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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 세계 새물결교회(연구-자료실) 원문보기 글쓴이: 주의 머슴
물질과 성공 (12)
◈59. (신약) 성경이 말하는 복 롬15:29
▲구약에 나타난 복
복을 비는 사람들의 심리는 세계 공통적입니다.
사람들이 성묘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사실 ‘조상이 주는 복을 받겠다’는 것입니다.
복을 구하는 심리 자체는 아무 잘못이 아닙니다. 인간의 본능입니다.
또한 하나님도 인간에게 복 주시기 원하십니다. 부모가 자식 잘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창조하시자 마자, 인간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창1:22
노아 홍수 이후에도, 새롭게 시작하는 인류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창9:1
아브라함을 불러서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습니다. 창12:2
▲그러나 구약은 신약을 통해 해석되어야!
우리는 신약을 통해 구약을 해석합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 받은 복도 <신약을 통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의 개념에 있어서, 오늘날 많은 분들이 “구약적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샤머니즘과 비슷한 요소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더욱 친근하기 때문이고,
자기 본성이 그것을 강력하게 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오복'은, 예수 안 믿어도, 운이 좋으면 받으며, 마귀가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령한 복'은 오직 예수님만 주십니다. 또한 '참 복'입니다.
사실 신약 성경 전체가 '복'이 무엇인지, 그 정의를 명확히 밝혀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다, ‘복되다’를 설명할 뿐입니다.
그러나 전체 분위기를 통해 신약성경이 의미하는 복을,
로마서와 에베소서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 전달하기 원했던 복을 예로 들어봅시다.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롬15:29
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주고 싶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로마서, 즉 '믿음으로 구원 얻는 복'입니다.
로마서 서두에도 비슷한 바울의 목적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영적인 선물)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함이니 롬1:11
즉, 바울이 주기 원했던 복은
믿음을 통해, 믿는 자들이 얻게 될 ‘신령한 복’이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를 통해 전달하기 원했던 복을 예로 들어봅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에베소서 1:3
로마서와 마찬가지로, 바울이 이해하고 말한 축복은 ‘신령한spiritual 복’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 현세적, 물질적인 복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약 복음서의 예수님의 행적을 보더라도,
예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오복을 노골적으로 베풀어주신 적은 없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불쌍해서 먹이시고, 병을 고쳐주신 것뿐입니다.
▲결론을 서두에서 밝히면
‘복’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니,
신약 성경에 약 50여회가 나옵니다. (아래에 모두 소개)
그것을 모두 읽어보니 “부자, 성공”등, 우리가 갖고 있는 일반적 (오)복의 개념은
<단 한 차례도 나와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부자, 성공, 출세, 건강’ 등의 복도 ‘성경적 복’에 포함된다고 봅니다.
‘일반 은총’적 영역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도 주시기 원하십니다.
다만 신약 성경에 강조가 되어 있지 않을 뿐입니다.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복은 <신령한 복, 복음의 복, 영적인 복, 영원한 복>입니다.
그 외 기복주의적 복은... 신약성경에는 바탕에 깔려 있지, 강조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복도 하나님이 기본적으로basically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복, 소중하게 받아 누려야 할 복은,
또한 주님이 먼저 절실히 주시기 원하시는 복은
<신령한 복, 복음의 복, 영적인 복, 영원한 복>입니다.
‘기복주의’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신령한 복’에는 관심 없고, ‘세상 복, 현세 복’에만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 복 때문에, 도리어 신령한 복을 얻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성경은 '거절'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해로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해롭지만 않다면...그것을 받아 누리는 것을...하나님도 원하십니다.
그럼 신약이 말하는 <복>이 어떤 것인지, 퍼뜩 분류를 해 보았습니다.
이 분류는 개인에 따라 다르게 분류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늘 나라를 상속하는 복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마태복음 25:34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사도행전 3: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갈라디아서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요한계시록 20:6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베드로전서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복음 1: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속죄, 구원, 믿음의 복
로마서 4: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로마서 4: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로마서 15:29
내가 너희에게 나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지고 갈줄을 아노라
갈라디아서 3: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라디아서 3: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
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사도행전 3: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말씀이나 진리를 깨달을 때 받는 복
마태복음 13: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태복음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누가복음 10:23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7: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말씀을 읽거나 순종할 때 받는 복
누가복음 11: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로마서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22:7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요한계시록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계시록 22:14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요한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야고보서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끝까지 충성할 때 받는 복
마태복음 24:46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누가복음 12: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누가복음 12: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누가복음 12: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고린도전서 7:40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
야고보서 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고난 당할 때 받는 복
누가복음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누가복음 6: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23: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베드로전서 4: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베드로전서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주는 자가 받는 복, 보상받는 복
사도행전 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누가복음 14: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갈라디아서 4: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를 주었으리라
마태복음 10:41 (아래 두 구절은 ‘복’은 아니지만, 유사한 개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누가복음 6: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 덕담, 인사로서의 복
누가복음 1: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누가복음 11:27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요한3서 2절 참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기원하노라
◑‘오복’ 개념의 복
(이 복들도 영적인 복으로 먼저 해석하고, 육적인 복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임.
히브리서는 '신약의 구약'임)
히브리서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히브리서 7: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히브리서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브리서 12:17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인터넷 설교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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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신자의 9가지 역설 고후6:1~10
고후6장에는, 아주 흥미롭게도 <9가지 설명이 3번 반복>해서 나옵니다.
▶먼저 반드시 겪어야 할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9가지> 열거하고 있습니다.
견딤, 환난, 궁핍, 곤난, 갇힘과 매맞음, 요란한 것, 수고로움, 자지 못함, 먹지 못함...
들이 그것입니다. 고후6:4~5
(*다른 성경은 10개로 나오나, NIV는 '갇힘과 매맞음'을 묶어서 9개로 나온다.
그런데 본문에서 "9"가 반복해서 나오므로, NIV번역의 9개를 이 칼럼에서 채택함)
그런데 바울이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모든’ 일에서 거리끼지 않고
하나님의 일군으로 자천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일을 겪더라도 그런 어려움이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또 9가지나 열거한 까닭도,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을 것이며
그것도 매번 여러 종류의 고통이 상황에 따라 따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일군에는
<좋은 일 9가지>도 생긴다고 말합니다.
깨끗함, 지식, 오래 참음, 자비함, 성령의 감화, 거짓이 없는 사랑,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 의의 병기...가 그것입니다. 고후6:6~7
이 또한 앞에 설명한대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더라도 항상 따르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어려움 9가지와 좋은 일 9가지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어려움 9가지’는 외부적 상황 하에서 객관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반면에 ‘좋은 일 9가지’는 모두 신자 자신의 내면이 인식하는 주관적 변화 내지 반응
입니다.
그럼 무슨 뜻이 됩니까? 항상 외부적으로는 어려운 일이 따르지만
내면은 오히려 기쁨과 감사가 넘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어서 신자가 겪는 9 가지 역설을 설명한 것입니다.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합니다. 고후6:8~10
그가 “...같으나 ... 아니하고“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신자에게는 완전히 반대적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남들이 보는 현실 상황은 부정적이고 힘들지만
본인이 실제로 느끼는 것은 정반대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신자를 평가할 때에 더욱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예컨대 세상에선 신자가 악하고 욕되며 무명한 자 같이 취급을 받아도
하나님은 아름답고 영광스러우며 유명하게 대우해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 바꿔 말해 신자라면 누구라도 모든 일에서
9가지 나쁜 것(4,5절)을 이겨내고,
9가지 좋은 것(6,7절)을 이웃에 베풀어야 하며,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에서 9가지 역설적 결과(8-10절)를 만들어 내어야 합니다.
<07.12.14. nosuchjesus에서 펀글, 축약
★연구할 문제 : 바울은 숫자 “9”를 좋아하는 것 같군요.
고전 12장에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도 9가지만 듭니다. 더 들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갈5장 성령의 열매를 말할 때도 9가지만 듭니다.
9는 3(완전, 완성 수)의 3번 곱이라서, ‘완전, 결국’을 뜻하는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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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마음을 넓히라 고후6장11-13
11 고린도인 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제가 설교를 거의 처음 듣는 본문이라서, 스크랩 해 보았습니다<편집자.
(스크랩 출처를 밝히지 않을 때는, 출처 글의 내용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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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출처를 밝히지 않음을 널리 양해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의 성도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바울 사도 자신은, 고린도교회에 대하여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었다고 합니다.
‘입이 열렸다’는 말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가르침)을 다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먼저, 부모가 자녀들에게 말하듯이 마음을 넓게 열었으니,
너희 자녀들도 (영적) 부모에게 보답하듯이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
부모-자식처럼 탁 터놓고, 마음을 넓게 열고 대화하자고 합니다.
(이 설교문의 주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에 대해 ‘마음이 좁아진’ 것은
바울뿐만 아니라,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마음을 넓히라’고 촉구한 것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마음을 열고 그것을 받아들이라
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 교회가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것입니까?
예를 들면, 저희 아이들이 친할머니와 외할머니 중에 외할머니를 더 좋아합니다.
외할머니는 한 번도 나무라는 적이 없습니다. 그저 좋게만 대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친할머니는 잘못하면 나무랍니다.
우리 손녀들이 바르게 자라야한다는 사랑으로 하는데도
받는 아이들의 마음은 친할머니보다 외할머니에 더 열려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 고린도교회도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진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복음을 전하고 다른 곳으로 간 후에
다른 선생이라고 하는 자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와서 전하는 내용과 바울이 전하는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11:4
바울이 전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인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예수를 믿고 나서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되어야 한다는
외모를 중심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자랑하고 육체대로 말하는 자들의 설교를 듣다가,
바울이 자꾸 환란, 궁핍, 고난, 십자가...하니까, 고린도교인의 마음이 닫힌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시간마다 인간의 죄를 이야기하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만 증거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기에
이제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발전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이 좋습니까?
제가 전에 부목사로 있을 때에, 부목사가 둘이었는데 이런 문제로 서로 싸웠습니다.
수요 설교를 교대로 하게 되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제게, “예수 믿고서 쪼그라들어야 정상인 것이냐?”며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믿고서 나의 삶이 만사형통하게 잘 풀리면
그것이 예수 믿는 증거가 분명한 것입니까?
예수 믿고 나서도 여전히 어려움은 다 당하고
때로 믿지 아니할 때보다 더 어려움과 고난이 닥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증거가 아닌 것입니까?
“바쳐봐. 복 주나, 안 주나! 말라기서를 봐!”
이렇게 반말 투로 말하는 자들의 말을 떨쳐버리기가 왜 힘이 드는 것입니까?
우리 속에 그런 욕망이 도사리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자랑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그리스도의 사도요 셋째 하늘까지 갔다 온 바울사도는
자기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이라고 합니다. 고후6:4~5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도대체 이런 사람(바울)을, 우리가 환영할 만하고 영접할 만한 사람입니까?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부담되는 사람이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멀리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어떻게 저런 자가 하나님의 일꾼이냐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군이라면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능력을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유혹한 마귀의 유혹은 예수님에게서만이 아니라
바울사도에게도 지금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다 주겠다고 마귀가 유혹한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 종교적인 기적, 세상의 영광에 대한 유혹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유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광이 좋은데, 성경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고 하니
그런 설교를 하는 사람과도 멀리하고 싶은 것입니다.
누구를 가까이 하고 싶은 것입니까?
외모를 자랑하고, 육신을 자랑하는 자들을, 가까이하고 기꺼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자랑
그런 거짓 교사들을 어느 정도로 잘 영접하는지 고후11:19-20절을 봅시다.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고린도 교인들이 영접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외모를 자랑하고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고린도의 성도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종으로 삼고, 잡아먹고, 자고하다고 뺨을 치는데도 용납을 하는 것입니다.
왜 용납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들의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까봐서 두려운 것입니다.
또 그들의 말을 잘 들어서 축복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사도가 그런 자랑이라면 나는 너희들보다 하나도 못하지 아니하다면서
내가 어리석게 나의 육체를 자랑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출생과 자신의 사역을 말합니다.
그 어떤 누구도 바울사도 만큼 엄청나게 희생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사도를 멀리하고 다른 사람들을 영접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울사도가 그런 자랑거리를 배설물로 여기고
자신의 약함만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자꾸만 바울사도에 대하여 마음이 좁아지는 것입니다.
▲꼭 성공하고 나서야 주님을 잘 섬기는가?
어떤 집사님이, ‘예수를 믿고 부자가 되면 안 되는가?’ 물었습니다.
우리는 ‘부자’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내려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자란 무언가 소유가 많은 것을 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소유가 많은 것을 부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을 주려고 하면 내가 무엇이 있어야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부자가 되어서 많이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소유란 것이 이상해서 어느 정도 소유하게 되면
구제는커녕, 점점 더 소유하고 싶은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없을 때부터 쪼개서 남을 돕는 사람이, 나중에 있어도 남을 돕습니다.
성도가 처음에 복음을 듣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복음만으로는 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의 종이라는 자들이 와서, 바울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군이요 그리스도의 사도라면 ‘세상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힘과 권세와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사도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고후7:2절에 보시면,
<불의를 행하고 해롭게 하고 속여 빼앗는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후7:2
바울사도가 이 말을 해야 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의 마음이 복음에 대하여
좁아질 대로 좁아진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적 가르침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도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바울에 대해 우리 마음이 넓어지며,
바울의 가르침에 대해 우리 마음이 넓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고후6:10
바울사도의 근심이 무슨 근심이었습니까? 교회를 위한 근심과 염려였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근심이었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이유는, 근심의 문제를 주님이 해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합니다.> 고후6:10
바울사도가 가난 하였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였습니다.
자기 마음이 부요하기 때문에, 자꾸 사람들만 보면 뭐든지 도와주고 싶어 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거듭나지 못한 성도는, '누가 나를 도와 줄 것인가?'만 눈비비며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성도는, '누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가?'만 눈비비며 찾습니다.
전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후자는 마음이 부요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은 가진 자입니다.> 고후6:10
예수를 안 믿는 자는... 삶에 불만족이 많습니다.
가져도 가져도 더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잘 믿으면, 그러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삶에 만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06.05.07. 인터넷 설교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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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신앙의 히치하이크 롬1:25 도서요약, 편집
앨리스터 맥그래스「내 평생에 가는 길」The Journey pp.1~65. 읽고 요약, 편집
신앙생활을 ‘순례의 길’이라 하는데, 쉽게 표현하면 ‘긴 여행 길’이다.
목적지는 ‘새 예루살렘’이다. (현세적 새예루살렘 포함)
[천로역정]의 소설에서 그렇듯이,
또한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면서 광야에서 여행할 때 그렇듯이,
이 여행길은 결코 쉽지 않다. 무엇보다 우리가 지금까지 직접 경험해 봐서 잘 안다.
그런데 이 여행(순례자의 길)을, 좀 더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있다. 그것은 <앞서 걸어간 사람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지난 2천년 동안 이 길을 먼저 걸어갔던 사람들...
그들이 죽었으므로, 직접 그들의 경험담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이 남긴 저서들을 통해서...우리는 그들의 풍부한 여행 경험담을 들을 수 있다.
이 책의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신앙의 굵직한 몇 가지 보편적 질문들에 대해,
사람들의 진부하고 얄팍한 답변을 듣는 일에 이력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약 10년에 걸쳐, 이 여행길을 앞서 간 사람들의 경험담을 탐독했다.
그리고 이 책에 그 경험담(굵직한 신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보다 편안한 여행을 위해서 말이다.
▲신앙의 히치하이크
저자는 특별히 ‘신앙의 히치하이크’란 재미있는 표현을 쓰고 있다.
‘히치하이크’란 길 가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자동차 얻어 타는 것이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의 고전을 읽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히치하이크’, 즉 그들의 믿음에 쉽게 동승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그렇다. 우리는 고전을 읽어야 한다.
박사학위 논문이 석사학위 논문과 다른 것은,
<그 주제에 대해, 지난 2천년간, 앞서간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했는가?> 라는
해석사解釋史가 반드시 들어가야 박사 논문이다.
일례로, 오늘날 이 시대의 신앙의 대 주제인 <성공과 축복의 문제>에 대해
과거 2천년 동안 신앙의 조상들은, 어떻게 그 주제를 다루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편집자의 개인적 대답은, “거의 다루고 있지 않다”이다.
제가 읽어본 기독교 고전에는, 그런 것을 장려하는 설교는 없다.
축복과 성공의 주제는 미국 노만 빈센트 필 박사 이후로 유행하는 최근 주제다.)
그러므로, 미래에 기독교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기 소원하는 사람은
성경과 아울러
반드시 교회역사의 신앙 위인들의 고전들을 탐독하고 연구해야 한다.
이것이,
앞서 간 위인들의 차에 ‘히치하이크’로 동승하여,
그들이 발견하고 도달한 신앙적 유산과 업적을,
그들의 체험, 경험담, 깨달은 지혜 등을,
오늘날 우리가 쉽게 얻울 수 있는 방법이며,
우리의 힘든 순례길을 쉽게 해 주는 도움이다.
▲항해 일지
‘히치하이크’라는 표현 말고도, 같은 이미지로,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항해일지>라는 비유를 들고 있다.
즉, 기독교 고전을 읽는 것은 <항해일지>를 보며 항해하는 것을 뜻한다.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후로, 16세기에 대탐험의 시대가 열렸다.
유럽열강들은 앞다투어 바다로 나가, 새로운 대륙과 섬을 발견하는데 혈안이었다.
누구나 처녀항해를 하면 대단히 위험하다.
어디에 암초가 있는지 모르고, 해류를 전혀 모르고, 길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녀항해를 끝내고 무사히 귀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항해일지'를 마치 오늘날의 일급비밀처럼 소중하게 다루었다고 한다.
자기 편에게만, 그것을 공개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암호로 기록하기도 했고,
일부러 오기誤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후배들이 올바른 선배들의 ‘항해일지’를 들고 항해에 나서면,
그들은 암초나 항로이탈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저자는, 기독교 고전이 바로 앞서 여행한 사람들이 남긴 ‘항해일지’라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고전classics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항해일지 없이 배를 몰고 가는 선장은,
필경 암초에 부딪혀 좌초하거나,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승객들을 태운채로... (여기까지 도입, 아래부터 책의 본론)
◑피조물을 섬기는가, 창조주를 섬기는가?
▲신앙의 굵직한 보편적 질문 한 가지.
세상에는 ‘우상’이라고 치부하고 버리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좋은 것이 많은데
그런 것 다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것은... 어찌 보면 고행 아닌가? 가당한가?
우상숭배는 피조물을 섬기는 것이며,
참된 기독교는 창조주를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물질, 성공, 축복' 등 피조물들을
창조주보다 더 열심히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참된 여행길에서 벗어난 것인데...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빠지는 이유는,
‘물질, 성공, 축복’등이 상당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데 있다.
반면에 참 예배의 대상인 하나님은, 눈에도 잘 안 보이고, 손에도 잘 안 잡힌다.
그래서 오늘날 기독교가
‘물질, 성공, 축복’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진짜 섬겨야 할 하나님은,
그 우상들을 자기에게 내려주는 ‘도구’정도로 전락시키고 있다.
이 신앙적 굵직한 질문에 대해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고전>을 통해
발견한 통찰력으로 답변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피조물
세상은 아름답다. 꽃도 아름답고, 자연세계도 아름답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자연 세계에 대한 감탄의 선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도 젊은 시절에는 외모가 아름답다.
인격적인 아름다움도 있다.
부모의 사랑도 아름답고,
부부의 애정도 아름답고,
자녀가 커 가는 것을 보는 것도 아름답다.
피조물인 인간이 만든 건축물, 의상, 예술품도 아름답고,
인간이 이룩한 업적, 제국, 과학적 발견도 아름답다. 그 가치를 충분히 인정한다.
이것들은 너무 아름다워 우리 인간들이 흠모할 만 하다.
너무 흠모해서 우상이 될 정도이다.
▲하물며 창조주는 얼마나 더 아름다우랴!
피조물이 그렇게 아름답다면,
그런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아름다우랴!
얼마나 더 영광스러우랴!
그 창조주의 크신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았던 사람들도 있다.
변화산에서 체험한 세 제자들이다.
얼마나 좋고 아름다웠든지... 그들은 산에서 내려올 생각을 접었었다.
(여기서 피조물과 조물주 중에 누가 더 아름다운지 완벽하게 증명되었다.)
▲피조물인가, 창조주인가?
그런데 오늘날 ‘성공, 번영, 축복’을 추구하는 일부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 영광스러움을 추구하기보다는
피조물(성공, 번영, 축복)의 아름다움을 더 추구하고 있다.
엄격히 말하면 ‘우상숭배’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영광스러움을 보지 못하고,
(사실 잘 안 보인다. 잘 안 느껴진다. 그러나 고수들은 보고, 듣고, 느낀다)
그 분과 교제에서 오는 행복, 만족, 영광, 은혜 등
지난 2천년간 신앙 선배들이 그런 것들을 추구해 왔는데,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합니다!’라고 고백해 왔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귀하게 섬기고 있고,
하나님은, 그런 내가 원하는 피조물들을 내려주시는 분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5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영광과 아름다움이 일부 서려 있다.
그래서 피조물을 보면서, 창조주 그 분의 능력과 영광을 '일부' 볼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을 보는 눈에 푹 빠져서, 창조주를 도외시 해 버리면 잘못이다.
에드워즈의 고전을 읽어보자
우리는 세상과 그 낙에 안주해서는 안 되며 천국을 갈망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천국의 복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와 누릴 행복을 열망해야 합니다.
비록 외적인 낙에 둘러싸여 있고, 좋은 우정과 인연과 가족 중에 거할지라도,
비록 좋은 이웃들 가운데 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것들이 자신의 유업인줄 알고, 거기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소유하고, 누리고, 활용하되,
하나님이 명하시면 언제라도 버릴 각오로
천국을 위해 선뜻 즐거이 내놓을 각오로만, 누려야 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The Christian Pilgrim 중에서
에드워즈에 의하면, 세상적 아름다움도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는 것이다.
그것을 무시해 버리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인정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리) 그가 깨달은 통찰력이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 머물지 않고
우리에게 더 큰 아름다움을 제시해 준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어디까지나 시식(에피타이저)이지, 주 요리가 아니다.
시식만 먹고, 만족하고, 끝내버리려 하면 안 된다.
▶비록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아가고, 누리는 것이
일평생 힘든 순례길의 기나긴 여정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닌
<하나님 자신>을 발견해 나가야 한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이 바로 이것이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엡1:17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딤전1:11
이 <복음의 부요함>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들만큼 크고 놀랍습니다. 엡3:8
unmeasurable riches of the Gospel (복음=예수님 자신이라는 전제로)
바울 사도는 복음의 부수효과, 사은품(물건 살 때 끼워주는 것)을 전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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