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갈명(墓碣銘)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밀양 박공 묘갈명 병서
(資憲大夫知中樞府事密陽朴公墓碣銘 並序)
고(故)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만수당(萬樹堂) 박공(朴公)의 후손 상태(尙台) 인화(麟和)가 가장(家狀)을 받들고 나에게 와서 묘갈명을 지어주기를 부탁하였는데, 나는 늙고 황망한 사람이라 하여 사양하였으나 되지 않았다. 이에 삼가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공이 교제한 사람은 조대소헌(趙大笑軒), 곽망우당(郭忘憂堂),이송암(李松巖), 권동계(權東溪), 권묵옹(權默翁), 이운창(李雲窓) 등과 같은 현자들이고, 강습한 것은 사서(四書), 육경(六經), 주문공(朱文公) 《가례(家禮)》 등과 같은 책이다.
불행하게도 한 번 병란을 거쳤고 재차 화재를 당하여 없어졌기에, 그의 훌륭한 말씀〔嘉言〕과 아름다운 업적[懿蹟(의적)]을 다른 데서 징험할 수가 없다. 오직 송암이 준 시의 ‘임천에서 문장으로 늙음을 끝내 애석해하네〔林泉竟惜文章老〕’와 운창이 준 시의 ‘유업을 마침내 이루어 올바른 행실이 도탑네〔儒業終成行誼敦〕’와 동계가 슬퍼한 만사의 ‘일찍부터 경전을 공부하여 강론하며 진리를 구하는 데 힘을 쏟았네〔早抱遺經費講求〕’와 묵옹이 후학을 권장하며 지은 묘지명만 남아 있을 뿐이다.
임진왜란 때 망우당 선생과 대소헌 선생을 따라 창의하여 계책을 도왔는데, 적을 참획한 것이 비록 많았지만 공이 공로를 자기의 소유로 하지 않았다. 난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몸을 삼가고 널리 배우며 언어로 구사하여 문장을 이루었다.
공에 대한 기록으로 《원종공신록(原從功臣錄)》과 읍지(邑誌), 그리고 《여지승람(輿誌勝覽)》에 산발적으로 나오는 내용은 당시에 귀와 눈으로 듣고 본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님이 없다. 아, 사람이 참으로 현명하다면 ‘오호(嗚呼)’라는 한마디로도 충분한데, 하물며 여러 현자들의 기록이 이와 같이 묵직한 믿음을 줌에 있어서랴.
공의 휘는 인량(寅亮)이며 자는 여건(汝乾)이다. 그의 선조는 신라 시대 밀성대군(密城大君)이다. 삼한도대장군(三韓都大將軍) 벼슬을 지낸 휘 욱(郁)으로부터 고려 시대 7대를 지나는 동안 장군과 정승을 역임하였다. 그 뒤 중서령(中書令)을 지낸 휘 익(翊)은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을 사우로 사귀며 이학(理學)을 제일 먼저 창도하였다.
이분은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 태종이 다섯 번 벼슬에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았는데, 호는 송은(松隱)이며 좌상(左相)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니, 공에게 5대 조부가 된다. 고조부의 휘는 총(聰)이며 호는 졸당(拙堂)으로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다.
증조부의 휘는 승문(承文)이며 호는 두촌(杜村)으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조부의 휘는 서림(書林)으로 주부(主簿)를 지냈으며, 아버지의 휘는 진(蓁)으로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계림 정씨(鷄林鄭氏)로 참판을 지낸 호(湖)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병오년(1546, 명종 1)에 단성(丹城) 월명리(月明里) 집에서 태어났으며, 숭정(崇禎) 무인년(1638, 인조 16)에 죽어서 눌산(訥山) 건좌(乾坐)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아내는 함안 이씨(咸安李氏)로 병조 판서를 지낸 미현(美玄)의 손녀이며 참봉을 지낸 은(殷)의 따님이니, 묘소는 공의 오른쪽에 합장되어 있다.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노(櫓)와 미(楣)는 모두 문학(文學)으로 집안의 전통을 이었고, 딸은 진사 이상훈(李尙訓)에게 시집을 갔다. 노(櫓)의 아들은 문환(文煥),참봉을 지낸 문형(文炯),문연(文淵),문영(文榮),문수(文守)이고, 딸은 노형철(盧亨哲),우성린(禹聖麟),정서창(鄭瑞昌)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서자는 문갑(文甲)이다. 미(楣)의 아들은 문엽(文燁),문달(文炟),문길(文吉),문혁(文赫),문거(文擧)이고, 딸은 권극익(權克益),진흘(陳屹),하두장(河斗章),주도형(周道亨),이시화(李時華),이후백(李後白)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증손자와 현손자는 많아서 기록하지 않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후손에게 복을 드리우는 계책이며 / 垂裕之謨
나라에 죽음을 바치는 충성이네 / 效死之忠
부귀를 뜬 구름같이 보고 / 雲視富貴
은거한 만수당〔공의 호〕의 늙은이네 / 萬樹遯翁
임금의 은총 절로 이르니 / 恩資自至
나이와 덕망이 모두 높네 / 年德俱隆
돌에 묘갈명을 새겨서 / 用銘于石
후세에 무궁토록 밝게 보이네 / 昭示無窮
<끝>
[註解]
[주01] 조대소헌(趙大笑軒) : 조종도(趙宗道, 1537~1597)를 말한다. 본관은 함안(咸安),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이다.
저서로는 《대소헌집》이 있고,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주02] 이송암(李松巖) : 이로(李老, 1544~1598)를 말한다.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여유(汝唯), 호는 송암이다.
[주03] 권동계(權東溪) : 권도(權濤, 1575~1644)를 말한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보(靜甫), 호는 동계이다.
[주04] 권묵옹(權默翁) : 권집(權潗, 1569~1633)을 말한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달보(達甫), 호는 묵옹이다.
[주05] 이운창(李雲窓) : 이시분(李時馩, 1588~1663)을 말한다. 본관은 장수(長水), 호는 운창이다.
[주06] 오호(嗚呼)라는 한마디 : 공자(孔子)가 연릉계자(延陵季子)의 무덤에 “오호라 오나라 연릉 군자의 무덤이여!〔嗚呼!有吳延陵君
子之墓.〕”라고 썼던 일이 있다.
[주07] 무인 : 원문에는 임인(壬寅)으로 되어 있으나 고증하여 무인으로 고쳤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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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資憲大夫知中樞府事密陽朴公墓碣銘 並序。
故資憲大夫知中樞府事萬樹堂朴公後孫尙台, 麟和。奉家狀來。索銘福樞。以耄荒辭不獲。謹按狀公所與交。如趙大笑, 郭忘憂, 李松巖, 權東溪, 權默翁, 李雲窓諸賢也。所講習。如四子六經朱文公家禮等書也。不幸一經兵燹。再遭鬱攸。其嘉言懿蹟。他無可徵。惟有松巖之林泉竟惜文章老。雲窓之儒業終成行誼敦贈詩。與夫東溪之早抱遺經費講求之哀輓。默翁奬勸後學之撰誌而已 。壬亂。從忘憂, 大笑兩先生。倡義贊謨。斬獲雖多。公不自有。亂已還鄕。謹身博學。吐辭成章。散出原從功臣錄若邑誌若輿誌勝覽者。無非當日耳目所覩記也。噫。人苟賢也。一於乎足矣。况諸賢之記述若是其鄭重者乎。公諱寅亮。字汝乾。其先新羅密城大君也。自三韓都大將諱郁。歷麗七世將相。至中書令諱翊。師友圃, 冶。首倡理學。麗杜屋。我 太宗五辟不就。號松隱。贈左相。謚忠肅。是爲公五世祖。高祖諱聦。號拙堂。贈吏判。曾祖諱承女。號杜村。同中樞。祖諱書林。主簿。考諱蔡。贈判决事。妣鷄林鄭氏。參判湖女。嘉靖丙午。公生丹城月明里第。卒崇禎壬寅。葬訥山乾坐原。配咸安李氏。兵判美玄孫 。參奉殷女 。墓祔公右。生二男一女。男櫓, 楣。俱以文學。世其家。女李尙訓進士。櫓男女煥, 文炯參奉, 文淵, 文榮, 文守 。女盧亨哲, 禹聖麟, 鄭瑞昌。側室子文甲。楣男文燁, 文炟, 文吉, 文赫, 文擧。女權克益, 陳屹, 河斗章, 周道亨, 李時華, 李後白。曾玄蕃不錄。銘曰。
垂裕之謨。效死之忠。雲視富貴。萬樹遯翁。恩資自至。年德俱隆。用銘于石。昭示無窮。<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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