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아시아 청소년 농구 선수권 이야기입니다.
전두환 독재에 항거해 대학생들이 연일 시위를 하던 1984년 4월에 잠실체육관에서 벌어진 대회였죠.
중국(중공) 선수들이 대한민국 땅을 밟은 최초의 대회였기에 화제거리도 많았습니다. 입장식 때 중국이 중국기를 들고 입장하자 대만 선수들이 입장식에 참가 안 하겠다고 해서 소란이 벌어졌던 기억이 있고요. 중국 선수들과 대만 선수들이 혹여라도 충돌하는 불상사라도 일어날까봐 많은 경찰들까지 출동해 있었죠.
한국팀은 2년 동안 대부분의 전국대회를 제패한 천하무적 용산고 3인방인 허재 (중앙대), 이민형 (고려대), 한만성 (연세대), 그리고 광주고를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끈 센터 김종석과 투지와 허슬이 뛰어난 리딩가드 강인태(단국대)가 주축인 팀이었습니다.
중국(당시 중공)은 송리강, 205센티의 떠오르는 신예 빅맨, 송타오, 그리고 그와 함께 트윈타워를 이룬 왕하이보가 중심이었습니다. 두 선수 모두 워낙 신장과 윙스팬이 좋고 유연하기까지 해서 골밑 수비가 너무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키는 작지만 뛰어난 피벗플레이를 선보인 이민형, 투지넘치는 허슬과 빠른 볼배급으로 완급을 조절한 강인태, 그리고 전천후 올라운더 폭격기, 허재의 활약에 힘입어 한국팀은 5~10점차의 리드를 경기 내내 가져갔습니다. 193센티의 센터 김종석도 자기 몫을 다 해줬고요. 다만 믿었던 고 한만성 선수가 너무 부진해서 일찌감치 가져갈 수 있었던 승리의 분위기가 막판까지 접전으로 갔던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허재는 대회 내내 30점 전후의 득점력, 8개 정도의 리바운드, 7개 정도의 어시스트, 2~3개의 스틸을 보여주며 맹활약했고, 중요한 일본전에서도 33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7스틸로 팀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아래 GIF 영상들은 결승전 중국(중공)과의 경기에서 보여준 허재의 플레이입니다. 보존되어 있는 영상이 후반전 마지막 7분 정도 밖에 없어서 매우 아쉽지만, 클러치 상황에서의 허재의 활약상을 맛뵈기(?) 정도 할 수는 있을 듯 합니다.
1. 허재 스텝백
지금에 와서 보면 흔한 플레이라 별 감흥이 없으시겠지만, 80년대 당시만 해도 훼이크 동작에 이은 저런 보폭이 큰 스텝백 점퍼를 구사한 국내선수는 없었습니다. 당시에 내노라 하던 슈터들, 박수교, 박인규, 황유하, 이충희, 최철권, 오동근, 그 누구에게서도 이런 스텝은 볼 수 없었습니다. 작고한 김현준 선수가 스텝백 비슷한 점퍼를 가끔씩 구사하곤 했었지만, 영상에서처럼 완전히 방향과 각도를 틀면서 공간을 창출해내는 플레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허재는 한국농구에 있어서 스텝백 점프슛의 선구자였습니다. 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2. 허재 오른손 돌파
이 경기 내내 허재가 보여준 돌파력은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웠습니다. 중국의 장신 수비수들이 버틴 골밑으로 과감하게 치고 들어가며 오픈된 팀원에게 킥아웃 패스를 해주거나 본인이 직접 해결해버림으로써 중국팀의 수비진을 다 헤집어놓은 선수가 허재였습니다. 한국팀의 공격을 풀어줄 플레이메이커가 없었기에 3번으로 출전한 허재가 포인트가드 역할까지 맡아야 했고, 지공일 경우엔 이민형과 함께 재치있는 피벗 플레이와 픽앤롤 플레이로 한국팀의 공격찬스를 많이 창출해 냈었죠.
이 경기 후반전에선, 80년 NBA 파이널에서 닥터 J가 선보인 그 유명한 베이스라인 스쿱샷을 허재가 직접 구사하기도 했습니다. 중국의 장신 수비수들이 페인트존을 다 가로막고 서있던 상황에서 베이스라인을 따라 치고 들어오던 허재가 그들 앞에서 붕 뜨며 백보드 아래쪽으로 들어가 공중에서 몸을 비틀며 리버스 레이업을 올린 것이었죠. 제 눈을 의심했던 순간입니다. 공이 림을 한 바퀴 돌아나오면서 슛은 성공시키지 못했지만 말이죠.
위 영상은 허재의 왼쪽 돌파에 속수무책으로 뚫리던 중국선수들이 허재의 왼쪽 방향을 견제하며 막고 서있다가 허재의 오른쪽 돌파에 허를 찔리는 순간입니다.
3 허재 클러치 샷 1
경기 종료가 5분 안쪽으로 들어오자 중국의 추격이 매우 거세졌습니다. 빠른 속공과 얼리 오펜스를 이용해 4~5점 차까지 한국을 추격해왔는데, 그 때마다 터진 허재의 안정된 클러치 슛들입니다. 이건 자유투라인 근처에서 시도한 풀업 점퍼.
4. 허재 클러치 샷 2
경기 종료가 얼마 안 남은 상황에서 중국의 공격이 연이어 들어간 직후에 터진 허재의 깔끔한 클러치 슛입니다. 쇼울더 훼이크에 이은 매끄러운 미드레인지 점프슛.
5. 허재 클러치 샷 3
막판엔 중국의 계속되는 파울로 자유투를 집어넣어야만 되는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한국팀의 우승에 쐐기를 박는 허재의 클러치 자유투 두 방입니다.
결국, 허재의 공수에 걸친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한국은 74 대 69로 중국을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리게 됩니다. 허재는 만장일치로 대회 MVP에 선정이 됐고요. 또래 중엔 아시아에 라이벌 조차 없는 허재였습니다.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죠.
결승전에서의 허재의 스탯은 28득점, 7리바운드, 8어시스트, 4스틸, 1블락 (제가 직접 기록했고 이게 당시 FIBA 기록지보다 더 정확할 겁니다).
허재가 국가대표 선수생활을 하며 중국을 꺾은 적이 딱 세 번 있었는데, 이게 그 중 한 경기입니다.
** 제가 지금 외출을 해야 해서 두서없이 기억나는대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나중에 찬찬히 읽어보며 보충할 내용이 있으면 또 하겠습니다.
첫댓글 이때 3점이 없었나보네요~~?
없었죠.
퀵니스가... ㅎㄷㄷ
왼손잡이인데 오른손 드리블이 엄청 좋네요
역대 최고의 풋워크 소유자입니다. 허재의 발은 언제나 움직였죠. 공이 손에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허재가 수많은 상대 수비수의 Pick (스크린)을 헤집고 빠져 나와 공을 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잔걸음을 재빠르게 디디는지 헤아리기가 사실 힘듭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제가 한 말 같은데... 저 당시에 NBA 농구를 봤다고 해서 스텝백 점퍼를 장착하긴 힘들었겠죠. 일단 스텝백 점퍼를 구사한 NBA 선수가 아이재야 토마스 정도 밖에 안 떠오릅니다. 일반화된 기술이 아니었기에, 허재 본인이 스스로 개발해서 써먹었다고 봐야 할 겁니다.
저 당시엔 외곽슛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돌파에 의한 득점을 했었고 기본적인 미드레인지 점퍼 정도만 있었죠. 그러다가 성인농구에서 현대, 삼성의 피지컬 수비에 막혀서 고전하다 보니, 몸도 벌크업했고 중장거리슛도 장착하기 시작한 겁니다.
@사와키타 에이지 많았습니다. 다 돌아가면서 거칠게 수비했죠. 이원우, 임달식, 김성욱, 손영기, 김광, 김진, 이삼성...
@사와키타 에이지 당시에는 피지컬이 뛰어나지 않았었습니다. 삼성에서는 임달식(185)이 허재를 마크했는데, 허재 린치 사건으로 유명하죠. 현대의 김성욱(193)선수가 그 당시 피지컬로는 최 상급이었지만 김성욱은 김유택 한기범 담당이었고, 허재는 이원우 선수와 종종 매치업 되었죠. 삼성은 조동우 선수가 있는데, 부상이 좀 잦았죠. 하지만 조동우 선수(프로필 신장 197, 실제 시장 195)는 키만 큰 선수가 아니라 점프도 괜찮았습니다. 중대와의 경기에서 김유택 한기범 트윈 타워 사이를 뚫고 호쾌한 원핸드 덩크를 성공시키기도 했죠. 현대는 이문규 선수가 몸이 좀 탄탄한 편이었고, 현대 센터를 보던 박종천 선수도 194에 준수한 체격을 자랑했습니다. 문제는 삼성 조동우 선수와의 점프볼에서 한번도 따 낸 적이 없었다는... 당시 허재가 피지컬 적으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고, 현주엽이 피지컬 하나로 고교 농구를 압살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사와키타 에이지 연대에서는 거의 서장훈 혼자서 린치를 당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주로 골밑이었죠. 중대의 경우는 김유택과 허재가 주로 린치의 대상이었죠. 그 강도는 서장훈과 비슷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제가 서장훈이 당하는 걸 보면서 아직도 어린 대학생한터 성인 선수들이 저렇게 심하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서장훈이나 허재, 김유택 같은 선수는 정상적인 수비로는 막을 수 없는 선수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레전드 선수들의 특징은 지금봐도 플레이가 멋스럽고 기술구사가 세련됐달까요. 시대가 흘러 트렌드가 변해도 뭔가 남다른 멋이 있어요. 영상도 유니폼도 신발도 다른 선수들도 촌스러운데 유독 멋짐이 뿜뿜.
와 ...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귀한 영상/자료 감사합니다~
이 대회 한국경기 대부분을 봤습니다. 허재는 용산중 시절부터 이미 차세대 국가대표로 주목받았구요. 용산고 1학년때부터 용산고의 에이스이자 리딩가드였습니다. 허재의 용산고 1학년 당시 해설을 맡았던 한창도씨는 향후 대한민국 농구를 10년 이상 이끌어갈 선수라고 칭찬했었습니다. 84년 청소년 대회 당시, 중국 선수들은 185센치의 가드선수부터 센터인 왕하이보(207), 송타오(206)선수까지 전원 덩크슛을 구사했었고 압도적인 전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명지고 3학년 이준호(196, 이종현 아빠)가 당시 우리나라 최 장신 선수였는데, 주전센터인 한양대 김종석(193) 외에는 장신선수가 없는 우리나라다 궁여지책으로 엔트리에 넣었던 선수였죠. 당시 우리나라 팀 기수가 이준호 선수였을 겁니다. 일본도 200신장의 선수가 있었는데, 게임은 거의 뛰지 못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필리핀 선수들은 키는 작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선수들이 웜업때 덩크슛을 구사하는 놀라운 탄력을 보여주었죠.
하지만 농구가 덩크와 신장이 다가 아니죠. 허재가 있는 우리나라는 골밑에서 김종석 선수의 부투와 이민형 선수의 노련하고 안정적인 피봇, 그리고 한만성 강인태의 투지와 슛, 허재의 신기에 가까운 플레이로 우리나라는 중국을 꺾고 우승했습니다. 그 경기가 정말 대단했던게, 중국은 결승전에서 왕하이보와 송타오 트윈타워가 활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허재 한 선수에게 당하고 말았습니다. 왕하이보는 느렸지만 안정된 골밑 스킬이 인상적이었고, 송타오는 김종규를 연상케 하는 탄력과 날렵함이 돋보였습니다. 그 두 선수를 한양대 1학년 김종석선수가 193센치의 신장으로 정말 골밑에서 잘 버텨주었습니다. 김종석 선수는 필리핀과의 경기에서 상대팀에게 덩크를 먹은 뒤 바로 속공 원핸드 덩크로 응수하기도 했죠. 그 대회 우리나라의 유일한 덩크슛이었습니다. 이민형(190)선수는 아버지도 농구선수 출신이었은데, 당시 기업은행의 국가대표 포워드 이민현 선수와 이름이 비슷해서 주목을 받았었죠. 김종석 선수는 이 대회 활약데도 불구하고 대학에서는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리오타 이 경기를 라이브로 보신 분을 알게 되어 무척이나 반갑습니다.
이 대회에 출전한 중국, 대만, 필리핀 선수들이 몸풀 때 자유자재로 덩크하는 걸 보며 충격을 먹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필리핀의 아벨리노 림! 한국팀은 해봐야 이준호, 김종석, 허재 정도였죠. 이민형이 가능했을 것도 같고.
김종석은 런닝점프가 좋아서 경기 중에도 곧잘 덩크를 구사했던 선수인데, 서전트는 그리 좋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리바운드나 블락샷 등 세로수비를 할 때 불리함이 있었죠. 그렇다고 몸싸움에 능한 선수도 아니었고요. 성인농구에서 도태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리오타 허재의 중앙대 시절, 김유택 한기범 트윈 타워에 그나마 비볐던 멤버가, 동국대의 지금 감독으로 있는 서대성(195) 선수,동국대 에이스였죠. 이미 그때부터 머리숱이 점점... 동국대는 중대와의 경기에서 서대성과 이호근(이동엽 아빠)이 더블 포스트로 임했고, (성균관대는 대만에서 서지태(200)라는 센터를 수입해서 맡불을 놓기도 했습니다 . 명지대는 박지수 아빠 박상관(200)이 국민대는 혼혈 에이스 김성욱(192)이 졸업하면서, 중대 한기범에 필적할만한 추한찬(204)이라는 장신 센터를 발굴했는데 추한찬 선수는 일찍 선수생활을 접었죠. 연대는 최병식(193)선수가 외롭게 골밑을 지키고 있었고 고대는 최병식 선수만한 센터도 없을 정도로 심각했던 시절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농구든 배구든 195가 넘으면 장신선수로 주목받던 시절이었습니다. 국가대표 최장신 센터가 연대 출신 조동우(195)였으니까요. 조동우 선수는 부상이 워낙 잦아서 국가대표 센터는 신선우(190), 임정명(188) 조명선(190, 조명수 선수와 형제)가 주로 뛰었다는.... 가드 신동찬 선수도 190, 우리나라는 센터와 가드가 신장이 비슷한 기형적인 선수단이었죠.
@리오타 고대에는 최병식이나 김성욱보다 더 뛰어난 센터가 있었습니다. 바로 김윤호. 신장은 193에 불과했지만, 당시 농구대잔치 리바운드와 블락샷 부문 탑을 계속 유지했던 유능한 블루칼라워커 빅맨이었습니다.
@Doctor J 김종석은 지금으로 보면 그리 호리호리한 체격에 큰 키도 아닌데, 몸이 날렵하고 그런 스타일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성실하고 이타적인 플레이가 인상적이었죠. 그때 신문보도를 보면 한국팀에서 덩크슛이 가능한 선수는 두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종석과 또 다른 한명이겠지요.
@리오타 허재는 웜업 때 아주 쉽게 덩크를 했었고, 농구대잔치 경기 중에도 팁인 덩크를 성공시킨 적이 있습니다.
@Doctor J 김윤호 기억합니다. 불루워커 원조, 이제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188키의 센터 보던 친구도 있었던 같은데 이름이 가물가물하네요. 최철권 선수도 그시점에 고대에 있었지 않나 생각되네요
@리오타 최철권 선수가 84년 당시 고대 3학년이었죠. 그 때가 최전성기였다고 봅니다.
@Doctor J 허재가 덩크했다는 건 저도 기억하는데요, 허재가 덩크를 좋아하지는 않았다네요, 본인이 직접 얘기한 건데, 굳이 경기중에 덩크슛으로 힘뺄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자기는 주로 레이업으로 쉽게 마무리 한다고요. 허재가 그리고 자기는 김승현처럼 개인기를 부리는 스타일보다 이상민처럼 쉽게 감각적으로 하는 스타일을 선호한다고 말하기 까지 했습니다. 허재가 이상민과 강동희를 많이 좋아했죠.
@Doctor J 허재가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75점을 넣은 이후 고대 최철권 선수가 99점을 넣어서 우리나라 기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는 정말 대단한 슈터들이 많았죠. 슛이라면 떨어질 게 없는 허재 조차도, 이충희 김현준 박인규 이민현 황유화 최철권 같은 선수들한테는 한수 아래로 평가를 받았을 정도니까요.
@리오타 최철권의 기록은 97점인데, 이게 전국체전 경기에서 기록한 거라 사실 큰 의미나 가치는 없습니다. 그 기록 자체는 대단하지만요.
@Doctor J 쳄벌레인의 100점 기록을 생각하면 최철권 선수도 대단한 기록이다 싶었죠. 상대팀이 워낙 약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요. 허재는 당시에 단국대와의 경기에서 전반에 중앙대가 넣은 모든 득점을 혼자서 넣었었는데요. 단국대 측으로부터 공식적인 항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학생 스포츠에 비신사적인 플레이라는 거죠. 허재가 대단한게, 아무리 잘한다 해도 혼자서 전반전 50여 득점을 혼자서 해낸다는게, 참 대단한 거 같습니다
와....소중한 자료 정말 잘 봤습니다.
이런 형님이 이제는 예능을 하고 계시니...
세월 참...ㅋㅋㅋㅋㅋ
휴~~
저도 이 경기 중계로 본 기억이 납니다. 허재의 미친듯한 활약에 당황한 중국감독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죠.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중국감독이 한국 스탭에게 내가 많은 선수를 키워봤지만 이런 선수는 처음 본다고 했답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중국감독이 그런 소리를 했을 거란 확신은 안 들지만, 88년 올림픽 때 유고전을 마치고 유고감독과 드라전 페트로비치가 허재를 칭찬한 적은 있습니다.
그냥 딴딴한 느낌에 스피드가 충만해서, 동작 동작 하나가 임펙트 가득합니다. 정말 불세출의 농구선수인 거 같아요.
Dr. J 형님, 제가 이경기를 라이브로 삼촌이랑 보면서 허재선수에 대해 너무 강렬한 인상을 받았죠. 근데 오히려 저당시의 한국농구가 국제대회 나가서 오히려 선전했다는 느낌이 듭니다.
80년대 당시 한국농구를 보면 뭔가 한국만의 느낌이란게 있었어요. 그래서 외국팀과의 경기를 해도 비록 지기는 해도 종종 탄탄한 패스웍과 정확한 중거리로 그 팀컬러만큼은 확실히 유지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국내에서도 80년대에는 연휴나 결승전 경기가 있는 날엔 많은 사람들이 손에 땀을 쥐고 응원하는 열정적인게 있었는데 요즘 오히려 국내농구가 그당시보다 여러모로 사랑을 못받고있단 생각이 듭니다.
그럼요. 요즘 농구부터 접하신 분들은 콧방귀를 뀌실 지 모르겠으나, 80년대 한국농구 수준 무시 못합니다. 비록 2미터 넘는 빅맨들은 없었지만, 국내경기든 국제경기든, 그 깡과 배짱이 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투지와 근성은 정말 뛰어났었고요.
특히 82년 아시안게임 중국과의 결승전 경기 보면, 한국팀의 조직력과 패싱, 오프더볼 무브먼트 등이 혀를 내두르게 하죠. 이충희, 박수교, 신동찬, 임정명, 신선우, 이민현, 6인 로테이션이었는데, 6명 모두가 모든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봅니다. 6인 중 4인이 190 언저리 선수들이었으며, 6인 모두가 리바운드에 참여하고 패스하고 슛을 하고 돌파까지 하죠. 중국 수비진이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지금은 농구에 있어 키와 운동능력 등이 중요해 졌지만 80년대 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구는 슈터의 농구였죠. 기본적으로 슛을 못하면 선수취급을 받지 못하던 시대였습니다. 지도자들도 센터는 피봇, 박스아웃, 슈터에 공내주는 역할 정도만 시켰습니다. 그럴수 밖에 없는 게 당시에는 센터의 키가 너무 작았습니다. 70년대 국대 선수 센터 중에 한분은 "비행기를 타는 순간 내가 센터라는 사실을 잊게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요.
슈터들끼리의 경쟁도 치열했던 시대였습니다. 우리는 이충희와 김현준만 알고 있지만, 당시 현대 삼성이 아닌 기업은행에 입단한 이민현선수도 슛으로는 대단한 선수였고 국대 주전급 포워드였습니다. 박인규선수나 황유화 선수 역시 슛 정확도에서는 빠질 수 없는 선수였고 리딩가드의 교과서였던 신동찬선수나 박수교 선수도 슛이 매우 좋은 선수들이었습니다. 오히려 김동광 선수의 약점이 슛이었죠, 김영기씨나 신동파씨 같은 불세출의 슈터들이 끼친 영향력도 있었겠지요.
@리오타 이 당시 우리나라의 농구는 신장이 작다보니 국제대회에 나가면 2가지 전술이었습니다 지공으로 상대팀의 공격 횟수를 최소화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슈터들에게 슛찬스를 만들어 주는 전술. 그래서 당시 저도 82년 뉴델리 아시아 경기대회 중공과의 경기를 기억합니다, 베스트 5 전원이 정확한 슈팅에 빠르고 똑똑하고 공 운반능력에 팀에 대한 헌신까지 정말 대단한 선수들이었죠. 철저한 지공을 통해 장신 중공의 공격횟수를 줄였고, 도대체 센터가 누군지 가드와 포워드가 누군지 모를 정도의 올라운더들의 대활약이었습니다
물론 중국의 신장도 당시에는 대단했으나 요즘에 비하면 엄청나지는 않았습니다. 180대 가드1, 190초반 가드1 나머지 3명은 2미터 ~2미터5 사이의 운동능력 탁월한 포워드와 센터로 베스트5가 구성됐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 유명한 목철주(238로 알려졌으나 228이 정확함)선수의 신장이 압도적이었죠, 물론 당시 중국과 우리나라의 평균신장도 지금처럼 10센치 이상 차이가 났죠.
참 세련된 무브네요 지금 기준으로 봐도
다른 것보다도 여유가 진짜 돋보이네요. 저 나이에 클러치타임을 책임지면서 플레이 하나하나에 여유가 보입니다. 미드레인지 슛 1,2에서 보면 충분히 드리블을 하고 주변 찬스를 살피면서 가장 좋을 타이밍에 딱 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