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윤리(尹理)
1636년(인조 14)∼1694년(숙종 20) / 향년 58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자일(子一). 영상 인경(仁鏡)의 5대손이며, 사흠(思欽)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泳)이고, 아버지는 지선(止善)이며, 어머니는 이종택(李宗澤)의 딸이다. 1657년(효종 8) 진사시에 합격하고, 1663년(현종 4)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에 출사하다가 시강원사서·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과 장령 등을 역임하였다. 1674년 서인으로 예송(禮訟)에 화를 입고 성주의 시골집으로 내려갔다. 1677년에 경성판관에 제수되고 1680년 경신대출척 후에 다시 장령으로 등용되었다가 그 이듬해 온성부사가 되어 나갔다.
그 뒤 병조·형조의 좌랑과 부승지·경주부윤 등을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을 만나 삭직을 당하고 양주 선롱(先垅)이 있는 곳에 은거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1694년 강릉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출사하지 않았다.
--------------------------------------------------------------------------------------------------------------------------------------------------------
경주부윤(慶州府尹) 윤공(尹公) 이(理) 신도비명 병서(神道碑銘 幷書)
권상하(權尙夏) 찬(撰)
국가가 불행하여 당론(黨論)이 제멋대로 행해져서, 비록 깨끗한 명성과 인망으로 세상에 추중되는 사람일지라도 권력자의 뜻에 한 번만 거슬리면 그대로 말살되어 떨치지 못하므로, 이것을 식견 있는 이들이 탄식하며 애석히 여기는 바이다. 그런데 근세의 경주 부윤 파평(坡平) 윤공(尹公)이 바로 그중의 한 사람이다.
공의 휘는 이(理)이고 자는 자일(子一)인데, 고려 태사(太師) 신달(莘達)의 후예이다. 신달로부터 5세인 문숙공(文肅公) 관(瓘)에 이르러 그가 또 문강공(文康公) 언이(彥頤)를 낳으니, 이에 부자(父子)가 다 큰 명성이 있었다.
아조(我朝,우리 왕조)에 들어와서는 석(晳)이란 분이 연산조(燕山朝)에 사간으로 있으면서 자주 직간을 했다가 갑자사화 때에 사후(死後) 추벌(追罰)을 받았고, 인경(仁鏡)이란 분은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고 시호가 효성공(孝成公)이다. 그리하여 고려 태사 이후로 뛰어난 훈업과 높은 관작이 대대로 성대히 드러나서 동방의 갑족(甲族)이 되었다.
증조(曾祖) 휘 사흠(思欽)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였고, 조(祖) 휘(諱) 영(泳)은 익위사(翊衛司) 사어(司禦)로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고 휘 지선(止善)은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비(妣) 정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예빈시 참봉 종택(宗澤)의 딸인데, 병자년 10월 14일에 공을 낳았다.
공(公)이 6세에 모친을 여의었는데, 참판공이 매우 사랑하면서 또한 부지런히 가르쳤다. 공은 뛰어나게 총명하여 나이 13, 4세 때에 시명(詩名)이 장중(場中)에 가장 높아 누차 과제(課製)에 장원하였고, 22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28세에는 대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분속되고 누차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병오년(1666, 현종 7)에는 보안 찰방(保安察訪)이 되었다. 이해 겨울에 조정에서 특별한 천거가 있어 공이 여러 중신(重臣)들의 추중을 받아, 신익상(申翼相,1634~1697)ㆍ윤지완(尹趾完,1635~1718) 등 6인과 함께 그 선발에 뽑혀서 참상직(參上職)에 초배되었는데, 대간이 관질(官秩)은 규정이 있으므로 한 번의 천거로 지레 승진시켜서는 안 된다고 쟁론하여, 모두 예전 직급으로 환원되었다.
무신년(1668,현종 9)에는 관질이 만기가 되어 순서대로 전적에 승진되고 공조ㆍ호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윽고 병조(兵曹)로 옮겨 가 정랑(正郎)이 되어 춘추관(春秋館)의 직(職)을 겸대하였고 얼마 후에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가 되었다. 경술년(1610,광해 2)에는 전주 판관(全州判官)에 제수되었는데, 노친이 계시는데 임지(任地)가 멀다 하여 정체(呈遞)되었다.
그후로는 계속 양사(兩司,사헌부와 사간원)에 있으면서 정언(正言)ㆍ지평(持平)ㆍ장령(掌令)을 거의 1년 동안 번갈아 역임하였다. 신해년(1611,광해 3)에는 어버이 봉양을 위해 금산 군수(金山郡守)가 되어 나갔다. 계축년(1613,광해 5)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거상(居喪)을 잘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갑인년(1614,광해 6)에는 예송(禮訟)으로 사화(士禍)가 시작되자, 공은 바삐 성주(星州)의 옛집으로 돌아가 마치 그곳에서 생을 마칠듯이 하였다.
정사년(1617,광해 9)에는 경성 판관(鏡城判官)에 제수되었고, 기미년(1619,광해 11)에 체직되어 돌아왔다. 경신년(1612,광해 12)에는 대출척이 있고 나서, 직강(直講,성균관의 종5품 벼슬)으로 장령(掌令)에 제배되어 보사 원종공신(保社原從功臣) 1등에 참록되고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전임되었다. 그후 장령에 제배되고 누차 헌납(獻納)에 의망(擬望)되었다.
이해 겨울에는 온성 부사(穩城府使)의 결원으로 인해 문관을 택차(擇差)하라는 상의 전교가 있어, 공이 통정(通政)에 올라 그 명에 응했다. 임술년(1622,광해 14)에는 병으로 체직되어 군직(軍職)에 부쳐졌는데, 승정원의 직임에 연달아 의망되었다.
계해년(1623,인조 1)에는 병조 참의(兵曹參議,정3품)에 제수되고 바로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가 다음해에 휴가를 얻어 돌아왔다. 을축년(1625,인조 3)에는 동부승지에 제배되었다가 병조ㆍ형조의 참의에 고쳐 임명되었고, 다시 경주 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가서 수년 뒤에 체직되었다.
기사년(1629,인조 7)에는 사화가 일어나자, 양주(楊州)의 선영 아래에 자취를 감추고 세로(世路)에 뜻을 끊었다. 갑술년(1634,인조 12)에는 강릉 부사가 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않았다. 대체로 공이 초봄부터 병색이 있어 탈것에 실려 성남(城南) 집으로 돌아왔다가 6월 1일에 정침(正寢,몸채방) 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59세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上,임금)이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와 치부(致賻)를 의식대로 하였다. 그해 9월 병인일에 양주 송산(松山) 효성공(孝成公) 묘의 좌측 을좌(乙坐)의 언덕에 장사 지냈다. 그후 무술년(1658,효종 9)에 가선대부 이조 참판에 추증되고 겸대직도 관례대로 추증되었으니, 이는 공의 넷째 아들 양래(陽來)가 귀하게 된 때문이다.
공은 두툼한 얼굴에 키가 크고 수염이 아름다웠으며, 덕기(德氣)가 넘쳐흘러서 바라보면 대인 장자임을 알 수 있었다. 흉금이 너그럽고 곧아서 모든 득실과 영욕을 일체 도외시하였다. 성균관에 분속되던 처음에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1595~1671/영의정을 지냄)ㆍ양파(陽坡 정태화(鄭太和,1602~1673/영의정을 지냄) 등 제공이 모두 공도(公道)가 행해지지 않음을 탄식하였으나, 공은 태연하였다.
경신년(1668,현종 9) 이후로 조정 고관들이 서로 갈라져서 논의가 한창 일어나자, 이익을 탐하는 자들은 유리한 쪽을 붙좇았으나 공은 확고한 뜻이 있었으므로, 세인들이 대부분 공을 훌륭하게 여겼으나 공을 좋아하지 않은 자도 많았다. 그래서 공을 온성 부사(穩城府使)로 차견한 일 등은 비록 승진이라고는 하지만 실상은 공을 소외시킨 것이었다.
대각(臺閣,누대와 전각) 에 있을 적에는 논한 말이 매우 적절하였는데, 내수사(內需司)가 어장을 침탈하는 일과 공주의 집이 제도에 넘치는 일과 관청에서 무역을 하는 일과 부역을 고르게 매겨서 백성을 편하게 할 일 등에 대해서 그때마다 강력히 쟁론해 마지않았고, 남의 과실을 들추어 캐내는 데 이르러서는 절대로 뜻을 굽혀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았다.
지방 수령으로 있을 적에는 아전(衙前)을 단속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급선무로 삼았고, 전고(典故)에 밝아서 재결(裁決)이 신속하였으며, 공명하고 청렴 정직하여 사람들이 감히 사정을 봐달라는 뜻으로 요구하지 못했다. 금산에 있을 적에는 신해년의 큰 흉년을 당하여 쓸데없는 비용을 절감하고 정성을 다해 백성을 구제한 결과 온전히 살아난 백성이 매우 많았다.
온성(穩城)에 있을 적에는 변방의 잘못된 정사에 관한 일 10여 조항을 조목조목 열거하여 구분을 지어 올려서 변통해줄 것을 급히 청하니, 상이 공을 가상하게 여겨 이를 조정에 내려 채택 시행하게 함으로써 북도 지방이 공에게 힘입은 것이 많았다.
일찍이 영읍(嶺邑)에서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는데, 이때 조공 사석(趙公師錫,1632~1694)이 주시관(主試官)으로서 몸이 불편하여 공에게 혼자서 고선(考選)을 하도록 위임했었다. 그런데 합격자를 발표하던 날에 조공이 일어나 감탄하기를 “지극히 공정할 뿐만 아니라 어쩌면 감식안도 그렇게 밝은가.” 하였다.
이에 앞서 윤씨 성을 가진 자가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있으면서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하다가 관찰사로부터 시정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고을 사람으로 관찰사와 동서간이 되는 자가 공에게도 가까운 일가가 되었으므로, 그 윤씨 집에서는 공이 그 고을 사람과 서로 그 일을 선동시킨 것이라고 의심하여 골수에 사무치도록 깊이 원한을 품었다.
그러나 공은 실로 그 일에 관여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뒤에 공이 병조 참의와 승지가 되었을 때에 그 윤씨 집 아들이 이전의 원한을 품고서 스스로 계(啓)를 올리거나 혹은 자기 사람을 교사하여 함부로 공을 중상하였다. 그러자 이조 판서 이공 익(李公翊,1629~1690)이 상소하여 공을 변호하고, 문곡(文谷) 김 상공(金相公: 金壽恒)도 연석에서 공의 억울함을 변명하니, 상이 전후로 상주한 대간의 말들을 그르게 여기어, 심지어는 ‘승정원을 출입한 자로서 누가 윤리(尹理)보다 나은 자가 있느냐.’고까지 전교를 내리고 끝내 그 청을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또한 스스로 만족하게 여겨 이런 일을 조금도 마음에 두지 않았고, 분수를 지키고 한가히 지내면서 깨끗하고 바름으로 자신을 단속하고서 오직 자질(子姪)들 가르치는 것만을 일삼았다. 글 읽기를 좋아하며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저술한 것도 퍽 많았으나 거의 산일되어 버렸고 만년에 읊은 시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은 화락한 기색으로 몸과 마음을 다하여 어버이를 섬기었고, 제삿날을 당할 때마다 슬퍼하고 사모하기를 마치 막 초상당한 때와 같이 하였다. 또 모친의 얼굴을 직접 뵙지 못한 것을 지극히 가슴 아프게 여겨, 일찍이 모친이 쓴 언찰(諺札) 한 장을 얻어가지고는 상자 속에 간직해두고 그것을 어루만지고 열람할 때마다 반드시 눈물을 흘렸다.
공이 사는 집은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였고, 처자식은 항상 굶주린 기색이 많았다. 여러 주군(州郡)을 두루 다스리면서 청렴하고 검약하기가 한결같았는데, 경성 판관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날이 마침 몹시 추운 겨울날이었으므로, 어떤 이가 표범 가죽 하나로 조그만 조끼를 만들어서 공에게 입으라고 권하였으나 공은 마치 못들은 체해 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북쪽 사람들이 그 일을 미담으로 전해 오고 있다.
부인 흥양 이씨(興陽李氏)는 사인(士人) 의윤(義胤)의 딸인데, 참판공이 효부(孝婦)라 칭찬했고 종인들은 여사(女士)라고 하였다. 집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어 온 집안일을 총괄하여 세밀하게 처리했고, 공을 따라 지방 관소에 가서도 매우 신중하였으니, 공의 깨끗한 절조를 수립한 데는 내조가 많았던 것이다.
그중에도 가장 동기간을 사랑하고 여러 자식들을 가르치는 법도가 모두 후인들의 모범이 될 만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을유년 10월 30일에 별세하여 공의 묘 왼쪽으로 거리가 몇 걸음쯤 되는 곳에 장사 지냈는데, 그 언덕은 건향(乾向)이다.
4남은 모두 문장과 아망으로 사류들 사이에 추중되었다. 창래(昌來)는 사마시에 합격했고 벼슬은 좌랑이며, 석래(錫來)는 문과에 갑과로 급제했고 벼슬은 사간이며, 익래(益來)는 진사이고, 양래(陽來)는 부윤이다. 두 딸은 강태상(姜泰相)ㆍ이현명(李顯命)에게 시집갔다.
강태상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가 되었고, 이현명은 생원시에 장원하였다. 장방(長房)의 자녀들은 모두 자라지 못하고 죽어, 익래의 아들 명언(命彥)을 후사로 삼았다. 이방의 딸은 이겸제(李兼濟)의 아내가 되었다. 삼방의 아들은 명언이고, 사방의 양자는 지언(之彥)이다. 부사의 2남은 수성(壽星)ㆍ수규(壽奎)이고 3녀는 이조원(李肇元)ㆍ한진조(韓震朝)ㆍ송형명(宋亨明)에게 시집갔다. 생원의 양자는 세형(世珩)이다.
아, 공은 젊은 나이로 벼슬길에 들어가 태평성대를 만났었으니 의당 그 포부를 펼 듯했는데, 도리어 잠시 기용되었다가는 이내 밀려나곤 하여 경륜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으니, 이것이 어찌 공이 순진무구하게 청정함을 지키어 남에게 알아줌을 바라지 않는 데에 마음을 편안히 하여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암 노선생이 일찍이 참판공의 묘문(墓文)에서 공을 매우 훌륭하게 칭도하였다.
아, 대군자의 말 한마디는 구정(九鼎)ㆍ대려(大呂)보다도 중한 것이니, 세상 사람들이 공을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는 것이 어찌 공을 경하게 하거나 중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비록 공과 하루도 종유해본 적은 없으나 공의 훌륭한 풍도를 오래전부터 들어왔고, 근래에는 공의 아들 백씨ㆍ중씨와 종유하면서 그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더욱 들었으니, 지금 이 묘비문의 부탁을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그래서 마침내 행장에 의거하여 그 대략을 간추려 서술하고 명으로 잇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
윤씨는 파평의 망족으로서 / 尹爲坡望
높기가 화산 항산 같은데 / 嶐若華恒
그중에 오직 문숙공과 문강공이 / 唯肅曁康
거듭 고려 역사에 기록되었네 / 屢書麗乘
혁혁한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 赫赫昌朝
뛰어난 인재가 계속 나왔는데 / 俊髦嗣興
그의 훌륭한 손자가 있어 / 厥有賢孫
시운을 타서 조정에 올라 / 乘運颺登
특별한 천거로 명성이 높아지니 / 名高剡章
인망이 모두 그에게 기울었네 / 衆望皆傾
동궁께 시강할 적에는 / 侍講胄筵
경서의 뜻을 정명하게 해석했고 / 經義精明
오랫동안 대간으로 있을 적에는 / 久居臺坡
주장하는 논의가 공평했으며 / 持論坦平
지방관을 두루 역임할 적에는 / 歷試民社
인자하단 명성 크게 드러났네 / 大著仁聲
대체로 공의 평생 자취는 / 盖公平生
너그럽고 고상하고 청순함뿐인데 / 寬雅淳淸
공을 시기하고 미워한 저들은 / 彼媢嫉者
유독 무슨 마음이었던고 / 獨何心腸
그러나 임금 밝고 재상 공정하여 / 君明相公
많은 구설들이 해될 게 없었네 / 多口無傷
장차 그 계책 분발하려다가 / 將奮其猷
세상일에 마음이 놀래서 / 世事心驚
궁벽한 시골에 은퇴하여 / 斂退丘樊
순리대로 살다가 편하게 작고했네 / 生順死寧
송산의 언덕 아래 / 松山之皐
두수는 넘실거리는데 / 杜水洋洋
봉곳한 이 언덕이 / 睾如斯丘
대인이 묻힌 곳이로다 / 碩人之藏
훌륭한 효자가 / 翼翼孝子
숨은 덕 드러내려고 하네 / 思發幽光
내 말이 아첨한 말 아니니 / 我詞非諛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리라 / 昭揭無疆
--------------------------------------------------------------------------------------------------------------------------------------------------------
[原文]
慶州府尹 尹公 理 神道碑銘 幷序
國家不幸。黨論肆行。雖淸名雅望見重於世者。一忤當路。輒抹摋不振。爲識者所歎惜。近世若東都尹坡平尹公卽其一也。公諱理字子一。高麗太師莘達之後。五世至文肅公瓘。寔生文康公彥頤。仍父子有大名。入我朝有曰晳。燕山朝以司諫數直諫。甲子被泉壤之禍。有曰仁鏡。官領議政諡孝成公。蓋自太師以來。殊勳大爵。奕世貴顯。蔚爲東表甲族。曾祖諱思欽。慶尙左道水軍節度使。祖諱泳。翊衛司司禦。贈左承旨。考諱止善。贈戶曹參判。妣贈貞夫人全義李氏。禮賓參奉宗澤之女。以丙子十月十四日生公。六歲而失恃。參判公甚愛而敎亦勤。聰穎邁等。年十三四。詩名擅場屋。屢魁課製。廿二中進士。廿八闡大科。分隷成均館。屢爲假注書。丙午拜保安察訪。冬朝家有別薦。公被諸重臣引重。與申翼相尹趾完等六人膺其選。超拜參上職。臺諫論以官秩有程章。不可徑遷。一薦皆仍舊。戊申秩滿。序陞典籍。歷工戶曹佐郞。俄移騎省轉正郞兼帶春秋。尋爲侍講院司書。庚戌除全州判官。以親老地遠呈遞。自是連在兩司。爲正言,持平,掌令者殆周一歲。辛亥爲養得金山郡守。癸丑丁外艱。以善居喪聞。甲寅禮訟基禍。公遂走歸星州舊莊。若將終身。丁巳除鏡城判官。己未遞還。庚申更化。以直講拜掌令。參保社從勳一等。轉濟用監正。又拜掌令。屢擬獻納。冬穩城缺府使。自上有文官擇差之敎。公陞通政應命。壬戌以病遞。付軍職。連擬銀臺。癸亥拜兵曹參議。旋爲洪州牧使。明年賦歸。乙丑拜同副承旨。改兵刑曹佐貳。出爲慶州府尹。數年而遞。己巳禍作。屛迹於楊州先壟下。絶意世路。甲戌爲江陵府使。病不赴。蓋自春初示憊。輿還城南第。六月朔日。考終于正寢。壽五十九。訃聞上遣官致祭致賻如儀。以其年九月丙寅。葬于楊州松山孝成公墓左乙坐之原。歲戊戌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帶如例。以第四子陽來貴也。公豐貌脩榦美鬚髥。德氣充溢。望之知其爲鉅人長者。胸襟坦直。凡於得喪榮辱。一付之度外。分館之初。如白軒,陽坡諸公皆歎公道之不行。而公則夷然也。庚申之後。朝紳岐貳。論議方生。爭利者趨焉。公則有確乎之志。世皆多公。而不悅者亦衆。若北關之差遣。雖曰陞遷。其寶外之也。在臺閣。所論剴切。如內司侵漁。主第踰制。公家貿販及均役便民等事。輒力爭不已。至於抉摘人過失。絶不屈意苟合。在州縣以束吏恤民爲務。明識典故。裁決敏速。公明廉直。人不敢干以私。金山時當辛亥大殺。節縮宂費。竭誠乳哺。所全活甚衆。其在穩城也。以邊上弊政十餘條。陳列區畫。亟請變通。上嘉之。下廟堂採施。北路多有賴焉。嘗試士嶺邑。趙公師錫主試而病。屬公獨考。及坼榜日。趙公起而歎曰。非唯至公。亦何鑑識之明也。先時有姓尹者爲星牧。多行不義。爲道伯所擧正。邑人與道伯連袂者。於公爲近族。其家疑公有所交煽。含怨入骨。而公實不與也。後公之爲兵議,承宣。其家子挾前澸。或自發啓。或唆私人。肆意中螫。銓相李公翊上章救解。文谷金相公亦伸白於筵席。上以前後臺言爲非。至以出入銀臺者。誰有踰於尹某爲敎。竟不允其請。公亦逌然不以介懷。守分居閒。靜正自持。只以訓誨子姪爲事。喜看書。手不釋卷。著述頗富而多散逸。唯晩年吟詠藏于家。愉色事親。殫竭心力。每當喪餘。哀慕如袒括時。且以不逮慈顏爲至痛。嘗得一諺札。藏諸巾笥。撫覽必涕。所居不蔽風雨。妻孥恒多飢色。歷典州郡。淸約如一。自鏡城歸目。適當嚴冬。人或勸以一豹爲小襖。而公若不聞。至今北人傳爲美談焉。夫人興陽李氏。士人義胤之女。參判公曰孝婦也。宗人曰女士也。治家有法。綜理微密。隨公赴官。亦甚謹愼。公之淸節。內助爲多。最其愛同氣敎諸子。皆可爲後人矩。生與公同年。歿於乙酉十月之三十日。葬在公墓左幾步地。其原向乾。四男皆以文雅。見重於士流。曰昌來司馬佐郞。曰錫來文甲科司諫。曰益來進士。曰陽來府尹。二女適姜泰相,李顯命。姜武府使,李生員壯元。長房子女皆不育。以益來子命彥爲嗣。二房女爲李兼濟妻。三房男命彥。四房所後子之彥。府使二男壽星,壽奎。三女李肇元,韓震朝,宋亨明。生員繼子世珩。嗚呼。公早歲通籍。遭遇明時。宜若展布其所蘊。而顧乃乍起乍踣。飛不盡翰。豈公任眞守靜。安於不求知而然耶。尤菴老先生嘗於參判公墓文。稱道公甚盛。噫。大君子一言。重於九鼎大呂。世人之知不知。曷足爲輕重公哉。余雖未有一日之雅。宿聞公風懿。近與公伯仲胤游。益聞其所不聞。今於墓碑之託。何敢辭也。遂據其狀。撮其大略而爲敍。係之以銘。銘曰。
尹爲坡望。嶐若華恒。唯肅曁康。屢書麗乘。赫赫昌朝。俊髦嗣興。厥有賢孫。乘運颺登。名高剡章。衆望皆傾。侍講胄筵。
經義精明。久居臺坡。持論坦平。歷試民社。大著仁聲。蓋公平生。寬雅淳淸。彼媢嫉者。獨何心腸。君明相公。多口無傷。
將奮其猷。世事心驚。斂退丘樊。生順死寧。松山之皐。杜水洋洋。睪如斯丘。碩人之藏。翼翼孝子。思發幽光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