할듯^^
아마 들어보면 그 목소리를 왜들 그리 좋아했는지 이해가실듯^^ 그리고 어 이거 들어봤는데 싶은 곡들 무지 많을거예요~ 사실 느끼하단 사람들도 주위엔 많았지만 전 느끼한 게 좋아서 ㅋㅋ
잘 읽었어요~ 엘비스도 확실히 대단한 사람이죠ㅎㅎ 다만 리사는 얼굴 말고는 별로 아빠 닮은게 없는듯; 엄청난 창작능력에 있어선 마이클 만세~ 하고 싶네요ㅎ 자유게시판에 옮기긴 너무 아까운 멋진 글이긴 하지만 어바웃MJ 게시판과는 성격이 맞지 않는것 같아 옮겼어요^ ^
멋진 글 지우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