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생활묵상 불친절에 대한 신앙 단상에 이어 반대의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 안에서 친절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친절이라고 하면 외부로 어떤 행동이나 행위가 드러나는 것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자산도 유형자산이 있고 무형자산이 있듯이 친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이지 않는 친절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의 눈으로 볼 수 없다고 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은 것처럼 친절도 그런 친절이 있습니다. 그럼 과연 그게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늘은 딱 하나만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애정 어린 눈빛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볼 때나 인체의 눈을 통해서 봅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은 시각기관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어떤 사물을 보는 기능만 하는 것일까요? 이건 아주 기본적인 내용입니다. 눈이라는 시각기관은 단순히 외부의 어떤 시각적인 요소를 내 눈 안에 있는 수정체에 모인 시각적인 정보를 뇌를 통해 인지하는 기능을 입력이라고 한다면 이와는 반대로 또 출력을 하는 기능도 담당하고 있습니다. 입력이 될 때는 어떤 감정적인 요소가 작용되지 않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흡수되는 것처럼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출력은 좀 다릅니다. 출력의 양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습니다. 입력이 될 때 단순 입력이 되면 그냥 출력도 그에 대한 느낌 그대로 출력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과정은 일반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특별히 문제하고 할 만한 문제가 없습니다. 근데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의 수가 있을 땐 상황이 좀 달라집니다.
외부의 어떤 시각적인 정보가 단순히 시각적인 정보가 자신의 몸에 들어온 후 유전자 변이처럼 변이가 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이때 이런 변이가 이루어지는 과정에 반드시 수반되는 게 있습니다. 바로 그게 인간의 감정입니다. 조선시대 성리학 같은 경우에는 이 현상을 모태로 해서 주기론, 주리론으로 나누어 우리나라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학문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변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좀 더 다르게 표현을 하면 왜곡이라고 해도 무방합니다. 굳이 더 정확한 차이를 설명하자면 변이는 의지를 수반하지 않으면서 변화가 된 것이지만 왜곡은 변화에 어떤 의도가 개입이 돼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건 전적으로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의 의지의 문제입니다. 이때 이 의지에는 선한 의지가 있고 또 선하지 않은 불순한 의도가 개입이 될 수 있습니다. 선한 의지가 개입이 된 변이는 좋은 영향을 발산하는 선한 에너지가 될 것입니다.
선하지 않은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면 그건 좋지 못한 영향이 나온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마치 이런 원리에 의해 우리의 눈이라는 인체 감각기관은 다른 감각기관과는 좀 더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유사한 게 바로 귀도 이와 같은 원리로 작동을 하는 것입니다. 귀라는 청각기능도 외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눈보다는 그 영향이 미미합니다. 귀라는 청각기능은 이와 같은 모든 것도 어느 정도 내면에서 통제돼 외부에 적게 영향을 미치지만 시각은 청각과 비교해서 미치는 영향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설명을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드리면 이 모든 내용이 좀 더 선명하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어쩌다가 사용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령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요? 이 말은 주고도 좋은 사람이 있고 주고도 미운 사람이 있다고 표현을 하면 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럼 왜 인간의 내면에 이런 감정이 생길까요? 이 원인은 평소 그 사람에 대한 어떤 감정적인 정보 때문에 그런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평소 자신이 호감을 가지고 좋게 바라보는 사람과 아니면 평소 자기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끔 한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어떤 같은 행동을 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평소 좋은 호감을 가진 사람이 어떤 잘못을 했다면 그 잘못도 상대적으로 자신에게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 그동안 쌓여왔던 어떤 감정을 가졌다면 그 감정 때문에 그 상대방도 호감을 가진 사람에 대해 똑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평소에 그 사람도 호감을 가진 사람처럼 처신을 해왔다면 그렇게는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마 동일한 모습으로 똑같은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잘 분석하면 이런 특징이 있습니다. 절대 우리에게 불가능을 요구하시지는 않습니다. 다만 불가능은 불가능해서 불가능한 게 아니고 우리가 이미 불가능할 것이라고 우리 스스로가 먼저 설정을 해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변수가 있어도 그 변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느냐 하면 세상 사람과 똑같이 하게 되면 세상 사람과 같은 수준의 사람과 똑같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 그건 세상 사람들도 그렇게 하지 않느냐" 하시며 말씀하시는 것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처럼 그렇게 해서는 빛의 자녀가 될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과 똑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불가능과 같은 불가능인데 절대적인 불가능은 아니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에게 좋게 행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좋게 대해주듯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람 역시도 그 상대방에게 사랑스런 감정을 주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이게 복음에서 말하는 세상 사람들도 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의 자녀는 이것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걸 뛰어넘는다는 게 그게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경지는 성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다면 그 경지는 별론으로 한다고 해도 그 경지에 이르지 않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게 평소 자신이 애정 어린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이 대상엔 세상 사람도 당연히 포함되겠지만 우선은 신앙공동체 사람들에게 먼저 하는 게 더 좋을 듯합니다. 이게 드러나지 않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이게 얼마나 중요하느냐 하면요 사람의 눈빛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그 속에 담겨있습니다. 똑같은 눈인데 인자한 눈빛이 나올 수도 있고 경멸을 하는 눈빛이 나올 수 있고 이것 외에 다양한 눈빛이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런 게 얼마나 중요하느냐 하면 만약에 애정 어린 눈빛이 나온다면 그 눈빛을 본 사람은 그 눈빛 속에 있는 애정 어린 감정의 텔레파시가 전입되기 때문에 그게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신에게서 마치 어떤 사람을 멸시하는 눈빛을 보내게 된다면 그 사람이 그렇게 해서 어떤 상처를 받게 된다면 자신이 물론 외부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한 것은 아니지만 이유야 어찌됐든 자신으로 인해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제공하게 됐다면 그런 행동의 책임에 전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역으로 원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가 평소 우리와 자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그 대상이 누가 됐든 자신에게 좋은 어떤 행동을 해서가 아니더라도 평소 애정 어린 눈빛을 주는 것도 그 눈빛에 그 어떤 사람은 행복한 감정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하느님께서 이런 사정을 보신다면 이 사람에게 어떤 축복을 내리실지 우리가 한번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행동이나 행위의 결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애정 어린 눈빛으로 남을 잠시나마 행복하게 해 주는 선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라면 그게 바로 대데레사 성녀께서도 말씀하신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이 자비의 실천이 천국으로 가는 천국마일리지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소에 이런 것으로 천국마일리지를 적립해놓으면 우리가 나약한 인간이라 인간세상에서 저지른 잘못도 나중에는 이 마일리지 덕분에 좀 더 천국 문 가까이 갈 수 있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묵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