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 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천국과 지옥에 간 두 사람 이야기
예수님께서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16:14)을 향하여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시는 말씀으로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하실 때(16:1-13),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비웃음으로, 대중 앞에서 의로운 체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전혀 없고 오직 돈만 탐하는 그들에게 과연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이유로 비유가 아닌 사실적인 이야기라고 하는 견해도 있어 비유인지 아니면 사실적인 이야기인지에 대한 견해가 분분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비유로 다루겠습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비유이든 아니면 사실적인 이야기이든지간에 예수님께서 여기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진리는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잔치를 벌이며 사치스러운 생활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 집 대문 앞에는 나사로라는 병든 거지가 누워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허기를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고 갈 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거지는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의로운 사람들이 가는 장소에 가서 아브라함과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는데, 그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고통을 겪다가 아득히 먼 곳에 나사로가 아브라함과 같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부자는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여기 보내어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라도 좀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부자가 하는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에 살던 때를 생각해 보아라. 너는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서 위안을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우리와 너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 놓여 있어서 아무도 여기서 그리로 가려고 해도 가지 못하고 이리로 건너오지도 못한다.'
그러자 부자가 말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러면 제발 그를 내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내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이 죽을 때에는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성경이 그들에게 경고하고 있다. 네 형제들이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지 그 성경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부자가 대답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그들은 성경을 읽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일 죽었던 사람을 보내면 그들이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설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말하였습니다. '만일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간다 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를 보면, 두 사람이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의 신분은 아주 대조적입니다. 한 사람은 이름이 나오지 않는 어떤 부자이고, 또 한 사람은 문전걸식하는 거지 나사로 입니다. 부자는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럽게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렇지만 거지 나사로는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허기진 배를 채워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마저 그에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고 갈 뿐이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몸마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성치 않은 몸인데다가 늘 허기져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각각 어느 날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사들에게 이끌려 의로운 사람들이 가는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과 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자도 죽어서 땅에 묻혔는데, 그는 지옥으로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고통을 겪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세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에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반면에 부자는 죽어서 지옥의 극심한 고통 속에 처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세계를 말씀해 줍니다. 어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비록 빈부의 차이가 크지만 둘 다 유대인의 혈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여기의 어떤 부자는 실은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를 비유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천국과 지옥의 '사후의 세계'를 인정하는 사람들로서, 천국을 바라보며 그 세계에 들어갈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들이 다 사후 세계와 함께 부활을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마 22:23).
그런데 말입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부자이든 거지이든 둘 다 천국을 바라보며 부활을 기다리는 그들이기에 당연히 죽었을 때 둘 다 천국에 있는 자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부자는 죽어서 그가 바라본 천국이 아닌 지옥에서 큰 고통 중에 있고, 거지 나사로만 의로운 자의 세계인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평안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천국의 상태의 전부를, 그리고 지옥의 상태의 전부를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이 많습니다만, 성경은 극히 일부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천국과 지옥을 아는 데 충분하며, 이 세상에 있는 자에게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천국과 지옥은 어떠냐?를 아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는데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천국과 지옥을 부분적으로나마 알려 주고 있는 한에서는 알아야 할 것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1. 내세의 두 영역인 천국과 지옥
사람은 죽은 이후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사후 상태를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보이는 세계는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세 외의 또 다른 세계인 내세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 중에서 게 중에는 사람은 영혼불멸이라든지, 내세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가령 헨리 데이빗 도로우(Henry David Thoreau)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는 영혼불멸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다. 한 번에 한 세상만을! - 그것이 나의 좌우명이다. 현세에 아주 가까이 놓여 있는 의무를 실천하고 사후에 관해서는 염려하지 말자."라고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는 것을 믿지만 죽은 후에는 그 영혼이 새로운 형태로 환생(Reincarnation)한다고 하는 '윤회설'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한 영혼불멸도 믿고 내세도 믿는데, 단지 육신의 무거운 짐을 벗고 안식을 얻는 세계에 들어가는 정도로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대부분은 무의식적으로든, 아니면 의식적으로든지간에 영혼불멸과 함께 내세는 천국과 지옥이란 두 영역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종교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그 믿음은 절대적입니다. 다양한 종교, 그 중에서도 무속 신앙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경우에 있어서 오랫동안 잠재해 오고 있는 것은 사람은 죽으면 그 영혼이 선악간에 따라서 무서운 염라대왕이 자리하고 있는 지옥으로 가든지, 아니면 인자한 옥황상제가 자리하고 있는 천당으로 간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어느 종교보다도 사람의 영혼불멸과 내세관이 확고합니다. 이것을 자의적 생각과 판단으로 어렴풋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내 주시고 가르쳐 주신데 따라 알고 있습니다.
사람은 종교적입니다. 그것은 사람은 창조 받을 때 영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생기를 불어넣어 사람이 '생령'(a living Soul)이 되게 하셨습니다. '살아있는 영(영혼)'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의 영(영혼)이 불멸인 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영(영혼)적인 존재이기에 영적인 특성을 발휘합니다. 그것이 바로 종교성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섬기는 '예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는 데서 사람은 또한 도덕성을 띱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 이것은 모든 사람의 본분이다"(전 11:13)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그가 과연 하나님의 형상의 속성을 발휘하는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인격이 참으로 선한 것을 보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생명의 언약을 어긴 죄의 결과에 따라 죄로 잉태한 모든 후손이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는 선한 지혜에 이르지를 못하고 악한 지혜를 좇아 죽음의 어두움에 속하여 살게 된 것을 기억하십시오!.
사람은 영혼불멸의 존재인 까닭에 종교성은 현세에서뿐만 아니라 내세에서도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러나 내세에서 누구나 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내세는 두 영역의 세계로 되어 있는데 천국과 지옥이며, 천국에는 현세에서 하나님의 백성 된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한 자들만이 들어가는데 반해 지옥에는 무종교인이든 종교인이든지간에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시 42:10, 79:10, 115:2) 하며 참 하나님을 부인하고 대적하던 자들이 들어가고, 그렇게 해서 지옥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는 있으나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후회요 한탄이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해지게 되는 것이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광에 참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세는 두 영역인 천국과 지옥의 세계입니다. 내세는 오직 이 두 영역이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오직 이것만을 말합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의 두 영역 외에 소위 '중간 세계'를 주장하는 위험한 교리를 제시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카톨릭의 '연옥설'이 그렇고, 개신교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낙원'(樂園)이라는 곳이 따로이 존재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들은 낙원은 성도가 천국에 최종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머무르는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에 대한 증거로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품"이 바로 낙원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한 군데인 누가복음 23장 43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낙원이란 용어가 언급되고 있는 사실을 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좌우편에 각각 행악자들도 달렸는데 한 죄수가 회개하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말하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는데, 이 낙원이 하나님의 최후 심판이 있은 후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까지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가 있는 중간 세계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결코 중간 세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지옥과 함께 천국의 세계만을 말할 뿐입니다. 성경에는 천국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용어로 하나님의 나라, 천당, 낙원이 있습니다. 이 각각의 용어들은 서로 다른 것을 말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것을 이렇게 다른 용어로 설명해 주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통치력이 미치는 영역을 의식하고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나라'는 영어로 'kingdom'입니다. 왕국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 단어를 쓰는 것은 하나님이 왕권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에서입니다. 곧 하나님이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세로 나라를 다스리는 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다스리는 대상은 '만유'입니다. 곧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을 다스리십니다. 시편 103편 19절에서 그 사실을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이것은 다시 이렇게 개역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나라는 만유를 통치하시는도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 개념입니다.
둘째, '천국'에 대해서 봅니다. 천국은 하늘 나라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 역시 장소적 개념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생할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의 성질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땅에서라도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그 거룩한 권한의 작용이 임하는 곳을 의미했습니다.
셋째, '천당'에 대해서 봅니다. 성경에서 '천당'이라고 직접 사용한 용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집'으로 묘사한 곳은 한 군데 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하늘에 있는 집!, 한문으로 쓰면 '천당'(天堂)입니다. 천당이란 용어와 함께 우리가 같은 개념으로 자주 말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도성인 '천성'입니다. 천당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으신 집으로서 성도들이 하늘에서 거할 집을 뜻합니다. 성도들에게는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이 있음을 의식하게 하는 용어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인내하며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산 믿음의 인물들의 삶을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도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게서 나온 본향으로 돌아가 영원히 거할 것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는 모두가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마땅히 자신을 낳으신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가 그분과 더불어 영원히 살게 됩니다. 이렇게 성도는 장차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성도들이 미련을 가지고 살 곳이 아닙니다.
넷째, '낙원'에 대해서 봅니다. 이 용어는 성도들이 영생할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복되고 즐거운 곳인지를 잘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낙원은 하나님의 나라가 내포하고 있는 질적으로 윤택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져다주는 윤택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세계를 요한계시록 21장 1-7절은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 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또한 계속되는 말씀 중에서 10-12절과 22장 1-2절을 보면 과연 하나님의 나라가 성도들이 얼마나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에덴동산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이상 하나님의 나라를 묘사하고 있는 4개의 용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본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고 있는 우리는 지금 천국 생활을 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죽어서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서 그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곳은 천국이요 또한 낙원입니다. 지상 세계에 있을 때와 다른 점은 질적으로 다른 윤택한 삶입니다. 지상 세계에서는 현실적인 삶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 또한 그와 더불어 고난을 받습니다(롬 8:17). 그러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에서 부요를 누립니다. 그렇지만 죽은 자에게서 낙원은 더 이상 고난이 없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품에 있는 것으로 갖는 삶 모든 영역에서 윤택함을 누리는 부요한 자로 살아갑니다. 이 낙원의 세계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천당이요, 우리 전체에게 있어서는 천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백성과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이렇게 여러 용어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김홍전은 예수님의 행적 7권에서 성도는 죽으면 즉시 하나님의 나라, 천국, 천당 혹은 낙원이라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간다고 하면서도, 낙원과 천당을 같이 보는데 낙원은 종국적인 곳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낙원이라는 데는 성도가 영구하게 가 있을 곳이 아니라 경과의 과정으로 머무는 곳이라고 말합니다. 죽은 성도의 영혼이, 그러니까 땅에 묻힌 육신과 분리된 죽은 자의 영혼이 주님께서 재림하셔서 새로운 영광의 몸을 입고 나타날 때까지 가 있는 곳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이 지상 세계와 천국 세계와는 또 다른 중간 세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육신과 분리된 죽은 자의 영혼이 새로운 몸을 입을 때까지 머무르는 곳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죽은 자의 영혼이 일시적으로 머무는 세계라는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럴 경우 성도에게서 하나님의 통치 개념을 가지고 다룰지라도 현세의 지상에서의 교회와 내세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는 성격과 질이 다르듯이 또한 일시적인 상태인 낙원(천당)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는 성격과 질이 다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낙원은 결코 새로운 몸을 입은 부활한 자가 거할 곳이 아닌, 다만 죽은 자의 영혼이 완전한 몸의 회복을 입기까지 하나님 나라의 복된 상태 속에서 기다리는 장소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본문에서 부자가 음부(지옥)에서 겪는 고통 또한 영원한 형벌인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받기 이전에 단지 악인의 죽은 영혼이 아직은 새로운 몸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악한 자의 부활에 이른 상태가 아닌) 겪는 과정의 장소 정도가 되고 말 것으로서 이 역시 영구한 게 아닌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그런 차원이 아닌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만 사랑하는 자의 종국이 어떤 것인지와 이 세상에서 아무 것도 가지지 못했으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속에서 하나님을 진실로 사랑했던 거지 나사로의 종국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할 때 낙원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한 경과의 과정으로 볼 수는 결코 없습니다. 물론 분명히 죽은 자는, 그가 성도일 경우 낙원에서 완전한 몸의 구속(부활)을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품에서 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재림 때 완전한 몸의 구속을 입고 온전한 상태로 그가 있었던 그 낙원에서 복된 나날을 영원히 지낼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그 부활을 하기까지 낙원에 있는 것과 부활하여서 영원한 생명으로 낙원에 있는 것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곳이 용어의 개념과 의미상에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천당이요 천국이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와 동일하게 악한 자일 경우 지옥의 어두움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기다리다가 주님의 재림 때 마침내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이르는 부활을 할 것입니다. 이 역시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받아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이르는 부활을 하기까지 두려움과 고통으로 지옥에 있는 중에 마침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여서 그도 부활하여 하나님의 최후 심판에 따라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는 것으로 지옥에 있는 것의 차이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세워 놓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사후에 인간의 영혼이 가게 되는 곳은 천국과 지옥 단 두 곳 외에는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체는 사후에 흙으로 돌아가 썩게 되나 영혼 - 결코 죽거나 잠들지 않음 - 은 불멸적인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즉시 돌아갑니다. 의인의 영혼은, 죽는 순간에 거룩함으로 완전하게 되어 지극히 높은 천국에 들어가 거기서 빛과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얼굴을 뵈오며 ,몸의 완전한 구속을 기다립니다. 그러나 사악한 자의 영혼은 지옥에 던져져서 거기서 고통과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서 지내며, 마지막 날의 심판을 기다리게 됩니다. 성경은 육신이 죽은 후에 영혼이 갈 곳으로 이 두 장소 - 지옥과 천국 - 외에는 아무 곳도 인정하지 않습니다."(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32장 1항)
2. 천국의 세계
그러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알게 해 주신 가르침에 한해서 천국과 지옥의 세계를 보겠습니다. 먼저 천국의 세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어떤 부자가 지옥에 간 데 반해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갔습니다. 본문의 비유에서 천국이란 직접적인 용어가 사용되지는 않고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면, 거지 나사로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게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갈라디아서 3장 6-9절과 29절을 절별로 보겠습니다.
6절.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
으니라.
7절.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
8절.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
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
을 받느니라
29절.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지금 우리는 참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것이 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나사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신 공효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래서 나사로가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사로가 가 있고, 그의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늘 말하는 하나님 나라, 천국, 천당, 낙원입니다. 이곳에서 그리스도의 품에서 복을 누리고 사는 것인데, 나사로가 아브라함이 믿은 그 믿음을 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서 아브라함과 같은 복을 누린다는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품으로 묘사해 주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 있을 때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부자는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가져 보고, 마음껏 쓰고 살아 보았습니다만, 나사로는 병약한 몸으로 문전걸식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 돌아온 것은 그가 기대했던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 부스러기가 아니었습니다. 개들이 와서 그의 헌데를 핥고 갈 뿐이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그 누구에게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도 위로를 받지 못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를 의지하여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고자 했으나 부자는 그마저 외면했습니다. 그런 거지 나사로이지만 그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에게서 유일한 위로자요 소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가 죽어서 천사의 손에 받들려 간 곳은 아브라함의 품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거지 나사로는 세상에서 받지 못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으로 상징되고 있는 천국은 이렇게도 묘사해 줍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1-4)
천국의 세계는 하나님과 함께 사는 영생을 누리는 곳입니다. 다시는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시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영생의 복을 누리는 것에서 하나님의 크나큰 위로를 받는 천국은 하나님의 영광에 싸여 있어서 보석처럼 빛나고 벽옥과 수정처럼 맑고 투명합니다(계 21:11). 지옥의 고통이 실재하는 것이듯이, 천국의 위로 또한 실재입니다. 천국에 간 사람에게는 성경에서 사람의 언어로 묘사된 하나님의 위로보다 더 큰 위로로 주어질 것입니다.
3. 지옥의 세계
이제 지옥의 세계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부자가 죽어서 간 곳은 '음부'입니다. 음부는 '고통을 받는 지옥'을 말합니다. 그에 따라서 부자가 간 지옥의 세계는 고통이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 고통은 불 속에서 당하는 것이기에 아주 컸습니다. 참을 수 없는 상태이니까요. 어떻게 말입니까?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청하기를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여기 보내어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라도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한 것을 보아서 참을 수 없을 만큼 뜨거움과 목마름을 겪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옥의 고통스러운 형벌을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과 함께 지옥 또한 천상의 세계인고로 물질적 세계의 개념으로 지옥의 형벌을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천국이 썩지 않는 몸, 영광에 가득 찬 몸, 영적인 몸, 곧 그리스도와 같은 몸인 하늘에서 주어진 몸이 사는 세계이듯이 지옥도 성격상 동일합니다. 다만 천국이 낙원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하면, 지옥은 형벌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이 영원히 지속되는 영벌의 세계가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난 자임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은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에 불과한데 그렇게 하나님이 없이 영원히 사는 형벌은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 것이냐? 하는 것을 여기 부자가 불 속에서 당하는 고통으로 설명해 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옥을 알고 있는 것에서 우리의 생각을 보다 진지하게 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묘사되고 있는 지옥의 상태를 단지 영적이요 상징적으로만 알고서 사실적인 문자의 의미로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처한 지옥의 상태, 곧 불구덩이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상태는 영벌에 대한 양면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인 면과 상징적인 면을 함께 시사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리(R. G. Le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에 지옥에 대한 그 무시무시한 언어적 묘사가 상징적인 것이라면 모든 상징들의 그림자가 가리키는 실상은 얼마나 공포스러울 것인가!"라고 말입니다.
성경에는 지옥의 상태를 묘사하는 다양한 표현이 언급됩니다. '바깥 어두운 곳'(마 8:12, 22:13, 25:30), '지옥불'(마 18:9), '무저갱'(밑 없는 지옥 구덩이; 눅 8:31, 계 9:1, 2),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막 9:48)이 그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많이 쓰인 묘사가 '불'이란 단어입니다. 성경은 이 불의 성격을 '꺼지지 않는 불'(막 9:48, 눅 3:17), '영영한 불'(마 25:41)로 말해 주는데, 지옥에 처한 자들에게 온 몸에 고통을 주는 사실적인 형벌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풀무불'(마 13:42, 50), 또는 '불못'(계 20:14, 15)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고, '불과 유황'(계 14:10)으로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며, 본문에서 부자는 자신이 '불꽃'(눅 16:24)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어째서 이렇게 지옥을 묘사하는 말로 '불'이란 단어를 주로 썼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지옥을 뜻하는 단어로 네 개가 사용되었습니다. 히브리어 '쉬올'(Sheol), '게헨나'(Gehenna), '하데스'(Hades), '타르타러스'(Tartarus)입니다.
히브리어 쉬올은 문자적으로 땅 속에 있는 깊은 웅덩이를 뜻합니다. 구약에서 '지옥'을 뜻하는 단어로 쉬올이 사용되었을 때 그것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하지 않고 단지 선인과 악인이 사후에 계속적으로 실존하게 되는 장소의 의미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악인이 거처하는 세계란 의미로서의 '지옥'으로 사용된 가장 유명한 단어는 '게헨나'입니다. 예수님은 이 단어를 무려 11번씩이나 사용하셨습니다(마 5:22, 29-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 예수님께서 '지옥'을 의미하는 단어로 '게헨나'를 주로 쓰신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입니다. "게헨나는 히브리어 '게'(Ge)와 '힌놈'(Hinnom)의 음역으로서 예루살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힌놈의 골짜기'에 대한 명칭이었습니다. 그리고 힌놈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슬픔'이란 낱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아하스와 므낫세 왕의 치세 기간 동안에 몇몇 유대인들이 가나안 족속의 화신(火神), 몰렉의 제단을 건축한 바 있습니다(렘 7:31). 몰렉 숭배는 달궈진 우상의 팔에 어린아이를 바쳐서 불에 살라 죽이는 행위를 포함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들의 울부짖음과 또 저들의 통곡을 유발시킴으로써 그 지역에 이같은 이름을 붙이게 된 것입니다. 유다 왕 요시야는 몰렉 숭배를 금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제단을 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힌놈 골짜기는 유대인들에게 저주받은 곳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이제는 가나안 족속의 신에게 어린아이를 희생제물로 드리는 과거의 습관을 혐오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이 저주받는 곳이 되었으므로 백성들은 그 골짜기에 쓰레기를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곳의 위생적 청결을 위하여 항상 불을 지폈었습니다."(헤롤드 브라이슨)
그렇게 해서 힌놈의 골짜기는 항상 쓰레기 더미가 타는 시커먼 연기와 역한 냄새로 덮여 있었습니다. 힌놈의 골짜기가 지닌 구약적 배경과 함께 그곳에서 쓰레기 더미가 불타는 모습을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그 현실적인 상황을 악인이 처할 영원한 형벌의 장소로 묘사하였습니다. 그 단어가 '게헨나'입니다. 게헨나는 악인들이 영원히 고통을 겪으며 파멸된다는 사상을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게헨나는 악인에게서는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두려운 곳이요, 참으로 벗어날 수 없는 지긋지긋한 곳으로 깊게 인식되어 있습니다.
'지옥'으로 번역된 다른 헬라어는 '하데스'인데, 이것은 구약성경에 사용된 쉬올과 똑같은 '죽은 자의 보이지 않는 세계'란 일반적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마 11:23, 16:18, 눅 10:15, 행 2:27, 31, 고전 15:55, 계 1:18, 6:8). 그러나 하데스가 분리된 악인의 거처로 해석된 곳도 있습니다(눅 16:23, 계 20:13, 14).
'지옥'으로 번역된 네 번째 단어는 헬라어 '타르타러스'입니다. 이 단어는 게헨나와 똑같은 개념으로 베드로후서 2장 4절에 단 한번만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악한 천사들과 악한 사람들을 가두는 지하의 영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상에서 본 바대로 '지옥'이란 말로 사용된 여러 단어 중에서 '불'과 가장 직접적으로 관련된 단어는 '게헨나'입니다. 본문의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나는 불꽃 속에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한 말은 바로 게헨나로서의 '지옥'에 들어가 있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묘사는 비록 비유적인 표현일지라도 단지 그러한 표현을 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이 악인을 영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있는 일로서 고통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악인이 지옥에서 형벌을 당하는 고통은 비유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몹시 큰 고통이 끝없이 실재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유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림자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여러 곳에서 지옥에 처하는 자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이요(계 20:10),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 13:42, 50, 22:13). 이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신체의 한 부분이 없어지더라도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으며(마 5:29-30),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0:28).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지옥에 실재하는 고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옥은 무시무시하고 공포스러운 실재입니다. 그 누구도 당신을 속이지 못하게 하십시오. 예수님 당신이 그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종 '바깥 어두운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유인즉 그것이 빛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히 분리된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역시 그것을 '둘째 사망'과 '불못'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틀림없이 영생의 상실과 하나님의 면전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리 추방당함을 표함하는 기막인 영혼의 갈증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등장하는 어떤 부자는 비록 세상에서는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럽게 지냈지만, 그가 간 곳은 악인이 처하는 지옥의 세계였습니다. 이 지옥의 세계는 천국의 세계와 경계를 두고 있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왕래를 못할 만큼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입니다. 이것이 가로 놓여 있어서 아무도 천국에서 지옥으로 가려고 해도 가지 못하고 또한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오지도 못합니다. 이것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영원히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천국에 있는 사람들과도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서로 볼 수도 없는 상태를 뜻하진 않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간청을 했듯이, 분리된 채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헬무트 틸리케(Helmut Hhielicke)는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지옥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하게 분리됨을 뜻합니다. 분리된 채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강요받을 것인데 그것은 마치 목마른 사람이 은빛 색조를 띤 샘물이 솟는 것을 보면서도 마실 수 없는 사람처럼 그분을 바라다 볼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옥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압력을 받으면서도 전혀 접근할 수 없는 상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천국 백성과 분리된 것에 관해서도 동일합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천국에 있는 자들을 몹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부러워해도 천국에 갈 수 없게 영원히 분리되어 있습니다. 지옥에 있는 자들은 결코 천국에 있는 자들이 누리는 복을 바라볼 수는 있어도 누릴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 있는 자들은 그런 지옥에 있는 자들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을 것이구요.
천국에 가는 사람, 지옥에 가는 사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인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갔습니다. 그런가 하면 거지인 나사로는 천사의 손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두 사람은 다 유대인입니다. 부자는 이방인이라서 지옥에 가고, 나사로는 비록 거지이지만 아브라함의 후손인 유대인이라서 천국에 간 것이 아닙니다. 부자인 어떤 사람은 다름 아닌 14절에서 언급되고 있는 돈을 사랑하는 바리새파 사람들의 비유적인 묘사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입니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부자도 거지인 나사로도 다 유대인입니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 사람은 지옥에 가고, 한 사람은 아브라함의 품으로 상징되고 있는 천국에 갔습니까? 부자라서 지옥에 가고, 거지라서 천국에 간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부자이지만 인색하게 살고, 나사로는 거지로 아무 것도 없이 살았지만 착하게 살아서 천국에 간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1.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들어간 까닭
그렇습니다. 분명 이유가 있습니다. 이제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각각 지옥과 천국에 가 돌이킬 수 없는 서로 다른 곳으로 간 것은 한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지 나사로가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앞서 갈라디아서 3장 6-9절, 29절을 통해서 살펴보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2장 28-29절에서 참 유대인, 그러니까 참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은 어떤 사람인가를 말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이게 무슨 뜻으로 하고 있는 말입니까? 사람이 유대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든가, 또는 태어난 아이가 할례 의식의 전통에 따라 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만으로 참 유대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참 유대인이란 그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할례는 마음에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표면적으로 할례를 받아 신체의 일부를 잘라 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와 하나님을 향하는 것으로 완전히 변화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그의 생활이 하나님을 온전히 모시고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비록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나사로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하시는 공효인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리스도, 곧 구주로 영접한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불러 하나님의 생명으로 새롭게 출생시키시고 죄 사하시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하시고 의로운 자로 여기시고 하나님의 아들로 살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영원히 자리하게 됩니다.
나사로는 비록 부자의 집에서 문전걸식하는 거지이지만,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나사로는 단지 표면적 유대인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던 것이 아니고 이면적 유대인, 그러니까 참 유대인인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나사로에게선 부스럼 병으로 허약해진 몸인데다가 남의 집에서 문전걸식하는 것이 고생이었습니다. 그에 관한 기록으로 볼 때 그의 병은 상당한 상태인 중병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그래서 이곳 저곳을 다니며 걸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어서 부자의 문에 기대고 누워서 그 집에서 던져주는 음식 부스러기로 끼니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니 그 고생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호의호식 할 일이 없었고, 사치를 즐길 기회가 없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끼니때만이 아니라 한끼조차 제때 해결할 수 없었던 그로서는 더구나 병약한 그로서는 온종일이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불쌍한 행색이요 몰골이 말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그런 그를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부자가 먹고 난 남은 음식 부스러기로라도 배를 채우려고 했지만 개들이 와서 그의 헌 데를 핥고 갈 뿐이었다는 사실이 잘 말해줍니다. 그런 중에서도 나사로는 모세와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속에서 살았습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 그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알기 때문에 그는 죽는 때까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살던 때에 아무 것도 가진 없었으나 지금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안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 있을 때에는 아무에게서도 위안을 받지 못한 나사로였지만 아브라함의 품에서 이 세상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는 복을 그가 주로 모신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받아 누리는 위안을 받았습니다.
2. 부자가 지옥에 들어간 까닭
이제 지옥에 간 부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의 부자는 참으로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였다"는 것은 호의호식하며 사치스럽게 살았다는 것이니 그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많은 돈을 들여서 값비싸고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았다는 것은 능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사는 것을 통해서 은연중에 자기가 돈 많은 것을 과시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이 많은 것이 죄는 아니며, 따라서 많은 돈을 쓰면서 산 것이 지옥에 갈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나사로를 여기 보내어 그 손가락에 물을 찍어 내 혀라도 좀 시원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그 말을 들은 아브라함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아들아, 네가 세상에 살던 때를 생각해 보아라. 너는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져 보았으나 나사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서 위안을 받고 있고, 너는 거기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부자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고 살았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뭐든지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가지고 싶은 모든 것을 다 가져 보았습니다. 원껏 쓰면서 살았습니다. 호의호식하며 사치하였다는 것은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것을 통해서,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사는 것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반면에 나사로는 세상에서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부자가 소유하고 마음껏 쓰면서 살았던 것이 없었기에 그 어떤 것에서도 위로를 받을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 때문에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을 받고 나사로는 천국에서 위로를 받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데는 거기에 깔려 있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의지한 대상, 거지 나사로가 의지한 대상에 있습니다. 부자는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입니다만,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 돈이면 자기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었으니까 돈의 힘을 의존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낙을 즐기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허지만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만을 의존하지 않으면 삶의 낙을 가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부자가 받았던 위로를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그에게서 표면적인 모습은 굶주림과 헐벗음으로 인해 겪는 고통, 게다가 심한 피부병으로 인해 고생하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였습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만, 그가 죽었을 때 천사의 손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는 표현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는 표면적으로만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거지로 살아가는 형편이라고 해서 모세와 선지자가 하는 말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거기에서 보여지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보지 못하고 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신 말씀이 어찌 그리 맞는지요? 그의 가난한 마음에는 세상의 것으로 채워져 있지 않고 비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 나라로 채워져 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 진실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겪는 현실로 인해 그는 오히려 모세와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더욱 하나님을 바라보는 힘을 소유하였고 거기에서 낙을 누렸습니다. 그 결과 그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거기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참 안식을, 그야말로 평화롭게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는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이었습니다만, 돈을 좋아하는 자라서 하나님은 그에게서 멸시되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자는 이 세상에 있을 때 모세와 선지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아무리 외치고 설득을 시킬지라도 전혀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전능하신 능력을 거부한 자가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따르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설사 죽었던 자가 살아나서 말을 해 줄지라도 말입니다. 육은 육인 것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돈이 많고 호의호식하며 사치하게 살았다는 것이 지옥에 떨어질 죄는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런 그는 돈에서 세상의 낙을 즐기는 것 때문에 도무지 모세와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담아 듣지 않고 하나님을 멸시하여 멀리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자의 행동은 성령을 멸시하는 죄이니, 이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입니다. 이 죄로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 불 가운데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주는 교훈
이미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여기 "부자와 나사의 비유"는 앞에서 거론한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꾀) 비유"와 밀접한 관련성을 가집니다. 두 비유의 공통점은 재물(財物)의 사용(使用)에 대한 것입니다. 재물로 때문에 영생(永生)의 문제를 포기하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주님의 교훈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등장하는 부자와 나사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진리를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1. 첫 번째 교훈의 강조점
본 비유에서 부자는 돈에서 인생을 즐기는 방식을 보았습니다. 돈만 있으면 호의호식 할 수 있고 매일 잔치를 벌이며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 놀 수 있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였습니다. 인생을 즐기는 법을 돈의 힘에서 보았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입니다. 이 부자는 그가 가지고 있었던 풍부한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옥(地獄)의 고통스러운 형벌에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돈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영향으로 인하여 결코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길 수 없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자는 그 죄 값으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돈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웬만큼 경건의 훈련으로 무장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우선 일차적으로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귀하게 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타락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본능(本能)입니다. 재물의 마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은 거의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소멸시켜 버립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저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자주 말하는 만큼 그렇게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고 있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보시기에 경건한 신앙심이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기만 할 뿐인 저들 바리새인들이, 스스로를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여기면서 천국은 마치 따놓은 당상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몽상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주님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의도적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아브라함"을 등장시킨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저들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사람은 돈을 좋아하는 부자가 아니라 거지인 나사로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산 사람이 있고, 또한 거지로 산 나사로가 있었습니다만, 이 두 사람의 환경은 최종적인 때에 이르러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습니다. 저들이 살았던 세상에서의 삶이 그대로 영생의 세계에까지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자가 입고 있었던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은 지옥의 고통스러운 형벌 앞에서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던 삶의 대가를 지옥의 고통스런 형벌로 크게 치르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심판(審判)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유무(有無)를 가름하는 시금석은 이 세상에서의 예수께 대한 신뢰의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뢰하는 자들에게서 보여지는 가장 기본적인 특성은 재물에 대한 가치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습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그만큼 하나님을 진실하게 섬기기가 수월하지 않습니다. 물론 부자라고 해서 무조건 지옥에 간다거나 가난하다고 해서 무조건 천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라이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은 그가 신뢰하고 있는 대상에 따라서 결정되어 집니다. 하나님입니까? 재물입니까? 무엇을 신뢰합니까? 하나님입니까? 재물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갑니다.
2. 두 번째 교훈의 강조점
두 번째 교훈의 강조점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재물관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자는 그가 가진 재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서 재물을 다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본 비유의 두 번째 강조하고 있는 교훈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들이 재물에 대해서 생각을 바꾸어 어떻게 인식하고 있어야 하는지를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가 호화(豪華)로이 연락(宴樂)하였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이 맡기신 재물을 잘못 사용하고 있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가 소유하고 있는 재물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인 한에는 그는 그 재물로 하나님의 성품인 자비하심을 좇아 자비를 베풀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 17-1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재물에 대해서 이런 마음과 행동을 가져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부자는 자기 집 문 앞에서 걸식하는 나사로와 또 그러한 아주 극심한 극빈자를 위해서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자기 자신만의 만족을 위하여 그 많은 재물을 남용할 뿐이지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을 이 세상에 발휘하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전혀 하지 않았을 정도입니다. 그의 이러한 성품으로 보건대 그는 확실히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3. 세 번째 교훈의 강조점
본 비유에서 중요한 강조점의 세 번째는,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상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일단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면 바로 그 순간부터 천국과 지옥으로의 방향이 영원히 결정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일단 지옥에 들어가면 아무리 후회가 될지라도 영원히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저 천국을 바라보는 중에 큰 고통을 겪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생에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놓아야 합니다. 따라서 세상에서 생명을 가지고 있을 당시에 모세와 선지자(先知者)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주로 섬기며 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고를 받지 않는 사람은, 설혹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이를 증거하는 이적이 일어날지라도 결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생에서 선지자의 권고를 받아야 천국의 백성이 된다는 교훈을 강조하여 주시고 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의 권고를 받을 것을 말씀하시는 주님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선지자이셨습니다. 모세보다 선지자보다 더 큰 선지자이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자신의 멧세지를 저들이 받아들일 것을 원하셨습니다. 믿음은 진리가 이미 그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진리성(眞理性)에 의해서 일으켜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베풀어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그 어떤 초자연적인 현상에 베풀어진다고 해서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의 사역도 그가 비록 하나님의 필요에 따라 때로는 신비한 능력을 많이 베풀기는 하였으나, 그러나 그의 사역을 총괄적으로 평하건데, 그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는" 바의 가르침을 베푼 것이었습니다(행28:23). 그 어떤 기적이나 환상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 그 자체가 그 내포하고 있는 진리성에 의해서 믿음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를 향하여 아주 단호한 어조로,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16: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천국의 백성이 되는 진리를 대하면서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단지 감각적인 환상이나 이적에 의해서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은 더욱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울은 엔돌에서 다시 나타났던 사무엘을 보고도 회개치 않았습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이후 실제 인물인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도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 동안에 베풀어졌던 수많은 기적들도 저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일에 실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권능을 대하고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 비유의 결론을 재차 확인하며 맺는 말
이제 여기서 예수께서 베푸신 비유들에 대한 결론을 다시 한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일로 인해서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것을 잃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원하십니다. 천하를 얻고도 정작 자기의 생명은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가런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기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천하를 얻고도 그 생명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마 16:26). 재물을 사랑하다가 영생을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눅12:16∼21). 한 걸음 더 나아가 관심을 두어야 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재물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상호 공존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는 재물을 미워하거나 경히 여겨야 합니다. 여기서 미워하거나 경히 여기는 대상은 재물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물을 사랑하려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물을 미워하거나 경히 여겨야 한다는 의미는 재물에게서 자기 인생이 책임져지는 듯한 생각을 버리고, 재물의 힘을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을 뜻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돈을 사랑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인생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자리로 있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돈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요지의 주님의 가르침은, 이미 저들 바리새인들의 태도를 통해서도 잘 입증되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돈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주님의 교훈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주님을 거부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음은 드러내었습니다.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재물을 의뢰하는 자입니다. 즉 재물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의뢰는 적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은 사람인지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누군가가 재물에 대해서 애착을 갖는다거나, 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노동(문화)명령을 받고 있고, 나아가서는 노동을 통해서 그 수고한 대가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써야만 할 필요한 때에, 바로 그 때에 그것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것이 재물을 포기하는 것이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거나, 더러운 것으로 죄악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 시각에서 하나님과 그의 일에 선하게 사용하는데 있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대문에 누운 채로 그날 그날을 힘겹게 살아가는 한 생명을 구하는 일에 자신의 재물이 소비되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돕는 일에 기꺼이 사용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하나님보다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한 일에 참여하여서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수행함에 있어서 우리가 가진 재물을 필요로 하는 때에 그것을 기꺼이 소비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까지도 하나님보다도 돈을 더 사랑하는 자인 바리새인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일로 말미암아 현재 가진 돈이 부족하여 부득불 예산(豫算)을 삭감(削減)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때,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할 헌금(獻金)에 손이 먼저 간다면, 그래서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분명하게도 아직까지도 하나님보다는 돈을 더 사랑하는 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靈魂)을 가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모순되게도 우리는 이 사실을 잊고 삽니다. 우리가 참으로 영혼을 가진 존재라고 믿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와 같은 믿음이 어떻게 입증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의해서 입증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영혼을 가진 존재임을 믿으면 믿는 만큼 그것의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더욱 잘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생명의 근원되시는 그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우선하여 재물을 섬기지 말라"라고 우리는 영혼이 여기 나사로가 그렇게 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브라함의 품으로 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의 근원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적극적으로 순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본 글은 오래 전에 쓴 것으로서 본 글의 내용 중에 있는 '영혼'에 관한 이해는 교회가 가져온 일반적 이해 속에서 되어진 것으로 보다 바른 이해를 위하여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먼저 밝힙니다. 후에 기회가 있으면 본 글의 영혼의 존재와 관련한 부분은 전반적인 수정을 할 것입니다. 다만 최근 영혼에 대한 글을 한 회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쓴 것이 있으므로 궁금하신 분은 먼저 이것을 보시고 참고하시기 바랍니다.(질문과 답변 151번 참고)