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현감유공묘지명병서(連山縣監柳公墓誌銘幷序)
풍산 유씨(豐山柳氏)는 은사급제(恩賜及第)한 유백(柳栢)에서부터 비로소 드러났고, 중시조 공조 전서(工曹典書) 유종혜(柳從惠)에서부터 현달하였다. 4대가 내려와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분이유공작(柳公綽)이고,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분이 유중영(柳仲郢)이다.
통정대부로 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내고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분이 유운룡(柳雲龍)이다. 참판공이 낭천 현감(狼川縣監) 유기(柳裿)를 낳았다. 유기는 의인(宜人) 문소 김씨(聞韶金氏)에 장가들었는데, 문소 김씨는 내자시 정(內資寺正) 김극일(金克一)의 딸로 만력(萬曆) 신묘년(1591, 선조 24)에 공을 낳았다.
공은 이름이 원리(元履)이고 자가 탄지(坦之)이다. 어려서 시(詩)와 예(禮)에 능하다고 알려졌고, 장성하여 지려(志慮)가 있고 시무(時務)에 통달하였다. 계유년(1633, 인조 11)에 선공감 참봉(繕工監參奉)에 제수되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였고 무인년(1638, 인조 16)에 상복을 벗고 전설서 별좌(典設署別坐)에 제수되었다가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에 전보되었다.
기묘년(1639, 인조 17)에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에 승진되었다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전보되었는데, 모두 능력으로 직명(職名)에 천거되었다. 임오년(1642, 인조 20)에 외직으로 나가 연산 현감(連山縣監)이 되었는데, 처음에 부임하자 하리(下吏)들이 자못 그를 가벼이 여겼으나 늙은 아전이 들어와 자세히 살펴보고 나와서 아전들을 경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풀자 아전들이 두려워하고 백성들이 사랑하였다.
갑신년(1644, 인조 22)에 파직되어 돌아왔다. 이에 앞서 공은 가래와 기침을 앓았고, 점점 심해져서 기축년(1649, 인조 27) 12월에 별세하였다. 금계(金溪)의 천등산(天登山) 전부인(前夫人) 권씨 묘에 합장하였으니, 선영(先塋)에 모신 것이었다.
아! 공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고 부친의 가르침을 받아 집안에 있을 적에는 효도와 우애를 돈독히 하였고, 관직에 있을 적에는 일을 빈틈없이 치밀하게 처리하였다. 또 성품이 강직하여 비록 급작스러운 일이 있더라도 바꾸지 않았다.
선공감 참봉에 있으면서 건축을 담당하였는데, 호조 판서가 멋대로 한다고 노여워하자 공이 집을 가리키며 느긋하게 말하기를 “구설(口舌)로 쟁론하기 어려우니 집 한 칸의 재목과 기와를 따져보면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과연 공의 말과 같자 판서가 잘못을 부끄러워하며 탄복하였다.
또 일찍이 광주(廣州)에서 사옹원 직장으로 자기(磁器)를 감독할 때에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자 문서를 봉한 후에 별도의 창고에 보관해 두고 세가(勢家)의 사사로운 청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이서(吏胥)들이 번갈아가면서 두렵다고 압박하여도 끝내 흔들리지 않았다.
전설사(典設司)에 유막(油幕)이 부족하자 당시 호조 판서 이명(李溟)공이 재삼 요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 더욱 힘써 다투었다. 이명 공은 엄하고 혹독하다고 이름이 났었는데, 처음에는 노여워하다가 끝내 허여하자 같은 반열의 사람들이 혀를 내둘렀다.
정치화(鄭致和)가 뒤에 공이 연산(連山)을 크게 다스린 일을 살피고 공에 대하여 칭찬하기를 마지않았다. 연산은 이전부터 숨기고 빠진 전결(田結)이 많았는데 공이 간악한 것을 들추고 숨긴 것을 귀신같이 적발하여 속전(贖錢)을 징수하고 세폐(歲幣)를 극복하자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연산현은 봉세(俸稅)가 평소에 과다하였는데, 공이 두곡(斗斛)을 바르게 하자 아전들이 감히 간사한 짓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말하기를 “예전에 없었던 일이다.”라 하였고 판서 김집(金集)도 공을 칭탄하였다. 대개 공의 재주가 세상에 쓰였다면 성취가 있었을 것이지만 어찌 여기에서 그치게 하고 하늘이 수명을 빌려주지 않았는가? 애석하다.
첫째 부인 안동 권씨는 태사(太師) 권행(權幸)의 후손이자 처사 권직양(權直養)의 따님이다. 여인의 행실을 잘 갖추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요절하였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세장(世長)이다. 둘째 부인 고창 오씨(高敞吳氏)는 생원 오감(吳淦)의 따님으로, 아들 다섯을 낳았다.
진사 세익(世翊), 세헌(世獻), 그리고 세철(世哲)은 종형(從兄) 원직(元直)의 뒤를 이어 종사(宗祀)를 이었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딸은 둘을 두었는데, 장녀는 김윤(金玧)에게 시집갔고 하나는 아직 어리다. 세장(世長)의 딸 하나는 조군(趙頵)에게 시집갔고 아들 하나는 아직 어리다. 세익(世翊)은 1남 1녀를 두었고, 세헌(世獻)과 세철(世哲)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모두 아직 어리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 예리한 기구가 있었지만 / 有利器於斯
반근착절할 기회를 못 만났네 / 不遇盤根錯節
중도에 훼손되어 꺾였지만 / 中道而毀折
조물주에게 물어볼 길이 없네 / 無由問於命物
[註解]
[주01] 은사급제(恩賜及第):
과거(科擧)에서 정원(定員) 외에 특별히 급제를 허락하던 일을 말한다. 대개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여러 번 과거에 낙방(落榜)한 사
람에게 특별히 등외(等外)의 급제를 허락하였다.
[주02] 유공작(柳公綽):
1481~1559. 자는 유재(裕哉)로, 서애 유성룡의 조부이다.
[주03] 유중영(柳仲郢):
1515~1573. 본관은 풍산,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이다. 1540년(중종35) 문과에 급제하여 1553년 장령(掌令)을 거쳐
1564년 황해도 관찰사를 지내고 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였다.
[주04] 유운룡(柳雲龍):
1539~1601. 초자(初字)는 이득(而得),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다. 유성룡(柳成龍)의 형이며 이황(李滉)의 문인이
다. 경학(經學)과 행의(行義)로 이름이 높아 1572년(선조5) 음보로 전함사 별좌(典艦司別坐)가 된 뒤 이듬해 의금부 도사로 추배
되었으나 사직하였다.
다시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가 된 뒤 풍저창 직장(豊儲倉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이때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 주부
(內資寺主簿)로 승진하였다. 이후 진보 현감ㆍ인동 현감ㆍ풍기 군수를 역임하였다. 화천서원(花川書院)에 배향되었으며, 저서에
《겸암집(謙菴集)》이 있다.
[주05] 김극일(金克一):
1522~1585. 본관은 의성, 자는 백순(伯純), 호는 약봉(藥峰)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46년(명종1)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
여 형조 좌랑ㆍ사헌부 감찰ㆍ성균관 직강ㆍ형조 정랑ㆍ예조 정랑ㆍ경상도 도사ㆍ군기시 첨정ㆍ평해 군수ㆍ성주 목사ㆍ밀양 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약봉일고(藥峰逸稿)》가 있다.
[주06] 부친의 가르침:
원문의 ‘정훈(庭訓)’은 뜰에서 내린 교훈이란 뜻으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리는 교훈을 말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진항(陳亢)이
어느 날, 공자의 아들 백어(伯魚)에게 “선생님의 아들인 만큼 특별히 배우는 게 있느냐?”라고 묻자 백어는 “특별히 배우는 것은 없
으나, 요전에 아버님이 뜰에서 ‘《시경》과《예기(禮記)》를 배우지 않으면 남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라고 하셔서, 요즈음《시경》
을 읽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論語 季氏》
[주07] 이명(李溟):
1570~1648. 인조 때의 문신으로, 자는 자연(子淵), 호는 귀촌(龜村)이다. 호조ㆍ병조ㆍ형조 참판을 역임하고 자헌대부에 올라 호
조 판서로 임명되었는데, 물가를 조절하고 수지균형(收支均衡)을 잘 맞추었으므로 수년 내에 국고가 차고 넘쳐 밖에까지 쌓아둘 정
도였다. 재정을 다루는 데 있어 선조ㆍ인조 이래로 제일인자라 불리었다. 저서에 《귀촌집(龜村集)》이 있다.
[주08] 정치화(鄭致和):
1609~1677.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성능(聖能), 호는 기주(棋洲)이다. 영의정 정광필(鄭光弼)의 5대손으로 내외의 청요직을
역임하고 좌의정에 이르렀다. 1668년 좌의정을 사직하고 판중추부사로 있었다.
[주09] 세폐(歲幣):
해마다 중국 조정에 바치던 공물로, 음력 10월에 사신(使臣)이 가지고 갔다.
[주10] 두곡(斗斛):
곡식의 양을 재는 말과 휘를 말한다.
[주11] 김집(金集):
1574~1656.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사강(士剛), 호는 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이이(李珥)의 학문을 계승하고
예학(禮學)을 일으킨 김장생(金長生)을 이어받아, 그 학문을 송시열(宋時烈)에게 전해 주어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저서로《신독
재집(愼獨齋集)》이 있고, 편저로《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이 있다.
[주12] 반근착절(盤根錯節):
뿌리가 뒤엉키고 가지가 어지러이 교차된 것인데 이런 경우를 만나야 칼이 제대로 드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사태가 매우 복잡
하여 처리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야 훌륭한 인재가 자신의 재능을 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는 뜻으로 쓰인다.
후한(後漢)의 우후(虞詡)가 “반근착절의 상황을 만나지 않는다면, 칼이 예리한지 무딘지 분간할 수 없으니, 지금이야말로 내가 공을
세울 기회이다.[不遇盤根錯節, 無以別利器, 此乃吾立功之秋.]”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後漢書 卷58 虞傅蓋臧列傳 虞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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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連山縣監柳公墓誌銘幷序。
豐山柳。始顯於恩賜及第諱柏。中顯於工曹典書諱從惠。四世而傳杆城郡守贈左贊成諱公綽。觀察使贈領議政諱仲郢。通政原州牧使贈吏曹參判諱雲龍。參判生狼川縣監諱䄎。聘宜人聞韶金氏。內資寺正諱克一女。以萬曆辛卯生公。諱元履。字坦之。幼聞詩禮。旣長。有志慮通時務。癸酉。除繕工參奉。丙子遭內艱。戊寅服闋。授典設別坐。遷司饔直長。己卯。陞漢城參軍。轉司憲監察。皆以能擧職名。壬午。出爲連山縣監。始至。下吏頗易之。有老吏入前。審視出而戒群吏。未幾威惠竝施。吏畏而民懷。甲申罷歸。先是。公患痰嗽轉劇。己丑十二月卒。合窆于金溪天登山前夫人權氏墓。從先壟也。嗚呼。公質美而劑以庭訓。居家敦孝友。居官綜理微密。且性剛。雖遇倉卒不變。在繕工當營建。戶曹判書怒其濫。公指屋子徐曰。此難以口舌爭。請令計此屋一間材瓦。則可知。果如公言。判書愧服。嘗監造司饔磁器于廣州。省浮費籍封餘。藏之別庫。一不應勢家私請。吏胥交謁怵迫之。終不動。典設乏油幕。時李公溟判戶曹。再三請不許。公遂進前爭愈力。李以嚴酷名。始怒而終許。同列吐舌。鄭公致和後按公洪至連山。對公嘖嘖不已。連山自前多隱漏田結。公發姦摘伏如神。徵其贖以克歲幣。民情悅服。本縣俸稅素濫。公爲正斗斛。吏不敢售其姦。民咸曰前古未有之事。金判書集亦爲之贊歎。夫以公之才。倘見用於時。其所樹立。夫豈止此。而天不假年。惜哉。前配花山權氏。太師幸之後。處士直養之女。閨行甚備。不幸早夭。生一男曰世長。後配高敞吳氏。生員淦之女。生五男。曰世翊進士。曰世獻。曰世哲。繼堂兄元直後。承宗祀。餘幼。二女。長適金玧。一幼。世長一女。適趙頵。一男幼。世翊一男一女。世獻二男。世哲二男。皆幼。銘曰。
有利器於斯。不遇盤根錯節。中道而毀折。無由問於命物。<끝>
학사집(鶴沙集) - 김응조(金應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