芝峯李先生旌閭重修記(지봉 이선생 정려중수기)
宜春士人李圭夏與族孫晩雨來請(의춘사인이규하여족손만우래청)
其八世祖孝子芝峯先生諱宗榮旌(기팔세조효자지봉선생휘종영정)
閭重修記於晩燾按其行錄吾王(려중수기어만도안기행록오왕)
考霞溪府君臨年所撰也不肖不覺(고하계부군림년소찬야불초불각)
愴然泣下有不可以私疾終辭者噫(창연읍하유불가이사질종사자희)
公月城人我太祖佐命功臣諱日新(공월성인아태조좌명공신휘일신)
之后主簿諱寬之子六歲侍親癠(지후주부휘관지자륙세시친제)
晝宵不離側旣長師事南冥先生(주소불리측기장사사남명선생)
得聞敬義直方之學有從師日錄(득문경의직방지학유종사일록)
宣祖辛卯中生員翌年値大亂倡義(선조신묘중생원익년치대란창의)
有功錄宣武勳兩親歿六年廬墓(유공록선무훈량친몰륙년려묘)
啜粥泣血壬寅與鄭桐溪成浮査(철죽읍혈임인여정동계성부사)
諸賢疏伸崔守愚先生寃誣歿後(제현소신최수우선생원무몰후)
庚申有旌孝之典蓋人多士之論也閭(경신유정효지전개인다사지론야려)
在宜東二十里禾谷中橋之右今距庚(재의동이십리화곡중교지우금거경)
申三百餘年隨毁水葺其錫類之(신삼백여년수훼수즙기석류지)
美前人已備述之矣嗚呼公學問有(미전인이비술지의오호공학문유)
淵源忠勤載盟府當時獨以孝表(연원충근재맹부당시독이효표)
里雖若不足於揄揚然傅曰堯舜之(리수약부족어유양연부왈요순지)
道孝悌而己又曰孝悌也者爲仁之本是(도효제이기우왈효제야자위인지본시)
知擧一孝而不惟忠與學在其中入而(지거일효이불유충여학재기중입이)
孝出而忠斯之謂學問之道時有汗隆(효출이충사지위학문지도시유한륭)
物有興廢而吾道一而已矣與勸之不(물유흥폐이오도일이이의여권지부)
在玆而師法之不在玆乎(재자이사법지부재자호)
戊申立冬節通政大夫行承政院(무신 입동절 통정대부 행 승정원)
同副承旨兼 經筵叅贊官春(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
秋舘修撰官眞城李晩燾謹記(추관 수찬관 진성 이만도 근기)
[참고내용]
◇戊申年은 1908년을 말함.
◇진성(眞城) 이만도(李晩燾)는 호(號)가 향산(響山)인 이만도(李晩燾, 1842∼1910) 선생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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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역]
지봉 이공의 정려문 중수기〔芝峯李公㫌閭重修記〕
의춘(宜春)의 사인(士人,선비를 말함) 이규하(李圭夏)가 족손 만우(晩雨)와 함께 와서 8대조 효자 지봉(芝峯) 선생 휘 종영(宗榮)의 정려문 중수기를 나에게 청하였다. 그 행록을 살펴보니 우리 할아버지 하계 부군(霞溪府君)께서 임종하시던 해에 지은 것이었으므로 나도 모르게 서글픈 마음에 눈물이 흘러 병을 핑계로 사양할 수가 없었다.
아아, 공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니, 태조 때 좌명 공신(佐命功臣)이었던 휘 일신(日新)의 후손이자 주부(主簿) 휘 관(寬)의 아들이다.
6세 때 어버이의 병시중을 들면서 밤낮으로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자란 뒤에 남명(南冥) 선생을 사사하면서 ‘경의직방(敬義直方)’의 가르침을 받았으니 스승을 종유하며 기록한 일록(日錄)이 있다.
선조 신묘년(1591, 선조 24) 생원시에 합격하였는데 다음 해 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창도해 공을 세워서 선무 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었다. 양친이 돌아가신 뒤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죽을 마시고 피눈물을 흘렸으며, 일찍이 동계(桐溪) 정온(鄭蘊),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등 현인들과 함께 상소하여 최수우(崔守愚=崔永慶,1529~1590) 선생의 억울한 무고를 신원하였다.
돌아가신 후 많은 선비들의 의논을 따라서 경신년(1620, 광해군 12)에 효행을 정려하는 은전이 있었다. 정려문은 의춘에서 동쪽 20리 떨어진 화곡(禾谷) 중교(中橋) 가에 있다. 이제 경신년에서 3백여 년이 흘러 훼손될 때마다 보수하였으니 그 대대로 이어 온 효성에 대해서는 전인이 이미 잘 갖추어 기술하였다.
아아, 공은 학문에 연원(淵源)이 있고 충정이 훈부(勳府)에 실려 있는데 당시에 오직 효성만을 가지고 정려하였으니, 비록 공의 덕을 선양하기에 부족한 듯하지만 《논어》에 이르기를 “요순의 도는 효도와 공경일 뿐이다.[堯舜之道 孝弟而已]”라고 하였고, 또 “효도와 공경은 아마도 인(仁)을 행하는 근본일 것이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으니, 효도 하나만 거론하여도 충성은 절로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집에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충성하는 이것을 일러 학문의 도라고 하니, 시대에는 쇠락과 융성이 있고 사물에는 흥폐가 있지만 우리 도는 하나일 뿐이다. 흥기하고 권면할 것이 여기에 있지 않겠으며 본받아야 할 법도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주해]
[주01] 이규하(李圭夏) :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회길(悔吉), 호는 우천(愚川)이다. 1857년(철종8)생으로 1908년(융희2)에 향산
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주02] 하계 부군(霞溪府君) : 이가순(李家淳, 1768~1844)이다. 자는 학원(學源), 호는 하계이고, 본관은 진보(眞寶)이며, 이황(李滉)
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경기전 참봉(慶基殿參奉) 이귀서(李龜書)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정랑 김오응(金五應)의
딸이다.
1813년(순조13) 문과에 급제하여 1820년 성현도 찰방, 설서 등을 역임하였고, 1822년 인신(印信,도장)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이
유로 단양에 유배되었다가, 1831년 이후 정언, 수찬, 장령, 응교,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봉화 동양에 은거하
여 후진 양성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 《하계집》이있다.
[주03] 최수우(崔守愚) : 최영경(崔永慶, 1529~1590)이다. 본관은 화순(和順), 자는 효원(孝元), 호는 수우당(守愚堂)이다. 조식(曺植)
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 명망이 높았는데, 1589년(선조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 때 무고로 투옥되어 정철(鄭澈)의 국문
을 받다가 옥사하였다. 그 후 신원되어 대사헌에 추증되고, 진주(晉州) 덕천서원(德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주04] 집에서는 …… 하니 : 《논어》 〈학이(學而)〉에 “젊은이들은 집에서는 효도하고 밖에서는 공경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미덥게 해
야 하며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고 어진 이를 가까이해야 한다. 그렇게 실천을 하고 남은 힘이 있으면 곧 그것으로 글을 공부해야 한
다.[弟子 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則以學文]”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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