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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과 수업 -
이번 학기에 수강하는 과목은 영재교육 관련 과목 하나와 물리학과 과목 둘이다. 이 중 물리학과 과목은 고체물리와 양자역학. 고체물리는 대학원생 전용 수업이고, 양자역학은 대학생 수업인데 교수가 대학원생도 추가적인 과제를 수행한다는 조건으로 수강하게 하였다.
고체물리 수업의 교재는 Kittel이란 분이 쓴 책으로 고체물리 교재로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내가 대학생 때도 저 책으로 공부했었다. 보통의 대학에서는 4학년 때 배우는 선택과목인데, 아마 교재는 다들 Kittel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 반의 학생은 모두 12명. 국가별로 보면 한국, 중국, 방글라데시, 미국, 멕시코, 베네수엘라, 그리고 르완다이다. 미국은 4명, 중국, 방글라데시 출신은 두 명이고, 나머지 나라에서는 모두 한명씩 왔다. 교수는 네덜란드 사람.
영어로 물리를 배우면 어떨까? 생각했었다. 나는 솔직히 “아주” 자신이 있었다. 일단 내가 학교 다닐 때 처음에는 임용고사가 아니라 대학원 진학을 준비했었기 때문에 전공의 주요 과목은 연습문제까지 모조리 풀었었다. 물론 시간은 20년도 넘게 흘렀지만, 그래도 다시 공부를 하게 되면 예전에 했던 것들은 되살아나게 마련이다. 게다가 물리학은 수학문제 풀듯이 하는 것이므로 영어 실력이 부족한 것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니들이 공부를 해봐야 얼마나 하겠냐?’라는 자신감을 넘은 자만심마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업 시작. 일단 나는 알아듣지를 못했다. 알아듣지를 못하니까 이해도 못했다. 근데 나는 한국에서도 물리 수업시간에 이해를 못했었다. 그래서 지금의 이런 상황이 영어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것인지 분간도 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르완다에서 온 피델이 수업을 주도했다. 르완다(Rwanda)라니... 여기는 앙골라의 수도 루안다(Luanda)랑 헷갈리기 쉽다. 르완다는 한국 외교부가 지정한 <여행자제국가>이고, 2014년 1인당 GDP가 721달러로 북한보다도 낮은 곳이다. 조사대상 196개국 가운데 177등. 게다가 1959년부터 1996년까지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내전으로 수백만명이 학살당한, 정말 살기 힘든 나라이다. 특히 1994년에는 100일 동안 80만명이 학살되었다. 이는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이다. 피델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 시기에 용케 살아남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나라에서 온 피델이지만 영어도 나보다 잘하고, 물리마저도 나보다 잘했다. 이게 어찌된 일인지... 수업시간에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앉아있는 나와 달리 피델은 교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공부를 했다. 다른 미국 애들이야 당연하다고 해도 방글라데시에서 온 두 명도 적극적이었다. 여기는 물리시간에도 토론을 했다. 한국에서 내가 다녔던 학교의 경우, 수업시간에 토론은 없었다. 교수는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열심히 칠판에 써 가면서 설명하면, 학생들은 그저 받아적기에 바빴다. 할 이야기? 없었다.
영어를 못하는 것이 물리학과에서는 심각한 문제였다. 결국 나는 책을 보고 혼자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왔다. 영재교육 시간에는 이 정도로 못 알아듣지 않는데, 물리시간에는 알아듣는 것이 훨씬 더 힘들었다. 사실 이게 한국말로 해도 알아듣기 힘들거든... 근데 영어로 하니 더 못 알아들을 수밖에... 게다가 물리니까 칠판에 필기하는 내용도 많은데, 교수가 글씨를 예쁘게 쓰는 것이 아니라 날려서 쓰면... 영어를 날려 쓰면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물리학과 공부를 괜히 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냥 원래대로 Recreation & Leisure를 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해도 되었을텐데... 작년에 어학연수 받을 때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온 Hassam의 전공이 바로 저거 였다. 공부는 하기 싫어하면서도 점수에는 예민했던 진상... 내가 마이너를 바꾼 이유 가운데에는 하쌈도 있었다. 내가 저런 놈과 같은 교실에서 또 다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나마 양자역학은 상황이 양호했다. Dr. Close 교수님은 물리교육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그래서인지 첫날에는 회절격자필름(일명 무지개필름)을 이용해서 여러 광원들의 무늬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즐거웠다.
위에서도 말했듯 양자역학은 기본적으로 학부생을 위한 강의. 나를 포함한 두 명의 대학원생을 제외한 나머지 24명은 미국 학생들이다. 여기는 출석을 부르지는 않고 출석부 종이를 돌리면 거기에 서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대리출석을 하려고 들면 아주 쉽다. 학생들이 실제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요즘은 그나마도 안한다. 출석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클로스 교수님은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해 다양한 자료를 사용한다. 빔 프로젝터를 이용해서 인터넷 자료를 띄워 놓고 학생들이 참여하도록 독려한다. 그러면 학생들도 다양하게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책에 다 나오는 얘기를 뭐 저렇게 열심히 하나 모르겠다. 난 솔직히 과정은 됐고 결과에만 관심이 있는데, 이 분은 수업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수업시간에는 4명이 한 조를 이루며 앉아있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화이트보드와 보드마카를 늘 준비해 놓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이 직접 풀어보도록 유도한다. 사진에서 바로 앞에 있는 노트는 나의 것이고, 화이트보드에 문제 풀어놓은 것이 보인다.
책을 사지 않고 프린터로 출력한 다음 파일에 넣어서 보니 책을 사는 것보다 좋은 점이 더 많다. 일단 무겁게 다 들고 다니지 않고 필요한 부분만 가지고 다니니 편하고, 책에다 줄치고 메모하고 이러기도 좋다.
수업을 이런 식으로 하니 진도가 너무 느린 것이 단점이다. 봄방학을 맞은 시점에서 3장까지밖에 못 나갔으니 책을 다 공부하기는 힘들겠다. 클로스 교수님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학교 웹사이트에 보충할 내용을 동영상으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수업시간에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영상을 보고 공부하도록 안내한다. 그래도 모르겠으면 학생들이 서로 서로 배우고 가르쳐줄 수 있는 공간도 만들어 제공한다. 이름하여 물리도움센터.
수업시간에는 물리학과 자체 예산으로 L.A.라는 제도를 운영한다. Learning Assistant. 보통의 대학에 있는 교육조교(T.A. Teaching Assistant)가 대학원생인 것과 달리 이들은 대학생들이다. 바로 지난 학기에 배운 과목에 L.A.로 지원하여 수업에 들어가서 후배들의 학습을 도우며 자신도 함께 공부하는 것이다. 이런 것을 하는 애들은 똑같은 과목을 두 번 듣는 결과이므로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 결정적으로 한 시간에 10달러씩 돈을 받는다. 자격도 C학점 이상만 받았으면 되니까 제한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물리학과에 예산이 얼마나 많으면 이런 것이 가능할까? 위의 사진에 있는 물리도움센터에도 L.A.들이 앉아서 찾아오는 학생들의 질문을 함께 고민해 준다. 그러면서 돈도 벌고... 나도 당장에 저것을 하고 싶어서 신청을 했는데, 아쉽게도 대학원생이라 자격이 없었다. 예산이 학부에 배정되어 있어서 대학생만 가능하다고 했다. 물리공부하면서 돈도 벌고, 저절로 영어공부가 되면서 친구도 사귈 수 있는 엄청나게 좋은 기회인데 아쉽다.
- Take Home Exam -
2015년 3월 2일(월). 양자역학 중간고사를 보았다. 공부는 나름대로 꽤 열심히 했는데, 놓친 부분이 있어서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다. 50점 만점에 42점. 정말 아쉬웠다. 조금만 더 꼼꼼하게 준비했으면 한국인의 우수성을 확실하게 보여줄 수 있었는데...
그리고 고체물리 중간고사...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제안하기를 그냥 시험문제를 가르쳐줄테니 집에 가서 풀어오면 안되겠느냐고 했다. 난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했다. 그것도 기간을 열흘 정도 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런 형태의 시험을 Take Home Exam이라고 했다. 참... 이름도 잘 짓는다... 야... 이거는 아예 손도 안대고 코 풀게 생겼구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나도 편한 게 좋으니까...
2015년 3월 5일(목). 고체물리 시험문제가 발표되었다. 기한은 3월 16일(월)이고, 답안지는 스캐너로 읽어서 메일로 제출하라고 했다. 아니면 PDF파일로 만들던지...
그러나 나는 문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풀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공부를 안했느냐? 천만의 말씀! 나는 공부말고는 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풀 수가 없었다. 책에 나오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책에 나오는 그대로가 아니라 책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했을 때 풀 수 있는 문제였다. 정말 대략난감...
2015년 3월 10일(화). 수업 끝나고 교수님께 말씀을 드렸다. “Take Home Exam을 풀어보려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하나도 못 하겠어요.” 그랬더니 교수님이 몇 번이 어렵냐고 했다. 문제는 8개 중 6개를 골라서 푸는 것이었다. “다 모르겠는데요...” 이건 좀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말같지 않은 대답을 했다. 그랬더니 교수님이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찬찬히 풀어보고, 모르겠으면 연구실로 찾아오던지 전화를 하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핸드폰번호도 알려주셨다.
일단 인터넷에서 관련된 자료를 검색했다. 다음, 네이버...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전 세계 인터넷 정보의 80%가 영어로 씌어있다더니 구글로 검색을 하니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보였다. 일단 비슷한 문제를 풀어서 올려놓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비슷한 문제의 풀이를 출력해서 하나하나 되짚어보니까 내 시험문제도 하나 둘씩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다...
그렇게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다섯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도저히 못 푸는 문제 하나는 들고 직접 연구실로 찾아갔다.
교수님은 문제를 풀어주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를 풀기 위한 아이디어를 주셨다. 따라서 결국은 또 내가 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교수님의 조언 덕분에 어찌되었든 문제를 풀었다. 물론 맞았는지는 모른다.
답안지는 되돌아온다. 사진으로 올린 것은 두 번째 중간고사 답안지인데, 85.6점 맞았다. 처음 것은 91.0점을 맞았다. 점수는 괜찮아 보이지만 석차는 12명 중 8등이다. 점수가 높은 까닭은 집에서 풀었고, 기간도 열흘이나 주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시험은 교실에서 보았더니 석차는 모르지만 점수가 내려갔다. 교실에서 보는 시험은 In Class Exam이라고 한다.
사족
1) 모든 학문이 다 소중하고 위대한지는 모르겠으나, 유학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이번 학기에 물리수업을 들으며 내가 만일 물리학과로 들어왔으면 정말 큰일날뻔 했겠다는 생각을 했다. 원래 나는 물리학과에도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물리학과는 나처럼 토플점수 모자라는 학생을 위한 조건부 입학이라는 제도가 아예 없고, 토플과 함께 GRE 점수표도 제출해야 했었기 때문에 다행히(?) 못 간 것이다.
2) 통역의 세계에 대해 내가 잘 아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만 생각해보면 다른 목사의 설교를 목사가 통역하는 것이 가장 쉽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감옥에 계신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님이 평소에 자랑삼아 말씀하기를 자신은 미국땅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틈틈이 영어공부를 해서 설교를 통역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했었다. 근데 설교는 성경말씀에 기초하는데다 맨날 그 내용이 그 내용이거든... 물론 나같은 사람은 설교 통역도 할 수 없겠지만, 설교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별로 어렵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3) 갑자기 기독교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미국에 유학와서 학위따기가 제일 쉬운 학문이 신학이라는 얘기를 들어서이다. 그렇다면 교육학은 두 번째가 아닐까? 물리학과 수업을 들으며 생각해봤다.
4) 물리학과 수업을 들으며 난 스스로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꼈다. 나는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나? 이곳의 교수님들은 수업이 끝나면 적어도 10분 이상 학생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시간이 많이 걸리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언제든 연구실로 찾아오도록 안내하고, 실제로 가보면 잘 가르쳐준다.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터넷에 보충자료를 올린다. 정말 열심히 한다.
5) 한국의 모든 학교에서는 교사 또는 교수가 한번 가르쳤으면 끝이다. 한국에서 교사나 교수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 배웠어 안 배웠어?”이다. 그리고 일단 배웠다고 하면 그 다음부터 모든 것은 학습자의 몫이다. 공부를 하던 말던 내버려둔다. 물론 학생이 질문을 하면 대답은 해 주는데, 많은 교사와 교수들이 이런 상황을 귀찮아하고, 학생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묻지 않고 다들 알아서 해결하던지 아니면 안한다. 나는 미국에서는 저런 소리를 하는 교수를 본 적이 없다. 여기서는 학생들에게 아는지 모르는지를 묻는다. “Are you cool or not?” 이렇게. 그리고 학생들이 모르는 것 같으면 다시 설명한다.
6) 한국에서의 시험은 누가 잘하는지를 가려내기 위해 보는 것이라면, 미국에서의 시험은 학생이 교육목표에 도달했는지를 알아보는 수단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A는 우수성을 의미하지만, 미국에서의 A는 성실성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학생들이 목표를 성취했다고 판단되면 숫자에 상관없이 A를 주는 것 같았다. 언뜻 생각하면 학점 부풀리기로 볼 수 있는데, 학점 부풀리기는 ‘아닌 애들’한테까지 A를 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미국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제대로 된 대학에서는... (근거로 같이 고체물리를 배우는 중국출신 남학생이 지난 학기에 기츠 교수님한테 비록 다른 과목이지만 C를 맞았다고 제 입으로 얘기했다. 나는 대학원생이 C를 맞을 수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그 남학생은... 내가 볼 때... 평소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 수업시간에 전혀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다.)
7) 내가 어떤 학생인지를 보여주는 예. 내가 지난 2월에 텍사스주립대 도서관 홈페이지의 모델이 되었다. 계기는 어느 날인가 도서관 직원이 내게 오더니 맨날 도서관에 온다고 하면서 모델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이른바 길거리 캐스팅이다!! 그래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도 했다. 아래가 그 증거인데, 옆에 잘 안보이지만 깨알같은 글씨가 인터뷰 내용이다.
첫댓글 미국교육이 학습자를 중심에 두었다는 점, 성실성을 우선에 둔다는 점을
어떻게 저희의 학교현장에 접목 시킬 수 있을지 고민하겠습니다.
'표지모델' 축하드립니다! 공부가 체질이신듯! 이참에 박사도 도전하심이 어떠실지? ^^
하하... 저는 하루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