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배령에 가고싶었습니다. 등산과 사진을 좋아하는 이웃들의 영향으로 너무나도 귀에 익숙했던 지명, 곰배령... 아름다운 야생화와 사람의 때묻지 않은 그곳은 언제나 깊은 마음 속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태생적으로 등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에 갈천을 그렇게 오가면서도 곰배령은 늘 먼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의 밀린 숙제였습니다.
자정부터 1시간이 넘게 계속된 팩스 전쟁... 입산 허가를 받는 과정은 그리도 고되었습니다. 공무원의 편의주의적 행정 방식이 야속하기도 했지만, 나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마침내 이뤄진 팩스 수신 소리에 가벼운 흥분마저도 들더군요. 뒷 얘기로는 다음 날 오전까지 무려 2천 통의 신청서가 접수되었다는....
속속 모여드는 탐방객들과 함께 아침 8시에 입장을 개시합니다.
가족 모두 저질 체력인 탓에 출발하자마자 함께 출발한 동행들에게 앞길을 내어주고 천천히 산을 오릅니다. 준희는 처음부터 산에 가기 싫어했던 터라 출발부터 입이 나와있습니다. 갈천 계곡에 남아서 아이들과 노는 게 더 좋았던 모양입니다. 준희를 구스르고 달래가며 한 걸음 한 걸음 곰배령을 향해 나아갑니다.
탐방객을 인도하는 강선마을 강아지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사람들 걸음에 맞춰서 길을 갑니다. 정말 신통방통한 녀석들입니다. 갈천에 두고온 강아지 핀이 생각이 나더군요.
수정처럼 맑은 계곡입니다. 다큐멘타리 <곰배령 사람들>에서 보았던 바로 그 광경입니다. 마음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신발을 벗고 뛰어들고 싶었지만, 갈길이 멀었습니다. 준희의 연출된 표정 이면에는 온갖 짜증과 피곤이 감춰져있습니다.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지팡이에 기대어 있는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몇 백년 묵었다는 나무 아래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지쳐있습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얼마나 녹음이 짙던지... 한낮에도 사위가 어두컴컴합니다. 때문에 곳곳에 고사리 같은 음지 식물이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 탓일까요, 발에 채이는 모든 풀들이 다 산나물 내지는 약초로 보입니다. 물론 진짜가 있다 하더라도 알아보지 못했겠지요. 꽃 또한 이름은 알 수 없고 그저 노랑꽃, 보라꽃, 빨강꽃으로만 기억합니다.
기괴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고목의 모습... 일부러 만든다 해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까 언급한 보라꽃입니다. ㅡㅡ^
지쳐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스틱마저도 천근만근 짐이 됩니다.
이렇게 힘든 일을 엄마 아빠는 왜 시키는 것일까요?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을 때 갑자기 탁 트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곰배령 정상... 거센 바람과 함께 짙은 안개가 우리를 맞았습니다.
고생 끝에 찾아오는 달콤한 성취감... 다 왔다는 기쁨에 준희가 만세를 외칩니다. "정말 수고했다. "
언제 그렇게 힘들어했냐는 듯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승리의 세러모니를 연출합니다.
'조금 전까지 죽어가던 애 맞아?'
그것도 잠시...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한기를 느끼고 움추려듭니다. 여름이라 긴팔은 하나도 준비를 해오지 않았는데... 어쩌나 잠시 고민을 하다가 우천을 대비해 챙겨온 판초 우의를 꺼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내키지않아 하더니 이내 따뜻함에 만족스런 표정을 짓습니다. 창피하지도 않은지 그냥 바닥에 드러눕습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습니다.
안개 덕에 멀리 바다나 설악산의 풍경은 커녕, 지척의 야생화도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곰배령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했습니다. 테오 앙겔로플로스의 영화 <안개 속의 풍경>이 생각났습니다.
아내의 권유로 준희와 함께 기념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곳도 아닌 곰배령 정상, 자주 있는 일이 아니니 기념할 만 하지요.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는데도 인격이 잘 감춰지지 않습니다. 이제 한계에 달한 듯 합니다.
내려가는 길은 한결 수월했습니다. 올라오는 내내 징징대던 준희도 이렇게 앞장서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정상에 다 왔어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성취한 자의 여유겠지요.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요.
곰배령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곰배령, 올 가을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첫댓글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부럽습니다.
"안개속 풍경" 좋은 영화지요. 두번을 봐도 머리가 멍해지는 영화 였다는 기억이 납니다.
저또한 졸린 눈을 비비며 열심히 봤던... 기억이 납니다. 곰배령 꼭 한 번 가보십시오.
준희의 표정이 너무 리얼합니다.... 가기 전에 준희한테 꼭 이야기 듣고 갈지 말지 결정하면 될거 같습니다... 히 ^^
사심이 들어가 있는... 결심이신듯... 120% 못 가신다에 1표!
근대 곰배령 갈려면 어떻게 가야 하나요? 길 찾기를 묻는거 아닌거 아시죠~~
거주민이 아니면 입산허가를 받아야 하는걸로 아는데 절차와 방법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최소 탐방 하루 전까지 인제국유림관리소로 팩스(033-461-0450)를 통해 방문자 이름/주민번호/전화/주소/방문 일시(주중 9시, 10시 / 주말 8시, 9시, 11시)를 적어서 입산 신청서를 내야 합니다. 다음 날 오후에 033-463-8166로 확인 전화 해보시고요.
1일 150명에 한해 선착순 허가를 해주며 월, 화요일은 불가합니다. 민박이나 펜션을 예약하면 주인이 입산 신청을 대행해준다고도 합니다. 왕복 4시간 30분 코스이며 탐방로가 험하지 않아 아이들도 쉽게 갈 수 있습니다. 대체로...
친절하고,자세한 정보에 감사 드립니다. 시간내서 꼭 한번 가야겠습니다.
지리산을 종주하시면 '가족'의 소중함을 처절하게(?) 느낄 수 있을 것 입니다. 준희의 (숨겨진)표정만큼 먼 길이었겠지만.. 사진으론 도무지 그 느낌을 표현 할 길이 없군요. 그래서 직접 산을 오르나 봅니다.
저흰 가족에 대한 소중함보다는 원망을 처절하게 느끼지 않았나 걱정되기도 합니다. 겨우 곰배령 정도로 말이지요. 우야든동 당분간 산행은 없을 듯 합니다. 그래도 산 정상의 시원한 안개 바람을 맞고 기분이 풀려서 다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